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8화. 리그컵 1라운드. (2) >
1.
최악의 리그컵 1라운드 조 추첨을 달성한 포츠머스 FC.
보통 리그 1라운드가 끝나고 시작되는 리그컵 1라운드였지만 모종의 사정으로 8월 말로 옮겨간 덕에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
포츠머스에는 정말로 불행 중 다행.
아직 팀이 완성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리그 3경기를 더 치른다면 반전의 계기를 만들기 충분했다.
리그1 2라운드.
코번트리 시티 FC와의 원정경기.
조쉬 킹의 멀티 골, 라이언 프레이저의 데뷔 골로 3-0승.
리그1 3라운드.
피터버러 유나이티드 FC와의 홈경기.
조쉬 킹의 3경기 연속골, 존 말로리, 델리 알리, 리그 첫 골에 힘입어 3-1승.
리그1 4라운드
크롤리 타운 FC와의 홈경기.
드디어 터진 잭 해리슨의 오른쪽 윙포워드 기용. PK 골을 포함해 해트트릭을 달성한 잭 해리슨의 엄청난 활약에 5-1 대승.
이로써 개막전 포함 4연승을 달성하며 기세를 매섭게 끌어올렸다.
그야말로 개같이 부활!
소문으로만 듣던 리그2에서 보여준 절대강자의 모습을 한 단계 높은 리그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드디어 펩 과르디올라의 2-3-5 시스템이 포츠머스에 정착된 것일까?
아니다. 그저 소하가 포기했을 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2-3-5 시스템을 포기하고 기존의 2-4-4 시스템으로 돌아왔다.
더군다나 지난 시즌과는 달리 반대발 윙포워드까지 장착한 터라 더욱 강력한 모습을 선보인 것.
‘아쉬워. 정말 뛰어난 전술인데.’
소하는 입맛을 다시었다.
펩 과르디올라가 맨체스터 시티에서 선보인 2-3-5 시스템은 소하의 눈으로는 정말 완벽한 전술이었기 때문.
이 전술을 포츠머스에 완벽히 이식할 수만 있다면 꿈을 이루는 데에 한발 앞서나갈 수 있었으니까.
‘아직은 현 선수들이 따라가기엔 너무 어려운 전술이야. 펩 감독이 괜히 선수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게 아니지.’
펩 과르디올라의 전술은 뛰어나다.
그래서 그만큼 뛰어난 선수들이 필요했고 영입에 막대한 돈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적시장을 마치는 주범이며, 선수 빨 감독이라는 비판까지 나오게 했지만, 소하의 생각은 달랐다.
‘돈이야 있을 때 쓰는 거지. 그리고 선수빨도 세우는 사람이 세우지, 줘도 못 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자기가 자기 팀 돈 쓰겠다는데 왈가왈부할 건 아니지 않은가. 소하는 그저 원하는 선수를 영입하는데 돈을 펑펑 쓰는 모습이 부럽기만 할 뿐이었다.
‘하여튼, 이 전술은 나중에 사용하자.’
소하의 장점 중 하나가 발휘되었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것.
몇몇 감독들, 예를 들면, 무리뉴 감독의 말기나 루이스 판할 같은 감독들처럼 아집과 철학을 양보하지 않다가 팀을 망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물론, 이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 고집과 철학이 지금의 그들을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려둔 원동력이었으니까.
그리고 소하도 보기에는 정반대의 행보였지만 실상은 이들과 본질은 같았다.
‘고집부리지 않는 게 내 고집이다. 이게 내 철학이지.’
소하다운, 굉장히 독특한 자세.
그리고 이 자세는 포츠머스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데 일조하였고, 그간 논란은 사그라들었다.
선수 선발이고 전술이고 뭐든 간에, 감독은 성적으로 증명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4경기 연속으로 명단제외 중인 도봉산 선수에 대한 관심만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2.
도봉산. 26세.
포츠머스와 리그1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선수다.
330만 파운드의 이적료.
대한민국의 스타 출신.
