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9화. 이제 겨우 시작일 뿐. (3) >
1.
3월 29일. 경기 당일.
포츠머스의 홈구장 프래튼 파크 주변은 온통 포츠머스의 색인 푸른 물결로 가득 찼다.
언제 좋지 않은 분위기가 흘렀냐는 듯, 모두의 얼굴에는 기분이 좋은 미소가 걸렸다.
감독의 단호한 발언에 불안감을 떨쳐내고 모두가 우승을 즐기기 위해 단단히 준비해 온 것.
포츠머스란 도시에서 소하의 발언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전 40년째 포츠머스 서포터입니다.”
한 방송사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일가족 중에서 한 중년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이름은 찰스 챔버스.
챔버스 가문의 첫째 아들이다.
그는 부모님과 가족을 모두 데리고 경기장을 찾은 ‘흔하디흔한’ 응원자 중 하나.
“아 40년이요.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41세입니다. 한 살 때부터 포츠머스를 응원했죠. 정확히는 옆에 계신 아버지의 목말을 타고 경기장을 처음 방문한 거지만요. 하하.”
“허헛. 그게 벌써 40년 전이라니. 이제야 제 아들이 초보 서포터 티를 벗어난 거 같구려.”
아들의 옆에서 환한 웃음을 짓던 노인이 한마디 던졌다.
40년 팬에게 초보티를 이제 벗어났다는 발언을 한다니. 한국에서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다. 한국은 프로축구가 1983년에 생겼으니까.
하지만, 4부리그 구단도 기본으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영국에서는 예외. 수십 년째 한 구단만 응원하는 서포터는 길가의 돌만큼 많다.
“어르신께서는 언제부터 포츠머스의 서포터셨습니까?”
“허헛. 내 나이가 74세이니, 올해로 70년째라네. 내 아들도, 내 손자, 손녀도 모두 포츠머스 팬이지.”
전설에서나 존재한다는 3대째 서포터!
한국에서는 N년차 팬이라고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여긴 진짜다.
영국에서는 축구는 단순한 눈요깃거리가 아닌 ‘문화’ 그 자체였으니까.
포츠머스만 해도 1898년도에 설립.
이게 어느 때냐면, ‘대한제국’이던 시절이다. 아직 일본이 강제 점령을 하기도 전의 먼 옛날. 덤으로 미국-스페인 전쟁이 벌어졌던 시대이기도 하다.
“40년 차와 70년 차라. 두 분 모두 대단하시네요. 일가족이 모두 포츠머스FC 서포터이신가요?”
인터뷰의 질문에 두 부자는 순식간에 웃음기를 지우고 누군가의 눈치를 살핀다.
그 누군가란, 노인의 부인으로 보이는 나이가 많은 여사. 모두가 웃고 있음에도 표정이 시종일관 냉랭하기 짝이 없다.
“···저, 챔버스 씨?”
“큼큼. 모, 모두가 서포터인 건 아닙니다. 정확히는 한 명 빼고는 모두가 포츠머스 서포터죠.”
당황한 찰스 챔버스의 태도에 옅은 미소를 짓는 아나운서.
그 ‘한 명’이 누구인지는 너무나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다른 팀을 응원하시나 본데요, 혹시 어느 팀을 응원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 그게 말이오.”
아들, 찰스 챔버스는 침묵 마법에 걸렸고, 아버지, 모건 챔버스는 말을 더듬는다.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차가운 표정의 여사, 릴리 챔버스가 시큰둥하게 대신 답변한다.
“사우스햄튼FC랍니다.”
“···그, 그러셨군요.”
이번에는 역으로 아나운서가 말을 하기 어려워한다. 말로 먹고사는 직업이 말문이 막히다니. 그만큼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사우스햄튼FC, 혹은 사우샘프턴 FC
포츠머스의 숙적이자 철천지원수!
영국에서도 그 유서가 깊은 더비 매치인 ‘사우스 코스트 더비’의 한 축을 담당한 명문 클럽이었다.
