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45화 (45/306)

< 045화. 리그2, 후반기. (7) >

1.

도슨 부부의 집은 겉만큼이나 내부도 화려함이 흘러넘쳤다.

걸린 그림 몇 점만 팔아도 포츠머스 같은 작은 구단은 몇 개라도 인수할 거다.

‘그나저나, 참 신기해. 어떻게 둘이 결혼한 거지?’

영국은 아직 엄연히 신분제도가 존재하는 나라.

정확히는 계층이 나뉘어있다.

Upper-Class, 상류층.

Middle-Class, 중산층.

Working-Class, 노동계급.

이 클래스에 따라서 어울리는 사람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남자가 친해지려면,

상류층은 크리켓이나 테니스를 보고,

중산층은 럭비를 보며,

노동계층은 축구를 본다.

같은 뜻이라도 계층마다 사용하는 단어마저 다른 요상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런 나라에서 딱 봐도 워킹 클래스인 케빈 도슨과, 아무리 낮게 잡아도 어퍼 클래스인 나탈리 왓슨, 이젠 나탈리 도슨이 알콩달콩하게 살림을 차렸다는 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회귀자인 내가 봐도 말이다!

“너 이 자식. 1분 내로 상황을 설명해라.”

식사가 끝나고 나탈리 왓슨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케빈 도슨의 옆구리를 찌르며 사실을 실토하라고 윽박질렀다.

물론, 식사는 맛있었다.

일류 셰프의 맛깔나는 만찬이었으니까.

“가, 감독님. 다른 선수들에게는 비, 비밀로 해주십시오.”

“니 하는 거 봐서.”

“제발···. 부탁드립니다.”

축구계에서는 ‘빙산’이라는 별명으로 차차 이름을 알리는 중이었거늘.

빙산은 개뿔. 세상천지에 이런 빙신이 또 있진 않을 모습이다.

“알았어. 약속할게. 그나저나 너 엄청 잘 숨기는구나?”

“냇이 힘을 많이 써주었습니다.”

냇, 그러니까 NAT, Natalie.

나탈리의 애칭이다. 하여튼 깨가 쏟아지는 커플이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 좀이 쑤신다.

솔직히 노총각 앞에서 저렇게 꽁냥거리면 머리통 깨뜨려도 무죄 아닌가?

법의 제정이 시급하다.

“···하긴 나도 몰랐으니까.”

회귀자인 나도 모를 정도로 꼭꼭 숨기다니. 숨기는 실력이 제법이다. 거의 모 만화원작 영화 시리즈의 러시아 출신 여자 첩자 같지 않은가. 이름도 비슷하고.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무명 선수인 제가 스타 배우와 결혼한 게 알려진다면, 축구에 집중하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냇도 그걸 충분히 이해해줬습니다. 참 좋은 아내입니다.”

눈에서 하트가 뚝뚝 떨어진다.

아, 진짜 밥맛 싹 달아나네.

그래도 꽤 재밌긴 하다. 항상 침착하고 바른 남자인 이 녀석이 이렇게 공처가일 줄이야. 입이 정말 근질거리는군.

“그래서, 어떻게 만난 건데?”

“만났다기보다는 그녀가 찾아왔습니다. 정확히 5년 6개월 24일 전이군요.”

“···큼큼. 그랬구나. 근데 찾아왔다고?”

5년 전이라면 케빈 도슨이 아직 19살 때이지 않은가. 십 대에 저 스타가 찾아왔다고? 이건 또 무슨 기만이지?

“네. 처음에는 나이도 제가 4살이나 어리고 엄연히 계층 차이가 나는지라···. 멀리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더군요.”

“빠드득.”

“가, 감독님?”

“아니야. 계속해. 씨ㅂ이 아니라. 너무 훈훈한 스토리라서.”

도대체 왜 찾아왔을까.

궁금하긴 하다.

“그녀는 그냥 길가의 쓰레기를 줍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더군요. 사실, 농담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

“하여튼, 그렇게 시작된 저희의···. 큼큼. 사랑은 금방 결혼이란 과실을 맺었습니다. 2년 전이지요. 그런데 어디 편찮으십니까? 배를 부여잡으시고···. 표정도 좋지 않으신데···.”

