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9화. 토트넘 홋스퍼. (1) >
1.
“으아아! 망했어!”
“왜 하필!! 토트넘이냐고!”
“또 런던팀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홈이라는 정도? 그래도 승산이 너무 낮아.”
“그 많은 EPL팀에서 왜 하필 상위권 팀인데!”
나와 함께 퇴근을 마다하고 클럽하우스에서 조 추첨을 시청하던 구단 관계자들은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완벽한 좌절 모드!
뭐, 이해는 간다. 다른 팀도 아니고 토트넘이니까.
“감독님은 의외로 침착하시군요. 무슨 방도가 있으신 겁니까?”
의외로 침착한 내 모습에 놀란 밀러 아저씨가 은근슬쩍 다가와 물었다. 거참, 내 표정 하나는 기막히게 잘 읽는 사람이다.
“맞아요. 그나마 해볼 만한 상대니까요.”
나름 자신감 있게 내뱉은 말이지만 밀러 아저씨의 표정이 이상하다.
흡사 똑똑하던 옆집 총각이 어느 날 갑자기 바보가 된 모습을 보는듯한 얼굴.
그런 표정 당장 지우시라고요.
“너무 충격받으셨군요···. 이해합니다. 감독님. 이번 시즌 목표를 달성하기 불가능해졌기에 정신이 나가셨군요. 쯧쯧. 안타깝네요. 그래도 다음 기회가 있으니까 힘내십시오!”
안쓰럽다는 뜻이 담긴 눈빛을 보내며 혀를 차는 밀러 아저씨.
아주 그냥 소설을 쓰신다. 소설을 쓰셔.
마음 같아선 반쯤 벗겨진 머리통을 후리고 싶었지만 난 동방예의지국의 선비니까 참아야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정말 우리가 토트넘을 이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냐고요.”
밀러 아저씨는 내 진지한 질문에 웃음기를 쫙 빼고서 머리를 굴린다. 5분쯤 지났을까. 암만 생각해봐도 승산이 없어 보였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안 돼요. 안 돼. 최대한 우리 팀에 플러스를 주고 토트넘에게 마이너스를 줘봐도 체급 차이가 너무 큽니다.”
“그건 그렇죠.”
밀러 아저씨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공은 둥글다지만 구르는 방향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법.
단순한 구단 가치만 비교하자면 최소한 30배는 차이가 나는 수준이니까.
선수단 등급 자체가 차원이 다르다. 암만 ‘무관’으로 유명한 팀이라고는 하나, 꾸준히 유럽대항전에 출전하는 팀. 3부리그 팀 ‘따위’와 비교할 수준을 애저녁에 뛰어넘었다.
‘감독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고.’
심지어 이번 시즌에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가 새롭게 부임해 사령탑 자리에 앉았다.
훗날 파리 생제르맹에서의 좋지 않은 모습 때문에 명장이냐 아니냐 논란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훗날의 일일 뿐. 지금 당장은 명장이 맞다.
우리 팀의 철천지원수 구단인 사우샘프턴에서 훌륭한 성과를 냈으며,
토트넘에서도 구단 역사상 최초로 챔피언스 리그 결승으로 이끄는 감독이었으니까.
“그리고 헤리 케인. 이 선수는 요즘 허리케인으로 불리는 초특급 선수라고요. 간만에 잉글랜드에서 배출한 걸출한 공격수라는 평이 자자합니다.”
“당연히 알죠.”
모를 리가 있나. 2010년대 중후반, 2020년대 초반의 축구팬 중에 해리 케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앨런 시어러-웨인 루니’라는 잉글랜드의 월드클래스 포워드의 계보를 잇는 월드클래스 포워드!
왼발, 오른발 가리지 않고 대포알같이 강하며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슛을 어느 자리에서든 뿜어내는 슈팅 기술.
신장 188㎝의 뛰어난 신체조건을 활용한 뛰어난 볼키핑과 경합 능력.
정통 메디아푼타, 그러니까 공격형 미드필더의 뺨따귀를 후릴만한 패스 기술.
그리고 엄청난 활동량과 뛰어난 수비 가담 능력.
그냥 괴물이다.
느린 발과 상대적으로 조금 후진 드리블 능력이 단점이긴 하지만, 위의 장점들이 워낙에 압도적이라 옥에 티 정도일 뿐. 게다가 이 단점도 1.5선이나 2선까지 내려오는 플레이로 극복하기까지 한다.
솔직히 인제 와서 밝히자면 홀란드를 꼬시지 못했다면 차선책으로 꼽던 선수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임대 뺑뺑이만 돌던 선수였으니까.
물론, 충성심이 워낙에 뛰어난 선수라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큼큼. 저, 저도 알고 있는 걸 당연히 감독님도 알고 계시겠죠. 그런데 다 아시는 분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시는 겁니까?”
“그게 바로 저와 아저씨의 차이라는 거죠. 요즘 잘 따라오셔서 기뻤건만. 아직 갈 길이 머시군요···.”
이번에는 내가 역으로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밀러 아저씨는 내 어깨를 흔들며 닦달한다.
