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3화. 11월. (1) >
1.
포츠머스 FC에게는 11월에도 바쁜 한 달이 기다린다.
무려 8경기라는 살인적인 경기 일정.
리그1 6경기.
FA 컵 1라운드 경기.
EFL 트로피 지역 예선 경기.
소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리그컵 8강전은 12월 중순에 예정되어있다.
만약 11월이었다면 또다시 3일에 한 번꼴로 경기하는 미친 일정이 완성될지도 몰랐다.
토트넘이란 거함을 침몰시키고 11월을 맞이한 소하의 포츠머스.
당분간은 리그에 집중해야 할 시기다.
현재 리그1 15라운드까지의 순위는 당연히 포츠머스가 단독 선두.
[1위, 포츠머스 FC.
10승 3무 2패. 승점 33점.
2위, 브리스틀 시티 FC.
8승 4무 3패. 승점 27점.
3위,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7승 3무 5패. 승점 24점.
4위, 밀턴킨스 던스 FC.
7승 3무 5패. 승점 24점.
5위,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FC.
6승 5무 4패. 승점 23점.
6위, 애크링턴 스탠리 FC.
6승 4무 6패. 승점 22점.
7위, 로치데일 AFC.
5승 5무 5패. 승점 20점.]
꽤 재미있는 순위표다.
포츠머스 FC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FC.
애크링턴 스탠리 FC.
로치데일 AFC.
이 4개의 승격팀이 모두 상위 7팀에 포함된 보기 드문 기현상. 이유는 간단했다.
‘두들겨 맞은 경험이 약이 됐다. 철도 두드리면 더욱 강해지는 법이니까.’
‘자존심이 상한 일이지만, 리그1 팀들은 포츠머스보다는 약하다.’
‘상위리그 팀이라 겁먹었는데, 솜 주먹이잖아? 아니지. 그 팀이 무쇠 주먹일지도. 해볼 만하다.’
포츠머스를 제외한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FC, 애크링턴 스탠리 FC, 로치데일 AFC.
이 셋팀의 감독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품고 승격팀답지 않게 훌륭한 경기를 이어 나갔다.
요컨대,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고 여자도 만나본 놈이 잘 만단다고 하지 않던가.
똑같은 상황이었다.
리그2 시절, 포츠머스라는 규격 외 팀에게 두들겨 맞았던 경험!
당시에는 자존심이 구겨졌지만, 팀을 발전시킬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니까 내 욕 좀 그만하라고.”
물론, 소하도 승격팀의 돌풍에 대한 원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
자기 덕 좀 봤으면 인사라도 해주길 바랐지만, 어림도 없다.
인간이란 원래 눈에 띄지 않는 은혜는 잘 알지 못하니까.
특히나, 11월에 첫 상대인 로치데일은 은혜를 알기는커녕 역으로 매우 적대적이었다.
지난 시즌, 소하가 애크링턴에게 패배하며 나비효과로 인해 자신들이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렀다는 억하심정을 가졌기 때문.
“성소하에게 죽음을!”
“건방진 검은 머리의 콧대를 부숴버리자! 타도 성소하!”
“포츠머스는 리그컵을 병행하느라 지친 상태. 이번에야말로 복수를 달성할 적기다.”
“승리하면 성소하의 사진으로 엉덩이를 닦을 거야.”
소하로서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경기에서 일부러 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쯤 됐으면 로치데일의 감독이나 프런트에서 자제해달라고 요청할 법도 하다.
하지만,
“저희가 서포터들에게 뭐라고 지시하기는 힘든 노릇입니다. 엄연히 구단이 을이니까요.”
“팩트잖아요? 반박할 거리가 있는지?”
“맞는 말입니다. 성소하 감독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애크링턴 감독을 승격시켜주기 위해 농간을 부린 거니까요.”
역으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이 아니겠나. 길 가다가 소하에게 돈이라도 뜯긴 듯한 반응이다.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로치데일의 행보.
