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4화. 13-14시즌의 마무리. (2) >
1.
남은 6경기는 무난히 흘러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상상 이상으로 잘 흘러갔다.
다이스가 부상으로 빠졌지만, 그 자리를 스펜서 보이드가 기대 이상으로 잘 채워줬기 때문.
하기야, 쓰레기 자식이긴 하지만 원래 1군이었다. 저번 시즌 리그1 베스트에도 뽑힌 녀석이었고. 강등팀에서 리그 베스트에 뽑힐 정도면 실력 자체는 문제가 될 것이 없는 놈이다. 인성이 문제지만 말이다.
아마도 평범한 감독이라면 선발명단에 녀석을 무조건 박고 시작했겠지.
‘하지만 이 몸은 평범하지 않은 몸. 남은 6경기를 4승 1무 1패로 마무리 짓다니. 내가 봐도 놀라워.’
우승했다고 최다 승점 기록을 포기할 수 있겠나. 우승으로 해이해질 법도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선수들은 오히려 집중력을 높여주었다.
전에 내가 맥닐 구단주를 이용해 오리진을 떠올리게 해줬던 일이 영향을 주었겠지.
결국, 승점 107점 달성.
85-86시즌. 스윈던 타운 FC가 달성한 102점 기록을 5점 차이나 앞서며 107점, 신기록을 달성했다.
30년 만에 깨진 기록이니 최소한 수십 년 동안 리그2 역사 탭에는 포츠머스의 이름이 찬란하게 빛날 거다.
‘리그 최종전, 애크링턴과의 원정경기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정말 영원히 남을지도 모르는 기록을 세웠을 텐데 말이야. 아쉬워.’
5승 1무로 끝냈다면.
승점 110점의 위업을 이루었을 텐데.
나는 물론이고 선수들까지 신기록에 눈이 멀어 정말 최선을 다해 뛰었다.
하지만, 애크링턴은 만만치 않은 상대.
애크링턴의 콜먼 감독은 정말 단단히 준비해 왔다.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전방 압박 전술!
상당한 난타전이 일어났고, 홈 버프를 받은 애크링턴이 4-3으로 이겼다.
후반전에 리그 46경기 풀타임을 뛴 찰스 말로리를 빼면서 제대로 얻어맞은 것.
‘그렇다고 안 뺄 수도 없었어.’
찰스 말로리, 이제 생일이 지나 33세.
노장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선수인지라 정말 죽으려고 했거든.
자존심 때문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다크서클까지 생겼으니까.
하여튼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현대적인 전술을 완성한 애크링턴. 최종전에서 우리 팀을 이기고 3위로 리그를 마무리. 플레이오프를 벗어나 승격을 확정 지었다.
‘하 참. 내가 영향력을 끼치긴 하는구나. 이게 이렇게 되네.’
과거 애크링턴의 순위는 15위.
13위인 우리 팀보다 낮았었다.
하지만, 나에게 영향을 받고 전술을 깎은 덕분에 3위로 승격을 확정.
세상 참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나한테 감사하라고, 콜먼 감독. 그리고 애크링턴 서포터들도 마찬가지로 날 잊지 말고, 하루에 세 번씩 절하자.
그 때문에, 역으로 난 로치데일 팬들에게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1위. 포츠머스.
2위.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3위. 애크링턴.
4위. 로치데일.
5위. 플릿우드 타운.
6위.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
7위. 체스터 필드.
리그는 순위가 이렇게 끝났기 때문.
3위와 4위의 승점 차이는 겨우 1점.
만약, 내가 애크링턴과 비겨주기라도 했으면 로치데일이 승격이었다. 로치데일의 득실 차가 훨씬 좋았으니까.
-성소하, 야 이 씹새야!
-내가 너를 기억한다. 아니, 리그에서 3패밖에 하지 않은 애들이 애크링턴한테 져? 감독끼리 친해서 져준 거지?
-덕분에 승강 플레이오프로 잘 들어간다. 승격하면 두고 보자. 개자식아.