프리미어 리그에서 빛났던 재능.
리그1에 있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화려한 경력을 지녔지만, 4경기 연속으로 명단제외를 당하며 논란의 중심이 됐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위기에 처한 남자. 선수 경력에 크나큰 문제가 닥쳤다.
가뜩이나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폼이 죽었는데, 3부리그에서도 경기에 나오지 못하다니.
이대로 영영 잊힐지도 모르는 일 아니던가.
하지만 그는 주위의 걱정 섞인 시선이 무색할 만큼 포츠머스에서의 생활에 만족하는 중이다.
“헤이 도도!”
훈련이 끝나고 저 멀리서 조쉬 킹이 도봉산을 불렀다.
‘도도’란, 도봉산의 애칭. 봉산이란 이름은 잉글랜드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웠는지, 어느 순간부터 포츠머스 선수들은 도봉산을 이렇게 칭했다.
“훈련 끝나고 위닝 한 판?!”
“시끄러워. 감독님 들으면 바로 개인 면담이야. 바로 생수병 날아올걸?”
조쉬 킹이 게임 한판 하자고 도봉산에게 외치자 델리 알리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킹은 짐짓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다.
“너 진짜 게임 접었냐?”
“그게 아니라···. 조용히 말하라는 거지. 어때 도도? 너도 좀 치던데. 한판 하자.”
델리 알리는 목소리를 죽인 채 은밀히 제안했다. 소하가 들었다면 뒷목 잡고 쓰러질 만행! 뒤에서는 트리오 중 그나마 정상인인 칼빈 필립스가 머리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그러자.”
흔쾌히 허락하는 도봉산.
그렇다. 팀 동료들은 그와 상당히 잘 지낸다는 것. 이것이 도봉산이 포츠머스에서 잘 지내는 이유이며 꽤 놀라운 일이었다.
보통 동양인 출신이라면 조금 편견을 가지거나 멀리하길 마련이었거늘. 포츠머스라는 이 이상한 구단은 ‘인종에 대한 편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편견을 넘어 어린 선수들이 이렇게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 경우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성 감독님 덕분이려나···.’
한국인이면서도 잉글랜드인은 혼혈감독의 영향이 분명하다.
심지어 포츠머스에서는 그 흔한 ‘신고식’마저도 없었다.
이적이나 콜업으로 1군에 합류하게 되면 늘 따라오는 고참들의 유희 시간.
‘신고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장기자랑은 축구계의 문화였다.
‘군필 출신이라 안 좋은 기억이 있나 보군···.’
도봉산의 생각은 정확했다. 신병 시절 소하의 트라우마가 바로 신고식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소하의 눈에는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미필들이 군대놀이 하는 게 어이없었다.
“여어. 너희들 어디 가냐?”
멀리서, 존 말로리가 아는 체를 했다.
그도 퇴근을 준비하는지 샤워를 마치고 깔끔한 모습이다.
“선배가 알 거 없잖아요.”
절친한 사이인 조쉬 킹이 장난스럽게 튕겼다.
“새끼. 진짜 섭섭하네. 신입 왔다고 난 이제 버리는 거야?”
“네. 선배는 이제 지겨워요. 벌써 3년이나 봐서 밍밍하다고요.”
“하여튼 어린 녀석이란. 금방 질린다니까. 힘들 때 같이한 나를 이렇게 냉대하면 천벌 받는다?”
“그럼 잘하던가요.”
흡사 이혼을 앞둔 부부 같은 대화를 지껄이는 조쉬 킹과 존 말로리.
그 모습에 도봉산은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웃지 마. 지금 놀리는 거지?”
“하하. 아니에요.”
“너도 언젠간 버림 받을 거야. 그전에 얘네들 말고 나랑 놀자.”
“그럼 같이 가시죠.”
도봉산의 제안에 존 말로리는 흔쾌히 수락한다.
“좋아. 근데 뭐 하는데?”
“축구게임이요.”
델리 알리가 끼어들며 대신 대답하자 존 말로리는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인다.
