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59화 (59/306)

< 059화. 휴가. (5) (수정) >

1.

평화롭던 집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그리 좁지 않은, 솔직히 중년 여자 혼자 살기에는 넓은 40평의 단독주택.

하지만, 건장한 운동선수 다섯과 키가 큰 여성 한 명이 들어서자 고시원같이 좁은 느낌마저 든다.

“여기가 감독님의 집이군요.”

“호오. 화초도 많고 뭔가 단아한 분위기네요.”

“안락한데요.”

“조금 좁을지도?”

인사는커녕 남의 집에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품평부터 하는 모습에 소하의 얼굴이 악귀처럼 변한다.

“새끼들아, 대가리 박고 인사부터 해라. 이쪽은 내 어머니시다.”

소하가 눈을 부릅뜨며 명령하자 선수들은 움찔거리며 깍듯한 자세로 인사를 한다.

“죄송해요. 전 조쉬 킹이라고 해요.”

“안녕하십니까.”

영국에는 없는 문화인 폴더 인사!

그간의 주입식 교육이 제대로 먹힌 증거였다.

“다들 아는 얼굴이네. 차라도 한잔 내올 테니까 저기 탁자에 모여 앉으렴.”

소하의 어머니는 유창한 영국식 영어로 선수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선수들이 의외로 놀란다.

“오. 영어 잘하시네요?”

“허.”

조쉬 킹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치는 소하.

“하. 넌 진짜 뇌도 근육이냐? 영국인이랑 결혼하신 분이 영어를 못하겠어? 뭐···. 오랜만에 사용하시는데도 녹슬지 않은 건 의외지만.”

한국에 돌아온 뒤로 영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거늘. 근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사람의 바이브가 아니다.

“앉아서 이야기나 하자꾸나.”

금세 8인분의 차를 내오신 소하의 어머니. 자연스럽게 젊은이들을 이끈다.

“호호. 그나저나 여사님은 영어를 정말 잘하시는군요?”

“이거 왜 이래? 나 케임브리지 나온 여자야.”

“정말요? 저랑 동문이셨군요!”

두 여성은 금방 친해졌다. 우연히도 동문이었기 때문.

사실, 소하의 어머니는 상당한 엘리트였다. 영국의 한 남자에게 코가 꿰이기 전까진 말이다.

지금도 별다른 직장이 없이 가정주부로 사는 것도, 소소하게 투자하며 수익을 낸 덕분이다.

“감독님 저희 보니까 좋죠?”

“아니. 그냥 꺼져.”

“너무하시네요.”

풀이 죽은 조쉬 킹은 소하의 어머니에게로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한다.

“감독님이 너무 나빠요.”

“네가 나쁜 짓을 했겠지. 우리 아들은 착한 사람한테 못되게 굴 애가 아니야.”

“···.”

본전도 못 찾았다.

“하하하. 역시 감독님 어머니셔.”

“호호호. 감독님의 기질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거 같군요.”

순간 웃음이 넘치는 소하의 집.

그렇게 그들은 한가한 주말 오후에 한가한 차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2.

“여자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가서 놀고 오세요.”

“그래, 날씨도 좋은데 바람이라도 쐬고 와라.”

순식간에 급속도로 친해진 두 여성.

합이 아주 잘 맞는다.

바람이야, 창문을 열어놔도 쐴 수 있지만, 집주인의 명령에는 거절할 순 없는 법. 나가라면 내가 가야 한다.

“가자. 평균적인 한국 남자들이 노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이게 진정한 문화 체험이지.”

호기롭게 외친 소하.

그런 그가 선수들을 이끌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PC방.

취미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 이들이 같이 즐길만한 건 역시 게임이 최고 아니겠나. 게다가 한국문화를 알려주기에도 딱 좋다.

하지만,

“머나먼 극동아시아까지 왔는데 게임방에 데려가는 건 어른으로서, 감독으로서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교육적인 장소가 어떻겠습니까. 저희 둘을 제외하면 모두 십대 청소년이니까요. 게임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할 나이입니다.”

