< 094화. 11월. (2) >
1.
나날이 눈부신 활약과 성과를 갱신하는 포츠머스. 구단 관계자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마를 날이 없다.
“성소하 감독이 구단의 보물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사건건 소하와 대립각을 세우는 브라이언마저도 흐뭇한 미소를 지을 정도.
사실, 구단의 일인자가 되고 싶어서 발악하는 것이었을 뿐.
소하가 잘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이래저래 소하를 감독으로 영입한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오히려 소하가 잘할수록 이득이 뭉텅뭉텅 들어온다.
“일단은 지금은 즐겨야겠지. 후후.”
비릿한 미소를 짓는 브라이언. 그의 반들반들한 민머리가 유달리 빛이 난다.
이렇듯 모두가 성공의 과실을 마음껏 즐길 때쯤.
구단 내외로 포츠머스의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 한 사람이 의외로 웃질 못하고 골머리를 앓는다.
“흐으으으음!”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서 신음성을 내 삼키는 중년 남자.
반쯤 벗겨진 머리와 통통한 체형이 돋보인다. 굉장히 친근감이 느껴지는 외모랄까. ‘이웃집 아저씨’ 하면 떠오를만한 익숙함이다.
그의 이름은 잭 밀러.
포츠머스의 수석코치이자 소하를 대신해 잡다한 업무를 모조리 처리하는 살림꾼이기도 하다.
“성소하 감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그의 천재성이 가장 큰 요인이지만, 잭 밀러 수석코치의 공도 적지 않다. 감독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사사로운 일들을 모두 도맡아 해줬기 때문이다.”
한 포츠머스 담당 기자의 평가.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하도 이런 평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긍정했으니까.
과거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새사람으로 탈바꿈해서 이질감을 느꼈지만 말이다.
심지어 소하와는 다르게 인성마저 구단 안팎으로 칭찬이 자자한 잭 밀러. 그답지 않게 매우 신경질적인 모습은 의아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버럭! 와이프가 몰래 명품가방을 샀을 때보다 큰 목소리로 화를 낸다.
“안 되겠어. 감독님께 가봐야겠군.”
화가 잔뜩 나서 소하를 찾아가는 잭 밀러 수석코치. 또다시 소하가 탕비실을 털었단 말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똑똑.
단걸음에 소하의 사무실 문 앞까지 도착. 일단은 예의 바르게 노크를 한다.
곧이어 소하의 허락이 떨어진다.
“들어와요오.”
나긋한 목소리. 평소의 소하답지 않게 늘어진 어투다. 휴가 중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어조다.
-벌컥.
“감독님!”
잭 밀러는 문을 열자마자 호탕하게 소하를 불렀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업무에 바쁜 걸까?
-뿅뿅.
아니다. 그저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휴대용 게임기를 조작하며 게임 삼매경에 빠졌다.
“···감독님?”
어이가 없다. 지금은 분명히 근무시간이었거늘. 근무 태만의 정석을 팀의 사령탑이 시원하게 보여준다.
“···감독니이임!”
“왜요.”
당황한 밀러가 언성을 높이자 이제야 반응하는 소하. 웬 날파리가 앵앵거리냐는 태도다.
“···감독님. 지금 도대체 무슨···?”
“보면 몰라요? 게임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왜 업무시간에 게임을 하고 계시냔 말입니다.”
밀러가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들기며 추궁하자, 소하는 눈을 가늘게 뜬다.
“그야···. 다음 경기는 밀러 아저씨가 도맡아 하기로 했으니까요. 어제만 해도 푹 쉬라면서요. 혼자서 잘하겠다고 큰소리 텅텅 쳐두시곤.”
“···.”
“전 단지 얼굴마담이라고요. 이 얼마나 좋아요. 시즌 중에 휴가라니. 이 망할 구단에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큼큼.”
잭 밀러는 개똥 같은 소하의 개소리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이유는 따로 없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시즌 전, 약속했던 대로 FA 컵과 EFL 트로피 지역 예선을 정말로 밀러에게 맡긴 소하였다.
소하에겐 운이 좋게도, 컵 경기가 연이어 잡힌 일주일 일정. 이때다 싶어 마음껏 휴식 중이다.
“그래서 왜 찾아오셨죠?”
1분 1초라도 빨리 게임을 마저 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렬히 느껴지는 소하의 질문. 방해하지 말고 빨리 사라지라는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진다.
“그게···.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전술을 구상해야 할지 몰라서 말이죠···.”
뒤통수를 머쓱하게 긁적이는 잭 밀러.
그간 소하의 뒷바라지만 하다 보니 전술적인 감각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소하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죠. 뭐가 그리 어렵다고요.”