지금의 포츠머스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잘나가는 구단이다. 저 하늘의 태양과 반딧불 정도의 차이! 물론, 포츠머스가 반딧불이다.
“흥. 전 아무렇지도 않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우리 팀은 프리미어 리그이니까요. 리그2 따위에서 라이벌이 우승한다고 해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아요.”
“···.”
도대체 어떻게 둘이 만나서 결혼한 건지. 매우 궁금했지만,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릴리 챔버스를 따라 가족들이 자리를 뜨는 바람에 인터뷰는 아쉽게 종료되었다. 말과는 다르게 사우샘프턴 서포터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축제였나보다.
“하하핫. 제가 바로 그, 리 바이런입니다. 야수의 심정으로 3,000파운드를 포츠머스 우승에 걸었던 사람이죠.”
다른 한쪽에서는 머리가 반쯤 사라진 중년 남자가 카메라 앞에서 연신 싱글벙글 호탕하게 웃는다.
리 바이런, 포츠머스가 우승할 시 24배의 배당액을 받는 스포츠 베팅의 떠오르는 아이콘!
그가 인터넷에 올린 베팅용지는 그를 일약 유명인사로 만들게 했다.
만약 오늘 포츠머스가 이긴다면 한화로 1억이 넘는 대박을 터뜨릴 예정. 그야말로 운수가 터졌다.
“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역시 베팅은 팬심 베팅이죠! 하하핫.”
이상한 베팅법을 설파하는 리 바이런. 그러나 어쩌겠는가. 베팅판에서는 딴 놈의 말이 진리였으니까.
“성소하 감독에게 먼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옆에서는 작은 여관을 운영하는 지미 존슨 씨가 카메라 앞에서 소하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훌륭한 감독이죠? 멋진 축구를 보여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축구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활약으로 포츠머스시를 찾는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어요. 특히나 동아시아 쪽에서. 다른 감독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솔직히 시장보다 일을 잘해요. 포츠머스시의 경제 역군입니다.”
그의 말처럼 포츠머스는 전년 대비 관광객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소하의 힘이 컸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었다.
특히나 한국에서의 관광객이 급증했기 때문. 인터넷을 잘 보지 않는 소하는 체감을 하지 못했지만, 한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구가 중이다.
-군필 감독 등장.
-검은 머리 외국인? X, 검은 머리 한국인? O.
-K-천재 감독 등장.
-축구계에도 한류의 바람이 분다!
-차기 국가대표 감독직의 유력한 후보.
등등. 축구를 모르는 사람도 성소하라는 이름을 알 정도다.
처음에는 그저 인터넷뉴스나 스포츠뉴스에서 짤막하게 다뤄졌던 소하.
이제는 9시 뉴스는 물론이고 특집방송까지 만들어 집중적으로 조명할 만큼 유명인사가 되었다.
“우린 한국에서 왔어요! 두유 노우 김치?”
“대한민국! 짝짝짝!”
“성소하 감독님을 보러왔어요!”
경기장을 찾은 수많은 한국인도 열심히 인터뷰하며 분위기를 띄운다. 이래저래 소하와 그가 이끄는 포츠머스라는 축구구단은 포츠머스의 자랑으로 발돋움 중이었다.
2.
경기 전, 라커룸.
선수들은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으며 묵묵히 날 바라본다.
많이 긴장한 선수,
약간 긴장한 선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선수,
평소보다 의욕이 넘치는 선수.
특별한 경기이니만큼 평상심을 유지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 이럴 때 잘 대처하라고 감독에게 비싼 월급을 주는 거다. 요즘은 전술적인 측면은 수석코치가 도맡아 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얘들아? 어제 내 기자회견 봤지?”
“예!”
“오늘 출근할 때, 밖을 봤지?”
“예!”
“그럼 해야 할 일이 뭘까?”
“이기는 거요.”
“잘 아네. 훌륭해.”
난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긴장하냐, 안 하냐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뭘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할 뿐.