“아가리 해. 아, 미안. 말이 헛나왔네. 아무것도 아니야.”

순간 욱해서 험한 말이 나왔다.

요컨대 이거 아닌가.

우연히 길가에서 바른 생활을 하는 청년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졌고, 여자가 먼저 다가왔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슈퍼스타가! 아이고 배야. 연휴라 병원문도 닫았을 텐데, 큰일 났네.

“냇의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그녀는 불도저처럼 일을 진행하더군요. 연상의 여인이란. 정말 강했습니다.”

“여물어.”

“네?”

“아니야. 그랬구나. 참 감동을 주는 이야기야.”

배가 아픈 걸 참느라 매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영혼의 티끌만큼도 없는 대꾸였지만, 녀석은 눈치채지 못했나 보다.

“후훗. 감사합니다. 사실 많이 고민했습니다. 감독님에게 제 비밀을 알려도 되는지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털어놓으니 마음이 편하군요.”

난 불편해졌어, 라는 말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사실, 사적으로 이렇게 선수와 만나는 건 저번 생에서도 해보지 못했던 경험이라 어찌할지 모르겠다.

보통은 감독과 선수가 사적으로 친한 경우는 드물었으니까.

공과 사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나이 차이 때문이다. 암만 외국이라도 10살 이상의 세대가 다른 사람하고 어울리기는 쉽지 않을 일이다.

젊은 쪽이든, 늙은 쪽이든.

“호홋. 두 신사께서 어떤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나누시나요?”

마침, 나탈리가 돌아왔다. 생긋 웃는 모습이 참 어여쁘지만, 은근히 무섭기도 하다.

그거 아닌가. 키잡. 키워서 잡아먹는.

4살 연하의 십 대를 낚아채서 결혼까지 끌고 가다니. 확실히, 보통사람은 아니었다.

“사랑 이야기···라고 해야겠죠.”

“호호호. 부끄럽네요. 그럼, 감독님의 사랑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저의 사랑 이야기요?”

그런 거 없는데. 전의 삶에서도 여자랑은 인연이 없었으니까.

“전 아는 여자라곤 엄마밖에 없는데요?”

“네?! 정말요? 설마요! 그런 멋진 외모와 훌륭한 능력을 갖추시고 여자가 없다니.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

아니, 이 유부녀가 귓구멍에 소시지를 처박았나. 아픈 부분을 거침없이 공격하시는구만.

“정말인데.”

“믿기지 않네요. 짙푸른 눈에 검은 머리는 정말 신비로운데요. 요즘 여자들이 보는 눈이 없네요.”

“후후. 그렇죠?”

“그럼요. 이거 안 되겠네요. 제가 힘을 한번 써봐야겠는데요? 제 주변에 참한 아가씨들이 많답니다.”

솔깃. 이미 외모 칭찬에 악감정의 대부분 사라졌거늘. 이젠 세상에 다시없을 천사로 보인다.

그녀는 영국의 20대 여배우 중에서 톱클래스. 아는 연예인들로 일개 대대를 채우고도 남을 테니까. 그것도 상류층의 영애들로!

“정말요?”

“네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독님께 어울리는 사람을 소개해 드릴 테니까요.”

“후후후. 그럼 저야 고맙죠.”

“뭘요. 저야 항상 고맙습니다. 제 남편이 틈만 나면 감독님 칭찬을 하거든요. 얼마나 좋은 분인지 보지 않아도 알 정도였어요.”

슬쩍. 고개를 돌려 케빈 도슨을 바라보니, 그의 눈이 머물 곳을 잃은 채 방황한다.

“그, 그냥 별거 아니었습니다. 이, 이제 불꽃놀이가 시작되니 발코니로 가도록 하죠.”

서둘러 자리를 뜨는 케빈 도슨.

얼굴이 붉어진 게 굉장히 부끄러운 듯하다.

“귀엽죠?”

“···뭐, 그렇다 치죠. 그럼 쟤 따라가서 불꽃놀이나 보러 가죠.”

한국에 제야의 종이 있다면, 영국은 빅벤이 있다. 하지만, 암만 포츠머스가 런던과 가깝다고 하지만 들릴 리는 만무. 불꽃놀이나 구경하는 게 상책이다.

