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46화 (46/306)

< 046화. 리그2, 후반기. (8) >

1.

베리FC의 리 그랜트 감독의 노림수는 나름대로 꽤 선구적인 전술이었다.

정교함에서는 많이 떨어졌지만, 시메오네 감독이 이끄는 AT 마드리드의 3백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촘촘한 4-4-2로 유명한 시메오네 감독이지만 20~21시즌에는 3백을 기반으로 다시금 라리가의 우승컵을 가져온 시메오네 감독.

이 선택에는 강팀들의 전술 변화가 가장 큰 이유다.

현대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 하프 스페이스.

이를 공략하기 위해 전술은 변화했고, 2-4-4나 2-3-5, 3-2-5 같은 굉장히 공격적이며 하프 스페이스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강력한 전술들이 등장했다.

그런 전술들을 상대하기엔 촘촘한 4-4-2전술은 측면과 하프 스페이스를 노출할 수밖에 없었고, 변화를 단행한 것.

리 그랜트도 여기서 착안점을 두고 전술을 준비해 온 거다.

아무런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소하의 2-4-4를 막기 위해 고려한 수로서는 꽤 괜찮은 한 수였다.

‘안 돌아가는 머리로 최대한 대응 전술을 준비한 거 같은데···. 너무 우리만 신경을 썼어.’

겉보기에는 번지르르했지만, 전술적으로 구멍이 많았다.

어디까지나 시메오네의 3백과 유사하다는 이야기일 뿐. 질은 비교조차 어려울 정도다. 이유는 꽤 많다.

공격작업을 하는 선수가 한 명도 없어서 완전히 주도권을 내주었으며,

팀의 전체적인 압박 레벨이 낮아, 수비 시 수적 우위를 점했음에도 효율이 낮았고,

너무 측면과 하프 스페이스에 힘을 준 나머지 중앙의 수비가 헐거워졌다는 점.

포츠머스의 전술에만 신경을 쓴 바람에 기초를 망각해버렸다.

촘촘한 4-4-2가 왜 유행했던가.

측면을 내주더라도 중앙을 지키기 위해서다. 중앙이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공간이었으니까.

요컨대, 배보다 배꼽이 커진 형국이었다.

그리고, 소하와 포츠머스의 선수들은 이 약점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아! 케빈 도슨이 매우 공격적으로 플레이하는군요. 거의 미드필더입니다!]

[원래 저번 시즌까지만 해도 미드필더였던 선수였죠! 텅텅 비어버린 중앙을 마음껏 유린하고 있어요!]

케빈 도슨이 중앙 미드필더인 마이클 반즈, 커너 러셀과 3 미드필더를 구성하며 맹렬히 공격작업을 진행한다.

“오랜만에 합을 맞춰보는 거 같네요. 주장.”

패스를 주고받는 마이클 반즈가 특유의 맥빠진 목소리와 함께 웃음을 짓는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옅은 미소로 대꾸한 케빈 도슨은 6번째 전진 패스를 시도한다.

중앙 수비수가 파이널 서드로 6번이나 패스를 찔러넣다니. 대단한 성적이다.

그야말로 볼 플레잉 디펜더 그 자체.

웬만한 미드필더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뛰어난 패스 솜씨와 기술이다.

그의 모습은 마치, 4부리그에 나타난 마츠 훔멜스, 레오나르도 보누치, 다니엘 아게르!

그간 느린 발 때문에 미드필더로서 평가가 좋지 않았던 그가, 포지션 변경만으로 리그2 최고의 수비수로 우뚝 설 수 있는 요소였다.

[정말 뛰어난 패스 솜씨입니다! 케빈 도슨의 중장거리 패스와 전환 패스가 나올 때마다 베리FC의 단단한 버스가 마구 흔들립니다!]

[그간 4-4-2의 중앙 미드필더로서는 평가가 별로였는데요,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할까요. 성 감독의 안목은 정말 대단하군요.]

덤으로 따라오는 소하의 대한 찬양!

‘축구는 감독 놀음이다.’라는 격언을 실천으로 여실히 보여줬다.

[이제 전반 30분을 향해 흘러갑니다.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는 베리FC!]

[포츠머스도 전반전에 한 골 넣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후반전은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몰라요!]

전반전 남은 시간은 15분.