“감독님한테 걸리면 뒤질 텐데. 하지만 원래 그 맛에 몰래 하는 거지. 나도 간다.”
“역시 선배는 뭘 좀 아시는군요. 참고로 꼴등이 저녁 사야 해요.”
“후후. 나야 환영이지. 근데 너희들 못하잖아. 자신 있어? 오늘 밥은 공짜로 먹겠네.”
거침없는 존 말로리의 도발에 10대 트리오는 노발대발한다.
“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도 않네요. 선배는 혓바닥으로 해도 이겨요.”
“선배, 패드 만질 줄은 아세요?”
“선배는 실력보다 입이 앞서는 게 문제에요.”
“어디 한번 해보죠!”
도봉산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도 축구게임에는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금세 승부욕에 불타오르는 선수들.
하지만, 그 모습은 빠르게 식어버린다.
“음? 퇴근 시간인데 뭘 하고 계십니까?”
주장인 케빈 도슨이 등장했기 때문. 그러자, 도봉산을 비롯한 선수들은 잔뜩 긴장하며 시선을 피한다.
케빈 도슨이라면 바른생활 사나이.
감독이 금지한 게임을 하려고 작당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바로 보고할 터.
그렇게 된다면 정말 끝장이다.
“흐음. 수상하군요. 나쁜 짓을 모의하는 악의 무리 같은 모습이었는데 말이죠. 지금도 눈을 피하는 것이 매우 수상합니다.”
케빈 도슨의 의심은 더욱 깊어진다.
오히려 시치미 떼는 모습이 더욱 의심을 부추긴 게 확실하다.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는 선수들.
압박감에 못이긴 칼빈 필립스가 사실을 실토하려고 할 때.
“그렇군요.”
잠시 도봉산을 바라보던 케빈 도슨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넘어간다.
“새로 온 동료를 위해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려는 시도군요. 아주 훌륭합니다. ‘감독님’이 ‘아신다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래도 한참 시즌 중이니 ‘적당히’ 하고 귀가하시길 바랍니다.”
말에 뼈가 가득 담겼다.
아마도 무슨 작당인지 눈치를 챘음에도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것이리라.
주장인 케빈 도슨도 경기에 나오지 못하는 도봉산에 대해 상당히 신경을 쓰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위기를 탈출하고 기쁜 마음으로 클럽 하우스를 떠나는 도봉산과 포츠머스의 악동들.
“흐음.”
도봉산이 작은 한숨을 내뱉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도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조쉬 킹이 단순하고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애새끼이긴 했지만 도봉산의 상황은 누구보다 잘 안다.
적어도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착한 성품을 지닌 그였다.
“음? 걱정? 아니야. 그냥 잠시 딴생각했을 뿐이야.”
대충 둘러댔지만, 포츠머스의 10대 3인방과 존 말로리는 안쓰러운 눈빛을 지우지 않는다.
“우리 감독님을 믿으면서 훈련에 임하면 곧 경기에 나올 수 있을 거야.”
“맞아. 감독님이 저래 보여도 어떻게든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시거든.”
“약속은 지키시는 분이야. 날 리즈에서 영입할 때 했던 약속을 전부 다 지키셨어.”
조쉬 킹, 델리 알리, 칼빈 필립스는 열심히 소하를 두둔한다.
그 모습에 도봉산은 자기도 모르게 웃는다.
“훗. 너희들은 성 감독님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솔직히 좋은 감독님이잖아. 맨날 욕하고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 수도 없고 성질도 더럽고 자기 멋대로인 사람이지만 말이야.”
“···.”
이게 욕인지 칭찬인지. 첫 마디가 없었다면 감독의 뒷담을 까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칭찬으로 포장한 욕에 도봉산은 한 가지를 확실히 느꼈다. 최소한 기존의 선수들은 소하를 단단히 믿고 있다는 것.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깊은 인연을 맺은 듯한 느낌을 져버리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어째서?’
리그가 개막하고 단 한 번도 개인 면담을 하지 않았다.
