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3화. 리그2, 후반기. (5) >
1.
2013년 마지막 경기.
포츠머스의 압도적인 승리!, 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우려하던 수비 문제가 터졌으니까.
전반전에만 2-0으로 앞서가는 일방적인 경기였지만, 후반전엔 꽤 치열한 난타전이 펼쳐질 기세다.
그리고 그 시발점은 바로, 애크링턴의 공격수 요셉 번의 발끝에서 시작되었으니,
[애크링턴의 요셉 번! 멋진 개인기로 찰스 말로리를 무장해제 시킵니다! 골키퍼와 1대1 찬스! 요셉 번, 요셉 번! 고오올!]
[멋진 개인 기량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기어코 살리네요!]
“젠장.”
애크링턴의 9번, 요셉 번의 현란한 개인기에 말 그대로 녹아버린 찰스 말로리.
잔디를 주먹으로 후려치며 매우 분노한다.
“괜찮습니다. 말로리. 제가 같이 붙어 줬어야 했습니다.”
주장인 케빈 도슨이 다가와서 달래보지만 말로리의 인상은 쉽게 펴지지 않는다.
“아니. 네 판단은 맞았어. 네가 날 도와줬다면 녀석은 패스를 했을 테고, 결과는 똑같았을 거다.”
사실이었다. 전방 압박의 실패로 두 명의 공격수에게 역습을 얻어맞던 상황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전방 압박에 실패한 선수들이나 리커버리가 늦은 선수를 탓하는 게 옳았다.
아니, 애초에 누굴 탓하기보다는 매우 공격적인 팀 성향이 문제였을 뿐.
그리고 찰스 말로리는 누구에게 화가 나거나 다른 이유에 탓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화가 난 대상은 오로지 자신이었을 뿐.
‘젠장. 예전 같았으면 당하지 않을 개인기였는데.’
찰스 말로리. 32세.
축구선수로서 슬슬 꺾여가는 나이.
예전 같았으면 절대 당하지 않던 플레이였건만. 뻔한 스텝오버라고 머릿속으로 예상했음에도 반응이 늦은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다.
‘바뀐 식단 덕에 그동안은 그럭저럭 폼을 유지했지만···. 23경기 연속 풀타임은 슬슬 버겁군.’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기초 체력이 떨어져 연속된 풀타임 출전에 몸이 둔해진 것뿐.
사실, 구단 내에서 가장 혹사당하는 인물은 두 중앙수비수들이었다.
케빈 도슨, 23경기 23선발 0교체.
찰스 말로리, 23경기 23선발 0교체.
그나마 활동량이 적은 중앙수비수 자리라 버틴 것이었지, 미드필더였으면 노인혹사 이야기가 나와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더군다나 파트너인 케빈 도슨은 24세의 한창때 나이. 지친 기색이 전혀 없는 그의 모습과 비교되어 찰스 말로리는 더욱 분했다.
“감독님. 찰스 말로리가 좀 지쳐 보이지 않습니까? 이참에 교체를···.”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밀러 수석코치.
소하에게 넌지시 교체를 권유해본다.
“아니요. 이럴 때일수록 믿어줘야죠.”
하지만 소하는 단호히 거절.
그의 입에서 믿음이라니. 이처럼 어울리지 않은 단어도 별로 없을 거다.
“하지만···. 이제 한 골 따라붙은 애크링턴이 기세를 탈 텐데요. 점점 일대일 상황이 많아질 겁니다.”
감독에 대한 재능이 없는 밀러지만, 경기장 분위기는 잘 파악한다. 그도 20년을 경기장에서 구르고 구른 중견이니까.
축구판에서 기세란 정말 무섭다. 한번 불이 붙으면 짧게는 5분.
길게는 10분에서 15분.
이 시간 동안은 아무리 약팀이라도 강팀을 상대로 매섭게 공격을 퍼붓는 때이다.
일종의 피버타임이랄까.
현 스코어는 2-1.
후반 이른 시간의 따라붙는 골.
기세를 타지 못한다면 감독이 문제인 거다. 혹은, 아예 망한 팀이거나.
적어도 애크링턴은 둘에 해당 사항이 없는 팀이었다.
“그렇겠죠. 그래도 교체는 안 돼요.”
“아, 알겠습니다. 근데, 이유를 말해주실 순 있습니까?”
소하는 잠시 콧잔등을 긁다가 경기가 재개되자 밀러의 의문을 해소해준다.
“저 녀석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니까요.”
“자존심이요?”
자존심이라니. 팀의 성적보다 선수 개인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것이 우선이란 말인가?
좀처럼 소하답지 않은 대답에 밀러의 궁금증은 더욱 증폭된다. 뭘 잘못 먹었나 싶기도 하다.
“후후. 그런 표정 짓지 마요. 뭐 잘못 먹지 않았으니까.”
소하는 밀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아저씨의 생각처럼 이번 경기는 말아먹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리그는 이제 겨우 반환점이에요. 한참 남았다는 거죠.”
“그, 그렇죠.”
“이런 상황에서 교체해준다면 만천하가 자신이 늙었음을 알 거고, 자신감은 뚝 떨어질 것에요. 그럼 그땐 정말로 늙어버리는 거죠.”
