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72화 (72/306)

< 072화. 에밀리아 vs. 포츠머스. >

1.

지지직. 주위가 밝아지며 한 여성이 편한 옷을 입은 채 모습을 드러낸다.

나이는 20대 초중반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인상적인 미인이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에밀리아 존슨이라고 해요.”

에밀리아 존슨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후후후. 전 홍보팀의 신입사원이지만 실상은 다른 직업을 숨기고 있죠. 힘을 숨겼다고나 할까요?”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음흉한 미소를 흘리는 그녀. 나름 사악해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얼굴이 워낙에 귀여워 마냥 귀엽기만 할 뿐이다.

“바로, 제 본직은 생존전문가예요. 지금부터 야생보다 험준한 포츠머스 FC에서 생존하는 법을 알려드릴게요.!”

샤샤샥. 이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재빨리 구단의 클럽하우스 정면으로 향하는 에밀리아 존슨.

여전히 뛰는 자세는 이상하지만 빠르긴 정말 빠르다.

“이곳이 바로, 냉혹한 야생인 클럽하우스의 정문이에요.”

포츠머스의 클럽하우스 정문을 참으로 신기하게 소개하는 에밀리아. 정문에 얽힌 이러저러한 사연을 말하다가 순간, 몸을 숙인 채 화단 뒤로 몸을 숨긴다.

“헉. 숨을 죽이셔야 해요.”

“어째서죠?”

“험준한 포츠머스 FC에서도 상당히 상위권에 자리를 잡은 포식자가 등장했거든요.”

“앗. 누, 누구죠?”

“바로 저분이세요.”

에밀리아가 가리킨 사람은 고급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였다. 특징으로는 떠다니는 형광등 같은 매끈한 민머리.

바로, 포츠머스의 브라이언 CEO였다.

“매우 무시무시한 포식자이지만, 전 생존전문가. 어디 한번 말을 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샤샤샥. 다시금 이상한 말을 내뱉으며 브라이언에게 돌진하는 에밀리아.

정말 빠르다.

“음?! 아! 에밀리아 씨군요. 그런데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제 일을 하는 중이에요. 질문 몇 가지만 해도 될까요?”

“···흐음. 과연.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상한 행동이었지만, 묘하게 수긍하며 넘어가는 브라이언.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는 이질감마저 든다.

“험난한 야생인 포츠머스 FC에 대해서 한마디 해주시죠!”

“음? 야생이요? 컨셉인가 보군요. 좋습니다. 먼저, 포츠머스 FC의 역사는 1898년부터 시작합니다. 백 년도 넘은 아주 먼 옛날이지요. 처음에는 그저 작은···.”

“자, 잠깐 한마디가 넘었는데···.”

“또한 포츠머스의 애칭은 폼페이입니다. 이 별명에 대한 유례는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사, 사장님···!”

절규하는 에밀리아. 하지만 브라이언이 누구던가. ‘그 소하’에게도 혓바닥을 멈추지 않던 사람이지 않은가. 에밀리아 정도로는 그의 혓바닥을 막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

그렇게 한참을 포츠머스에 대한 역사강의를 들은 에밀리아.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은 이미 시커먼 썩은 동태눈깔이 되었다.

“괜찮으신가요?”

“괘, 괜찮아요. 전 생존전문가. 이 정도로 쓰러지진 않으니까요.”

“그렇군요···.”

“하여튼 모두가 상위 포식자의 두려움을 잘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야생 속으로 뛰어 들어가 보죠!”

반짝. 다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회복한 에밀리아는 빠른 속도로 클럽하우스에 들어간다. 정말 굉장한 회복력이다.

“자, 이번에 도착한 곳은 어떤 의미에선 굉장히 중요하고 위험한 장소입니다.”

“어떤 곳이죠?”

“무려, 최상위 포식자가 자주 출몰하는 적색 지대이거든요.”

“···최상위 포식자요?”

“네.”

“···.”

그녀가 도착한 곳은 탕비실.

