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4화. 리그2, 후반기. (6) >
1.
-삑삑삑!
2013년의 마지막 경기의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프래튼 파크에 울려 퍼졌다.
[경기 종료! 포츠머스가 3-1로 애크링턴을 상대로 승리를 거둡니다!]
[정말 화끈한 경기였어요. 포츠머스는 말할 필요도 없고, 애크링턴도 잘 싸워줬습니다. 포츠머스 수비진의 환상적인 수비가 몇 차례 없었다면 경기의 결과는 사뭇 달랐을 겁니다.]
후반전의 경기 양상은 마치 용광로같이 뜨거웠다. 서로 가드를 반쯤 내리고서 상대를 때리는 일에만 몰두했으니까.
포츠머스야 원래 두들겨 패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는 팀. 하지만, 애크링턴의 의외였다.
이 팀이 왜 하위권에 머무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화끈한 경기력이었다.
이른 시간에 추격 골을 넣고 기세를 탄 애크링턴. 압도적인 리그 1위인 포츠머스를 연신 두들겼지만 끝내 수비진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지쳐만 갔다.
찰스 말로리의 각성.
케빈 도슨의 차가움.
골키퍼 말콤 우드의 노익장.
수비를 담당한 이 셋의 분투에 결국 애크링턴은 완전히 지쳐버렸다. 즉, 때리다가 체력이 고갈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포츠머스의 공격진은 지친 상태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처음 경험해보는 맹렬한 공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포츠머스 선수들은 다시금 원래의 모습을 회복.
남은 15분 동안 마음껏 애크링턴을 짓밟으며 추가 골을 달성했고, 경기는 종료되었다.
“재미있는 경기였어요. 콜먼 감독님.”
소하는 경기 종료 후, 애크링턴의 감독 존 콜먼에게 손을 내밀었다.
싱긋 웃는 그의 미소에는 평소와 다르게 순수한 호의와 경의만 담겼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니까.’
팬들의 추위를 몰아낸 멋진 경기는 콜먼 감독의 맞장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이것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좋은 경기였습니다. 성 감독님.”
이에 화답하듯 콜먼 감독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항상 적대적인 감독만 있는 게 아니다. 콜먼처럼 소하의 능력을 인정하는 감독도 리그2에서는 제법 많았다.
물론,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정말 지는 줄 알았어요.”
“하하. 정말 이겨보려고 했는데 아쉽군요. 팀을 정말 잘 만드셨군요.”
“과찬입니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어요. 오늘 이래저래 정말 감사해요. 배운 것도 많았고.”
후반전의 애크링턴은 정말 강하고 공격적이었다.
이렇게 공격적인 팀은 시즌 내내 처음 만나봤을 정도!
보통 다른 팀들은,
묵직한 버스 두 대를 세우거나,
최대한 느린 템포로 시간을 질질 끌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바빴다.
혹은 어쩔 수 없이 공격적으로 나올 때도 있었지만, 이것은 지고 있는 상황에서의 차선이었을 뿐.
한마디로 어설픈 공격이었다.
하지만 애크링턴은 달랐다.
팀의 기초부터가 공격적이라 공격의 질이 몇 차원이나 높았다.
‘덕분에 많은 걸 배웠어.’
리그2를 벗어난다면, 상대적으로 모두가 강팀. 그리고 강팀은 보통 공격적인 전술을 가져온다.
만약, 때릴 줄만 알고 위로 올라갔다면 크게 혼났을지도 몰랐다.
자고로, 매도 맞아본 놈이 덜 아픈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경기는 선수들은 물론이고 소하 자신에게도 많은 긍정적인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후훗.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 감독님. 많은 걸 배웠습니다. 다음번 저희 홈구장을 찾아오셨을 땐,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패배한 애크링턴.
그러나 얻어가는 것은 포츠머스보다도 훨씬 많다. 콜먼은 감독은 이번 경기로 인해 풀리지 않던 전술적 실마리를 얻었으니까.
적어도 공격, 이라고 하면 포츠머스가 단연컨대 리그2의 왕.
그런 팀에게 공격적인 전술의 영감을 얻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다시 한번 두 손을 꽉 맞잡는 양 팀의 감독.
오랜만에 보는 경기 종료 후의 훈훈한 광경이다. 맨날 악수 거부가 일상이었거늘.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엔 부족한 점이 없는 장면이었다.
2.
경기 종료 후, 기자회견.
소하는 모처럼 밝은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앉았다.
“오늘 멋진 경기를 펼쳤는데요. 그중에서도 다이스의 활약이 멋졌습니다. 따로 전술적 지침을 내리신 건가요?”
이제는 비공식적으로 소하의 담당 회견자가 된 줄리아 로버츠가 질문의 포문을 열었다.
곧 구단 내부 기자로 임명될 가능성이 크다는 소문이 파다한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소하에게 눈을 떼지 않는다.
“네 맞아요. 공격적인 움직임을 가져가라고 주문했죠. 매우 잘 이행해줘서 고맙네요.”