“···그 있지 않습니까. 라커룸 대화라던지···. 상대 팀에 대한 대응 전술이라던지···. 선발은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 등등.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던 대로 하시면 되잖아요. 일단 FA 컵 경기는 관뒀으니까, 후보들 내놓으면 되고, 상대 팀 대응 전술은··· 뭐, 알아서 하셔야죠. 그것까지 제가 일일이 지시하면 일일 감독을 임명한 보람이 없잖아요.”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소하. 뭘 그리 어려운 일로 여기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완전히 말아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대패라도 당하면 사기가 떨어질 겁니다.”
밀러는 정론으로 반박을 결행했다.
아무리 버리는 경기라도 대패를 당한다면 부정적인 영향이 없진 않을 터.
져도 아깝게 져야 무난하지 않겠는가.
“에이. 그건 너무 갔다.”
소하는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냐는 제스처.
“···네?”
“이미 선수들은 다 알고 있는걸요. 밀러 아저씨가 일일 감독이란 사실 말이에요. 져도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에?!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요. 너무 긴장하셔서 오전 훈련 중에 애들이 하는 말을 못 들으셨나 보네.”
“···그, 그건 그렇죠.”
어제부터 경기 준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느라 끼니도 거르는 중이었으니까.
밀러의 부인은 갱년기가 왔다고 타박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선수들이 괜찮다고 합니까?”
“네. 너도나도 경기에 나가고 싶어 하던데요? 제 축구는 벌써 지겹다나 뭐라나. 물론, 잭 해리슨이 프로의식이 없다고 잔소리를 하긴 했죠.”
잭 해리슨, 젊은 꼰대.
프로라면 모든 경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절대 무적의 근거를 가지고 소하 앞을 정면으로 막아섰다. 하지만,
‘설마 밀러 아저씨의 지휘를 못 믿겠다는 거야? 아니면 수석코치님이 경기를 대충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뜻?!’
‘그, 그건 아니지만···.’
‘그리고 전술적인 부분을 수석코치가 도맡는 건 흔한 일이라고.’
‘···.’
‘게다가 밀러 아저씨의 평생소원이 감독 한번 해보는 건데, 그거 하나 들어주지 못하는 인성이야? 너 인성에 문제 있어?’
‘아닙니다. 따, 따르겠습니다.’
소하의 궤변에 고장이 나버린 꼰대 로봇, 잭 해리슨. 비지땀을 흘리며 명을 받들었다.
“의외로 잘 넘어갔군요?”
이 사실을 모르는 밀러는 용케도 설득했구나 싶었다.
“···큼큼. 다 아저씨의 인덕 덕분이죠. 부러워요, 부러워. 나는 맨날 슬슬 피하는 새끼들이 말이야. 서러워서 원. 하여튼 부담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저와 선수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응원하는데 뭐가 문제에요?”
“그렇군요···!”
잭 밀러는 악마의 속삭임 같은 소하의 응원에 다시금 의욕이 폭발한다.
“어디 한번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겨버리면 어쩌죠?”
“그럼 한번 더하는 거죠. 후보 선수들 경험치 먹일 시간이 늘어나니까, 나쁘지만은 않아요. 그러니까 사후는 생각하지 마세요.”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소하의 대답에 용기백배하는 잭 밀러. 버프를 제대로 받았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FA 컵 우승을 향해 야생마 같은 질주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템포 따라오십시오!”
“···그러세요.”
“그럼, 전술 연구를 위해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푹 쉬셔도 됩니다!”
잭 밀러는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소하의 사무실을 나선다.
그의 뒷모습이 낙양성으로 입성하는 동탁의 등처럼 보이는 것은 분명, 착각이 아니리라.
“···잘하실 수 있으려나. 아니지. 크게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밀러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소하. 조금 걱정스러워 보였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게임 삼매경에 빠져든다.
2.
11월 16일. FA 컵 1라운드.
리그컵과는 매우 다르게 수입이 상당이 짭짤한 FA 컵의 특성상 모든 팀이 최선을 다한다.
오직 하나, 포츠머스를 빼고는 말이다.
포츠머스의 FA 컵 1라운드의 상대는 공교롭게도 러시 윌콕스 감독이 이끄는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FC.
도대체 몇 번째인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자주 만나서 슬슬 지겨울 정도지만, 윌콕스 감독은 그렇지 않나 보다.
“이번에야말로 포츠머스를 무조건 쓰러뜨리고 말겠다!”
당찬 포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은 러시 윌콕스 감독의 자존심에 균열을 만들기에는 매우 충분했다.
몇 날 며칠 동안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전술을 조립. 드디어 포츠머스를 완벽히 잡을 방안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이 전술이라면 성소하, 그 여우 같은 어린 친구도 패배를 면치 못할 거다.”
코피를 줄줄 흘리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러시 윌콕스 감독.
자신만만하게 포츠머스를 홈구장으로 불러 투지가 가득한 일전을 펼친다.
하지만.
이게 웬걸.
[아! 포츠머스의 컵 경기 포함 4경기 무패 기록이 너무나도 쉽게 끝납니다!]
