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1화. 토트넘 홋스퍼. (3) >
1.
토트넘 홋스퍼의 선공으로 시작된 리그컵 4라운드 경기.
나를 비롯한 모두가 예상했듯, 경기 극 초반은 토트넘이 분위기를 꽉 잡은 채 필드를 누빈다.
“역시 바이브가 달라.”
2군 팀이었지만 강팀은 강팀이었다.
하기야, 세계 최고의 리그 중 하나인 프리미어 리그에서 살아남은 선수들이다.
벤치에 앉아서라도 생존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리그1 선수들과는 격이 다른 클래스였다는 증거였다.
“시작한 지 3분이나 지났는데 공 한번 못 잡아봤어요. 정말 강하네요.”
잔뜩 긴장한 밀러 아저씨. 한시도 경기장에 시선을 떼지 않으며 중얼거리신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모습은 오랜만이라 바짝 겁을 먹었나 보다.
쯧쯧. 토트넘도 우리 팀의 강력한 압박에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도 가지 못하고 있거늘. 뭐가 그리 무서운지 모르겠네.
“진정하세요. 아직 슈팅 한 개도 나오지 않았···.”
-뻥!
[아! 아깝습니다! 안드레스 타운젠트의 강력한 왼발 중거리 슛이 멀리 벗어납니다. 방향이 좋지 않았어요.]
[영점조절이 필요한 모습입니다.]
때마침 터진 안드레스 타운젠트의 빨랫줄 같은 중거리 슛. 그리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타이밍 참···. 할 말을 잃게 만든다.
“···.”
“···감독님. 방금 뭐라고 하셨죠? 슛이 어쩌고 하신 거 같은데···.”
“자, 잘못 들은 거겠죠.”
밀러 아저씨가 눈을 샐쭉하게 뜨며 반문하자, 애써 시선을 돌렸다.
거참, 말 한번 하기 무섭네.
“그래도 이제 우리가 공격할 때잖아요. 기세가 한풀 꺾일 거예요.”
좋지 않은 의미로의 미친 중거리 슛은 당연히 골라인 아웃. 즉, 우리 팀에게 공격권을 헌납했다는 말이니까.
“자, 봐봐요. 이제 곧 우리 팀의 매서운 공격이 시작···.”
[아! 말콤 우드에게 짧은 패스를 받은 찰스 말로리가 어처구니없는 패스 실수를 범합니다. 다시 토트넘의 공세가 시작되겠군요.]
[오랜만에 만나는 프리미어 리그 팀이라 의욕이 앞선 모습입니다. 힘이 너무 들어갔어요.]
아, 진짜. 너무하네. 나한테 계속 이러기야?
또다시 말을 끝내기도 전에 찰스 말로리가 어이없는 전진패스를 시도. 너무나도 당연하게 애써 얻은 공격권을 넘겨줬다.
“···감독님?”
“···그래도 다시 압박을 잘하고 있잖아요. 빠르게 수적 우위를 점했으니까 곧 소유권을 다시 찾을···.”
[의욕이 너무 앞섰어요! 엑토르 베예린과 커너 러셀이 서로의 진로를 방해합니다.]
[이러면 거센 압박을 받던 토트넘이 활로를 찾을 수 있죠! 보세요, 바로 베예린이 비운 공간으로 공간패스를 넣지 않습니까!]
“단순한 해프닝일 거예요. 크로스까지는 이어지지 않을···.”
[왼쪽 측면을 송곳같이 후벼 파는 나세르 샤들리!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크로스를 올립니다!]
[아쉽게도 헤리 케인의 머리에 걸리지 않는군요. 좋은 크로스였습니다.]
“이제 진짜 우리 팀의 공격이 시작···.”
[앤디 로버트슨의 무리한 돌파! 블라드 키리케슈와 나빌 벤탈렙의 협력 수비에 공을 너무 쉽게 빼앗깁니다.]
[저기선 패스를 줬어야죠. 평소 같지 않게 너무 급했어요.]