“그럼 가서 해야 할 일, 의무를 다해라.”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어차피 리그2 우승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을 뿐이었으니까.
3.
[잠시 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정말 많은 팬이 경기장을 찾아주셨는데요, 빈자리를 찾기 힘듭니다.]
[그렇습니다. 포츠머스FC의 티켓사무국에서는 100%를 달성했다는 발표를 했어요. 이로써 포츠머스는 이번 시즌에만 두 번이나 좌석점유율 100%를 달성하네요.]
좌석점유율 100% 달성은 프리미어 리그의 월드클래스 팀들도 잘 나오지 않는 기록이다.
홈구장이 워낙에 큰 탓도 있었지만, 포츠머스도 리그2에서는 가장 큰 홈구장이다.
프래튼 파크, 2만석. 인구 20만의 작은 도시에서 2만 석이 모조리 들어찼다는 건, 주민의 10분지 1이 이 장소에 모였다는 사실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오늘 홈팀, 포츠머스가 승리한다면 우승을 확정 짓습니다. 서포터들은 정말,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죠. 여러 악재가 겹친 지금. 포츠머스는 최대한 빨리 우승을 확정 짓고 싶을 거예요.]
오늘 특별히 장내 아나운서로 초대받은 톰 힉스와 나단 필립스. 자리가 자리인지라 중립적인 해설과 중계를 해야 했지만, 얼굴만은 웃음꽃이 활짝 피웠다.
이는, 그들의 목소리를 알아본 팬들도 마찬가지.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경기장에는 일순 힉스와 필립스의 이름이 울려 퍼진다.
“뚱보! 뚱보! 톰 힉스!”
“예언가! 예언가! 나단 필립스!”
포츠머스 팬들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그들은 거의 신앙에 가까워졌다.
[하하. 저희 목소리를 알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립스 씨, 오늘 경기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포츠머스에겐 매우 어려운 경기가 될 거라고 봐요. 여러 악재는 알고 계실 테니 넘어가더라도 스컨소프도 만만치 않은 팀이에요. 일단 감독이 하부리그의 명장으로 이름이 높은 러스 윌콕스 감독이니까요.]
러스 윌콕스,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의 감독. 하부리그에서는 알아주는 좋은 감독이다. 특징으로는 훌륭한 선수단 장악 능력과 상대를 맞춘 대응 전술의 대가다.
플랜A가 약하다는 약점이 존재했지만, 소하의 포츠머스에는 가장 까다로운 상대이기도 했다.
[스컨소프가 오늘 상당히 변칙적인 전술을 가져왔습니다. 3백···으로 보이는데요.]
[선발명단만 보자면 투톱을 사용하는 3백으로 보여요. 자세한 건 경기에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대응 전술을 치밀하게 짜온 것이 분명해요.]
선발명단만 보고서 전술을 완벽히 알아내는 건 요즘에 ‘예언가 좀비’라는 별명이 붙은 필립스에게도 불가능.
하지만 확실한 건 꾀가 많은 여우인 러스 윌콕스 감독이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해왔다는 점이다.
-삑!
곧이어 선수들이 입장하고 감독끼리 악수가 끝나자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그럼 이제 곧! 경기가 시작됩니다. 포츠머스와 스컨소프, 스컨소프와 포츠머스의 경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힉스의 외침과 함께 울려 퍼지는 단 한 가지 단어,
“포츠머스! 포츠머스!”
이제 우승의 향방은 90분 후에 결정된다.
4.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의 전술은 꽤 흥미로웠다. 왼쪽을 틀어막고 오른쪽을 공격한다라.
존 말로리와 매튜 다이스의 오른쪽은 왼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점을 노리는 거겠지.
“역시 윌콕스 감독이네요. 나름대로 만만치 않게 준비해 온 거 같은데요? 감독님.”
“그래 보이네요. 다이스가 잘 버텨 줘야 할 텐데요.”
스컨소프의 진형은 3백.