구단 직원들을 위해 간단한 요깃거리가 지천으로 널린, 평화롭기 짝이 없는 곳이거늘. 도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걸까.

물론, 중요하긴 했지만 말이다.

“쉬잇. 조용히 하세요. 지금, 최상위 포식자가 이 안에서 목격됐으니까요···!”

스윽. 몸을 낮춘 채 슬쩍 탕비실 안을 훔쳐보는 에밀리아. 그녀가 경고했던 대로 한 남자가 탕비실의 서랍을 정신없이 뒤적거리는 중이다.

남자의 나이는 20대 중후반쯤.

검은 머리와 푸른 눈이 굉장히 잘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뽐내는 미남이다.

“뭐 하는 걸까요?”

“글쎄요. 하지만 전 생존전문가. 직접 다가가서 뭐 하는지 물어보도록 하죠.”

에밀리아는 말을 마친 뒤 슬그머니 젊은 남자에게 총총걸음으로 다가간다.

“어? 에밀리아 씨.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뭐, 저야 항상 안녕하죠. 그런데 저쪽 분은 뭐 하세요?”

“하, 하하. 일하는 중이에요.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최상위 포식자는 에밀리아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다.

“그럼요.”

“지금 뭘 하시는 건가요?”

“···꼭 알아야 합니까?”

쉽게 수락했는지만 질문만은 어려웠나 보다. 친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경계심이 극도로 차오른다.

“주머니가··· 불룩하신 게 뭔가 수상해서요. 혹시···?”

“흠흠.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쯤은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도 탕비실에서 초코바를 빼돌리는 건 조금···. 어쩐지 요즘 초코바가 자주 비더라고요.”

“···.”

불룩 솟아오른 바지 주머니에서는 초코바의 포장지가 보인다. 그것도 양쪽 주머니가 모두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아, 몰라. 이제 에밀리아 씨도 공범이에요.”

“네?!”

검은 머리의 남자는 서랍을 열어 사탕을 한 주먹 꺼내더니 에밀리아의 바지 주머니 속에 욱여넣고 손을 턴다.

“저기요, 잘 찍고 있죠? 이제 에밀리아 씨랑 당신도 공범이야!”

“그게 무슨?”

“그, 그건 아니죠.”

서둘러 반박하는 에밀리아. 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뿌리치고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진다.

“···어, 어떠신가요? 정말 최상위 포식자 답죠? 정말 무서운 개체에요.”

“···무섭네요.”

무서웠다. 그의 뻔뻔함이.

“이, 이번엔 조금 난도를 낮춰보도록 하죠. 먹이사슬의 하위 개체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으로 가봅시다.”

샤샤삭. 충격과 공포로 얼룩진 탕비실을 빠르게 벗어나는 에밀리아. 그녀가 이번에 도착한 곳은 식당이다.

마침 한참 아침 식사 시간이라 사람들이 꽤 북적인다.

“이곳이야말로 초원이라고 할 수 있죠. 아, 마침 하위 개체의 대표적인 개체가 모습을 드러냈네요.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밀리아는 수더분한 수염을 기른 통통한 40대 남자에게 다가갔다.

“응? 홍보팀의 에밀리아 씨 아니에요?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에밀리아가 다가가자 사람 좋은 미소로 반기는 중년 남자. 통통한 볼살 덕분에 귀여운 인상이다.

“안녕하세요. 일하는 중이에요.”

“아, 그렇군요.”

“포츠머스의 생활이 어떤지 궁금한데요, 여쭤봐도 될까요?”

“허허. 그럼요.”

중년 남성은 너털웃음을 한번 내뱉은 뒤 인자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주 훌륭한 곳이죠. 어떨 땐 집보다 여기가 편해요. 아니지. 항상 집보다 편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 구단이 얼마나 가족 같은지 알 수 있죠. 차라리 클럽하우스에 세 들어서 살고 싶어요. 최소한 바가지 긁을 사람은 없으니까요. 정말 좋습니다.”

“···.”

아련한 중년 남성의 눈빛에 에밀리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몇 걸음 물러난다.

