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5화. 휴가. (1) >
1.
“구단주님의 작은 선물입니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가시는데, 편하게 여행을 즐겨 주십시오.”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 5분 전.
기술재무팀장의 알버트 위버 씨가 비행기 표를 건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위버 씨는 부럽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구단주의 선물이 부러웠고,
둘째는 휴가를 떠나는 내가 부러웠을 테니까.
‘본격적인 덩치 불리기가 시작되었으니···. 고생 좀 하라고 밥벌레 양반들.’
프런트의 중역들은 대부분 휴가가 잘렸다. 이제 리그1로 승격한 현실.
그간 강등으로 인해 통폐합한 부서들을 원래대로 나눠놓기 위해서다.
기술팀과 재무팀은 다시 분리될 것이며,
새롭게 부서들이 신설될 것이고,
몇몇 부서는 1팀, 2팀 등으로 확대될 것이다.
즉, 조직개편이 시작된 것.
이 말은 새로운 관리자와 사원들이 대거 들어온다는 이야기였다.
휴가에서 복귀한다면 여러 가지 사건들이 날 기다리고 있겠지.
잠잠하던 브라이언 새끼도 이 틈을 타서 다시금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수작질을 부릴 테고.
‘아휴. 머리야. 그렇다고 반대할 수도 없는 노릇. 솔직히 이번 조직개편 및 확장은 꼭 필요하다. 나한테도 나쁘지 않아.’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작업이다.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
지금처럼 구멍가게식으로 운영하다가는 암만 나와 선수들이 날뛰어도 펑크가 날 테니까. 거듭 말하지만, 선수단과 프런트가 모두 잘해야 진정한 강팀이 된다.
물론, 지금 가진 내 막강한 구단 내 영향력이 조금 줄어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손에 들린 티켓은 ‘성적이 유지되는 한’ 그럴 일은 없을 거란 보장이자 믿음이었다.
‘일등석이라니. 한 2,000만 원쯤 하지 않나? 머리털 나고 처음 타보네.’
선수 열 명분의 주급을 감독의 귀향 행 비행기 표로 들이붓는 과감함!
이것이야말로, 구단주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증거였다.
‘후후. 브라이언. 그 대머리 새끼의 표정을 전 세계 사람들이 봤어야 했는데. 아쉬워. 참 아쉬워.’
비행기 표를 받을 때 우연히 옆을 지나가던 브라이언. 대화의 내용을 들은 녀석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눈빛은 달랐다.
우르르 쾅쾅. 지진, 혹은 폭풍이 몰아친 듯 흔들리는 동공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아 꼬셔. 개 같은 새끼. 배가 아파 뒤지겠지? 콱 그냥 뒤졌으면 좋겠네.
“오. 이것이 파스트 클라스의 위엄인가. 줄을 안 서도 되네.”
탑승 시간이 되자, 길고 긴 탑승 대기 줄을 무시하고 제일 먼저 입장했다. 돈의 맛이란. 너무 달다. 당뇨병 올 거 같아.
그리고 드디어 입장한 12개의 좌석을 가진 일등석. 아니, 좌석이 아닌 침대가 놓여있다. 의자라고 하기엔 너무 크다.
‘역시 사람이 별로 없군.’
예상대로 일등석은 텅텅 비었다. 지금은 5월. 한참 비수기일 때 아닌가. 마침 오늘은 사업가들도 비행기를 타지 않는 날인가보다.
이래저래 감독이나 선수는 매우 고된 직업이다.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주말도 없이 일해야 하며, 일 년 동안 쉬는 날은 딱 한 달.
그것도 머릿속에는 항상 일을 염두에 두며 쉬어야 한다.
아버지, 아들 직업을 잘못 점지하신 거 아니에요?
‘한 명만 있네. 내 촌놈 티를 볼 사람이 적어서 나쁘진 않네.’
이렇게 고급스러운 대중교통은 처음인지라. 솔직히 인터넷으로 알아보지 않았으면 신발 벗을 뻔했다.
‘근데 저 사람은 왜 자꾸 야리지?’
처음 입장했을 때부터 자리에 앉는 이 순간까지 느껴지는 오묘한 시선. 나보다 먼저 이 고급스러운 장소를 방문한 한 승객의 눈길이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유일한 승객이기도 하다.
‘뭐 하는 놈이야?’
동양계로 추정된다. 중국인인가? 저렇게 선글라스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너무나 노골적으로 쳐다보자 더는 버티기가 힘들다.
“저기요, 왜 자꾸 사람을 쳐다봐요? 잘생긴 미남 처음 봐요?”
내가 또 누군가. 인내심이라고는 개 코딱지만큼도 없는 28 청춘 아니던가. 오랜만에 자본주의의 맛을 음미해야 하니, 저런 싹튼 감자 같은 존재는 미리 쳐내야 인지상정.
“···후후.”
남자는 내 거친 발언에도 불구하고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이로써 한 가지 분명해졌다.
저 인간은 날 안다는 것.
그러지 않고서야 내 거친 발언에도 여유롭게 웃음을 지을 리가 없다.
저벅저벅.
