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0화. 리그컵 1라운드. (4) >
1.
‘나쁘지 않아, 곧 예전만큼 할 수 있겠지. 좋았어.’
‘거의 다 돌아왔는데? 이대로만 가자.’
‘조금 실력이 떨어졌지만 이 정도 수준도 나쁘지 않지. 완전 부활도 머지않았어.’
공을 잡은 찰나의 순간.
도봉산은 과거의 감독들과 동료들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모두가 막연하게 곧 좋아질 거라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거라고. 그저 막연한 위로와 헛된 희망을 담은 말들,
그래서 그럴 줄만 알았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시간이 약이겠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괜찮아지겠지.
하지만 시간은 독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몸과 마음은 굳어만 갔다.
부러진 다리는 단단히 붙었건만. 마음은 정반대였다. 1년, 2년이 지나며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지경까지 왔다.
긴 시간 동안의 공포는 어느덧 무의식에 자리를 잡아 습관이 되었으니까.
그래도 도봉산은 괜찮았다.
주급을 수천만 원이나 받는, 한국 국적의 축구선수로서는 엄청나게 성공한 삶이지 않은가.
이대로 적당히 선수 생활을 이어가도 상위 1%의 화려한 삶이 가능했으니까.
어차피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
자기도 모르게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잊은 채 타성에 젖었다.
포츠머스로 이적을 단행한 것도 같은 연유였다. 존경하는 선배인 유해진과 한참 유명세를 날리는 성소하 감독이 이끄는 팀에 들어간다면, 명성만은 계속 이어질 테니까.
실력이 떨어졌다지만 리그1 수준에서는 상위권. 위험부담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늘 그랬듯, 위험부담이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전까지의 이야기.
‘넌, 중성화 수술을 당한 늙은 개야!’
욱씬.
가슴이 아팠다.
톰 밀러에게 부상을 당한 그 날 이후.
이렇게 날카로운 비판은 처음 받아봤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하의 말은 해머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넌 지금도 화를 내지 못하지.’
정확했다. 화가 나기보다는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하고 바랐을 뿐. 그때 도봉산은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은 패배자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지막 기회야.’
이번 노리치 시티와의 리그컵 경기는 마지막 기회였다. 젊은 천재 감독인 소하도 이런 뜻으로 말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난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우연히 찾아온 절호의 역습 기회.
참으로 축구의 신은 얄궂다. 마지막 기회에서 이런 상황을 유도하다니.
‘감독님이 여기서 원하시는 플레이는 무엇일까.’
소하가 어떤 선택을 하면 좋아할지부터 고민하는 도봉산. 틀렸다. 이것은 소하가 원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곧 도봉산도 이 사실을 깨닫는다.
‘아니야. 감독님이 원하는 플레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원하는 플레이는 무엇일까.’
내가 하고 싶은 플레이.
내가 하고 싶었던 플레이.
내가 잘했던 플레이.
지금은 선택할 플레이는 분명히 정해져 있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문뜩,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다.
통통한 몸매를 가진 후덕한 인상의 수석코치, 밀러가 퇴근 전의 그에게 찾아왔다.
‘도봉산. 이걸 감독님이 전해주래.’
밀러가 건넨 두툼한 서류뭉치.
그 안에는 빼곡히 숫자들이 늘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데이터야.’
‘데이터요?’
‘정말 어렵게 구한 거라고. 네가 볼턴 초기에 보여줬던 신체 데이터와 근래에 스캔한 신체 데이터를 비교·분석한 거지. 잘 보라고. 그럼 내일 봐.’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밀러.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퇴근도 잊은 채 서류를 검토하는 도봉산.
그리고 그 서류는 도봉산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모든 신체 능력이 향상했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긴 부상으로 인해 신체 능력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아왔었다.
하지만, 숫자에 근거한 데이터는 그간 받아왔던 평가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던가.
‘맙소사···.’
전율이 일었다. 감독의 말은 맞았다.
자신이 약해진 것은 몸이 아니었다. 약해진 건 마음이었을 뿐.
‘난···. 뭐든 할 수 있는 상태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도봉산.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플레이를 선택했다.
2.
[아! 도봉산 선수가 고민이 많아 보입니다. 지금은 1초라도 아쉬운 시간인데요.]
[이러다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행운의 기회가 끝나버릴지도 몰라요! 전반전 10분 내내 붕 뜬 듯한 플레이를 보여줬는데, 역시 문제가 있나 보군요.]
길지만 찰나의 시간이었던 고뇌.
