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7화. 리그컵 1라운드. (1) >
1.
도봉산에 대한 소하의 발언은 경기 후 기자회견이 종료되자마자 일파만파 퍼졌다.
그리고 포츠머스의 살아있는 신이라 불리는 소하도 엄청난 논란 속에서 편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사람들의 구설수라는 도마 위에 오른 싱싱한 횟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광어 수준이 아닌 다금바리 급 횟감!
“뭐야? 29살에 벌써 노망이 오나? 지가 영입하고 지가 실력이 없데.”
“그저 유니폼 판매꾼으로 영입했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내 이럴 줄 알았지. 향우회를 결성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뿐. 퇴물이 다 된 선수를 영입할 때부터 이상했어.”
“성소하의 한계지. 2년 차를 맞이해서 진짜 실력이 나오는 거라고. 저번 시즌에는 그냥 운이 좋았어.”
“참을 만큼 참았다! 성소하 아웃!”
“우리 할머니보다 선수 보는 눈이 없어.”
먼저, 뛰어난 성적과 해바라기 단의 거침없는 탄압에 숨죽이던 악성 서포터들이 날뛰었다.
이들의 목적은 단순하다. 그저 어떻게든 욕을 하며 하루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족속들.
좋은 먹잇감이 나타나자 그간의 서러움을 풀려는 듯 허리띠를 아주 제대로 풀었다.
어느 팀에서나 존재해는 악성 종양 같은 존재들이라 평상시 같으면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소하가 직접 먹잇감을 줬으니까.
사실에 따른 ‘비난’이었기에 절대다수의 평범한 서포터에게도 ‘그럴지도?’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맞는 말일지도···?”
“무지성 억까는 정말 싫지만, 이번에는 무지성도 아니고 억까도 아니야.”
“성 감독의 경기장 내적에서의 모습은 아직 믿을만해. 하지만 경기장 외적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는데.”
“듣기로는 프런트의 일에도 성 감독의 영향력이 크다는데, 이참에 권한을 축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영입 권한을 그냥 기술팀이 전담해야 할지도 몰라.”
사람들에게 스미는 불신.
너무 과한 것일지도 몰랐지만, 원래 사람이란, 인간이란 이런 존재였다.
백번 잘해도 한번 실수하면 실수만 머릿속에 남듯이 말이다.
그리고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축구 구단은 고객을 위한 서비스업을 하는 회사.
구단은 여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위치였으니까.
제 혼자만 재미있는 개그를 치는 개그맨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조커도 아니고.
이대로 계속 좋지 않은 분위기가 심화한다면 소하에게도 좋지 않다.
경질은 어림도 없겠지만, 구단 내 영향력이 약해질 터. 어떻게든 대중들의 반응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누군가 나서야 했다.
물론, 감독이 나서서 해명하는 것이 제일 즉효 약이었지만, 소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니, 소하는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가 대신 나서줄 테니까.
“응, 아니야. 성 감독식 길들이기 모르냐? 해준 게 얼만데 벌써 개소리들이야?”
“아니, 간단한 수학도 못 하나? 330만 파운드는 이미 한국 시장 공략으로 원금 회수했어.”
“유니폼 팔이면 어때서? 이래저래 이득을 본 거면 된 거 아니야?”
“머리는 장식인가. 아무리 비싼 선수라도 폼이 오르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는 철학을 보여준 거지. 이거는 기존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요소라고.”
“그 사이가 안 좋다던 하비 셸비랑 스펜서 보이드도 잘 써먹은 감독이야. 두고 봐라. 한 달 뒤면 펄펄 날아다니는 도봉산을 볼 테니까.”
균형의 수호자, 해바라기단 등장.
엄청난 화력으로 비판 의견을 깡그리 몰아낸다.
그 모습은 마치, 소하가 고용한 용역 불도저!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듯 거침없이 밀어붙인다.
덕분에 여론은 백중세를 유지.
치열한 고지전이 펼쳐진다.
“이걸 쉴드를 치네?”
“나도 쉴드 한번 쳐봄. 쉴드로 머리통 친다고 새끼들아.”
“악성 억까들 이참에 솎아내자.”