젊은 꼰대 잭 해리슨.

모범생 케빈 도슨.

둘은 여지없이 반론을 제기하며 거부 의사를 내비쳤다.

‘후후. 역시 예상대로군.’

히죽. 썩은 미소를 짓는 소하.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태도다.

하기야, 소하가 누구던가. 선수들 자신보다 선수를 잘 아는, 말 그대로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앉은 인물.

미리 준비한 궤변을 술술 읊는다.

“혹시 너희들 그거 아니? 한국은 E-스포츠 초강국이란 사실을?”

“유명하죠!”

고개를 끄덕이는 선수들.

E-스포츠가 발족한 지는 상당한 시간이 지난 시점. 아직 젊은 선수들은 당연히 이 사실을 알았다.

“왜 초강국일까? 바로, 한국에는 ‘라 마시아’가 동네 곳곳, 아니. 한 블록마다 존재하기 때문이야.”

축구계에는 가장 유명한 유소년 육성기관이 존재한다.

바로, ‘라 마시아 데 칸 플라네스.’

줄여서 ‘라 마시아’라고 불리는 FC바르셀로나의 유소년 육성기관이다.

월드 클래스 선수를 줄줄이 배출한 전설적인 유소년 육성기관!

그 ‘리오넬 메시’와 ‘세 얼간이’라고 불리는 차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세르히오 부스케츠가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의 PC방은 다른 곳과 달라. E-스포츠의 유망주들이 크는 곳이라고.”

“호오.”

“즉 이건 단순히 노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지.”

“알겠습니다. 감독님. 역시 마냥 아무 생각 없이 저희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었군요. 휴가 중에 사적인 모임을 했음에도 저희를 위해 한국의 유소년 육성법을 경험하게 도와주시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케빈 도슨과 잭 해리슨이 눈을 빛내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감탄했다는 표정이다.

‘잘 넘어갔으니까.’

소하는 조금 양심에 찔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고 무리를 이끌고 상가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PC방으로 들어간 소하와 일당들.

음침할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밝고 화사한 커피숍과 다를 바 없는 모습에 입을 떡 벌린다.

“와. 여기 IGR(Internet Game Room)이 맞나요? 저쪽에서 요리도 하는데요?”

“호오. 한국의 게임룸은 이렇게 생겼군요. 과연, E-스포츠 강국다운 면모입니다.”

“훌륭합니다. 유흥업소라고 판단한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역시. E-스포츠의 강국에는 이유가 있었어. 이런 곳에서 게임을 하면 실력이 늘 수밖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자리에 앉는 일행. PC방의 손님들은 한국인이 하나도 없는 기묘한 파티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큰 신경을 쓰지 않고 게임에 몰두한다.

‘역시. 이래서 좋아.’

소하는 예상이 또다시 맞아떨어지자 다시 한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그들이 시작한 게임은 당연하게도 리그 오브 협곡.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게임이었으니까.

“전 게임을 할 줄 모르니 인터넷이나 하겠습니다.”

잭 해리슨이 빠지자 정확히 5인 파티가 구성된다. 그렇게 지인 아이디를 빌려 시작한 5인 파티 일반 게임.

“너무 쉽네. 한국 서버 수준이 생각보다 떨어지네요.”

“감독님, 갱 좀 자주 오세요!”

“시끄러워. 툭하면 정글 찾네.”

“역시 나랄까···?”

“흐음. 냇이랑 할 때는 맨날 졌는데···. 게임도 이겨야 재미있군요.”

5명의 협곡 유저들은 거침없이 연승행진을 이어나간다.

떠오르는 천재 감독답게 정글을 누비며 정확하고 과감한 명령을 내리는 소하.

필드의 괴물답게 상단 전장에서 상대 팀과 두려움 없이 1대1 승부를 펼치는 조쉬 킹.

넘버 10에 걸맞게 중앙 전장에서 팀의 척추를 담당하는 델리 알리.