7번째 중거리 패스를 성공한 케빈 도슨은 열 걸음 정도 더 전진한다.

운이 없게 공이 뒤로 흐른다면 치명적인 상황에 부닥칠지도 모르지만, 머리가 그리하라고 명령했고, 그는 거부감없이 그대로 이행했다.

“쳇. 너무 수비가 많은데.”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지만, 움직임은 세컨드 스트라이커인 델리 알리.

아직 몸이 완성되지 못한 그는, 두꺼운 수비벽을 이기지 못하고 슬쩍 내려온다.

공교롭게도 공격형 미드필더와 중앙 수비수가 동일 선상에 서는 순간.

이 때문에 케빈 도슨을 주의하던 선수의 신경은 알리에게 쏠린다.

“받아, 알리!”

마침, 알리에게 다이스의 패스가 당도.

알리는 고개를 빠르게 돌려 주위 상황을 스캔한다.

‘좋아. 상대 선수를 좀 끌어볼까?’

평소 다이렉트한 축구를 선호하는 소하의 기지에 어긋나는 행동이지만, 알리는 자체적인 판단을 내렸다.

-휙휙.

슬쩍슬쩍. 발로 재간을 부리며 상대 선수가 붙기를 기다리는 알리.

제법 현란한 발놀림에 전담 마크맨은 쉽사리 공을 빼앗지 못한다. 오히려 그대로 발재간에 넘어가 공간을 내어줄 판국이다.

“에잇.”

보다 못한 베리의 선수 하나가 협력 수비를 하러 자리를 벗어난다.

어쩔 수 없는 선택.

만약 그대로 개인기에 돌파라도 당한다면 위험한 상황이 찾아올 테니까.

그만큼 알리도 요주의 경계 대상이었다.

‘좋아. 그럼 이제.’

-툭.

미쳐 협력 수비가 당도하기도 전에 재빨리 케빈 도슨에게 공을 찔러주는 알리.

‘주장, 바로 차기 편하시게 잘 깔아 드렸어요. 설마 잡고 차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겠죠?’

패스에는 많은 정보가 담긴다.

방향, 속도, 회전 등등.

일류선수들은 이를 마음대로 조합해 받는 선수에게 무언의 정보를 전달한다.

아직 알리가 일류선수는 아니었지만, 일류선수가 될 재능은 충분한 선수.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다.

‘알겠습니다.’

케빈 도슨도 이제 이류, 삼류의 껍질을 깨고 비상하려는 선수.

알리의 뜻을 정확히 파악한 그는 주저 없이 중거리 슛을 시도한다.

-뻥!

조쉬 킹의 중거리 슛이, 거함·거포 시절의 함포 같은 위력이었다면,

케빈 도슨의 중거리 슛은 표적을 암살하는 정숙한 저격 소총 같은 맛이 난다.

-슈욱.

선수들의 발목 부근을 물찬 제비처럼 스쳐 지나가는 공.

베리FC 골키퍼는 너무나도 낮은 탄환의 궤적에 순간 반응이 늦었다.

“제기랄!”

뒤늦게 온몸을 고무줄처럼 늘리며 손을 뻗어 보는 베리의 골키퍼.

-철썩!

살짝 손끝으로 건드리긴 했지만,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골입니다! 포츠머스가 드디어 선제골을 뽑아냅니다. 전반 31분. 케빈 도슨의 그림 같은 중거리 슛!]

[아주 지능적인 슈팅이에요. 비좁은 수비의 틈과 골키퍼의 시야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어요.]

“오오오!”

한껏 포효하는 케빈 도슨!

시즌 1호 골을 작렬한 그가 달려가는 곳은 다름 아닌, 포츠머스의 벤치.

“감독님!”

와락. 감독인 소하를 힘껏 끌어안으며 평소와는 다르게 격렬하게 기뻐한다.

[아, 시즌 첫골의 셀레브레이션을 감독과 함께하는 모습입니다!]

[하하.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스승과 제자이지만, 정말 사이가 좋아 보이는군요.]

“저리 가. 땀내나.”

말과는 다르게 꽤 기분이 좋은 미소를 짓는 소하였다.

2.

케빈 도슨의 선제골 이후, 경기는 개막전과 흐름이 똑같았다.

간신히 유지하던 베리FC의 모래성.

