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2화. 토트넘 홋스퍼. (4) >
1.
1-0, 전반전 종료.
게임광 알리의 엄청난 재능을 훔쳐볼 수 있었던 훌륭한 골이었다.
“좋아. 전반 30분은 똥 덩어리들이었지만 남은 15분은 최고였다.”
하프타임 라커룸 대화.
난 냉정하게 팩트를 말해주었다.
비판과 칭찬이 섞인 발언에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맞아요. 30분간 너무 쫄아있었어요.”
“막상 해보니까 할만한데요?”
“왜 겁먹었는지 모르겠네요.”
“대부분 후보라 합이 잘 맞지 않더라고요.”
축구는 팀 스포츠.
개인적인 실력은 달릴지라도, 팀으로서 맞붙는다면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공이 둥근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래, 진작 알아봤어야지. 너무 늦었잖아. 머저리들아.”
“···.”
“하여튼, 반즈가 아니었다면 뭘 해보지도 못했을 거다. 수고했다.”
공개적인 칭찬에 마이클 반즈는 머쓱한지 뒤통수를 긁적인다.
“뭘요. 그러니까 다들 낚시를 시작하라고. 긴장 완화에는 최고니까.”
“···.”
낚시꾼답게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다. 이때다 싶어 낚시 친구를 만들기 위해 영업을 하다니. 역시,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영업은 하지 말고, 이 자식아.”
난 마이클 반즈에게 핀잔을 준 뒤 말을 이었다.
“이제 남은 건 45분이다. 토트넘은 벤치에서 시작한 주전들을 경기장에 투입할 거야.”
자고로 명감독이란 승부욕을 기본으로 장착한 인종들. 비록 그리 중요하지 않은 대회라고 할지라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거다.
“특히나, 크리스티안 에릭센이 경기장에 얼굴을 비칠 확률이 높다. 아니, 무조건 나올 거다.”
크리스티안 에릭센이란 이름이 나오자, 선수들은 혀를 내두른다.
“휘유. 대단한 선수던데요.”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볼 때마다 감탄만 나오더라고요.”
“진짜 월드클래스에 근접한 선수지.”
크리스티안 에릭센.
아직 해리 케인의 실력이 만개하기 전인 14-15시즌에는 토트넘의 독보적인 ‘에이스’다.
탄탄한 기본기.
뛰어난 테크닉.
경기장을 위에서 바라보는 듯한 시야.
왕성한 활동량과 수비 가담.
믿기지 않는 킥력.
왼발 오른발 가리지 않는 양발잡이.
냉정을 잃지 않는 침착함.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역할이 현대 축구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선수다.
“그래, 맞아. 정말 뛰어난 선수지. 리그1 팀으로서는 막기 힘든 선수일지도 몰라. 하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야.”
세상천지에 약점이 없는 선수가 어디 있을까. 그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도 부족한 활동량이라는 단점이 존재할 정도다.
“에릭센은 탈압박에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 선수가 중앙 공격형 미드필드가 아닌 측면으로 나오는 이유지.”
현대 축구의 패러다임, 압박.
그것도 강한 압박이다.
압박이 대두되면서 정통 판타지 스타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2명, 3명. 많게는 4명까지 가세하는 중앙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으니까.
때문에, 메시급 선수가 아닌 이상 플레이메이커들은 3선이나 측면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에릭센 또한 마찬가지. 강한 압박에 다크템플러가 되는 경우가 상당수 존재했다.
“에릭센에게 2명은 달라붙는다. 무슨 상황이 되더라도 말이야. 필요하다 싶으면 한 명 더 붙고. 2~3명 정도라면 그 친구도 뭘 할 순 없을 거야.”
에릭센은 최악의 모습을 보여준 타운젠트와 교체될 확률이 높다.
즉, 우리 팀의 왼쪽 라인에 설 예정이라는 뜻.
난 앤디 로버트슨과 스티븐 데커에게 강한 압박을 주문했다. 델리 알리에게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압박에 참여하라는 지시도 추가. 녀석들이라면 아무리 에릭센이라 할지라도 쉽지 않은 경기가 되겠지.