-진짜, 아. 플레이오프 지옥에 빠뜨리네. 왜 지고 지랄이야!
등등. 아주 지랄이 났다.
아니, 아니꼬우면 그전에 열심히 승점을 쌓아두던가. 왜 나한테 지랄이야?
나도 이기고 싶었다고.
아, 그리고. 베리 FC는 강등당했다.
리 그랜트 감독이 푸짐하게 싸지른 똥.
새로 부임한 감독이 치우기엔 너무나도 많은 배설물이었다.
게다가 싸지른 똥이 너무 많아서일까? 새로 부임한 감독은 구린내를 참지 못하고 정신이 돌아버렸다.
잘하는 척하다가 순식간에 삐쩍 마른 리 그랜트로 돌변. 괄약근에 힘을 풀고 똑같이 똥을 싸지르기 시작.
결국은 내셔널 리그로 시원하게 강등행 열차를 탔다.
신임 감독은 4개월 만에 경질.
구단은 아주 결딴이 났다.
이래저래, 축구판은 감독놀음임을 여지없이 보여준 시즌이었다.
‘물론, 좋은 일만 생긴 건 아니지.’
내가 좋아하는 무협 소설이 하나 있다.
망해버린 종남파를 젊은 장문인이 일으켜 세우는 작품. 작가의 필명이 건승신마였을거다.
하여튼 나름대로 내 현실 상황과 비슷한지라 굉장히 사랑하는 소설이다.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이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운은 파도와 같다.’
운이 좋을 때도 있으면 나쁠 때도 존재한다는 뜻.
즉, 좋은 운은 좋은 시즌 마무리였고,
나쁜 운은 다이스의 부상이었다.
경기중에 혼자 발목을 접질려 실려 나간 매튜 다이스.
정밀 검진 결과, 완치 5개월 판정을 받았다. 수술도 고려해야 할 정도의 큰 부상일 줄이야. 정말 몰랐다.
‘하긴. 보통 혼자 당하는 부상이 더 지독한 법이니까.’
발목인대가 심하게 찢어진 부상.
한참 어린 선수에게 재활까지 6개월이 넘는 큰 부상은 너무나 악재다.
‘씨발. 기껏 사람 만들어놨더니 저 하늘의 축구의 신이란 새끼는 장난질을 하네. 나중에 두고 봅시다.’
거친 욕설이 절로 나온다.
저런 큰 부상을 입는다면 성장이 멈출 것은 물론이고, 원래의 실력으로 돌아가기도 쉽지 않은 일.
낙관적으로 생각하기엔 축구계에서 빛나던 유망주가 부상으로 재능의 꽃을 피우지 못한 경우는 너무나 많았다.
잭 윌셔, 애런 램지, 아부 디아비, 간수, 엘 샤라위, 파투 등등등. 셀 수도 없이 많다. 근데, 아스널 선수가 많은 건 기분 탓인가? 기분 탓이겠지.
하여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가 잘 이겨내 주길 기도하는 것뿐.
부상을 이겨내려면 본인의 의지가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다이스 개인의 문제만도 아니야. 팀 운영에도 큰 문제가 생겼다.’
이적시장에도 큰 제약이 생겼다.
일단, 스펜서 보이드는 나갈 몸.
그렇다면 백업마저도 없다.
더불어 오른쪽 풀백이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된 상황. 상대 구단은 일단 가격을 올리고 보겠지. 급하다는 걸 알 테니까.
다른 곳을 보강해야 할 이적 자금을 오른쪽에 투자해야 하다 보니, 시작부터가 머리가 어지럽다.
‘유소년을 올리던가, 구단주 할배가 돈을 넉넉히 쥐여주던가. 혹은 내가 미래의 지식으로 꿀 매물을 찾든가 해야겠지.’
이래저래 나만 고생이다. 어휴.
2.
시즌이 종료되고 각종 수상이 발표되었다. 먼저, 리그2 올해의 감독상은 당연하게도 포츠머스의 감독인 소하.