장내 아나운서의 외침에 도봉산은 정신을 차렸다.
이미 드리블로 공을 몰고 전진하기에는 조금 늦은 상황. 그래도, 도봉산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앞을 향해 튀어 나간다.
[드디어 도봉산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판단이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일단은 드리블을 시도하는군요!]
[아직 완전히 늦은 것도 아닙니다! 조금 늦었던 판단 덕분에 상대 수비진들이 조쉬 킹과 잭 해리슨에게 달라붙었습니다. 오히려 드리블할 공간이 생긴 거죠!]
장내 아나운서와 해설의 말처럼 1초 남짓 늦은 판단은 오히려 드리블하기에 좋은 상황을 만들었다.
-툭.
거침없이 왼쪽 측면에서 중앙을 향해 대각선 드리블을 시도하는 도봉산.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인다.
“멈춰라!”
늦은 시작이 좋은 상황만 만든 것은 아니었다. 노리치 시티 선수들이 리커버리를 할 시간도 생긴 거니까.
노리치 시티의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브래들리 존슨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팔을 뻗으며 반칙을 해서라도 도봉산을 막을 각오를 굳힌 모양.
하지만 정신을 차린 도봉산은 그리 만만치 않은 선수였다.
주춤주춤. 조금 속도를 늦추는 도봉산.
‘됐다···!’
순간 도봉산의 오른편에서 동일선상에 서게 된 브래들리 존슨은 거침없이 발을 뻗는다. 태클에 일가견이 있는 그였기에 공을 빼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 뭐지?!’
그런데 이게 웬걸.
회심의 태클이었지만 허공만 가르며 헛발질이 되어버렸다.
“너무 뻔해.”
“!!”
어느샌가 자신의 오른편으로 돌아선 도봉산이 한마디 던지며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것 아니겠나.
그렇다. 도봉산은 엄청난 민첩성으로 공을 뒤로 빼 순식간에 방향을 바꿨던 것.
유려한 ‘드래그 백’ 기술이었다.
정말 귀신같은 발놀림!
포츠머스 선수들에게는 없는 최상급의 발기술이었다.
“그래 그거지!”
이 모습을 지켜보던 소하가 쌍수를 들며 칭찬을 보냈다.
바로 이거였다. 소하가 바라던 도봉산의 모습이 드디어 나왔다.
“하지만 아직 더 보여줄 수 있잖아?”
이제 시작일 뿐. 소하가 아는 도봉산은 여기서 더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도봉산은 소하가 바람대로 한 번 더 마법을 부릴 준비가 끝나있었다.
“내가 막는다.”
노리치 시티의 주전 수비수인 세바스티앙 바쏭이 앞으로 나섰다.
마크하던 조쉬 킹은 동료인 마이클 터너에게 떠맡긴 채 거침없이 질주하는 도봉산의 앞길을 막는다.
“나도 도와줄게.”
이에, 스웨덴 국가대표인 왼쪽 윙백, 마르틴 올손도 마크하던 잭 해리슨을 내버려 두고 협력수비를 실행한다.
마크하던 선수를 내버려 두는 선택.
썩 좋은 수비는 아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그만큼 도봉산의 돌파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는 뜻.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것도 아니었다. 교묘하게 패스길을 선점하며 움직였으니까.
순간적으로 편해진 잭 해리슨과 조쉬 킹에게 패스를 보낼 방법은 극히 어렵다.
[이대로라면 둘러싸일 텐데요.]
[도봉산 선수가 어떤 선택을 할지 무척 기대되는 상황입니다. 패스도, 뚫고 나가기도 힘들어졌습니다. 노리치 시티 선수들의 과감한 수비가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전 프랑스 국가대표 세바스티앙 바쏭.
현 스웨덴 국가대표 마르틴 올손.
괜히 국가대표 출신이 아니라고 증명하는 듯 훌륭한 수비다. 한 치의 오차라도 생겼다면 뒷공간을 아예 내줄지도 몰랐으니까.
이에, 사면초가에 빠진 도봉산.
드리블 속도를 줄이며 주위를 살펴본다.
‘앞으로 패스를 주기엔 까다롭다.’
월드클래스 급 선수의 패스 솜씨가 아닌 이상 수비수에게 걸릴 것이 분명.
그렇다고 뚫고 나가기엔 공간이 좁다.
‘뒤로 돌려야 하나···?’
1초. 1초를 늦게 출발한 죗값이었다.
이대로라면 역습은 끝난 것과 다름없다.
뒤에서도 한번 따돌린 브래들리 쿠퍼가 살기 어린 눈으로 접근 중이었으니까.