그러든지 말든지. 소하는 평소처럼 시큰둥하게 정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조금 전, 오늘의 MOM(Man of the Match)에 뽑힌 다이스 선수가 인터뷰를 마치었습니다. 사실, 인터뷰보다는 감독님에 대한 찬양에 가까웠는데요, 선수단과 사이가 좋아 보이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비결이 무엇인가요?”
줄리아 로버츠는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점을 정확히 짚었다.
28세의 초보 감독이 이렇게 선수단을 휘어잡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음.”
잠시 고민하는 소하. 먼저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해볼까.
“훌륭한 인품?”
“···.”
“···.”
싸아-. 분위기가 북극해의 바닷물이 들이닥치기라도 한 듯 냉랭해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경기장 내에서 길길이 날뛰던 사람이 하기엔 너무 낯부끄러운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애당초, 소하라 하면 영국 너튜버계의 샛별 아니던가. 그것도 영국에서 한국 욕을 전파하는 선구자였다. 좋게 보자면 한류 1세대랄까.
물론, 나쁘게 보자면 나라 망신일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큼큼. 농담입니다. 너무 하시네요. 이렇게 정색하시다니. 흠흠.”
“···하하. 차, 참 재미있는 농담이었습니다. 그, 그렇죠?”
“하하···하.”
“그, 그럼요.”
애써 동의하는 기자진들.
한참 잘나가는 감독과 척진다면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으니까.
알게 모르게 갑질을 펼친 소하는 짐짓 화가 난 듯 눈을 가늘게 뜨다가, 싱긋 웃으며 그럴싸한 답을 즉석 해서 내놓는다.
“나이가 비슷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능력이 받쳐주기도 하고요.”
매우 자신감 넘치는 답변!
혹자는 오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이 자리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성소하. 이 28세의 한국계 영국인이 능력이 없다면 이 세상은 무능력자들만 존재하는 세계일 테니까.
“아하. 그러시군요. 당연하게도 감독님의 능력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나이는 좀 의문이 드는데요. 보통 젊은 감독들이 선수단 장악에 힘들어하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거든요.”
젊다는 건, 그만큼 경력이 짧다는 이야기.
또한 선수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다는 증거.
정말 미친 재능이 아니고서야 젊은 나이가 감독이란 직업에 이득을 주는 경우는 매우 적었다.
“생각하기 나름이죠. 오히려 같은 세대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선수에게 접근하는 길도 있으니까요.”
“아하! 그렇군요. 그럼 그 방법을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아니요. 늘 제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 아시죠?”
알다마다. 이젠 지겨워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다.
“영업비밀을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경기에도 좋은 경기를 하시길 바랍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연말 좋게 마무리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줄리아 로버츠의 시간이 끝나고, 다른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시작된다.
연말이기도 하고 모처럼 다른 감독과 훈훈한 이야기를 나눈 소하.
기분이 괜찮은지 마지막까지 친절하게 기자회견에 응한다.
그 후, 소하가 향한 곳은 라커룸.
선수들은 옹기종기 모여 이틀간의 신년 휴가에 대해 떠들썩하게 잡담을 나누는 중이다.
-덜컥.
소하가 얼굴을 내비치자, 선수들은 잡담을 멈추고 시선을 한곳으로 모은다.
“다들 수고했다. 아니지. 한 명 빼고 수고했다.”
찌릿. 냉정하고 싸늘한 눈초리가 향한 곳은 당연히도 앤디 로버트슨.
로버트슨은 소하의 무한 뒤끝에 애써 딴청을 피우며 천장만 바라본다.
“이틀간 푹 쉬고 좋은 몸 상태로 훈련에 복귀하길 바란다. 술은 적당히 마시고. 그럼, 이만. 해산.”
이래저래 덕담이나 부족한 점을 말할 법도 하지만 빠르게 말을 마치고 선수들에게 귀가를 명했다.
이것도 소하가 이끄는 포츠머스만의 독특한 기조. 뭐든 길게 끄는 법이 없었다.
‘교장 선생이나 대대장의 연설만큼 엿 같은 게 없으니까.’
모두 경험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다.
땡볕 아래에서,
살갗이 찢어지는 듯한 추위 속에서.
힘든 훈련을 끝내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상황 속에서.
장장 십수 분의 연설을 하던 대대장의 모습은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싫었다.
싫어하는 짓을 그대로 한다면 똑같은 인간이 되는 법.
이미 마음은 새해 휴가로 떠난 선수들의 시간을 잡아먹는 짓은 정말 취향이 아니었다.
“역시 감독님은 짧아서 좋아.”
“야호. 감독님도 푹 쉬세요.”
“그럼 전 갑니다!”
후다닥. 모두가 즐거워하며 덕담을 보낼 때 로버트슨만은 재빨리 도망쳤다.
‘하여튼. 눈치는 빨라서.’
따로 불러 잡아서 잔소리 좀 해주려고 했건만. 눈치가 참 귀신같다.
“저··· 감독님···?”
모두가 화기애애 웃으며 라커룸을 떠날 때 한 선수가 홀로 남아 소하를 불렀다.
“음? 아이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주장 도슨이잖아?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일까. 사뭇 진지한 표정에 소하도 표정을 가다듬고 걱정한다.