“괜찮아요. 최대한 전진하고 나서 공을 빼앗긴 거라 재정비할 시간이 충분···.”
[공을 탈취한 나빌 벤탈렙이 멋들어진 대각선 패스를 뿌립니다. 반대쪽에서 쇄도하던 나세르 샤들리가 공을 편하게 잡네요.]
[포츠머스가 재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 멋진 판단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샤들리는 크로스에 대한 재능이 없는···.”
[주발이 아닌 왼발로 크로스를 올리는 샤들리! 시원하게 공중을 가릅니다. 궤적이 좋네요! 아주 날카로워요. 목표는 아담 웹스터와 경합 중인 헤리 케인!]
“···그래도 공중볼은 우리의 기대주 아담 웹스터가 강한···.”
-텅!
[아깝습니다! 헤리 케인! 멋진 헤더였지만 골포스트 상단을 때리고 마네요!]
[순간, 골인 줄 알았습니다.]
"씨발! 지금 뭐 하는 거야. 얘들아 정신 안 차려?"
기어코 내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게 하는구나.
몇몇 선수들이 찔끔거리며 몸을 떨었지만 내가 알 바인가.
진짜 속에서 열불이 터진다. 아니, 장난하는 거도 아니고 말하는 거랑 자꾸 반대로 되냐고!
“···감독님?”
밀러 아저씨가 가만히 있을 리가. 팀이 두들겨 맞고 있음에도 히죽 웃으며 날 물끄러미 바라본다.
“···.”
“감독님,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무시는 걸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허헛.”
이때다 싶어 놀리는 밀러 아저씨. 하긴 날 놀릴 기회는 흔치 않을 테니까.
평소 같았으면 받아줬겠지만 지금 경기력이 너무 좋지 않다.
“시끄러워요.”
“넵.”
내가 으르렁거리자 눈치 빠른 밀러 아저씨는 곧바로 딴청을 피운다.
하여튼, 눈치 하나는 월드클래스야.
“그런데요. 감독님. 선수들이 좀 많이 긴장한 거 같습니다.”
잔뜩 눈치를 보며 우리 팀이 두들겨 맞는 모습을 지켜보던 밀러 아저씨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 기분이 풀렸다는 걸 알아차리는 솜씨가 귀신같다.
“맞아요. 엄청나게 긴장했어요.”
“짜식들, 평소처럼 해도 모자랄 판에 저러다니. 도대체 왜 저러죠?”
“뭐···. PTSD이라고 볼 수가 있죠.”
번리와 치렀던 프리시즌의 친선경기.
그때 제대로 두들겨 맞은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토트넘은 번리보다 훨씬 강한 상대. 마음속에서 상대를 훨씬 더 부풀렸을 거다. 비록 후보진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번리와의 친선전이 독이 되었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야 어찌어찌 버틴다고는 하지만, 곧 무너질 텐데요. 실력도 내보지 못하고 지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그렇죠. 말도 안 되죠.”
전력을 다하고 지는 건 그럴 수 있다. 구단 간 체급 차이가 엄청나게 무시무시하니까. 하지만 바짝 쫄아서 뭘 해보지도 못하고 지는 건 용납이 어려운 일.
“그래서 오늘 주장 완장을 마이클 반즈에게 준 거예요.”
“···네? 전 그저 오늘 선발 중에서 가장 구단에 오래 머문 선수라서 임명하신 줄 알았는데요?”
틀린 말은 아니다.
주장인 케빈 도슨은 부상으로 이탈.
부주장인 잭 해리슨은 벤치.
최고참인 찰스 말로리는 주장 완장을 달면 맛이 가는 인간.
이런 상황에서 찰스 말로리 다음으로 짬이 높은 마이클 반즈가 주장 완장을 차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전 짬밥 순으로 매기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저 녀석의 ‘느긋함’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느긋함이요? 감독님은 저 녀석의 그 성격을 싫어하시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하지만, 때때로 독은 약이 되기도 하니까요.”
