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58화 (58/306)

< 058화. 휴가. (4) >

1.

진정한 휴가를 맞이하기엔 꽤 많은 시간이 필요로 했다.

재벌가의 냄새를 머리털 나고 처음 맡은 날부터 며칠 뒤.

-감독님···.

기술 재무부장, 알버트 위버 씨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지만 일단 잡아 떼줘야 동방의 예의겠지.

“아이고. 전 한국에 잘 도착했어요. 문안 인사를 위해 국제전화를 거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참으로 감동적이네요.”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역시 씨알도 먹히지 않는군.

그 온화한 위버 씨가 반쯤 정신이 나간 목소리라니. 후후. 성취감이 드는데?

-가뜩이나··· 부서 정리한다고 바쁜데, 거기에 스폰까지 물어오시다니···. 정녕 저희를 일에 치여 죽게 만들 작정이시군요?!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거죠. 위버 씨 월급은 땅을 파면 나오나요?”

-그건 아니지만···.

“잘 풀리면 성과금도 나갈 텐데 칭찬해 주질 못할망정. 실망이 매우 크네요. 이거 구단주님한테 전해도 되죠?”

-저, 절대 안 됩니다!

버럭! 내 장난스러운 협박에 위버 씨는 화들짝 놀라며 제지한다. 하기야, 월급쟁이한테 성과금을 자른다는 건 사형선고와 같은 의미.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막아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요. 그래서 얼마 부르던가요?”

-크흠. 노, 놀라지 마십시오. 700만 파운드입니다!

호오. 700만 파운드라. 그러니까 한화로 100억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리그1 수준을 아득히 초월한 엄청난 금액.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중하위권 정도 되는 액수다.

후후. 이번 이적시장에 숨통 좀 트이겠어. 구단 운영비를 제외하더라도 상당한 금액이 남을 테니까.

“그게 다예요?”

-···설마요. 심지어 장기 계약입니다. 금액 상승은 없지만 5년이나 됩니다. 그리고 계약만료 시 우선권을 요구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네요. 계약 기간은 조금 길지만.”

끽해야 3년 정도로 생각했거늘.

굉장히 위험부담이 큰 계약을 제시한 거다. 만약, 우리 팀이 프리미어 리그로 가지 못한다면 현성그룹 최악의 흑역사로 남을 테지.

‘하지만 5년이라면···. 내가 어느 정도 두각을 내거나 꿈에 근접했을 무렵.’

프리미어 리그의 소위 빅6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스폰서한테 받는다.

가장 많이 받는 구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거의 오천만 파운드에 달할 정도다.

여기에 빅6의 말석인 토트넘이 2,000만 파운드 정도 받으니 얼마나 큰 금액인지 감이 올 거다.

‘만약 포츠머스가 새로운 빅6에 자리에 앉는다면 30% 정도로의 금액으로 재미를 본다는 이야기지.’

이래저래 서로서로 이익인 계약이다.

“알아서 잘 처리하세요. 거절할 생각은 없으시리라 믿을게요.”

-그럼요. 이런 계약을 누가 거절하겠습니까? 그 외에도 잡다한 스폰 계약 및 경기장 내 광고 계약도 들어왔는데 들어보시렵니까?

허허. 이 사람이. 나 지금 휴가 중이라고.

자기가 몸을 담근 똥물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치졸한 수작질이로군.

“전 휴가증이거든요? 한 번만 더 별거 아닌 거로 전화하면 구단주님에 다 이를 거예요.”

-그, 그것만은···!

“그럼 이만!”

뚝. 이제 좀 쉬자 제발.

하지만 내 간절한 바람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MBS입니다. 이번에 방송에 나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녁 마당 PD입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함께할 영광을 주실 수 있을까요?”

“TVM 시사 코너입니다. 요즘 한참 화제의 인물인 성소하 감독님을 모시고 싶은데요.”

엄청난 수의 방송 출연 요청.

진짜 스타들만 나간다는 주말 예능에서는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나름 인기인 아니겠나.

일정에 맞춰서 대부분의 출연 제안에 응해줬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KBC의 제안은 모조리 거절.

난 한번 마음먹으면 엔간해선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거든. 사람 잘못 건드렸어.

방송 출연이 전부가 아니었다.

광고도 제법 짭짤한 수입이 아니던가.

“이번에 저희 브랜드에서 캐주얼 슈트를 하나 발매했는데요.”

“혹시 중소기업 축구화 광고도 가능할까요···?”

자동차나 아파트 같은 최고의 광고는 아직은 없었지만, 수입이 참으로 달달하다. 순식간에 내 주머니는 흘러넘치기 시작할 정도!

“후후. 아들 하난 잘 키웠어.”

제일 노난 건 우리 어머니다.

수입의 절반이나 드린 덕분에 매일, 삼시 세끼 밥상이 휘황찬란해졌다.

말 그대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주시는지라 밥 먹는 시간이 가장 기다려진다.

이거야말로 최고의 투자 아닐까?

하여튼 상당히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런데도 방송 및 광고 제안은 끊이질 않고 계속 들어온다.