사실, 비이성적인 로치데일의 태도에는 한가지 노림수가 존재했다.
‘하부리그에서 가장 큰 팬덤을 가진 포츠머스와 라이벌리티를 가지게 된다면 돈이 굴러들어온다···!’
뭐겠나. 당연히 돈이었지.
영화 같은 부활 덕분에 하부리그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화제성과 팬들을 잔뜩 끌어모은 포츠머스.
여기에 토트넘까지 잡아내면서 프리미어 리그를 제외한다면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팀이 되었다.
흡사,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캠프파이어랄까. 그리고 로치데일은 포츠머스가 피운 거대한 화염에 슬쩍 고구마를 구워 먹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번 기회에 성소하 감독과 포츠머스에게 예의라는 개념을 주입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치데일의 케이스 힐 감독도 경기 전날의 기자회견에서 한 손 거들었다.
이래저래 경기에서 이긴다면 로치데일이 상당한 이득을 얻을 상황.
포츠머스를 잡았다는 화제와 명예를 등에 업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세간의 관심은 소하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집중된다.
“평소처럼 시원하게 코카콜라를 준비할 거야. 폭언의 향연을 보여주겠지.”
“꼭 이렇게 나대는 팀은 성소하 감독한테 두들겨 맞더라고.”
“포츠머스의 인기에 편승해 한 입 하려는 듯한데, 너무 뻔한 수작이야.”
업보랄까. 평소의 행실이 쌓여 모두가 소하가 제대로 된 반격을 하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시작된, 포츠머스의 경기 전 기자회견.
“로치데일이 감독님과 포츠머스에게 경쟁심을 불태우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소하를 제외한다면 모두가 즐거워하는 화젯거리라 당연히 질문이 튀어나왔다.
초롱초롱.
재미있는 답변을 기다린다고 대놓고 티를 내는 기자들. 하지만 소하는 의외로 심드렁한 태도로 질문을 넘긴다.
“글쎄요. 로치데일에게 행운이 따르길 바랄게요.”
“···그, 그렇군요.”
추욱.
어깨를 늘어뜨리며 잔뜩 실망한 기자들. 평소의 소하답지 않은 답변은 마치, 경기에서 이길 자신이 없어 보이기도 하다.
하기야, 토트넘과의 경기가 겨우 3일 전이었으니까.
보통 체력적으로 부담이 큰 상황에서 잔뜩 독기를 품은 상대를 이기기는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번 경기는 로치데일의 홈.
소하가 자신이 없어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리그1 16라운드! 로치데일과 포츠머스의 경기 지금 시작합니다!]
여러 화젯거리가 뒤섞인 16라운드 경기의 시작.
기세등등하게 공격을 시작하는 로치데일! 이번에는 무조건 포츠머스를 이기고 말겠다는 집념이 느껴진다.
하지만,
[경기 종료! 포츠머스의 3-0, 승리!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로치데일을 꺾어버립니다!]
[아! 이게 뭔가요. 너무 공격적으로 플레이하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졌습니다. 포츠머스가 이렇게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뒷공간을 파고들며 손쉽게 승리를 가져가네요!]
조쉬 킹의 멀티 골.
잭 해리슨의 쐐기 골.
모두 역습을 통해 나온 골이다.
한 골 먹힐 때마다 더욱 앞으로 나오다가 완전히 박살이 나 버린 로치데일.
소하는 전반전에 이미 승부를 마무리 짓고 교체로 주전에게 휴식을 주는 여유까지 부렸다. 3골까지 먹히자 로치데일이 완전히 퍼진 덕분.
‘멍청하긴. 쯧쯧.’
혹시 하고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여줬건만. 그대로 속아 넘어가서 뒷공간을 이렇게 쉽게 노출할지는 몰랐다.
‘거의 아메바에 가까운 지능 아닐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소하.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썩은 미소가 진득하게 걸렸다.