“철새들은 강팀이나 빨라고.”
베트남 전쟁 때의 캐신 전투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혈전.
랜선 너머로 한 남자가 웃고 있는 모습의 그려지는 건 분명히 착각만은 아니리라.
물론, 이 공방전은 길지 않을 거다.
그전에 어떻게든 성과를 내보이지 않는다면. 고지전의 승리는 공격 측의 차지일 테니까.
2.
이 정도는 예상 범위 안이다.
한국인들이 냄비근성이 심하다고 하지만, 잉글랜드라고 다를 건 하나도 없다.
‘솔직히 심했으면 더 심했지.’
한국 축구팬들은 정말 얌전한 편이다.
조금만 못해도 욕하는 건 비슷한 수준이지만, 응원문화는 비교가 실례일 정도. 적어도 한국 팬들은 키보드를 두들기고 말지 주먹질은 쓰지 않으니까.
괜히 혐지인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다.
밀월과 웨스트햄.
얘네들이 대표적.
경기중에도 서포터들끼리 생수통 집어 던지는 건 아침 인사급이었고, 경기 전후로 패싸움하는 건 식후 커피 한 잔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물론, 얘네들이 ‘금속 노조’여서 더욱 살벌한 거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팀도 별반 다른 건 없다.
수틀리면 경기장 난입해서 보드진한테 쌍욕을 박지 않나,
원정팀 버스에 테러를 가하지 않나.
오줌을 담은 생수통을 다른 팀 서포터에게 던지질 않나.
심지어 경기중에 싸움질을 벌여, 경기장을 무너뜨리는 원흉이 되어 39명이 사망하고 60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대참사’까지 일으켰으니. 정말 골치가 아픈 족속들이다.
‘일일이 다 신경을 쓰다간 할 일도 못 한다. 적당히 관심 끄는 것이 장수의 길이지.’
서비스업이라도 진상은 무시해야 하는 법. 애초에 얘네들은 매출에 도움도 별로 안 된다. 유니폼 한 장이라도 가지고 있으려나.
하여튼, 지금 중요한 건 외부에서 뭔 개소리를 지껄이든 내 할 일을 하면 된다는 거다.
어차피 해바라기 단이 치열한 고지전을 펼쳐주고 있었으니까. 우려할 만큼 여론이 악화할 리는 없을 거다.
“오, 드디어 시작하네요, 감독님.”
“더럽게 질질 끄네요. 모 매니저 게임에서는 그냥 스페이스 바 한번 누르면 끝나던데.”
“···게임은 게임이니까요. 그래도 재밌지 않습니까? 허허.”
“그건 인정.”
나와 밀러 아저씨, 그리고 프런트의 사람들은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한 채널을 보는 중이다.
이 채널은 바로, 리그컵 1라운드 조 추첨. 잉글랜드인이라면 누구나 응원하는 팀이 존재하길 마련이었고, 이런 조 추첨 중계방송은 인기가 상당하다.
뭐든지 ‘뽑기’란 재미있는 법이니까.
“제발 챔피언십 리그에 속한 팀은 피해야 할 텐데요.”
“그건 저도 동감.”
리그컵은 1라운드에서 4라운드까지, 그리고 8강부터 결승까지 나뉘어있다.
가장 낮은 단계인 1라운드에는 다행스럽게도 프리미어 리그 팀들은 참가하지 않는다.
경기 수 조절과 더불어 밸런스 패치랄까. 솔직히 3, 4부리그 팀들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리그컵 1라운드는 챔피언십 리그 팀이 가장 위험한 상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상대는 당연히도,
“최악의 상황은 지난 시즌 ‘프리미어 리그에서 강등당한 챔피언십 팀’과 만나는 거죠. ”
“거, 참.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동양에는 화는 입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거든요?”
“큼큼. 마,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호, 혹시 모르니까요.”
내가 눈을 샐쭉하게 뜨자 밀러 아저씨가 말을 더듬는다. 하기야, 잉글랜드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으니까. 정말로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욕을 한 바가지로 드실 거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발언이에요. 감독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하고 있어야 하니까요.”