“그래도, 어차피 치명적인 패스는 허용할 수밖에 없을 거다.”
90분 내내 월드클래스 급 선수를 막는 건 아직은 버거운 일. 결국 토트넘의 주포인 해리 케인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올 거다. 예정된 미래랄까.
“그땐 널 믿는다. 아담 웹스터.”
내 믿음에 아담 웹스터는 막고라를 앞둔 투사처럼 묵묵히 읊조린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묵직한 저음에 나는 따로 더 말을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는 어떻게든 보여줄 거다.
2.
아담 웹스터.
훗날 브라이턴으로 이적해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이름을 당당히 알리는 뛰어난 수비수다.
물론, 지금은 어린 유망주에 불과. 부상당한 케빈 도슨의 빈자리를 제대로 채워주지 못했고, 리그 2연패의 주범으로 확정된 상태다.
‘···믿음을 배신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눈을 부릅뜬 채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리는 아담 웹스터. 짧은 머리와 선이 굵은 얼굴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사내 냄새가 풀풀 풍긴다.
실제 성격도 굉장히 상남자다운 선수이기도 하다.
이런 그에게 지난 리그 경기에서의 좋지 않은 모습은 치욕 그 자체.
그의 생각에는 어린 자신을 믿고 콜업 시켜준 것도 모자라 프로 데뷔까지 시켜준 감독의 믿음을 져버린 행위였다.
‘어떻게든 막아낸다.’
다시금 투지를 불사르는 아담 웹스터.
어떻게든 잉글랜드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맹렬히 퍼뜨리는 중인 해리 케인을 막아내 보겠다고 다짐한다.
-삐익.
이윽고 시작된 리그컵 4라운드.
소하의 예상대로 크리스티안 에릭센은 타운젠트와 교체되어 경기장에 들어온다.
그러자, 전반전에 열세를 보이던 토트넘에 활기가 돌기 시작. 다시금 경기의 주도권을 잡고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다.
[한 골 뒤진 토트넘이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잘 풀리지 않던 빌드업도 이제는 유연하게 되는군요. 에릭센의 존재감이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축구계에는 한가지 정설이 존재한다.
‘B급 여럿보다는 A급 한 명이 좋다.’
여러 뜻이 담겼지만, 여기서는 특별한 선수 한 명은 팀의 수준을 완벽히 바꾸기도 한다는 뜻이다.
에릭센이라는 토트넘의 레전드가 될 선수가 그 뜻을 여실히 증명 중이었고.
[대단합니다. 기본적으로 두 명의 포츠머스 선수가 전담마크를 하는데도 유려하게 패스를 이용해 압박을 풀어나가네요.]
[이거, 에릭센 선수가 큰일을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말처럼 앤디 로버트슨과 스티븐 데커의 강력한 압박을 기어코 풀어내며 전방으로 볼을 투입한다.
“안 되겠네!”
이 모습에 참다못한 델리 알리도 에릭센을 억제하기 위해 압박에 가담한다.
포츠머스의 핵심 3명의 전담마크.
탈압박이 그리 좋지 않은 에릭센인지라 실력 차가 여실히 남에도 고전을 면치 못한다.
[에릭센을 막아 내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는 포츠머스!]
[훌륭한 압박입니다. 하지만, 한 선수에 세 명이나 붙는다면 공간이 많이 빌 텐데요!]
그렇다. 한 선수에 세 명이나 달라붙는다면 다른 두 선수에게 압박이 없단 이야기.
그리고 에릭센은 이 틈을 절대 놓치지 않는 선수였고, 곧바로 행동에 나선다.
“파울리뉴 받아! 다음은 벤탈렙에게!”
훗날 바르셀로나에 입성하는 파울리뉴에게 가까스로 패스에 성공.
파울리뉴는 에릭센의 지시대로 벤탈렙에게 곧바로 패스를 보낸다.
“좋아!”
공을 받은 토트넘의 기대주 나빌 벤탈렙. 훌륭한 기술을 가진 플레이메이커 스타일의 선수다.