“잠깐.”

나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 손을 붙잡았다.

뭐야? 따로 할 말이 있는 건가?

그나저나 참 곱다. 손이.

이게 여배우의 손이구나.

“음?”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물론 초면에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란 거는 잘 알고 있는답니다.”

“무례는 무슨. 말해봐요.”

“제 남편을. 케빈 도슨을 잘 지도해 주세요. 정말 머릿속에 축구밖에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녀의 손에서 온기가 전해진다.

또한, 그녀가 케빈 도슨을 얼마나 위하고 사랑하는지도,

지금 하는 부탁이 얼마나 간절한지도.

가늘게 떨리는 손을 통해 절절히 전해진다.

“훗.”

난 한번 씨익 웃어준 뒤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런 스타가 간절히 부탁하는데, 내 비밀 보따리 속의 비밀 하나 정도는 말해줘야 격에 맞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전 그와 함께 영국과 유럽을 동시에 제패할 생각이니까요.”

영국인답게 내가 말한 내용을 금세 이해한 나탈리 도슨. 상상 이상을 뛰어넘는 원대한 계획에 배우인 그녀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자, 그럼 불꽃놀이나 구경하러 가죠.”

-피유우웅! 퍼퍼펑!

마침,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하늘을 수놓는 각양각색의 불빛은 나와 나탈리 도슨의 눈을 어지럽힌다.

“감사합니다.”

뒤에서 나탈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듣지 못한 척했다.

감사고 뭐고, 약속이나 지키라고요.

참한 처자이길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2.

1월 2일.

다시 돌아온 베리FC와의 일전.

이번엔 베리의 홈으로 원정을 떠났다.

베리의 전반기 순위는 14위.

용케 중위권은 유지하는 중이었고, 소하를 극도로 증오하는 리 그랜트 감독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검은 머리 애송이에게 이번에야말로 진짜 축구를 가르쳐 주겠소.”

한결같았다. 대쪽 같은 사람이랄까. 오히려 소하에 대한 증오심은 전보다 훨씬 강해진 모습이다.

어찌나 화가 났던지 14위 팀이 1위 팀에게 축구를 가르쳐준다는 새로운 비전까지 제시하다니. 증오에 이성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물론, 소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흡사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을 때만큼 놀라운 발언이네요. 14위 팀이 1위 팀에게 가르쳐줄 축구라니.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축구인가 보죠?”

전매특허, 비꼬기 작렬.

기자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소하는 선수들에게 딱 한 마디만 전했다.

“이겨라.”

긴말은 필요 없었다.

살기 어린 목소리.

맹수 같은 눈빛.

슬쩍 비틀린 입꼬리.

비기거나 진다면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예고, 그 자체!

이틀간의 휴가로 조금 무뎌진 선수들의 정신상태가 순식간에 날카로운 명도처럼 예리하게 벼려졌다.

그리고 시작된 베리FC와의 2차전.

소하의 포츠머스는 애크링턴 경기와 같이 공격할 때 2-4-4 포메이션을 가져가며 맹렬한 공격을 시작,

그의 맞서는 베리FC는 무려 5백으로 진득한 수비태세를 갖춘다.

[아! 이게 뭔가요? 베리FC 전술이 너무 극단적입니다.]

[5백이에요. 3백에 양 윙백마저 내려앉았네요. 심지어 양쪽 윙도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아요! 거의 7백입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비명과도 같은 탄식.

그리고 터지는,

“우우우우! 공격해라! 공격!”

“그랜트 아웃! 우린 축구를 보러 온 거지 수비를 보러온 것이 아니다!”

“가르치긴 뭘 가르치냐! 너나 성 감독한테 배우고 와!”

“개 병신같은 전술을 또 가져오냐 돼지 새끼야?!”

“우우우우우! 선수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버러지야?”

베리FC의 홈구장을 가득 메우는 홈팬들의 욕설과 야유.

복장 터질 일이었다. 새해 첫 경기였건만. 이런 극단적인 수비축구로 새해부터 꿀잠을 선물하려고 하다니. 팬들의 눈이 뒤집힐만한 일이었다.

‘젠장. 두고 보라고.’