“···이건 꿈이야.”
“하···. 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믿을 수 없어.”
“쪽팔린다. 진짜.”
로치데일 서포터로서는 악몽보다 더욱 지독한 결과.
로치데일의 팬들은 혼이 빠진 얼굴로 쓰디쓴 패배의 술잔을 들이켰다.
이미 마음이 완전히 부서진 상태.
굳이 한 번 더 못질을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소하는 적에게는 자비가 없는 악당 아니던가.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여유를 부리는 건 삼류 악당이나 하는 짓.’
진짜배기 악당인 소하는 기자회견을 통해 확인 사살을 신속하게 처리한다.
“경기전에는 로치데일을 상대하면서 관심과 자신감이 없어 보이셨는데요, 일부러 노리신 겁니까?”
“설마요. 자꾸 기자회견장에서 거짓말을 한다면 제 신용에 문제가 생길 거 아니에요? 전 본심을 보여줬을 뿐이에요.”
지난달의 트릭쇼로 신용을 상당 부분 잃은 소하. 되찾아야 할 시점이다. 트릭쇼는 단기 효과가 좋지만, 다시 재충전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한 게 흠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정말 자신이 없던 것이었나요?”
“아니요. 알다시피 전 항상 자신감에 가득한 사람이죠. 하지만 말이죠···.”
소하는 한번 말을 끊으며 기자회견을 쭈욱 둘러본 뒤 무덤덤하게 말을 잇는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심드렁한 연기가 일품이다.
“혹시, 길을 걷다가 발밑에 개미에 신경을 쓰시는 사람이 있나요?”
“···네? 아, 아마도 없지 않을까요?”
뚱딴지같은 질문에 잠시 당황하다가 고개를 가로젓는 기자진들. 개미를 신경을 쓰며 걷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모습에 소하는 심드렁하게 손뼉을 친다.
“맞아요. 너무 작은 존재에게 신경을 쓰고 다니지는 않죠. 앞을 보고 걷기에도 바쁜데요.”
“그, 그렇다는 건?!”
“로치데일은 저와 포츠머스에게 개미 같은 존재였을 뿐이에요. 굳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죠.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니까요.”
“···!!”
평범한 독설보다 훨씬 뼈아픈 발언!
포츠머스 팬들은 시원한 쾌감을,
로치데일 팬들은 크나큰 좌절감을 맛보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후우. 이제 이쯤 했으면 더 깝치는 새끼들이 나오진 않겠지.’
단순히 복수를 위해 대단한 모욕을 선사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꼬일 날파리들에게 선포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망신당할 생각이면 언제든지 들어오라고.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단단히 작심한 소하.
리그컵에 모든 신경을 써야 할 시점에 귀찮은 일은 미리 방지할 작정이다.
하지만, 돈이란 가치의 유혹은 거부하기 힘든 법. 소하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계속해서 시비 거는 놈이 튀어나오게 된다.
2.
“성소하 감독의 전술은 별로입니다. 제가 제대로 된 축구를 보여주겠습니다. 전술이란 이런 거라고 느끼실 겁니다.”
17라운드 상대인 동커스터 로버스 FC의 감독, 폴 딕코브 감독의 발언.
홈경기여서 그런지 자신감이 대단하다.
아쉽게도 실력이 자신감에 따라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경기 종료! 포츠머스의 2연승! 동커스터의 홈에서 3-1로 승리를 가져갑니다!]
무참한 패배.
이어지는 소하의 독설!
“인정합니다. 제 전술은 별로예요. 근데, 별로인 전술에 져버리는 전술을 도대체 무슨 전술일까요? 낙타가 짠 전술인가?”
“···.”
괜히 반사이익을 보겠다고 설친 폭 딕코브 감독은 졸지에 낙타가 되었다.