‘후우. 스마트폰을 한 대 더 장만해두길 잘했어. 그래도 너무 귀찮으니 에이전트가 필요하긴 한데···.’

이런 귀찮은 일들을 모조리 대신 처리해주는 직업이 에이전트다.

가격부터 시간까지 모조리 조정해주니까. 영국으로 돌아가면 한번 알아봐야겠다.

상상외로 너무 요청이 많거든.

이러다가 프리미어 리그 승격이라도 하면 대통령까지 부르는 거 아니야?

귀찮은데. 돈도 벌지 못하고.

‘솔직히 이 정도 인기를 끌 줄 나도 예상하지 못했어.’

그간 열심히 끌어왔던 어그로의 효과가 제대로 나왔다.

그리고,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잉글랜드 감독.’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타이틀에 더해, 큼큼. 잘생긴 20대라는 점은 상당한 세일즈 포인트가 됐나 보다.

‘그럼 이제 좀 쉬자.’

당분간 전화기를 꺼둘 생각이다. 돈은 벌 만큼 벌었고 모조리 코인에 투자해 두었으니까.

근데, 왜.

이 망할 비트코인은 가격이 그대로지?

2.

소하가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어언 2주.

화창한 초여름날씨가 찾아온 부천시 원미구 상동은 언제나 그렇듯 평화롭기 짝이 없다.

베드타운으로 유명한 도시.

학교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도시.

때문에, 다른 곳은 몰라도 신중동과 상동은 큰 사건 없이 조용하기 짝이 없는 동네다.

하지만. 그것도 어제까지의 일.

요상한 무리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며 일대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

“여기가 감독님의 고향!”

“아파트가 엄청 많아! 우와.”

“뭔가 SF 도시 같은데?”

“상당히 깔끔한 도시로군요.”

“그래도 담배꽁초는 상당히 많습니다. 좀 주우면서 가야 하겠습니다.”

“오호홋. 이런 주거단지로 해외여행을 오는 것도 재미가 있네요.”

5남 1녀의 기묘한 조합.

게다가 매우 놀랍게도 전부 다 외국인이다. 언뜻 보면 이태원에 온 듯한 착각을 줄만큼의 기괴한 인원 구성!

베드타운 성격이 강한 부천의 특성상, 외국인들이 이렇게 돌아다니는 건 정말 보기 드문 광경.

덕분에 시민들의 이목을 한곳으로 집중시켰다.

“뭐야? 저 사람들. 전부 다 외국인이야. 흑인 3명에 백인 3명.”

“와. 여자 비율 봐봐. 다리 길이가 무슨. 모델 아니야?”

“미국인인가?”

“영어 같긴 한데···. 발음이 조금 독특한 거 같기도 하고.”

“영화 촬영하나?”

웅성웅성. 그들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부 다 시선을 떼지 못한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해?”

“상일 하이스쿨을 찾아야 하는데요.”

“학교가 너무 많아.”

그들은 잠시 길을 잃고 방황하는 기묘한 무리. 이때, 가장 근육질인 흑인 한 명이 힙한 모자를 매만지며 나선다.

“보스가 그랬어. 모르면 물어보라고.”

그러자, 동료들이 한소리 한다.

“그렇게 맨날 보스한테 생각 없이 질문했다가 혼나기만 했잖아.”

“넌 한국말 할 줄 모르잖아.”

“보스에게 배운 한국말을 하면 안 됩니다. 알아보니 험한 말이더군요.”

동료들이 우려가 한가득 섞인 눈빛을 보내며 질문을 하려는 남자를 제지한다.

“걱정하지 마! 요 며칠간 좀 배웠으니까.”

“하아···.”

“한번 믿어봅시다. 킹도 이제 어엿한 19세예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들. 걱정이 절반 이상의 동의에 말을 꺼낸 흑인은 히죽 웃으며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춘 동네 사람에게 다가간다.

건들건들. 쩔렁쩔렁.

갱 같은 불량한 걸음걸이!

그와 함께 목에 주렁주렁 매단 쇠사슬 같은 목걸이가 출렁거린다.

백번 양보해도 절대 친근한 이미지는 아니다. 심지어 그는 186cm의 근육질.

평범한 한국인이라면 겁부터 집어먹을 만한 외관이다.

“헤이! 상일 하이스쿨 어뒤이써요?”

“히익!”

후다닥. 재빨리 사라지는 동네 사람.

뿐만 아니라 슬쩍슬쩍 훔쳐보던 다른 사람들도 모조리 도망친다.

“보스, 보스 그러던데 갱인가 봐!”

“마피아 일지도몰라. 백인도 섞여 있잖아.”

“한국도 외국인 범죄조직으로부터 안전하지 않구나···!”

“DEA와 블러드갱인가?!”

순식간에 주위는 휑해졌다.

“···잘하는 짓이다.”

“넌 앞으로 깝치지 마.”

“걸음걸이가 매우 불량합니다. 조만간 걸음 교정을 시켜드리겠습니다.”

“그 요상한 목걸이는 호텔에 두고 오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호호호홋!”

배를 잡고 미친 듯이 웃는 여성 한 명과 타박하는 나머지 남자들.