“허헛. 제 말이 그 말이었습니다. 수백분의 일의 확률이지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원래, 알고 맞는 게 덜 아픈 법입니다.”
하여간, 나날이 변명 실력이 느신다니까. 누굴 닮아서 저렇게 변하고 계신 건지. 참으로 안타깝다.
“···일단 저번 시즌 프리미어 리그에서 강등당한 팀이 어디 어디였죠?”
“노리치 시티, 카디프 시티. 그리고 풀럼FC입니다, 감독님.”
“일단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확률이 2배는 증가했네요.”
리그컵 1라운드의 조 추첨은 북부와 남부 팀으로 나누어서 한다.
즉, 북부 팀은 북부 팀끼리, 남부 팀은 남부 팀끼리 맞붙게 된다는 것.
그리고, 당연히도 우리는 남부 팀 소속이다. 포츠머스는 영국의 최남단 도시 아니던가. 설명할 시간도 아깝다.
“노리치 시티도 남부 팀이고 풀럼FC는 런던이니 당연히 남부 팀이로군요. 허허. 거참, 공교롭네요.”
“그러니까요. 더군다나 단순한 강등팀도 아닌 프리미어 리그를 들락날락하는 체급이 큰 구단들이니까요.”
노리치 시티.
위 고 노리치로 한국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구단이다.
연고지는 이스트 오브 잉글랜드 노퍽 주 노리치.
1부리그에 27시즌이나 머문 정통의 강호! 잊을 만하면 1부리그로 올라와 특유의 노란색과 초록색이 섞인 유니폼을 자랑하는 팀이다.
아직은 친선경기 때 우리를 가지고 놀았던 번리 FC보다도 체급이 큰 팀.
만나면 나로서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다. 구단 가치만 따져도 10배 이상은 차이가 나겠지.
‘풀럼도 만만치 않은데···. 그냥 최선은 둘 다 만나지 않는 거다.’
풀럼FC.
무려 15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잉글랜드 내에서도 오래된 구단이다.
그에 반해 우승컵은 하나도 없는 ‘무관 본능’이 장착된 팀이지만, 무시할 수준은 절대 아니다.
어찌어찌 프리미어 리그에 계속 얼굴을 들이미는 건 그만큼 바이브가 살아있다는 뜻이니까.
심지어 유로파리그 결승전 무대를 밟아본 팀이기도 하다! 이때가 09-10시즌이었으니, 고작 4년 전. 오히려 노리치 시티보다 어려운 상대일지도 몰랐다.
“후우 긴장되네요.”
“모두 기도합시다.”
“뭔 기도에요. 몇십분의 일에 확률에 우리가 재수 없게 걸리겠어요?”
아니, 이 아저씨가? 그냥 노리치 시티랑 풀럼 만나고 싶다고 고사를 지내시네.
“전에 감독님이 하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운은 뭐더라? 똥물이라고 하셨나?”
“···운은 파도라고 했죠.”
똥물도 파도가 있다는 말과 헷갈리셨나 보다.
“아 맞아요. 그거. 그거. 하여튼 지금까지 우리는 운이 좋지 않았습니까.”
“그런가요?”
운이 좋았다고? 흐음. 글쎄.
슬쩍 뒤를 돌아 몇몇 버러지, 그러니까
브라이언과 벤스 모건을 위시한 친 CEO 파들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조 추첨 방송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쑥덕거리는 게 참으로 꼴 보기 싫다.
“아닌 거 같은데. 제가 운이 좋다니요. 그냥 재수 존나게 없는 인간인데요. 싯팔. 내 팔자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욕설을 내뱉자 밀러 아저씨는 씨익 웃으며 내 등을 토닥인다.
“허허. 그래도 좋은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감독님 개인에게는 운이 없을진 몰라도 구단으로서는 운이 아주 좋지 않습니까?”
“···.”
“성소하란 뛰어난 감독을 가지게 된 건 다시없을 엄청난 운이었죠. 그러니 앞으로 고난이 닥쳐와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독님께서 말씀하신 운의 반작용 아니겠습니까? 허헛.”
“···.”