남자는 이제 아예 작심한 듯 내 쪽으로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성소하 감독님.”
정말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인사를 건네는 남자.
내 이름을 너무나도 정확한 원어민 발음으로 불렀다.
아아, 성소하라는 이름을 이렇게 정확한 발음으로 불러주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야.
“···헉.”
그야 당연했다. 그는 한국인이었으니까.
그는,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실제로는 처음 뵙네요. 전 유해진이라고 합니다. 아실진 모르겠지만.”
정말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는 남자의 이름은 유해진.
그러니까, 그 유해진이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주역!
한국인 최초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해서 수년간 활약했던 대한민국 축구의 레전드!
해외 축구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그 선수였다.
“앗. 아, 안녕하세요.”
매우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이 사람을 여기서 우연히 만나게 될 줄 정말 몰랐으니까. 심지어 내게 먼저 아는 척을 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배우 박지성과 닮은 꼴로 유명한, 한국 축구 최고의 아웃풋을 여기서 만나다니. 감히 어떻게 예상할 수 있겠는가.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네요. 성 감독님.”
“아이고야. 과찬이에요.”
좀 전에 미남 운운하며 한소리 했었지만 유해진 선수임을 알고도 뻔뻔하게 나갈 순 없는 노릇.
“초면에 실례지만 성 감독님과 조금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그, 그럼요.”
거절 따위 개나 주라지.
가뜩이나 혼자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하기도 지겨웠는데 잘됐다.
“그럼 먼저 이야기하기 편하게 자리를 바꾸는 것이 좋겠군요.”
유해진 선수는 매우 익숙하게 자리 변경을 요청한다. 마치 자기 집 안방에서 리모컨을 돌리는 듯한 편안함!
역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선수답게 일등석 정도는 지겨울 만큼 타본 티가 난다. 나 같은 서민으로 친다면, 그냥 대중버스 타는 느낌이겠지.
“다행이네요. 오늘 일등석에 저희 둘밖에 없어서 쉽게 바꾸었습니다.”
“좀 휑하긴 하죠.”
내 옆자리로 옮긴 유해진 선수는 편안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저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승격에 성공하셨다죠? 그것도 리그2 최다승점을 세우시면서요.”
“아이고. 감사해요. 뭐 다 유해진 선수가 길을 터준 덕분 아니겠어요?”
“하하.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흠칫. 어떻게 빈말인 줄 알았지?
솔직히 내가 선수였다면 유해진 선수의 덕을 봤겠지만, 난 감독이라고.
감독질 하는 데 있어서 유해진 선수가 도움을 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모두 내 힘과 아버지의 후광 덕분이지.
매우 인성이 뛰어나고 스타 중의 스타지만, 구별할 건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감독님은 휴가를 떠나시는 중입니까?”
“네 그렇죠. 일 년 내내 달렸더니 힘들어서 죽겠어요. 엄마 밥이 그립더라고요. 역시 한국인은 밥심 아니겠어요?”
“하하. 맞아요. 런던이나 맨체스터에도 한식당이 많지만,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에 비교할 수준은 아니죠.”
오랜만에 한국인과 대화를 하니, 참 죽이 잘 맞아떨어진다. 역시 같은 나라 사람만큼 말하기 편한 부류도 없다.
일단 문화가 같으니까.
이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가자, 곧 비행기가 붕 뜨며 출발한다.
얼마간 비싼 포도주, 고급 요리와 승무원의 대단히 뛰어난 서비스라는 자본주의 맛을 즐긴 뒤.
유해진 선수가 볼일을 다 마치고서 다시금 입을 연다.
“그나저나 감독님이 이끄는 포츠머스는 상당히 매력적인 팀이더군요.”
“매력적이긴요. 제가 보기엔 맨유나 QPR이 훨씬 매력적이에요. 뭐···. QPR은 좀 아닐지도? 하하.”
선수 유해진의 가장 큰 오점이자 최악의 흑역사.
바로, Q.P.R.
그러니까 퀸즈 파크 레인저스 시절이다.
맨유에서 44억의 이적료로 QPR로 이적, 주장 완장까지 달았지만, 팀의 강등을 막지 못했다. 아니, 아예 강등의 원흉으로 지목되기도 했을 정도!
심지어 주장 완장을 시즌 도중에 빼앗긴 최악의 시절이었다.
그렇게 1년을 QPR에서 보낸 유해진 선수는 네덜란드의 PSV 에인트호번으로 임대 이적. 즉 지금의 유해진 선수는 네덜란드에서 뛰고 온 후였다.
“후후. QPR과는 썩 좋은 추억이 없죠.”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워낙 밑바닥 팀을 맡고 있는지라. 그런 상황도 부럽다는 뜻이었어요. 프리미어 리그는 꿈의 리그잖아요.”
“괜찮습니다. 하부리그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일 테니까요.”
이해심 넓은 유해진 선수는 다소 아픈 부분을 찌른 날 쉽게 용서해주었다.
“정말 아쉽군요. 제가 조금만 젊었다거나, 무릎의 상태가 좋았다면 감독님과 함께 축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앗. 정말요? 지금 바로 오셔도 상관없는데요. 지쳐서 토할 때까지 주전으로 기용해드리겠습니다. 후후.”