“저 그게···.”
“편하게 말해, 편하게.”
평소 말하는 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던 선수였거늘. 꽤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혹시, 내일 약속 있으십니까?”
“···응?”
소하는 귀를 의심했다. 약속? 이걸 왜 물어보는 거지? 물론 약속 따위는 없다. 포츠머스에 미쳐있어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저, 종일 침대 위에서 뒹굴 작정이 약속이라면 약속이겠지.
“벼, 별거 아닙니다. 만약 약속이 없으시다면 저희 집에서 저의 가족들과 새해맞이 만찬을 즐겨주셨으면 했습니다. 아쉽게도 감독님같이 뛰어난 분이라면 축구계의 저명한 인사들과 약속이 잡혀 있으실 테니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정말로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겁니다. 절대로 무례를 범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
나왔다. 케빈 도슨식 보험약관 읽기.
심지어 발음이 하나하나 정확하고 또렷하다. 저렇게 빨리 말했음에도!
전문 아나운서 뺨을 후려칠 정도의 실력이다.
“그럼, 모쪼록 좋은 시간 보내시···.”
“그래. 갈게.”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꾸벅 인사를 하고 떠나려던 케빈 도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소하가 쉽게 승낙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다.
“간다고. 주소나 찍어줘. 내가 인명부 뒤져서 찾아갈 순 없잖아? 스토커도 아니고.”
“···아, 알겠습니다.”
몸을 가늘게 떨며 소하에게 주소를 알려주는 케빈 도슨. 임무를 완수하자마자 재빨리 사라진다.
“···쟨 종종, 알다가도 모르겠어. 저런 놈이 어떻게 결혼을 했을까.”
소하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을 뿐이었다.
3.
12월 31일, 오후.
모처럼 몸단장을 마치고 향한 곳은 당연히도 케빈 도스의 자택이다.
감독이 된 도리로서,
사람이 된 도리로서.
새해맞이 저녁 만찬에 초대받았는데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해하지 마라. 절대, 집의 냉장고가 비어서 가는 건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도리를 지키기 위함이다. 큼큼.
케빈 도슨의 집은 바닷가가 보이는 주택이었다. 내가 사는 고급 주택보다 비싸 보이는 멋들어진 저택이다.
아니, 대저택이다.
‘이 새끼. 이거 뭐야. 4부리그 선수가 살만한 집이 아닌데?’
4부 리그 선수가 50년을 뛰어도 구매하지 못할 대저택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널찍한 1층 정원에는 커다란 수영장마저 있다.
종종 영화에 나오는 멕시코 마약왕들이 사는 집. 그 집과 똑 닮았다.
“뭐야. 이 새끼 알고 보니 다이아 수저였어? 기만충이었네.”
보통 수저도 아니다.
최소 다이아 수저. 이것 말고는 설명이 어렵다.
-딩동.
조심스럽게 현관 벨을 누르자,
-스르륵.
잠금장치가 매우 조용히 풀리며 문이 열렸고 한 여자가 얼굴을 빼꼼 내민다.
“어서오세요!”
생글 웃으며 날 반기는 여자.
엄청난 미인이다.
그리고 어디서 봤던 거 같은 기시감마저 든다. 어디서 봤더라? 이상하다. 분명 저 정도 미인을 봤다면 기억에 또렷이 남았을 텐데 말이야.
“후훗. 성소하 감독님이시죠?”
“아···. 네. 인사가 늦었네요. 성소하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얼떨떨하게 인사하자 묘령의 미인도 생긋생긋 웃으며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전 나탈리 도슨이에요. 케빈 도슨의 부인이랍니다!”
“아하··· 네 잘 부탁드립니다···?”
자, 잠깐. 나탈리 도슨? 알고는 있는 이름이다.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도슨의 아내인 것도 당연히 알고 있다.
어디까지나 이름으로만 말이다.
‘하지만 저 얼굴의 나탈리 도슨이라면.’
한참 영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20대 미녀 여배우 아니던가!
“후훗. 맞아요. 부족하지만 배우로서 얼굴을 알린 그 나탈리 도슨이랍니다.”
“···.”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정답을 말해주는 나탈리 도슨.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난 모처럼 뇌 정지가 왔다.
너무 유명한 사람이라서? 아니다.
너무 예쁜 사람이라서? 아니다.
‘개새끼···. 부럽다···.’
그저 케빈 도슨이 부러웠으니까.
부러워서 미칠 거 같았으니까!
배가 아파서 응급실로 실려 가고 싶었으니까!
배신감마저 든다. 그저 그런 4부 리그 선수인 줄 알았건만.
나랑 동류인 줄 알았건만!
‘다음 주장을 미리 골라놔야겠군.’
내 흉흉한 마음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나탈리 도슨은 우아하게 팔을 뻗으며 다시 한번 힘차게 환영 인사를 건넨다.
“후훗. 어서 오세요! 케빈 도슨과 나탈리 도슨의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에!”
순간, 그냥 돌아가고만 싶었다.
< 044화. 리그2, 후반기. (6)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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