이를 삼켜 버린 케빈 도슨이란 차가운 북해의 파도.

한번 파도에 잡아먹힌 모래성을 다시 복구할 방법은 없었다.

선수들은 소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인정사정없이 베리FC를 두들겨 팼다.

다시금 재현된 무자비한 폭행과 폭력.

축구계의 스너프 필름 같은 잔인한 경기는 빠르게 종료되었다.

경기 시작 31분간 0-0.

경기 결과는 5-0 대승.

다시 한번 처참한 경기 결과를 맞이한 베리FC의 팬들. 경기 내내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향해 야유와 욕을 퍼부었지만, 조기 퇴근은 하지 않았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으니까.

“그랜트는 꺼져라!”

“제발 꺼져줘. 프런트는 뭐하냐? 우리 집 고양이가 전술을 짜도 이거보단 낫다!”

“우우우우우! 이러다가 내셔널리그로 강등당하겠다!”

“병신같은 전술에 병신같은 구단. 아! 이런 팀을 응원하는 나도 병신이구나!”

“그랜트 아웃! 그랜트 아웃!”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린 베리FC의 팬들은 경기장에 난입할 기세로 분노를 터뜨렸다.

그리고 이어진 기자회견.

또다시 악수를 거부한 리 그랜트 감독은, 기자회견장에서도 마이크를 집어 던지고 퇴장.

일대 파문을 만들고 모습을 감추었다.

그야말로 활활 타오르는 폐가!

물론, 불구경이라면 누구보다 좋아하는 소하는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멋진 경기 결과였습니다. 이번 경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먼저, 베리FC 서포터분들께 심심한 애도를 표할게요. 손발이 얼어붙는 추위를 뚫고 비싸디비싼 표를 끊고서 이런 경기 결과를 맞이한다면 어떤 기분일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네요.”

자연스럽게 기자회견의 내용을 베리FC의 이야기로 돌리는 소하. 미디어 핸들링 실력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리 그랜트 감독이 더는 자리를 지키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베리FC의 프런트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언급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제가 여기서 드리고 싶은 말은 한가지에요. ‘홈구장인 줄 착각했다.’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발언이시군요.”

“그냥, 느낀 점을 말했을 뿐이죠. 다만, 리 그랜트 감독 개인에게는 한가지 부족한 게 있습니다. 바로 예의, 두 번째 악수 거부니까요. 성적을 떠나 동업자에 대한 예의부터 차려야 하지 않나, 조심스럽게 조언할게요.”

이럴 때일수록 부드럽게 공격해야 한다. 너무 뾰족한 발언은 오히려 공격의 대상이 자신으로 바뀔지도 몰랐으니까.

그래도, 어차피 속뜻은 매한가지였다.

‘실력도 모자라고 예의도 없는 경질 1순위 감독에게 애도를 표한다.’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하지만 기자단들의 생각은 달랐다.

‘호오. 이런 무례를 두 번이나 당하고도 가볍게 넘어가다니.’

‘실력과 더불어 인성도 겸비했군.’

‘과격한 발언 말고도 이렇게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도 아는 감독이야.’

‘포츠머스 팬들은 좋겠군.’

소하에 대한 평가마저 상향조정.

상당히 만족스러운 경기 결과와 기자회견이었다.

‘후후후. 이젠 나와 더 대비돼서 빠른 경질 열차를 타겠지. 잘 가라. 돼지 새끼야.’

물론, 속은 매우 음험했다.

3.

1월 이적 시장은 불안할 정도로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태풍 직전의 고요한 바다랄까. 리 그랜트의 경질 소식에 더욱 불안해졌다. 화와 복은 같은 문으로 들어오기 마련이었으니까.

‘있다 해도 NFS만 때렸겠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어도 자동응답기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건만. 단단히 준비한 각오에 비해 너무나도 평화롭게 끝나 맥이 조금 빠질 정도다.

‘뭐, 겨울 이적 시장이니까.’

겨울 이적 시장은 여름 이적 시장과 그 성격이 매우 다르다.

여름 이적 시장에는 자금도 많을뿐더러 영입을 대국적으로 진행하고,

겨울 이적 시장에는 자금도 적을뿐더러 영입을 긴급하게 진행한다.