그것도 윙이 없는 3-4-1-2 포메이션이다. 선발명단으로 명단과 현 움직임을 보자면 말이다.
“확실히, 백수가 된 돼지 새끼랑은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전술을 가지고 왔네요.”
“러스 윌콕스 감독이야, 이쪽에선 알아주는 감독이니까요. 그래 봤자 감독님보다는 못하지만요. 흐흐.”
“이야. 이거 시즌 끝나면 재계약부터 해야겠네요. 밀러 아저씨의 안목은 정말 나날이 성장하는 게 보여요.”
“다 감독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껄껄.”
밀러 아저씨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냥 넘겼지만, 사실 상당히 예리하다.
공격 능력에 비해 수비가 달린 다이스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전략이라니. 꽤 매섭다.
물론, 다이스가 수비를 못 하는 선수는 아니다.
수비만 했을 때도 6점을 유지하던 선수였으니까. 요컨대, 수비가 6점 공격이 8점 정도.
경기는 일단 우리 팀이 주도권을 가지고 시작했다. 홈팀의 이점을 살려 초반부터 기세를 잡아준다.
좋아, 내가 주문했던 대로 잘 이행하는군. 선제골만 먼저 넣는다면 일을 매우 쉬워진다.
“다행이네요. 오늘 매튜 다이스의 폼은 절정으로 보이는데요? 감독님.”
“당연하죠. 오늘만큼 관심받기 좋은 경기가 또 어디 있겠어요.”
다이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큰 경기일수록 더 날뛰는 성격이니까. 이 말은 즉, 훗날 별들의 리그에 가면 어떤 괴물이 될지 모른다는 소리다.
“스컨소프도 만만치 않네요.”
이번 시즌 패스에 눈을 뜨고 엄청난 성장을 한 잭 해리슨.
그가 왼쪽을 분쇄하고 크로스를 올렸지만, 아쉽게도 수비수에게 차단당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컨소프의 역습!
클리어링 한 볼이 우리에겐 매우 불행하게도 상대 공격수의 발밑에 정확히 떨어졌다.
“집중해! 집중! 리커버리를 더 빨리 가줘야지!”
조금 반응이 늦은 리커버리.
때문에 다이스 혼자 필사적으로 따라붙으며 지연 수비를 펼친다.
엎치락뒤치락.
우리 쪽 파이널서드 오른쪽 측면에서 상당히 적극적인 몸싸움을 펼치는 두 선수.
다이스는 어린 만큼 부족한 경험을 적극적인 경합으로 메우려고 노력한다.
“좋아! 좀만 더 버텨! 동료들이 온다!”
좋은 수비다. 0.5초만 더 지연시킨다면, 리버커리가 도착할 테고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테니까.
하지만,
“아악!”
외마디 비명이 내 고막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비명의 주인공은 다이스.
적극적인 경합을 펼치던 19세의 어린 친구가 잔디에 얼굴을 파묻고 매우 고통스러워한다.
“빨리 가세요! 빨리!”
의료진을 부르는 심판의 손짓에 나는 거칠게 외쳤다.
“넷!”
서둘러 경기장으로 달려가는 우리 팀 의료진들. 얼마간 다이스의 상태를 체크하던 팀닥터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아! 다이스 선수가 부상당했어요. 요즘 엄청난 폼을 보여주던 어린 선수였는데요. 정말 아쉽습니다.]
[교체 사인이 들어왔군요. 큰일입니다. 전반 5분 만에 다이스 선수가 경기장을 떠나야 한다니요.]
용광로 같던 경기장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갑고 조용해졌다.
“하하. 정말 이러기에요?”
의외의 사태에 오랜만에 하늘을 보며 투덜거려봤다. 이제 오른쪽 윙백을 맡을 선수는 인간쓰레기 스펜서 하나.
선택의 기로였다.
그를 쓸 건지,
전술을 바꿀 것인지.
< 049화. 이제 겨우 시작일 뿐. (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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