얼굴이 잔뜩 붉어진 리 그랜트 감독. 온갖 모욕을 실시간으로 듣다 보니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그래도 어금니를 꽉 깨물며 인내하는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비책을 준비했긴 했나 보다.

‘놈들의 공격력은 측면에서 나온다. 즉, 측면만 봉쇄한다면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다.’

측면과 하프 스페이스.

그리고 중앙지역까지.

모조리 틀어막았다.

이 정도로 내려앉는다면 뚫을 방법은 한가지.

‘중거리 슛. 하지만 포츠머스 선수 중에 중거리 슛에 능한 선수는 없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어차피 이곳은 베리의 홈구장.

원정팀인 포츠머스가 체력소모도 더욱 클 테니 때리다가 지치길 기도하는 전술이다.

“이야. 밀러 아저씨. 여기 베리FC 홈구장 맞죠?”

“하핫. 맞습니다. 야유소리만 들으면 우리 집 같네요. 그나저나, 저 돼지 새끼가 꽤 단단히 준비해온 모양인데요? 감독님.”

밀러도 리 그랜트에게 상당히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인물.

자연스레 거친 발언이 튀어나왔다.

소하는 밀러의 입에서 나온 ‘돼지 새끼’라는 단어가 무척 마음에 드는지 한껏 음미하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홈구장의 이점을 살려서 후반전 마지막에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 같네요.”

“그렇죠. 저런 건 축구도 아닙니다. 수비축구도 선이 있는 거 아닙니까?”

“후후. 축구에 옳고 그르게 어디 있겠어요. 오직 승리만이 옳을 뿐이죠. 다만, 저런 수작으론 승리하지 못할 테니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죠.”

소하의 말이 끝나자 밀러는 똑같이 썩은 미소를 지으며 눈빛을 빛낸다.

“호오. 무슨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후후후. 밀러 아저씨도 정말 저희가 중거리 슛이 좋은 선수가 없다고 생각하세요?”

“그야···. 그나마 킹이 있긴 한데, 걘 솔직히 중거리를 잘 찬다기보다는 그냥 힘으로 욱여넣는···. 아!”

말을 하는 도중에 깨달음을 얻은 밀러.

이걸 잊고 있었다니. 자신의 머리가 조금 원망스러워질 정도다.

“이제 생각나셨나 보네요. 우리 팀은 작년까지만 해도 중거리 슛이 좋은 미드필더가 한 명 있었죠.”

“크흐흐. 그렇죠. 이제는 미드필더가 아니지만요.”

그의 이름은 케빈 도슨.

지금은 너무나도 중앙수비수로서의 모습이 익숙해져 그만, 잠시 깜빡 잊었었다.

“이걸 깜빡하다니. 저도 늙긴 늙었나 봅니다. 감독님.”

“그만큼 도슨이 새로운 포지션에 잘 적응한 거겠죠.”

“하긴 녀석의 모습을 보면 태생이 중앙수비수 같긴 합니다. 하여튼, 참 용하세요. 어떻게 저 녀석의 진면목을 오자마자 밝혀내신 겁니까?”

“···큼큼. 다 능력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녀석의 중거리 슛은 녹슬지 않았겠죠?”

거짓말이 아니다. 회귀도 능력이니까.

“물론입니다. 자신만의 장점을 가지고 싶다면서 중거리 슛 연습을 엄청나게 했었거든요. 그럼, 지금 지시를 내리셔야 하지 않나요? 적극적으로 공격 가담을 하라는 지시가 좋아 보입니다.”

밀러의 조언에 소하는 슬며시 고개를 저으며 부정한다.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아, 그렇군요. 제가 바보였군요.”

제안을 제시한 밀러는 경기장을 바라보며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인정했다.

이미 케빈 도슨은 평상시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며 공격작업에 가담 중이었으니까.

“역시 주장이에요. 알아서 잘하잖아요?”

“맞습니다. 감독님. 그리고 제 짧은 식견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거물이 될 친구입니다.”

뛰어난 축구 지능.

훌륭한 지도력.

타의 모범이 될 프로의식.

뛰어난 신체 조건.

그간 좋은 감독을 만나지 못해 빛을 보지 못하던 무명의 선수가 비상하기 위해 날갯짓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045화. 리그2, 후반기. (7)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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