[토트넘의 파상 공세를 잘 이겨낸 포츠머스가 오랜만에 공격권을 가져갑니다. 마이클 반즈가 수비지역까지 내려왔군요.]
마침, 마이클 반즈가 경기 시작 15분 만에 처음으로 공을 잡았다.
“그럼, 어디 한번 봐볼까요? 제 생각처럼 녀석이 약이 될지를 말이에요.”
“흐음···. 오늘 감독님의 촉이 별로···.”
“시끄러워요.”
“넵.”
다시금 기어오르려는 밀러 아저씨를 재빨리 진압. 모든 신경을 공을 잡은 마이클 반즈에게 집중시켰다.
반즈야, 네가 무조건 해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경기에서 승리는 불가능할 테니까.
2.
소하의 생각대로 포츠머스의 선수들은 마음속에서 상대를 너무 크게 부풀렸다.
‘번리보다 강한 팀이야. 더 빨리, 더 강하게 움직여야 해.’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안 돼.’
‘공격이 너무 강해. 최대한 빨리 선취골을 넣지 않으면 져버릴 거야.’
잔뜩 긴장한 선수들.
물론, 적당한 긴장은 플레이의 집중력을 높여준다.
하지만 뭐든 과하면 없느니만 못한 법. 과한 긴장은 부상의 위험도 커질뿐더러, 몸이 느려지고 더욱 빨리 지치며, 판단도 느려진다.
이런 상황에 팀에 필요한 것은 느긋함.
그리고 포츠머스에는 느긋함의 화신이 존재했다.
“자, 천천히 하자고.”
마이클 반즈는 주장 완장을 매단 왼팔을 번쩍 치켜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물론, 외침 한 번으로 팀의 긴장을 풀어줄 수는 없는 법. 뭐가 됐던 필드 위에서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우선 템포를 늦춘다.’
마이클 반즈는 의욕은 없지만 시키는 일은 잘하는 타입. 게다가 머리도 뛰어나 소하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행동에 나선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볼을 끌면서 느긋하게 다른 선수들과 패스를 주거니 받거니 한다.
공격작업은 중요치 않다. 그저 천천히 느긋하게 공을 주고받을 뿐.
언뜻 보면 가벼운 준비운동을 하는듯한 모습이다.
때로는 공을 빼앗기기도 하며,
때로는 공을 되찾기도 하며,
수비진영에서 공격진영까지,
왼쪽, 오른쪽 가릴 거 없이.
경기장을 유유자적하게 마음대로 누비는 마이클 반즈. 그의 모습은 흡사, 잔디 위에 강림한 낚시의 신선이 따로 없다. 강태공이랄까.
‘이거 뭐 하는 새끼야?’
오늘 포체티노 감독의 지시에 마이클 반즈를 마크하게 된 왼쪽 풀백, 벤 데이비스.
훗날 팬들에게 BD33이라고 불리는 웨일스의 유망주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이는 장내 아나운서와 관중들도 마찬가지.
[지금 뭐 하는 건가요? 감독에게 프리롤을 주문받은 거 같긴 한데···.]
“뭐 하는 거야?”
“쟤 썩은 생선이라도 먹었나?”
“더위 먹었나? 낚시하다가?”
좀처럼 의미를 찾기 힘든 플레이의 연속. 하지만, 비판을 하던 사람들은 서서히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어? 갑자기 포츠머스의 플레이가 부드러워졌는데?”
“그러게. 엉망이던 압박도 합이 잘 맞아 들어가잖아?”
“저거 봐. 탈탈 털리던 아담 웹스터가 처음으로 해리 케인한테 경합을 이겼어.”
“엑토르 베예린도 슬슬 시동이 걸린 거 같은데? 좀 전까지만 해도 천하에 다시없는 폐기물이었는데.”
속절없이 밀리던 포츠머스가 어느샌가 슬슬 경기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드디어 마이클 반즈의 느긋함이 다른 포츠머스 선수들에게 퍼졌다는 이야기였다.