그야말로 모두가 답이 없다고 생각할 아쉬운 상황.
‘할 수 있다···!’
도봉산은 어금니를 질끈 깨문 채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 늦췄던 속도를 재점화.
국가대표급 수비수들에게 용감무쌍한 장수처럼 달려든다.
“어딜!”
“감히!”
언뜻 무모해 보이는 도봉산의 돌진에 바쏭과 올손은 코웃음을 치며 압박한다. 두 국가대표가 매섭게 접근하자, 정말 위압감이 장난 없다.
남은 공간이라고는 두 수비수 사이의 작은 틈뿐. 사람은커녕 공도 간신히 지나갈 비좁은 틈이다.
‘길은 보였다.’
혼자만의 활로를 발견한 도봉산.
왼발로 공을 한번 잡고 몸을 한 바퀴 회전하는 턴으로 왼쪽으로 빠져나가며,
그와 동시에 오른발로 바쏭과 올손 사이의 공간으로 공을 차넣는다.
한편의 뮤지컬 장면 같은 아름다운 마르세유 턴!
사람은 지나갈 수 없는 좁은 공간이었지만 공은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마법 같은 기술이었다.
순식간에 앞의 두 명.
뒤에 한 명.
총 3명을 ‘마법’으로 녹여버린 도봉산. 보고도 믿기지 않을 민첩성으로 좁은 틈을 빠져나온 공의 소유권을 되찾고 엔드라인까지 질주한다.
그리고 공이 벗어나기 직전, 페널티박스 중앙의 조쉬 킹에게 깔끔한 크로스를 올려준다.
“나이스 도도!”
믿기지 않은 동료의 기술에 잠시 얼이 빠진 조쉬 킹.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펄쩍 날아오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조쉬 킹의 상대는 신장 194cm, 몸무게 90kg의 마이클 터너. 이 남자를 상대로 공중볼을 따내기엔 아직 조쉬 킹의 내공이 부족하다.
“공중볼은 특기가 아니군.”
마이클 터너는 조쉬 킹을 가볍게 제압하고 공을 걷어냈다. 정말 아쉽게도 무산되는 절호의 찬스.
분위기가 차가워질 법도 하지만, 의외로 분위기는 더욱 끓어올랐다.
[도저히 믿기지 않은 환상적인 기술이었습니다. 전 아직도 도봉산 선수가 어떻게 그 좁은 틈을 빠져나왔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 도봉산이 순간이동 마법이라도 쓴 줄 알았어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방법이라고는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방법밖에 없었거든요. 리플레이 화면으로 감상하고 싶네요!]
침을 튀기며 도봉산의 믿기지 않는 스킬을 칭찬하는 장내 아나운서와 해설.
“와아! 멋지다!”
“진짜 미쳤다! 이게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먹히던 드리블러의 실력이지!”
“저런 기술로 상대를 녹이는 모습을 몇 년 만에 보는지 모르겠어!”
“와, 포츠머스는 좋겠네, 저런 선수를 영입하다니. 우리 팀도 노려보지.”
“포츠머스의 부족했던 섬세함을 채워줄 만한 선수야!”
한마음 한뜻이 되어 멋진 장면에 연이은 환호를 보내는 양팀 서포터들.
“도도, 너 이런 캐릭터였어?”
“모처럼 개인플레이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훌륭한 기술이었어요.”
“나중에 드리블 좀 가르쳐주라.”
“야수의 심장이었어. 거기서 그런 선택을 한다니. 다르게 보이는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료들의 찬사.
그리고,
“잘했다. 바로 이게 바로 상암동 미친개지.”
저 멀리, 원정팀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소하의 모습.
“···.”
이거였다.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잊고 지내왔던 자신의 본모습은 이것이었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어.’
언제쯤이었을까.
주위의 평가처럼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할 거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계를 결정지었던 것이.
하지만, 소하의 말처럼 다 개소리였다.
‘다리가 부러지면 어때. 또 붙이면 되는 거 아닌가?’
아직도 무섭긴 하다. 그날의 고통은 아직도 악몽에 나올 만큼 고통스럽고 두려웠다.
그래도, 이대로 늙어버려 꿈을 포기한 채 숨만 쉬는 것이 더 무서웠다.
‘난 할 수 있다.’
그 옛날 그 눈빛으로 다시 돌아온 도봉산. 이제 그에게 다리가 부러졌던 고통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소하의 바람대로, ‘상암동 미친개’가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 080화. 리그컵 1라운드.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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