이대로 있다간 우울함에 전염될 것이 뻔했으니까. 그리고 마침, 굉장히 흥미로운 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크고 근육질인 개체와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을 지은 개체다.

“이 개체들은 최상위 포식자의 주식입니다. 요 며칠 잡아먹히지 않아 영양가를 매우 많이 포함하고 있어요.”

“앗! 에밀리아 누나잖아? 여기서 뭐해요? 그리고 저분은 누구시고.”

“야, 딴 데 신경 쓸 시간 없어. 감독님이 출근하자마자 사무실로 오라고 문자 보내셨잖아. 누나, 인터뷰는 다음에 할게요. 미안해요.”

순식간에 사라지는 먹이사슬 최하층 주민들. 에밀리아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빛낸다.

“아! 잘됐군요. 마침 최상위 포식자가 주식을 원하는 모양입니다. 그럼 따라가 보도록 하죠.”

샤샤샥. 다시금 재빨리 발을 놀린 에밀리아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감독 사무실.

이미 먹이사슬의 밑바닥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건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위장으로 들어갔네요. 그럼 어떻게 소화되는지 엿들어보도록 하죠.”

에밀리아는 살금살금 다가가 문에 귀를 가져다 댄다. 솔직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야 이 새끼야! 지금 나랑 장난하냐? 삼각형을 만들라고 삼각형을! 너 삼각형이 뭔지는 알지?”

“다, 당연하죠···.”

“그런데 왜 말을 못 알아듣는 거야!”

“그, 그거야 감독님이 말씀하신 게 역삼각형인지 몰랐으니까요···.”

“이런 싯팔. 그걸 꼭 말로 해줘야 아냐? 2-3-5 진형이면 당연히 역삼각형을 만들어줘야지! 왜 밑으로 쳐 내려와서 정삼각형을 만드냐고!”

버럭! 버럭!

극히 분노한 최상위 포식자의 고함은 문을 뚫고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알리야. 내가 너 게임 하지 말라고 했지?”

“···어, 어떻게 아셨죠?”

“너희 부모님이 알려주셨다, 이 자식아.”

“마,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건 축구보다 게임에 미쳐있는 니 새끼가 더 말이 안 되고!”

“···하, 한판만 더했으면 스, 승급 전이었다고요.”

“승급전 같은 소리 하네. 어디 한번 현실에서 유소년팀으로 강등당해볼래?”

이어지는 포식자의 매서운 소화기관의 작동 소리.

에밀리아는 짐짓 비통한 표정을 연기하며 슬며시 문에서 멀어진다.

“자, 어떤가요? 정말 무시무시한 야생이 따로 없지 않나요?”

“···.”

“하지만 전 생존전문가. 이런 곳에서 1년을 넘게 살아남은 베테랑이죠. 여러분들도 저를 잘 따라 하신다면 생존에 성공하실 거라고 믿어요!”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도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다시 만나도록 하죠!”

“···.”

느릿하게 어두워지는 공간.

눈을 빛내며 두 주먹을 불끈 쥔 에밀리아의 모습은 어느덧 새까만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2.

“그러니까···. 이게 홍보팀에서 준비 중인 포츠머스 FC의 홍보영상이라는 이야기··· 라는 거죠?”

브라이언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나직이 되물었다.

“···.”

“···.”

한숨을 푹푹 내쉬는 브라이언.

그 앞에 선 홍보부장 벤스 모건과 아시아 홍보팀장 에밀리아 존슨은 고개를 떨군 채 석고대죄 중이다.

“괘, 괜찮지 않나요?”

“나름대로 요즘 세대에 어울리는 홍보자료라고 판단했습니다.”

궁색한 변명.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 하지만 사장님도 촬영에 응해주셨잖아요···.”

“그거야 당연히 ‘건실한’ 홍보영상을 촬영 중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상일 줄 정말 꿈에서도 몰랐어요!”

“···.”