진심이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그것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초거대구단에서 7년을 뛴다는 건 정말 특별한 일이었으니까.
지금 우리 팀 선수들이 난다 긴다 하지만, 아직 눈앞의 대한민국 레전드의 실력을 따라가기엔 미흡하다.
암만 선발 출장 수가 적다고 해도 월드클래스 선수들과 한솥밥을 먹었던 경험은 따라잡기 힘든 자산이다. 심지어 얻어 낸 우승컵도 십수 개.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우승도 해본 선수가 잘한다.
유해진 선수가 우리 팀에 온다면 정말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 될 터.
비싼 몸값이 문제겠지만, 구단주 할배의 가랑이 밑을 개처럼 기어서라도 돈을 뜯어낼 거다.
“하하! 정말 솔깃한데요?”
“전 지금 진심이거든요?”
“충분히 진심이 느껴집니다. 솔직히 너무 뜨거운 진심이라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을 번복할 뻔했어요. 정말 흔들렸습니다.”
“···.”
“그래도. 아쉽지만 이번 결정을 번복하기엔, 너무나 많은 시간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힘들겠네요. 정말 아쉽습니다. 이건 정말이에요.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조금 일찍 감독님을 만났어야 했어요.”
유해진 선수는 정말 씁쓸한 표정으로 연신 사과를 거듭한다. 세상 체념한 표정이랄까. 혹은 모든 것을 내려둔 고승 같은 모습이기도 하다.
물론, 난 왜 이 위대한 대한민국의 전설이 이런 표정을 짓는지 안다.
‘은퇴 선언.’
선수로서 은퇴를 결정한 것.
24년간 해왔던 축구를 그만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아니, 조금은 이해가 된다.
나도 경질당했을 때 인생 전부를 빼앗긴 듯한 상실감을 느꼈으니까.
“은퇴··· 하실 작정이죠?”
흠칫. 잠시 무거운 분위기에 침묵에 빠졌던 나와 유해진 선수. 내가 입을 열자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한다.
“그걸 어떻게···.”
“아직 1년 차 애송이지만, 감독이잖아요? ‘선수’의 마음은 얼굴만 봐도 알아차려야 하는 직업이라는 건 잘 아실 거라 믿어요.”
“···후훗. 역시 뛰어난 감독의 재능을 가진 분이시네요. 퍼거슨 감독님도 마찬가지였어요. 대충 쓱 훑어보기만 해도 저와 동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짚어내셨죠.”
“위대한 분이시니까요.”
“네. 정말 위대한 감독이죠.”
그렇게 퍼거슨 감독의 이야기로 다시금 화기애애한 대화로 돌아갔다.
흠. 유해진 선수가 은퇴하고 뭘 했더라? 어쩌면 좋은 카드가 될지도 모르겠다.
2.
10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드디어 도착한 인천 국제공항.
짐을 찾은 나와 유해진 선수는 공항 출구에 잔뜩 모인 기자들과 매스컴을 바라보며 이별을 고한다.
“오늘의 즐거운 만남은 여기까지겠네요. 그럼 전 다른 쪽으로 빠져나가겠습니다.”
“네? 저 앞에 기자들이 저렇게 깔렸는데요? 미리 알리신 거 아니에요?”
내 물음에 유해진 선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상당히 재밌다는 표정.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거지?
“전 비밀리에 귀국한 겁니다. 즉, 제 최측근 말고는 아무도 모르죠.”
“···그럼 저 기자 양반들과 카메라는 왜 저기서 대기하죠? 뭔 연예인이라도 귀국했나요.”
“연예인이라. 그럴지도 모르죠.”
후후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 조만간 따로 연락하겠습니다. 그럼, 짧은 휴가, 부디 편히··· 즐기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다시금 정말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유해진 선수.
종종걸음으로 인파에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왔다! 왔어!”
“도착했다!”
“밀지 마! 밀지 말라고! 첫 질문은 내 꺼야! 쇼부 봤잖아?!”
“헛소리하지 마! 난 영국까지 가서 퇴짜맞고 온 사람이라고!”
우르르. 기자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나에게 돌진한다. 정확히는 내가 있는 방향이겠지. 뭐야? 내 뒤에 연예인이라도 도착한 건가?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그렇다는 건.
‘나한테 오는 거?’
아니. 왜? 아니지. 어떻게?
유해진 선수처럼 비밀리에 입국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았거늘. 잠깐. 이 표를 누가 줬더라···?
“성소하 감독님!”
“감독님 KBC에서 나온 윤성환 기자입니다. 질문 하나만 하겠습니다!”
“감독님! 한국인 최초로 잉글랜드 프로리그에서 승격을 이루어 내셨는데요!”
“감독님!”
“제발 한마디만!”
생각을 계속 이어나가기 힘들었다.
기자들이 3일간 굶은 멧돼지처럼 몰려왔으니까.
아, 편히 쉬긴 틀렸구나. 씨발.
< 055화. 휴가. (1)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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