“허 참. 또 또 이러신다. 그렇게 감추지만 말고 이길 방도를 시원하게 말해보시란 말입니다!”
이러다가 내 턱주가리를 주먹으로 돌려버릴 기세다. 맞긴 싫기도 하고, 충분히 놀렸으니 이제 말해볼···까?
“뭔데 다들 귀를 기울이고 있죠?”
“···.”
“···.”
어느새 나와 밀러 아저씨의 주위에 옹기종기 모인 구단 직원들. 심지어 망할 대머리 새끼인 브라이언은 의자까지 끌고 와서 관람 중이다.
얼씨구. 팝콘은 왜 가져오는데?
위버 씨 퇴근 안 해요?
어휴. 됐다 됐어. 저잣거리 이야기꾼이 된 거 같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별 수 있나. 그냥 말할 수밖에.
“큼큼. 일단 우리는 운이 좋았어요.”
“운이요? 토트넘을 만났는데 운이 좋다고요? 빨리 팀닥터 불러봐요. 감독님 머리에 이상이 생기신 듯합니다!”
“···.”
밀러 아저씨에 대한 살의가 일었지만, 간신히 냉정을 되찾았다.
“한 번만 더 태클 걸면 저 그냥 집에 갈 거예요. 그럼···. 어···. 어디까지 했더라? 아잇. 싯팔. 까먹었잖아요!”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밀러 아저씨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짚어준다.
“운이 좋다고···.”
“아 맞다. 운이 좋았죠. 먼저, 3라운드에 밀월을 만난 건 정말 운이 좋았어요. 챔피언십 팀이 아닌 EPL팀을 만날지도 몰랐으니까요.”
리그컵 3라운드부터는 유럽대항전에 출전하는 팀도 참가한다.
즉, 진짜 강팀들이 몰려왔다는 것. 이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 챔피언십의, 그것도 강등권인 밀월을 만났다는 건 운이 좋다고밖에 설명이 어렵다.
“그리고 3라운드에서 살아남은 16팀, 우리를 빼면 15팀 중에서 12팀이 EPL팀이에요. 12팀 중에서 토트넘은 딱 중간 정도 실력을 갖춘 팀이죠.”
아직 이정재가 이적하기 전의 토트넘이다. 지난 시즌 가레스 베일을 레알 마드리드로 판매하고 팀의 정비가 덜 끝난 상태. 빅6라고 불리기 전이라 그리 강한 상태는 아니다.
“물론, 운이 좋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나쁘지도 않죠. 딱 중간이니까. 게다가 운이 좋게도 우리 홈이에요. 이건 단판 승에서는 상당히 유리하죠.”
단판승에서는 홈이나 원정이냐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홈 어드밴티지를 챙긴다는 건 운이 정말 좋았다는 방증이다.
“그렇군요. 운이 나쁘지 않았다는 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운이 좋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부족해요.”
잠자코 바라보던 브라이언이 질문을 던졌다. 새끼. 그냥 팝콘이나 처먹지 왜 주둥아리를 열까.
대답해주긴 싫었지만, 청자가 저 새끼 혼자가 아니니 어쩔 수 없군.
“먼저, 4라운드라는 점이죠. 4라운드. 8강에 들어가기 전 단계에요. 아직 빅클럽이 모든 힘을 투자하기엔 미묘하죠.”
거대 구단은 5라운드, 즉 8강전까지는 쉬엄쉬엄한다. 그리고 이 거대 구단에는 당연히 토트넘도 포함이다.
“하지만, 다른 EPL 구단은 아니에요. 그들은 유럽대항전이 없는 탓에 선수단의 여력이 충분하거든요. 4라운드부터는 주전을 내보낼 거예요.”
거대 구단의 1.5군이나 2군.
중소구단의 1군.
후자가 여실히 강하다. 몇몇 팀을 제외하고선 압도적이란 표현을 써도 될 만큼. 자본이 몰린 EPL의 특성상 상향 평준화가 이루어져 이런 경향은 나날이 강해지는 중이었다.
“즉, 후보를 기용할 예정인 구단 중에서 토트넘은 가장 약한 상대라는 거죠.”
바로 이거다. 내가 운이 좋다고 한 이유가 말이다. 어떤가? 정말 운이 좋지 않은가? 축구의 신은 나에게 엿을 먹이려고 노력했겠지만 난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고.
암만 토트넘이 강하다 할지라도, 리버풀, 첼시, 아스널, 맨체스터 시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보다는 약하다.
위의 다섯을 만날뻔했는데 토트넘을 만났다는 건 최고의 상황이었다.
“아! 그렇군요!”
“과연. 듣고 보니 정말 운이 좋았군요?”
“역시 감독님이야. 보는 시선이 달라.”
“와···. 평범한 분은 확실히 아니야.”
감탄을 내지르는 직원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다.
“···대단하십니다.”
심지어 브라이언 문어 대가리 새끼도 눈을 휘둥그레 뜰 정도로 감탄한다.
그래, 더욱 칭찬하고 놀라거라. 나의 위대함을 평생 숭배하도록.
“그런데요···. 감독님. 토트넘이 암만 설렁설렁한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상대 아닙니까?”