부상이탈로 팀에 빨간불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겨울에는 비싼 선수를 영입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프리시즌도 없는 기간이라 이적생의 적응도 힘들었으니까. 선수들도 겨울에는 쉽사리 이적을 결정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우리 팀 선수들에게 관심이 없냐? 이건 또 아니다. 새끼들 보는 눈들은 있어서 말이야.

일단 세간이 집중하는 선수는 다섯.

조쉬 킹.

잭 해리슨.

커너 러셀.

하비 셸비.

찰스 말로리.

하나 빼고는 전부 다 알짜배기다.

그중 가장 뜨거운 건 당연히도 조쉬 킹. 아직 17경기나 남았음에도 득점왕이 확실한 녀석이다.

29경기 21골.

암만 4부리그라고 해도 18세의 어린 선수가 달성했다기엔 매우 뛰어난 성적이다.

“캬하하. 이젠 리그2의 최고 공격수는 바로 접니다! 찰스 선배는 이제 한물갔어요. 감독님도 그렇게 생각하죠?”

“닥쳐.”

조쉬 킹의 기세는 아주 그냥, 오관육참장의 관우가 따로 없었다. 알다시피 킹은 대놓고 관심병에 걸린 녀석.

목에 깁스라도 했는지 고개가 숙어지는 날이 없을 정도!

조만간 날 한번 잡아서 그 뻣뻣한 목을 말랑말랑하게 풀어줘야겠다.

‘그래도 아직 걱정되지는 않아. 위연 같은 놈이지만 겨울에 이적할 녀석은 아니지.’

녀석의 남은 계약 기간은 1년 5개월.

2015년 6월에 끝이다. 시즌을 마무리하고 협상테이블에 앉힐 1순위라는 이야기다.

‘잭 해리슨의 계약 기간도 킹과 똑같았으니까. 바쁘겠군. 다음 이적 시장은.’

잭 해리슨이 요즘에 새로 얻은 별명은 4부의 ‘가레스 베일.’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꽤 날카롭다. 슬슬 반대편 윙어 훈련을 시킬 참이었으니까.

‘팔만한 선수는 하비 셸비뿐이야. 애초에 내다 팔려고 기용하는 거니까. 커너 러셀과 찰스 말로리는 절대 안 되지.’

하비 셸비. 부심러.

이 대머리 선수와 했던 약속은 착실히 이행했다. 가격만 맞으면 바로 보내줄 준비도 끝났고. 따라서 녀석은 별 불만 없이 잠잠하다.

커너 러셀과 찰스 말로리는 최소한 챔피언십 리그까지는 같이 가줘야 할 선수들. 판매의 판자라도 꺼낸다면 프런트를 뒤집어 엎어버릴 거다.

‘그나저나, 애들이 꽤 기강이 잡혀있어서 다행이군. 다 감독 덕분이려나. 후후.’

델리 알리와 케빈 도슨만 떠올리면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요전번, 선수 인터뷰 때 이 녀석들이 오랜만에 내 마음을 충족시켜줬으니까.

“던스로 복귀요? 어디서 그런 소문이 나온 지 모르겠네요. 물론, 전 던스를 좋아하긴 해요. 제 친정팀이니까요. 하지만 전 성 감독님께 계속해서 지도를 받고 싶을 뿐이에요. 더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선 남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에요. 그러니까 빨리 옵션 발동 좀···.”

뛰어난 성적 덕분에 리그1 복귀설이 터졌지만 매우 단호한 태도로 일축했다.

던스를 응원하지만, 자신의 실력향상을 우선으로 둔 알리다운 발언이었다.

조금만 기다리렴. 승격 확정하고 구단주 할배 주머니를 털어볼 테니까.

그리고, 이적설에 반응한 케빈 도슨의 인터뷰는 한술 더 떴다.

“제1순위 목표는 팀의 성적이고, 제2순위 목표는 재계약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3순위 목표는 팀의 레전드로 남고 싶다는 겁니다. 나머지는 고려대상조차 되지 못합니다.”

매우 훌륭한 인터뷰 아닌가? 포츠머스 팬들이라면 이 인터뷰만으로도 며칠간 포르노 비디오가 필요 없을 거다.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이제 슬슬 끝이 보이는군.’

빠르게 흘러 지나간 1월.

슬슬 리그2의 결승점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겨울이었다.

< 046화. 리그2, 후반기. (8) > 끝

ⓒ 블라님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