단점은 플레이메이커답지 않게 패스 실수가 잦다는 점.
하지만, 압박이 없는 상황에서는 실수할 리가 없다.
-툭!
전방으로 쇄도하는 해리 케인에게 긴 패스를 뿌리는 데 성공. 썩 좋은 구질은 아니었지만 해리 케인은 만만치 않은 선수였다.
“시야 좋고!”
해리 케인.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수준급 발밑을 보유한 재능!
다소 강한 힘이 실린 공을 매우 부드럽게 자신의 소유로 만든다.
‘해볼까.’
이제 뒤를 돌아 수비수 한 명만 넘으면 골이 눈앞인 상황. 21세의 해리 케인은 패스보다는 혼자 결정짓기로 작심한다.
“어림없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용맹하게 달려드는 포츠머스의 아담 웹스터.
190cm의 덩치가 뒤에서 달라붙자 해리 케인은 강한 압박을 느낀다.
‘이 자식이···!’
전반전만 해도 경합에서 쉽사리 이기던 선수였거늘. 지금은 같은 선수가 맞나 싶다.
엎치락뒤치락.
잉글랜드 국적의 두 덩치들이 치열한 볼 다툼을 진행한다.
흡사, 옛 신화의 타이탄들이 결투를 벌이는 모습!
상당한 볼거리였지만, 곧이어 승리자가 결정됐다.
“이번엔 내 승리다!”
우렁차게 포효하며 공을 탈취한 아담 웹스터. 곧바로 그의 장기인 전진 드리블을 시도한다.
수비수답지 않게 훌륭한 드리블 실력.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장기, 전진 패스가 상대 진형으로 뛰어드는 알리의 진로 위로 정확히 떨어진다.
“와! 진짜 미친 패슨데?”
칭찬을 아끼지 않는 델리 알리. 공의 속도를 죽이지 않은 채 가벼운 터치 하나로 그를 마크하던 블라드 키리케슈를 무장해제시킨다.
그간 열심히 가다듬은 기본기와 그의 센스가 합쳐진 멋진 장면.
“흐음. 어떻게 할까.”
반대편에는 그의 친구 조쉬 킹이 침투 중, 더 멀리엔 교체로 들어온 잭 해리슨도 보인다.
패스를 넣어줘도 충분히 위협적인 상황. 하지만 델리 알리는 혼자 해결하기로 마음먹는다.
-툭.
패스하는 척하면서 한 번 더 중앙으로 드리블을 치는 델리 알리.
이에 프랑스 국적의 수비수, 유네스 카불은 제대로 속아 잔디 위에 넘어지고 만다.
-슈룩!
수비수 한 명을 쉽게 녹인 델리 알리는 완벽한 슛 각도를 만들어냈고 그대로 감아차기를 시도했다.
패널티 아크 근처에서 뿜어지는 중거리 슛! 모 게임 이용자라면 ZD슛이라고 외칠 장면이다.
-철썩!
미셸 포름 골키퍼가 몸을 던져봤지만 워낙에 코스가 좋아 방어에 실패.
그대로 골을 헌납했다.
[골입니다! 골! 델리 알리의 멋진 감아차기 슛입니다.]
[오늘 정말 컨디션이 장난 아닌데요?! 게다가 저 셀레브레이션은 뭔가요. 이상한 손동작이네요!]
드디어 나온 델리 알리의 시그니처 셀레브레이션.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나머지 손가락을 펴 눈에 붙이는 요상한 동작이다.
슬픈 사연이 담긴 사인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저 이상할 뿐.
하지만 델리 알리가 가진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어우러져 묘한 멋을 뽐낸다.
“됐다! 이제 이겼다.”
박수를 연신 날려대는 소하.
아직 경기는 20여 분이 남았지만, 승리할 거란 확신이 생긴 그였다.
3.
델리 알리의 멀티 골 덕분에 2-0으로 승리. 강력한 상대인 토트넘을 기어코 이겨냈다.