장기인 중장거리 패스처럼 원거리 딜러로서 먼 거리에서 데미지를 누적하는 칼빈 필립스.

최후방 수비수답게 서포터로서 팀의 궂은일을 도맡는 케빈 도슨.

그야말로 축구 경기장에서 보여주던 그들과 놀랍도록 똑같은 모습이다.

처음 호흡을 맞춰 보지만 흡사 수년간 손발을 맞춰왔던 ‘팀’으로서의 강력함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들의 연승행진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

하지만.

소하의 표정은 썩 좋지 않다.

‘새끼들이 하라는 훈련은 하지 않고 게임만 했나? 왜 이렇게 잘해?’

특히나 주의할 인물은 델리 알리.

이 선수는 훗날 축구보다 게임을 잘하는 스트리머로서 유명해졌으니까.

‘이번 시즌 행동강령에 추가할 목록이 생겼군.’

마음속으로 선수들이 질겁할 흉흉한 계획을 세우는 소하.

하지만, 지금은 휴가. 이 일은 나중에 터뜨리기로 작정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3.

녀석들을 데리고 부천시 상동의 번화가를 여기저기 누비고 다녔다.

이젠 내가 휴가 중인 감독인지, 관광회사 가이드인지 구분이 어렵다.

PC방 이후로 프랜차이즈 카페, 코인 노래방, 플스방, 인형뽑기방 등등.

한국의 젊은 남성들끼리 갈만한 장소는 모조리 들렸다.

물론, 온종일 현성백화점 뒤편을 돌아다녔는지라 슬슬 알아보는 사람들이 속출했음은 당연지사.

“와. 저 사람 성소하 아니야? 그 포 어쩌고 하는 축구 클럽의 감독.”

“요즘 TV에 자주 나오던데. 실물이 더 잘생겼다.”

“한국인 최초의 천재 감독이라던데.”

“생각보다 소탈하네. 비싼 데서 놀 줄 알았는데. 마음에 들어.”

이미지 메이킹까지 성공!

그리고 슬슬 선수들을 알아보는 사람들까지 나온다.

“어? 설마 저 외국인들 포츠머스의 축구선수들 아니야?”

“사인 요청하면 받아주려나?”

“생각보다 다들 훨씬 덩치가 크구나.”

“같이 사진 좀 찍어주세요!”

어디에서나 축구팬들은 존재하는 법. 나에게 항상 팬서비스를 잘하라고 주입받은 녀석들은 친절하게 팬서비스에 응한다.

그래 바로 그거야. 우리가 먹고사는 건 다 팬들 덕분이라고.

‘꽤 재밌는 하루였어.’

귀찮긴 했지만 혼자 있었다면 집에만 처박혀 있었을 텐데. 모처럼 청춘을 즐기는 거 같아 피곤함은 없다.

다만, 코인 노래방에서 영국 국가를 부르던 잭 해리슨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자, 그럼 마지막 코스로 가자.”

“어딘가요?”

한껏 21세기 한국의 문화를 즐긴 녀석들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낸다.

“길거리 음식을 먹어 봐야지 않겠어?”

“호오. 길거리 음식이라면요?”

“떡볶이와 순대다!”

“그게 뭐죠? 일단 가보죠!”

지금까지의 여정이 다들 마음에 들었는지 반론은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이겨내며 도착한 길거리 떡볶이집.

“응? 한국인이 하나도 없네.”

떡볶이집 아주머니는 갑작스러운 외국인 파티의 등장에 조금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음식을 내놓으신다.

“오우. 빨간데요?”

“매운 거 아니에요? 저, 잘 못 먹는데.”

“훗. 일단 먹어 봐.”

미래를 아는 나에게는 참 재미있는 모습이다.

일단 지금은 아닐지라도 훗날엔 월드 클래스 선수들.

각자 몸값만 해도 최소 3,000만 파운드다. 비싼 선수는 5,000만 파운드 이상이겠지.

이 금액은 한화로 400억에서 800억짜리 라는 거다.