마이클 반즈의 눈물겨운 원맨쇼가 빛을 발휘하는 순간.
전반 30분.
소하가 원했고, 계획했던 대로 경기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3.
같은 시각.
경기장 위의 토트넘 선수들도 이상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아니, 처음부터 포츠머스의 선수들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 무너지지 않지?’
이상했다. 겨우 리그1, 3부리그에서 뛰는 보잘것없는 선수들이었거늘.
척 봐도 잔뜩 긴장해서 실수를 연발했음에도 기어코 실점만은 막아낸다.
‘왜지? 실력과 재능도 떨어지고 실수도 계속하는 주제에 왜 계속 막아내는 거야?’
당연한 의문. 하지만 토트넘의 선수들은 한가지 오판을 했다.
바로, 재능만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 적어도 재능만큼은 토트넘의 2군보다는 포츠머스가 우위였으니까.
재능이란 기초 체력. 기초 체력에서 우위를 점했기에 포츠머스가 실수의 연속 속에서도 버텨냈다는 사실을 토트넘은 몰랐다.
그리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밀린다···!’
포츠머스가 정신을 차리자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 당황한 토트넘의 선수들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바로 그거지!”
소하는 그 모습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후보란, 경기에 자주 나오지 못하는 선수라는 뜻.
이는, 경기 감각이 떨어져 있으며 같은 후보 선수들과 합을 맞춘 적이 적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강한 충격을 받으면 쉽게 바스러지는 진흙 같은 팀이라는 거지. 이제 누군가가 골로 연결해줘야 한다.’
포체티노 감독이 약점을 노출했음에도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지 않은가.
지금처럼 분위기를 탔을 때 앞서나가 줘야만 했다.
그리고 소하의 바람을 이루어줄 주인공은 바로, 델리 알리.
‘이제야 사람답게 하는구만.’
사실 독보적인 멘탈을 가진 선수라 마이클 반즈와 함께 유일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던 선수였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동료들과 함께 토트넘을 매섭게 몰아붙인다.
‘기회다!’
스티븐 데커의 강력한 중거리 슛이 수비수를 맞고 튕겨 나간다.
마침, 바운드 되는 위치는 델리 알리가 서 있던 왼쪽 페널티 박스 부근.
-뻥!
공을 발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발리슛으로 연결했다.
타고난 천재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한 박자 빠른 슈팅!
“어···?”
발리슛을 시도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미셸 포름 골키퍼.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공은 골망을 가른다.
-철썩.
발리슛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확한 슛! 골대 왼쪽 구석으로 정확히 빨려 들어갔다.
[골입니다! 골! 포츠머스가 강호 토트넘을 상대로 선제골을 달성합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환호성.
이어서 터지는 관중들의 함성.
누구도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리그컵 4라운드의 전반전이었다.
4.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은 델리 알리의 원더골을 바라보며 신음성을 내뱉는다.
“흐음.”
외통수였다. 이미 전술적으로는 완벽히 카운터를 맞은 상황. 그의 장기인 좁은 지역에서의 빌드업 플레이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수들의 체급으로 눌러버리기에는 포츠머스의 덩치도 만만치 않다.
‘이럴 때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전술을 변경하거나.
빌드업에 능한 선수를 투입하거나.
잠시 고민하던 포체티노 감독은 마음의 결정을 내린다.
“에릭센. 미안하지만 네가 후반전부터는 뛰어줘야겠다.”
후자를 선택하는 포체티노 감독. 전술을 변경하기엔, 지금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은 주력 전술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수준.
더 좋지 않은 상황이 펼쳐질 거라는 사실은 너무나 유추하기 쉬웠다.
“알겠어요.”
포체티노 감독의 명령에 싱긋 웃는 덴마크의 천재 미드필더, 크리스티안 에릭센. 포츠머스로서는 처음 맞이하는 국내리그 탑 클래스 선수의 등장이었다.
< 091화. 토트넘 홋스퍼. (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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