“하하. 제가 이번에 없는 살림을 쪼개고 쪼개서 진열대를 하나 샀거든요. 거기에 지금까지 받은 이달의 감독상 트로피랑 같이 보관해둘게요.”
올해의 감독상 트로피를 매우 성의 없게 든 소하는 적당히 소감을 발표했다.
리그2 올해의 감독상 따위. 맨 밑에 놓아둬도 상관없다. 어차피 훗날 무수히 많은 트로피를 진열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어진 리그2 득점왕 수상식.
매우 당연하게도,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과 같을 정도로,
포츠머스의 골잡이 조쉬 킹이 수상했다.
잔 부상 하나 없이 46경기를 소화한 그는 46경기 36득점을 달성.
그야말로 엄청난 한 시즌을 보냈다.
이제 갓 1군에 진입한 18세의 선수가 달성했다고 믿기 어려운 성적!
순식간에 알리와 함께 잉글랜드 주목받는 유망주로 날아올랐다.
“하하핫. 전 제가 한 말을 지켰어요! 분명 30골 이상 박는다고 어떤 아저씨한테 말했거든요. 그리고, 꼬맹아. 9번 유니폼 사건 후회 없지?! 내가 은퇴할 때까지 매년 사도록! 그러니까 제 유니폼을 많이 사주세요! 앞으로 더 대단한 선수가 될 테니까요!”
흡사 유니폼 판매직원 같은 인터뷰.
물론, 소하의 ‘부탁’이 상당히 많이 담긴 상업성 발언이었다.
“갑작스러운 성장에 많은 사람이 놀라고 있습니다. 불과 18세의 나이로 리그2를 평정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아나운서의 말에 조쉬 킹은 큰 고민 없이 즉답한다.
“먼저, 울 부모님과 가족 덕분이죠. 그리고, 제 친구들인 알리와 필립스도 많은 도움을 줬어요. 하지만 역시 저의 성장에 가장 큰 도움을 주셨던 분은 감독님이세요. 맨날 혼내고 욕하고 빈 생수통 던지고, 추가 훈련에 또···.”
삐이! 인터뷰의 뒷부분은 생략되었다.
이게 욕인지 칭찬인지 구분이 어려웠으니까. 이 인터뷰로 조쉬 킹의 미래에 거대한 먹구름이 생겼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소하라는 거대한 먹구름이 번개를 뿌리며 기다릴 테니.
다음은, 도움왕 수상식.
이번 시즌 리그2의 가레스 베일이란 별명이 붙은 잭 해리슨이 수상했다.
7골 23도움이란 어마무시한 성적!
다득점이 많은 포츠머스의 특성상 정통 윙어임에도 엄청난 스탯 생산량을 보여줬다.
“제 모든 공로를 감독님께 돌리겠습니다. 그분이 아니셨다면 제가 이런 성적을 거둘 수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종종 시즌 중에 자리를 비우시는 행동은 자제해···.”
삐익! 두 번째 생략.
과도한 잔소리가 원인이었다.
이후로도 10여 분간 팀원들이 쓰레기통을 사용하지 않는 사소한 문제부터 단정치 못한 옷매무새까지 시시콜콜 지적했다는 잭 해리슨.
역대 최악의 수상 소감이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다.
마지막으로, 리그2 영플레이어상.
델리 알리가 수상했다.
그의 성적은 18골 18도움.
한 살 위의 친구인 조쉬 킹과 공격 포인트 숫자는 같았지만, 더 어리다는 이유로 주인공이 되었다.
“역시 제가 받아야 하지 않았나 싶네요. 저와 같은 나이 중에서 이렇게 잘한 선수는 없잖아요? 물론, 우리 구단의 선수들은 제외하고요.”
그다운,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소감이었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게 과하면 스타병이 발병하는 법.
소하는 언젠간 날 잡아서 스타병을 막을 예방주사를 단단히 놔주겠다고 벼르고, 또 벼렸다.