질문을 건넨 흑인 청년은 굉장히 풀이 죽는다.

“너무해···.”

“후훗. 너무 상심하지 마요. 제가 길을 아니까요.”

“왓 더? 그럼 왜 질문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뒀어요?”

“그야···. 재밌을 거 같으니까요?”

여성은 생긋 웃더니 발랄한 걸음걸이로 앞장선다.

“저 앞에 보이는 거대한 고가 도로가 바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에요. 저길 넘어가면 상일고등학교가 나올 거예요.”

“정말 크다.”

“주택단지를 가르는 고가 도로라니. 역시 한국은 사이버 펑크야.”

“포츠머스하고는 정말 달라.”

한 마디씩 던진 일행들은 천천히 여성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이 거대한 고가 도로만 넘는다면.

그들의 보스의 본가가 멀지 않았다.

3.

불행의 씨앗이 점차 점차 숨통을 막으려 다가오는 그때.

소하는 휴가가 아닌 휴가로 인한 피로로 한참 침대 위에서 깊은 잠을 청하는 중이다.

“도로롱···.”

종종 나오는 코골이가 아니었다면 송장이라고 착각할 만큼 깊이 잠들었다.

어찌나 피곤했는지, 해가 중천이 되도록 일어날 생각이 없을 정도.

하기야, 그간 2주는 정말 피곤하긴 했다. 1년 동안 포츠머스에서 번 돈보다 요 2주에 더 많이 벌었으니까.

‘녀석. 얼마나 피곤했으면.’

소하의 어머니도 이 사실을 매우 잘 아는 인물. 평상시였으면 잔소리 폭풍과 함께 맹렬한 등짝 스매싱으로 잠에서 깨워 밥을 먹였겠지만, 오늘은 그냥 내버려 둔다.

그렇게 평범한 가정집의 평범하고 평화로운 주말을 맞이하는 소하네 집.

하지만 이 평화는 폭풍의 눈이었을 뿐이었다.

-띵동. 띵동.

“음? 누구지?”

찾아올 사람은 없다. 남편과 사별한 뒤 은거에 가깝게 살아왔으니까. 종종 못난 아들이 몰래 찾아오긴 했지만, 지금은 산송장이 된 상태.

소하의 어머니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인터폰의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다.

“음?! 누, 누구지?”

-헤이, 요. 여기 보스집 맞나요우?

“···.”

그녀는 후다닥 소하가 깊이 자는 중인 방으로 달려들어 가 아들의 등짝을 후려친다.

-짝!

작렬하는 강스파이크!

“으악. 뭐, 뭐야?! 브, 브라이언 이 씹새끼가 드디어 물리적인 보복을 하는구나! 개 같은 대머리 새끼!”

갑작스러운 충격에 잠에서 깬 소하는 거친 욕설 퍼부으며 눈을 비빈다.

“브라이언이 누구야? 얘는 참. 뭔 자다 깬 애가 이렇게 욕을 하니?”

“뭐, 뭐야. 엄마였어요? 저 깨우지 말라니까요. 깜짝 놀랐네.”

“지금 큰일이 났어!”

“뭔데요? 마이너스 통장에 빵꾸라도 났어요? 제가 준 돈으로 때워요.”

독두꺼비같이 볼을 부풀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소하. 모처럼 맞이한 꿀잠을 날린 게 불편한가 보다.

“뭔 헛소리니! 이 자식아. 지금 우리 집에 갱이 찾아왔다고!”

“에? 무슨 소리예요, 엄마. 아직 꿈인가···.”

“한 대 더 맞아야 잠이 깨겠구나?”

손을 번쩍 치켜드는 소하의 어머니.

소하는 그 동작에 손사래를 치며 잠결에서 벗어난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한국에 무슨 갱이에요, 여기가 보스턴 뒷골목도 아니고.”

“진짜라니까! 흑인인데 옷차림이 아주 그냥 영화에서 보던 갱들이랑 똑같아.”

“흑인이요···?”

“그래! 헤이, 요. 거리면서 여기 보스의 집이 맞냐고 물어보더라고.”

“···하아.”

소하는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한국의 민속놀이와도 다름없는 모 게임의 후속편 트레일러에서 나오는 대사가 절로 떠오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는 ‘놈’들일 테니까요.”

“그, 그러니?”

“네···.”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현관으로 향하는 소하.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힌다.

그러자.

“와! 감독님!”

“보스! 보러왔어요!”

“너무 늦게 왔죠?”

“이 시간에 일어나시다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셔야 합니다. 건강하게 지내시려면요.”

“손님을 맞이할 때는 최소한 씻고 맞이해야 하는 법입니다. 어서 가서 씻고 오십시오.”

“호홋. 너저분한 감독님도 멋지세요.”

조쉬 킹, 델리 알리, 칼빈 필립스, 케빈 도슨, 잭 해리슨. 그리고 나탈리 도슨.

환하게 웃으며 반기는 그들의 모습을 뚱하게 바라보는 소하. 제발 꿈이길 바라며 허벅지를 꼬집는다.

물론, 매우 아팠다.

< 058화. 휴가. (4) > 끝

ⓒ 블라님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