“구단에 망신을 주려고 작정하셨군요. 훈련장은커녕, 탕비실과 식당, 그리고 감독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엿듣는 내용만 나오다니요.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

좀처럼 성화를 내지 않던 브라이언이 화를 내자 에밀리아와 벤스 모건은 겁에 질려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안돼···. 내 작품이···.’

벤스 모건이야 그냥 따라와서 아무 생각 없었지만, 에밀리아는 속이 탔다.

‘흑. 나름 고심한 작품인데.’

그녀 나름대로 인터넷 유행을 따라 야심 차게 준비한 영상물이었거늘. 이렇게 퇴짜맞을 줄을 몰랐다.

이렇게 새로운 데이터 쓰레기가 만들어지는 걸까. 하지만, 구원자는 언제나 등장하는 법이었다.

-똑똑.

“지금 다른 직원과 이야기 중··· 어? 성 감독님?”

다른 업무 중인 게 뻔히 보이는데, 노크하자 성화를 내려던 브라이언. 하지만 노크를 한 사람이 소하인 것을 목격하고선 말을 바꾼다.

“흠. 들어오십시오.”

달칵.

“이야.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성화를 내고 계시길래 궁금해서 방문해봤어요.”

“···그, 그렇습니까?”

브라이언은 소하의 독특한 아침 인사에 다시금 목덜미가 뻐근해지는 걸 느낀다.

좀체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라 급한 일인 줄 알았건만. 그저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은 자신을 찾아올 줄 몰랐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감독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흐음. 잘 됐군요. 이참에 감독님한테도 한번 ‘그 영상’을 보여드리도록 하죠.”

“영상이요?”

눈썹을 일그러뜨리는 소하. 며칠 전 탕비실에서의 ‘그 사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아니요. 일단 한번 보죠.”

브라이언의 의심 섞인 눈초리를 애써 무시하며 영상을 시청하는 소하.

짧은 페이크 영상은 순식간에 끝난다.

“휴우.”

소하가 한숨을 내쉬자 브라이언은 신이 나서 입을 연다.

“어떻습니까? 성 감독님도 저와 같은 생각으로 보이네요. 정말 구단 망신을 줄 영상물 아닙니까?”

드디어 소하와 브라이언의 생각이 일치하는 걸까?

“네? 무슨 소리예요. 이건 명작이라고요! 대박이라고요!”

그럴 리가. 소하는 진심으로 흥분하며 침을 튀긴다.

“이건 혁신적이에요. 맨 VS 와일드를 패러디한 감각! 최소한 3년은 앞서나간 훌륭한 패러디 물이라고요!”

“···.”

“이거 누가 기획했어요? 설마 모건 씨가? 에이 아닐 거야. 저분 머리에서 나올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는걸.”

자연스럽게 벤스 모건을 개무시한 소하.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귀여운 얼굴의 홍보팀장에게 향한다.

“역시, 에밀리아 씨죠?”

“그, 그렇긴 한데···. 정말 재미있으셨나요?”

“당연하죠! 이건 대박 날 거라니까요. 빨리 구단 SNS에 올리세요. 빨리!”

“···그래도 될까요? 사장님?”

아무리 소하가 구단 내에서 영향력이 강하다고 해도 최종결정권자는 브라이언.

당연히 그의 허가가 필요하다.

“···.”

브라이언은 잠시 고민하다가 싶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후유···. 알겠습니다. 감독님이 이렇게 강력하게 추천하니 어쩔 수 없군요. 다만, 이건 감독님께서 추진하신 겁니다?”

“그럼 저야 고맙죠.”

또다시 면피를 시도하는 브라이언이었지만 소하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당연히 대박이 날 작품이었으니까.

그리고 소하의 예상을 틀리지 않았다.

하루 만에 조휘수 50만 돌파.

이달의 영상으로 크게 알려지며, 포츠머스 FC 이름을 세계 곳곳에 널리 퍼뜨렸다.

물론, 소하는 탕비실을 턴 죄가 드러나 비품을 빼돌린 죄로 경위서를 써야 했지만 말이다.

< 072화. 에밀리아 vs. 포츠머스.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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