[2-0,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의 완벽한 승리! 러시 윌콕스 감독, 드디어 성소하 감독에게 승리를 따내는군요!]
너무나도 무력했다. 오늘의 포츠머스는 그가 알던 포츠머스가 절대 아니었다.
흡사, 성소하 감독이 오기 전의 포츠머스의 모습 아니던가. 이 정도면 대충해도 이길 수 있었다.
‘뭐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기 내용.
분명, 포츠머스의 선수들은 의욕이 넘쳐 보였거늘. 전혀 합이 맞지 않을뿐더러 압박의 질도 현저히 떨어졌다.
“···어, 음···. 오늘의 포츠머스는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다음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이겼지만 찝찝한 러시 윌콕스 감독. 기자회견장에서도 허탈한 그의 어조는 얼마만큼이나 어리둥절한지 여실히 드러났다. 이거 영, 큰 거 보고 나서 뒤를 닦지 않은 기분이다.
왠지 모르게, 며칠 동안 흘린 코피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 기분 탓이겠지.’
애써 부정해보는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의 러시 윌콕스 감독. 그래도, 오늘 밤은 찝찝한 마음 때문에 잠을 설칠 것이 분명했다.
3.
무력한 패배를 당한 포츠머스.
소하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비난을 피해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성소하 감독님. 몇몇 서포터와 평론가들이 감독님께서 FA 컵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닌지 우려 섞인 비판을 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FA컵.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대회다.
그만큼 이 대회에 대한 잉글랜드인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때문에, 돈도 돈이지만, 명예로운 대회를 가벼이 여긴다는 건 ‘꼰대’가 많은 잉글랜드에서 쉽게 좌시할 수 없는 일.
당연히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벼이 여기다니요. 저희는 최선을 다했지만, 러시 윌콕스 감독의 스컨소프 유나이티드가 더 강했을 뿐이에요.”
“그렇다 해도 평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점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희는 다른 팀보다 많은 경기를 치르고 있어요. 그저, 체력의 한계가 다가왔을 뿐이에요. 과한 억측은 삼가시길 바라요.”
새빨간 거짓말!
당연하게도 소하의 말에 쉽게 속아주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소하의 FA 컵 버리기는 지난 시즌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정통이었으니까.
그래도 감독이 강하게 말하자 일단은 넘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곧, 소하의 말이 진실이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아! 이게 뭔가요. 포츠머스가 EFL 트로피, 지역 예선 조별 경기에서 패배합니다. 상대는 리그2 팀이었는데요.]
[성소하 감독이 일전에 언급한 체력문제가 사실이었나 봅니다! 이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 무안하겠네요.]
지난 시즌 리그2에서 같이 보냈던 첼트넘 타운 FC에게 2-1 패배를 당하는 이변을 연출!
첼트넘 타운 FC.
1887년에 설립한 굉장히 긴 역사를 지닌 구단이지만 체급이 훨씬 낮은 팀이었거늘. 포츠머스가 어지간해서는 지기가 힘든 팀이었다.
덕분에, 대회 최고의 이변으로 신문 기사의 1면을 장식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불명예 그 자체!
“···으아아아아!”
팀의 2연패를 이끈 일일 감독 잭 밀러.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마저 쥐어뜯으며 비명을 내 질렀다.
“풉.”
그 모습이 상당히 재밌던지 소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상관으로서 위로를 해야 인지상정.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간신히 입을 연다.
“괘, 괜찮아요. 아직 EFL 트로피 조별 경기는 2경기나 남았잖아요. 거, 거기서 이기면···. 푸풉.”
“···그냥 대놓고 웃으십시오···.”
“우, 웃긴요. 괜한 억하심정 가지지 마세요. 제 진심을 모, 몰라주시다니. 시, 실망이네요. 푸풉.”
“···됐습니다.”
눈을 샐쭉하게 뜨는 잭 밀러. 소하가 얄밉기 그지없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나저나···. 역시 놀라운 사람이야.’
잭 밀러는 밉살맞은 고양이처럼 입을 가린 채 웃음을 참는 소하를 힐끔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곁에서 지켜볼 때는 굉장히 쉽게 쉽게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소하가 일 처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했건만. 실상은 절대 쉽지 않은, 상상을 초월하는 난도였다.
‘더군다나···. 나는 선수단 장악은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잖아. 아무튼 젊은 사람이 정말 대단해.’
잠시 소하의 첫 시즌이 떠오른다.
선수들도 초보 감독을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 상황에서 기적을 만들어 내다니. 나이가 훨씬 어린 소하에게 다시금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밀러였다.
“푸풉. 뭘 봐요. 저, 저 안 웃는다고요. 진짜예요. 사, 사레 걸려서···. 푸풉.”
물론, 매우 얄밉긴 했지만 말이다.
< 094화. 11월.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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