이렇게 모든 시상이 끝나고 시즌은 완전히 종료. 이제 한 달 반가량의 휴가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3.
13-14시즌 마지막 팀 미팅.
별일은 아니다. 그저 한 달 반의 휴가에 앞서 덕담을 나누는 시간 정도니까.
“잘 다녀와라. 헛짓거리하지 말고. 다들 알겠지만, 너무 풀어져서도 안 된다. 내년에도 우리는 우승을 위해 달려 나가야 하니까.”
난 인상을 구긴 채 상투적인 이야기를 건넸다.
“네!”
“알겠어요!”
“감독님은 휴가 어디로 가시나요?”
이미 마음만은 이미 휴가인 녀석들은 설렁설렁 대답한다. 하기야, 이번 시즌은 훈련도 고되고 힘들었으니까. 빨리 쉬고 싶겠지.
“그럼 잘 가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고 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슬쩍, 살기를 담아 으르렁거리자 이번에는 선수들이 찔끔거리며 격렬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식단관리도 틈틈이 할게요.”
“건강한 휴가를 보내고 오겠습니다.”
“프로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상당히 공손해진 발언.
역시 이 녀석들은 좋게 말해서는 들어 처먹지 않아. 역사적으로도 몽둥이가 약이었지. 암. 그렇고말고.
“그럼 해산!”
내가 해산을 명령하자, 선수들은 다시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옹기종기 모여 클럽하우스를 떠난다.
그중 몇몇은,
“헤헤. 감독님 ‘잘’ 지내세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 거 같아서 아쉽네요.”
“감독님도 항상 몸 관리를 철저히 하시길 바랍니다. 후후.”
께름칙한 눈빛을 보내며 실실 웃는다.
뭐지? 이 새끼들 무슨 꿍꿍이지?
하여튼 딸내미의 외박을 허락한 부모님의 마음이 절절히 와닿는다.
“소하. 넌 이제 한국으로 가는 건가?”
우리의 몬스터, 아니, 내 군대 동기 김용한이 다가와 물었다.
“그래야지. 오랜만에 엄마가 해주시는 밥 좀 먹어야겠어. 너도 갈 거지? 같이 가서 비행기 표나 끊자.”
혼자 떠나는 장거리 비행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는 법. 조금 이상한 녀석이긴 해도 말동무로서는 제법 괜찮다.
“아니.”
당연히 승낙할 줄 알았건만. 내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정한다.
“응? 한국 안가?”
“그래. 난 미국으로 간다.”
“미국? 거긴 왜?”
“본격적으로 영양 관리를 1년 동안 맡아본바, 내 부족한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미국은 스포츠과학이 가장 발달한 나라지.”
“···.”
요컨대, 자신의 실력을 증진하기 위해 수행을 떠난다는 소리다.
정말 훌륭한 마음가짐을 지닌 훌륭한 직원이자 친구이다.
“감독님. 잘 쉬고 오십시오.”
밀러 아저씨도 통통한 뱃살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네. 아저씨도 푹 쉬고 오세요. 다이어트 좀 하시고. 오래 봐야죠. 고혈압 와요. 그렇게 살찌면.”
“···큼큼. 조금 뺄 예정입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네? 뭐가요?”
“아무튼 죄송합니다.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럼 이만!”
쌔앵. 전생에 조선의 선비였던지 평소 절대로 뛰지 않던 양반이 전속력으로 사라졌다.
뭐야. 당신.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거기 안 서?
“헤헤. 감독님 휴가 잘 보내고 오세요.”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 에밀리아 양도 조금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건넸다.
“에밀리아 씨도 잘 쉬다 와요. 다음엔 한국어로 대화를 나눠보죠.”
“네네! 기대해주세요!”
두 손을 불끈 쥐며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이 조금 귀엽기도 하다.
그렇게 스태프진과 프런트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난 휴가를 위해 한국으로 향할 준비를 시작했다.
< 054화. 13-14시즌의 마무리.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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