참 묘하다. 포체티노 감독이 다가올 겨울 이적시장에 500만 파운드나 주고 영입하는 선수가 델리 알리였거늘. 참 묘하다.
“훌륭한 경기였습니다.”
패배했지만 그리 아쉬워하지 않는 포체티노 감독. 원래대로였다면 리그컵 결승까지 가던 인물이었다. 맨체스터 시티에게 패배해서 준우승에 그치지만 말이다.
“제대로 했으면 상대도 안 됐을 거예요. 그래도 이제 챔피언스 리그 경쟁에 집중할 수 있으셔서 편해 보이시네요.”
“리그컵 경기에서 탈락한 건 아쉽지만 더 중요한 건 있기 마련이니까요.”
리그컵은 떨어질 거면 빨리 떨어지는 것이 좋다. 괜히 올라갔다가 진심으로 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몰랐으니까.
과거, 토트넘의 14-15시즌 성적은 리그 5위. 아쉽게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지 못했다. 리그컵에서 빠르게 탈락한 토트넘이 몇 위로 마감하는지 보는 것도 꽤 재밌는 일이 될 거 같다.
“델리 알리라는 선수는 참 탐이 나는군요. 사실, 사우샘프턴 시절부터 눈여겨보던 유망주이긴 했습니다.”
“···.”
저 눈 봐라. 자기 선수로 만들고 싶다는 탐욕이 잔뜩 어렸다.
하기야, 자신의 손으로 영입해서 월드 클래스 근처까지 끌어줬던 선수니까.
달라진 미래임에도 사람의 취향은 그대로란 말인가.
“···탐내지 마세요.”
“글쎄요. 델리 알리를 영입하기엔 지금이 최적의 시기라고 봅니다.”
“계약 기간이 5년이나 남았어요. 만만찮은 금액일걸요?”
이번에 완전 영입을 진행하며 새로운 계약을 체결한 델리 알리. 잔여 계약 기간은 이적료와 비례한다.
이적료란 계약 기간을 없애기 위한 금액이니까.
그래도 포체티노 감독으로서는 지금이 가장 가격이 저렴할지도 모른다.
우리 팀이 승승장구해서 내 계획이 완성된다면 돈 주고는 못 살 거다.
“천만 파운드 이상이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천만 파운드. 한화로 130억에 달하는 거금이다. 리그1 팀 중에서 이 정도 액수를 거절할 팀은 없으리라.
“···그럴지도요. 하지만 절대 팔지 않을 거니까 단념하세요.”
물론, 내 기조는 항상 같다.
NFS. Not For Sale.
판매의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이미 과거보다 훨씬 잘 성장하고 있는 홈그로운 초대형유망주를 팔 미친 감독이 있을 리가.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언젠간 제대로 맞붙어볼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쉬운 듯한 웃음을 흘리며 경기장에서 퇴장하는 포체티노 감독. 한번 선수를 점찍으면 다른 선수들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한 우물만 파는 감독이라 걱정된다.
후우. 이참에 델리 알리의 세뇌를 더욱 단단하게 진행해야겠다.
이적은 선수가 거절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4.
케빈 도슨의 부상으로 리그 2연패를 당하며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포츠머스.
강호, 토트넘을 리그컵 4라운드에서 잡아내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기분 좋은 소식들.
[포츠머스의 주장 케빈 도슨,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다.]
[장기 부상자, 매튜 다이스가 드디어 가벼운 훈련을 재개.]
부상자들의 복귀. 이는 분위기를 다시 끌어올린 포츠머스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다.
여기에 아담 웹스터의 성장은 주전 수비수들에게 휴식을 부여해도 팀이 흔들리지 않게 도와줬다.
“리그컵에서 토트넘까지 잡은 포츠머스를 막을만한 팀이 보이지 않는다. 포츠머스가 11월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냐에 따라 리그1의 우승팀은 4달 만에 결정될지도 모른다.”
저명한 축구 평론가의 리그1 평가.
그의 말처럼 11월 리그에서의 모습이 어떨지 모두가 궁금해하는 포츠머스였다.
< 092화. 토트넘 홋스퍼.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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