“···.”
조용히 대화를 지켜보던 밀러 아저씨가 뜨거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아저씨가 요즘 불만 있나?
“맞아. 암만 봐도 어려운 상대지.”
“그나마 쉬운 상대일지는 몰라도 객관적으로 보자면 백번 싸워서 다섯 번도 못 이길걸?”
“중요한 건 허리케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해리 케인은 리그컵 담당 공격수라고. 주전인 솔다도와 아데바요르보다 잘하던데···.”
순식간에 반전된 직원들의 태도.
제기랄. 기껏 약을 잘 쳐놨더니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문어 대가리 새끼가 유출할까 봐 대충 얼버무리고 퉁 치려고 했는데 말이야.
“···밀러 아저씨는 내일 저랑 개인 면담 좀 하죠.”
째릿. 내가 사납게 노려보자 밀러 아저씨는 헛기침하며 시선을 회피한다.
“크, 크흠.”
“일단, 해리 케인을 공략할 방법은 준비해뒀어요. 아니지. 토트넘의 포체티노 감독을 상대할 비책을 이미 마련해 뒀다고 보는데 맞겠죠.”
슬쩍 운을 떼자 다시금 탄성이 튀어나온다. 태세 전환 속도가 협곡의 정령 주술사가 따로 없다.
“와. 대단하세요. 도대체 언제 시간을 내신 거죠? 게다가 상대가 토트넘이 될지도 모르셨잖아요!”
에밀리아 씨의 순수한 감탄.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호기심 맹수의 질문에 난 거짓으로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전 상대가 될 15개 팀을 모조리 분석해놨으니까요. 동양에는 유비무환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어요. 미리 준비하면 걱정이 없다는 뜻이죠. 감독이란 직업에 가장 필요한 소양 아닐까요?”
“역시 우리 팀이 감독님 하나는 정말 잘 얻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끄덕끄덕. 에밀리아 씨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존경하는 눈빛까지 보낼 정도.
조금 찔리긴 했지만, 순도 100% 거짓말은 아니니까 양심의 가책은 덜하다.
적어도 내가 미래에서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공부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지금 당장 하지는 않았을 뿐.
“그럼 대책은 무엇입니까?”
혼란을 틈타 브라이언이 평범해 보이지만 구린내가 풀풀 풍기는 질문을 던졌다.
“전부는 비밀 유지상 말하진 못하겠고, 한 가지만 말하죠. 토트넘을 이기기 위한 비책의 핵심 선수는 말이죠··· 바로···.”
2.
마이클 반즈. 26세. 미혼.
취미는 산책과 낚시.
소하의 포츠머스에서 최고참 선수 중 하나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참 오래됐네.’
늦은 아침.
클럽하우스를 향해 출근길에 오른 마이클 반즈는 푸르른 하늘 위의 구름을 보며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이제 6년 차인가···.’
20대 전부를 포츠머스에서 보낸 마이클 반즈. 느긋하기 짝이 없는 그였지만 세월은 너무나도 빠르게 느껴진다.
세월의 빠름에 묘한 감회에 빠져,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클럽하우스의 정문이 보인다.
느긋한 성격답게 출퇴근 시간의 번잡함을 싫어하는 마이클 반즈.
아예 클럽하우스 근처로 이사를 가버린 그였기에 가능한 출퇴근 방법이었다.
“후우. 벌써 도착했네.”
너무 이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늦지도 않은 시간. 요컨대, 출근 시간이 겹치는 선수가 많은 시간대다.
“어? 반즈 선배! 오늘도 똑같은 시간에 오시는군요.”
“반즈 선배와 만났다는 건 오늘은 지각하고는 인연이 없다는 거지.”
“좋은 아침이다, 마이키.”
마이클 반즈를 발견한 동료들이 그를 격하게 환영한다. 조금 멍해 보일 정도로 느긋한 그였지만, 선수들은 그를 상당히 좋아했으니까.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가지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말을 잘 들어준다는 것이었다.
특유의 성격 덕분에 어떠한 말이라도 끝까지 들어주는 그는 구단의 고민 상담원 같은 존재였다.
말 없고 소심하기로 유명한 커너 러셀과 매튜 다이스도 마이클 반즈와 친할 정도였으니. 그가 구단 내에서 얼마나 많은 인망을 얻고 있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역시. 포츠머스는 좋아.’
마이클 반즈는 보기 드문 미소를 지었다. 어쩌다 보니 오게 된 구단이었지만 이제는 고향처럼 느껴진다.
‘영원히 이 평화가 지속됐으면···.’
조심스럽게 사랑하는 여유와 평화가 계속되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바라는 마이클 반즈.
하지만 아쉽게도 포츠머스에는 여유와 평화 따위는 길가의 개똥 취급만도 하지 않는 한 남자가 최상위 포식자로서 군림했다.
“야, 마이키. 감독님이 감독실로 바로 튀어오라는데?”
동갑내기 친구인 존 말로리의 전언.
이는 오랜만의 마이클 반즈의 얼굴에서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깨뜨리기에 매우 충분했다.
< 089화. 토트넘 홋스퍼. (1)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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