정말 치욕 중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이쯤 했으면 이번에야말로 나대는 새끼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세 치 혓바닥으로 세계적으로 보자면 상위 1%의 감독들을 개미와 낙타로 만든 소하. 제발 그만 좀 달라붙길 바랐지만 관심종자들은 포기할 생각이 없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똑똑히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경기장을 찾아주신 서포터들에게 승리의 달콤함을 선물하겠습니다.”
이어지는 18라운드 스윈던 타운 FC의 사령탑, 마크 쿠퍼 감독의 출사표!
이 사람도 홈경기라는 이점을 믿고 당당하기 이를 데 없다.
물론, 소하는 참지 않았다.
[경기 종료! 5-2, 포츠머스의 대승! 골이 상당히 많이 나온, 대단히 재미있는 경기였습니다.]
서로 맞불을 놓은 포츠머스와 스윈던.
거듭 말하지만, 때리던 놈이 더 잘 때리는 법이다.
전반전 2-2까지 잘 따라붙은 스윈던이었지만 후반전에는 힘이 빠져버렸다.
평소 점유율을 중시하다가 갑작스레 빨라진 템포에 체력관리를 하지 못한 것.
그리고, 패배했다면 당연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소하에게 폭언을 들을 각오를 말이다.
“하늘 위에는 우주가 있어요. 잉글랜드의 초등학교에서는 지구과학을 가르치지 않나 봐요? 혹은 초등학교를 나오지 않았다거나···.”
졸지에 최종학력이 유치원 졸업, 유졸이 돼버린 마크 쿠퍼 감독. 이마에 굵은 힘줄을 띄우며 부들부들 떨었음은 당연했다.
이로써 3명의 감독이 개미, 낙타, 유졸이 돼버린 잉글랜드 3부리그, 리그1.
그리고 소하에게는 매우 불행하게도 언론과 서포터들은 매우 즐거워한다.
“이거지. 감독들 간의 피가 터지는 트래쉬 토크. 경기 수준이 좀 떨어지면 어때. 이야기가 재미있잖아.”
“주제 무리뉴 감독이 괜히 감독주제에 엄청난 인기를 가진 게 아니라고.”
“재밌다. 재밌어.”
“다음번 성소하 감독의 명언은 언제 나올까? 정말 기대돼.”
소하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결과!
모두가 즐거워했고, 이것은 숫자로도 명백히 증명됐다.
-리그1, 평균관중 숫자가 20% 증가.
-흥행보증수표, 포츠머스. 그들의 경기는 항상 매진 행진.
-포츠머스의 독점중계를 원하는 방송국은 3개로 밝혀져.
어그로꾼들이 원했던 돈이 정말로 굴러들어 와버렸다.
“씨발.”
인상을 와락 구기며 욕설을 내뱉는 소하.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즐기기로 작정한다.
‘그래 뭐, 돈도 벌고 좋네. 끝까지 가보자! 들어와!’
소하가 누구던가. 정신력 하나만큼은 프리미어 리그의 명감독들 못지않은 남자 아니던가.
절대로 바라지 않던 상황까지 몰렸지만, 아예 즐기기로 한다.
흡사, 호랑이 등에 탄 상황에서 탭댄스를 추는 모습이다.
그렇게 악전고투를 벌이며 11월의 일정을 헤쳐나가는 포츠머스.
순식간에 11월 중순이 다가왔고, 리그컵 8강전 추첨이 완료되었다.
“호오. Q.P.R 이잖아? 재수가 좋군.”
퀸즈 파크 레인저스.
지금은 단장인 유해진이 잠시 머물렀던 구단이다.
그리고 현시점에서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강등 1순위 후보.
준결승전에 진출하기에는 최고의 기회가 찾아왔다.
“고생 끝에 낙이 오는 법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올라온 거야? 저 망팀이.”
고진감래, 현대에서는 점점 보기 힘든 현상이 아직도 가능하다는 방증이었다.
< 093화. 11월. (1)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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