한 마디로 ‘걸어 다니는 강남 빌딩.’

그것도 작은 상가건물이 아니라 중형빌딩 정도는 되겠지.

“아뜨뜨뜨. 너무 뜨거워!”

“매, 매워!”

저 꼬락서니 봐라. 길거리에서 파는 1인분에 천 원짜리 떡볶이를 처먹으면서 오두방정을 다 떠는 저 모습을.

저런 놈들이 무슨 수백억짜리 몸값을 책정받는다는 건지.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너무 매운데요!”

“기어코 저희에게 복수하시는군요! 너무해요.”

“···.”

찔끔. 어떻게 알았지?

외국 놈들이 먹기엔 좀 자극적이었으려나. 그럼 감독이 된 도리로서 먹을 만하게 바꿔줘야겠지.

“좀만 기다려봐. 내가 그거 너희들이 먹을 만하게 바꿔줄 테니까.”

난 재빨리 마트에 들어가 소스 하나를 사 왔다. 이름하여, 크림소스.

거침없이 크림소스를 떡볶이 접시에 들이붓자 아주머니가 한소리 한다.

“에구 총각. 지금 떡볶이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맛있게 만드는 거죠.”

자신의 요리를 망치는 모습에 도끼눈을 뜨셨지만 무시했다. 이게 진짜 맛있는 거거든.

“오우. 이젠 정말 맛있어졌는데요?”

“와. 역시 감독님입니다.”

아직도 떡볶이의 매움에 오만상을 쓰지만 제법 입맛에 맞았는지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는다.

이게 바로 매운맛이지. 이제 밍밍한 영국 요리는 싱거워서 못 먹을걸? 후후.

“그나저나 한국은 독특하네요.”

“뭐가?”

“해가 떨어져 밤이 되었는데도 혼자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조금 어색하네요.”

케빈 도슨의 말에 나머지 선수들도 격하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영국은 밤거리 혼자 다니기엔 조금 무섭지.”

밤에 혼자서 골목길을 걸어 다닌다?

그냥 불량배들한테 팬티 빼고 전부 다 상납하고 싶다는 이야기다.

“중심부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여자 혼자 다니기엔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 다른 건 몰라도 치안이 정말 좋거든.”

“좋은 나라군요.”

“그런 쪽에선 훌륭하지.”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4.

“흐음···. 이게 맛있다고?”

소하와 선수들이 자리를 뜬 직후.

떡볶이집 아주머니는 슬쩍 주위를 살펴보더니 소하가 크림소스를 들이부은 접시를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 본다.

그리고.

“!!”

두 눈을 부릅뜨며 새로운 맛의 세계를 깨달아버린다.

‘그래. 이거야. 부드러운 매콤함! 이걸 제대로 된 음식으로 만들어보자.’

훗날 대유행하게 되는 로제 떡볶이가 수년이나 일찍 탄생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5.

선수들을 서울에 잡은 호텔로 돌려보낸 뒤.

선수들을 보내고 나니, 집안이 좀 휑해진 느낌이다.

‘그럼 이제 쉬어 볼까.’

어머니도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피곤하셨는지 잠에 빠져든 지 오래.

나도 그렇게 돌아다녀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휴가, 휴식. 이런 거를 누리기엔 아직 이룬 것이 없다.’

문득 드는 생각.

주위에서 마구 비행기를 태워 준다고 잠시 초심을 잃었나 보다.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쉴 시간은 아직 이르지 않을까?

‘선수들을 위해서라도 아직은 쉴 때가 아니야.’

한국까지 찾아오면서 날 만나러 와주는 밉살스러운 녀석들. 그 녀석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날 위해서라도.

‘나도 남은 휴가는 반납해야겠군.’

조금 이르지만, 영국으로, 포츠머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인가보다.

‘자유계약으로 풀리기 전에 빼돌릴 선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내 짧고 바쁘기만 했던 휴가는 끝이 났다.

< 059화. 휴가. (5) (수정)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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