이 사람 이거 왜 이래? 요즘 들어 부쩍 아부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이럴 때도 훅 치고 들어오다니. 설마···. 혹시?
“···지금 괜히 재수 없는 말 했다고 욕먹을까 봐 미리 약 치는 거죠?”
나의 예리한 지적에 밀러 아저씨의 동공에는 지진이 난다. 그럼 그렇지.
“···큼큼. 오, 오해입니다.”
“맞네. 맞아. 내 이럴 줄 알았어.”
“아, 아닙니다!”
“시끄러워요. 이제 다 밀러 아저씨 잘못이니까 그런 줄 아세요.”
“가, 감독님!”
하여튼, 나날이 약아져선. 역시 내 편은 하나도 없어. 인생은 혼자 걷는 거지. 그렇고말고.
계속 이어지는 밀러 아저씨의 처절한 변명을 무시한 채 다시금 조 추첨 방송에 집중. 어느덧 북부 팀의 조 추첨이 끝나고 드디어 남부 팀의 차례다.
무난하게 진행되는 조 추첨.
나름대로 큰 전력 차가 나지 않는 팀끼리 맞붙으며 치열한 리그컵 1라운드가 예상된다.
그리고 이에 비례해서 점점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
아직 우리 팀도 나오지 않았고, 노리치 시티와 풀럼FC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점점 확률이 올라간다는 뜻 아니던가.
오, 제발.
[이번 팀은 풀럼입니다. 과연 풀럼과 맞붙게 될 팀은 어디일까요.]
드디어 나왔다. 1라운드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팀 중 하나인 풀럼FC가.
꿀꺽.
방송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마른침을 삼킨다. 밀러 아저씨와 나의 대화를 모두가 들은 모양이다.
[오! 리그1 팀입니다.]
조금 지쳐 보이는 진행자의 발표에 일순, 싸늘한 냉기가 내려앉는다.
리그1 팀이라면 우리 팀이라는 가능성이 매우 크다.
[바로 이번 시즌에 리그1로 승격한 팀이죠. 강등당한 팀과 승격한 팀의 멋진 경기가 예상됩니다. 그 팀은 바로···.]
리그1로 승격한 팀이라고?! 그럼 우리 팀을 포함해서 4팀이다. 그리고 이미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와 애크링턴은 조 추첨이 끝난 상황.
50%의 확률로 풀럼행이다.
[로치데일 AFC입니다!]
“휴우우우. 살았다.”
“아, 거 새끼. 존나게 말 끄네.”
“지뢰는 피했네요.”
“십년감수했네.”
나와 밀러 아저씨를 포함해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진짜 쫄렸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이번 팀은 아! 이번에 강등이라는 고배를 마신 노리치 시티 입니다.]
나왔다. 드디어 노리치 시티가 나왔다.
제발 우리팀만 아니길.
[그리고, 이를 상대할 팀은···. 아! 리그컵 1라운드 최고의 빅매치가 될 거 같네요!]
뭐, 뭐라고? 빠, 빨리 말해 이 새끼야.
거 새끼 진짜 사람 애간장 태우는 데에 일가견이 있네.
[포츠머스입니다! 정말 흥미진진한 경기가 될 것 같군요!]
“···씨발.”
“···좆됐네.”
“···꾸, 꿈이죠?”
“···거 참···.”
“···TV 꺼!”
밟아버렸다. 결국 밟아 버렸다. 무조건 피해야 하는 두 개의 지뢰 중 하나를 밟아 버렸단 말이다.
정말 재수 하고는, 씨발.
“다 아저씨 탓이에요.”
“···.”
비를 맞은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짓는 밀러 아저씨.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피어오른다. 일 년 전에 연습경기에서 패배한 그 모습 아니던가. 그만큼 충격이 크다는 이야기니, 그만 놀려야겠다.
‘후우. 노리치 시티라. 결국 고난 하나가 다가오는구나.’
이번 시즌 목표는 리그컵 우승.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지만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공은 둥근 법이니까.’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뭐 별거 있어? 이기면 되는 거지.
좋아, 씨발.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이미 조 추첨은 끝났어.
우리는 노리치로 간다!
< 077화. 리그컵 1라운드. (1)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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