언뜻 보면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그건 또 아니다.
훈련 시간에는 말도 많이 걸었으면 훈련도 정말 세세하게 봐주며 열의를 보였으니까.
‘알 수가 없어.’
감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도, 동료들을 본다면 언젠간 자신도 그들처럼 소하를 좋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도봉산이었다.
3.
노리치시티와 리그컵 1라운드가 이틀 남았을 무렵.
도봉산은 아침 팀 훈련에 앞서 소하의 부름을 받았다.
이에 다른 선수들은 안쓰러운 눈빛을 숨기지 못한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아침 개인 면담은 78%의 확률로 욕을 먹는 시간이지.”
“오늘 감독님 표정 어땠냐?”
“최소 미들-앵거 레벨이던데.”
미들-앵거.
중간단계의 분노.
소하의 5단계 분노 중 중간단계다.
1단계 : 화가 나지 않은 상태.
사흘에 한 번꼴로 보이는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 이때는 선수들에게도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 날이다.
2단계, 로우-앵거: 작은 분노.
대부분을 이 상태로 보내서 선수들도 그러려니 하는 상황까지 왔다.
사실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다.
3단계, 미들-앵거: 중간 분노.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튀어나오는 상태. 1단계와 상당한 수준의 차이가 있는 터라 이날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
4단계의 하이-앵거와 5단계의 리미트-앵거는 한 달, 또는 분기에 한 번씩 터지는 상태. 이때 걸리면 최소한 일주일은 오버헤드킥 훈련이었다.
“···.”
이미 이 사실을 동료들에게 뼈저리게 가르침을 받은 도봉산. 얼굴에는 불안함이 가득하다.
“빨리 가봐. 늦으면 바로 1단계 상향조정 될 테니까.”
“최대한 비위를 맞추라고. 그러면 살아남을지도 몰라.”
“너무 걱정하지 마. 진짜는 어떤 ‘차’를 주느냐에 따라 갈리니까. 물론 냉수일 확률이 매우 높지만.”
“그동안 즐거웠어.”
“바이시클킥 노하우 알려줄까?”
“···.”
도봉산은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위로인지 제삿밥을 차리는 건지 구분이 어려웠으니까.
터벅터벅.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감독 사무실로 향하는 도봉산. 도대체 어떤 이유로 자신을 부른 건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
‘일단 부딪쳐 보자.’
똑똑.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노크를 하자, 곧이어 내방을 허락하는 소하의 목소리가 들린다.
“들어와요.”
문을 열자, 수수함을 넘어 삭막한 느낌까지 드는 사무실의 풍경이 반긴다.
그리고 서류 무더기가 올려진 책상 너머로 소하의 모습이 눈에 띈다.
“어, 왔어? 빨리 앉아.”
생각보다 훨씬 밝은,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에 도봉산은 긴장의 끈을 조금 푼다.
“개인 면담은 오랜만이네. 그동안 섭섭한 건 아니었지?”
물론 섭섭했다. 하지만, 도봉산은 사회생활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였다.
“아닙니다. 언젠간 불러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뭐 마실래? 아니다. 마침 내가 준비한 게 있거든. 조금만 기다려봐 봐.”
부드러운 목소리와 온화한 얼굴로 소하는 냉장고를 뒤적인다.
‘별일 아니었나 보군.’
결국은 마음을 놓아버린 도봉산. 하지만, 이것은 소하의 기만책이었다.
“두 개 중 어느 걸로 마실래?”
“···.”
도봉산은 말을 잃었다.
소하의 왼손에는 냉수가,
소하의 오른손에도 냉수가 들려있는 것이 아닌가. 이는 다른 선수들이 봤다면 최악의 상황이란 뜻이었고, 도봉산도 어느 정도 아는 사실이었다.
“본 감독은 너한테 매우 실망했어.”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살기가 담겨있다.
이에 도봉산의 머릿속에는 오늘 개인 면담이 매우 힘들고 고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 078화. 리그컵 1라운드.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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