“···.”
“아직 할 수 있다, 싶을 때 이겨내 줘야 해요. 그리고 전 그가 이겨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고요. 또 그래 줘야만 하고요.”
찰스 말로리. 과거엔 소하와 지독한 악연이었던 사이.
지금은 주장이란 직을 벗어던지고 훌륭한 선수로 탈바꿈했지만, 사람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강한 자존심.
한때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주목받았었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같은 프리미어 출신인 마이클 반즈와는 180도 다르지만 말이다.
주장직을 내려놓으면서 많은 걸 내던진 찰스 말로리. 아직 최고의 리그에서 뛰었던 자부심만큼은 홀로 남아 그를 지탱해주는 기둥이었다.
“녀석은 이겨줘야 해요. 그래야지만 리그2뿐만이 아닌, 다음, 다다음 스텝까지 팀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젊은 선수가 많은 팀 사정상 ‘베테랑’이 건재해 줘야 해요. 찰스 말로리는 그 시험대에 오른 거죠.”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밀러는 조용히 고개를 끄떡였지만 속은 전혀 달랐다.
‘도대체··· 감독님은 어디까지 보고 계신 걸까.’
설마 부임 첫 기자회견 때의 3년 계획이 진심이었단 말인가?
전반기, 압도적인 성공 때문에 모두가 잠시나마 잊은 3년 계획.
3년 내로 프리미어 리그로 돌아가겠다는 허황한 꿈!
지금 하는 말로 미루어 볼 때는 단순히 관심을 끌기 위한 발언이 아니었나 싶다.
‘아니야. 오히려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듯한···.’
감독이 보는 미래는 도대체 어디일까.
도저히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망해버려 기둥조차 남지 않은 팀을 프리미어 리그로 복귀만 시켜준다고 해도, 홈구장 앞에 거대한 동상이 세워질 업적.
포츠머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칭송받게 될 거다.
‘설마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생각이 너무 갔나 싶어 머리를 절레절레 내젓는 밀러. 복귀 이상은 감히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뭐, 같이 있다 보면 알겠지.’
소하의 목표가 영국제패를 넘어 유럽제패란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밀러였다.
“그럼 만약, 이겨내지 못하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밀러의 신중한 질문에 소하는 큰 고민 없이 냉정하게 읊조린다.
“그땐, 이별을 준비해야겠죠.”
2.
후반 10분.
소하와 밀러의 예상대로 경기는 애크링턴이 기세를 잔뜩 끌어올린 채 경기를 지배한다.
[애크링턴의 기세가 매섭습니다. 후반 이른 시간 한 골 따라붙으며 팀이 정신을 차렸어요!]
[포츠머스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대로 파도에 휩쓸려버린다면 다이스의 엄청난 활약에도 승리를 잃을지도 몰라요.]
장내 아나운서의 말처럼 포츠머스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
이런 상황에서 감독이 가져가는 방법은 꽤 여러 가지다.
첫째로, 선수교체.
천천히 선수를 바꾸어주면서 흐름의 맥을 끊는 방법. 매우 익숙한 방법이다. 후반 추가시간에 시간을 질질 끄며 교체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긴장감을 뚝 떨어지게 했으니까.
둘째로, 전술 변경.
위의 방법과 동시에 사용하기 좋다. 천천히 선수를 바꾸며 조금 더 수비적으로 전술을 변경해, 기세가 끊길 때까지 버티는 것.
셋째는 현상 유지.
어차피 기세란 일시적인 현상. 잘만 틀어막는다면 제풀에 지쳐 쓰러질 테고, 분위기는 다시 바뀔 테니까.
관중들과 관계자들도 소하의 선택이 궁금한지, 슬쩍 대형스크린에 그를 비춘다.
모처럼 후끈한 경기.
이 경기에서 괴짜, 혹은 천재인 그의 선택은 무엇일까.
세간이 궁금증을 가질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하는 팔짱을 낀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아, 성 감독은 일단 지켜보려는 모습이군요. 과연 감독의 선택은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궁금하군요.]
[그간 성 감독의 모습은 즉각 즉각 교체하며 대응하는 타입이었는데요. 의중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화끈한 사전 준비와 비교해 정적인 움직임. 꽤 생소한 모습에 다들 의아해한다.
때문에, 경기는 계속해서 애크링턴의 공세.
다이스의 멋들어진 4번째 전환 패스를 로버트슨이 트래핑 미스를 내며 공을 상대하게 헌납한다.
한참 공세로 전환하는 시점.
가장 위험한 횡패스의 실패.
위치는 하프 라인 근처.
굉장히 위험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
포츠머스는 순식간에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부닥친다.
“야이 씹! 로보야! 축구화에 불광냈어? 트래핑을 우리 할머니보다 못하네! 너 이 새끼 내일 나와!”
버럭! 오늘따라 유달리 잠잠하던 소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분노한다.
우렁찬 응원 소리를 이겨낼 정도의 엄청난 폭언!
당연하게도 로버트슨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히익.”
어깨를 움츠리며 눈에 불을 켜고 리커버리를 시도하는 로버트슨.
아쉽게도 이미 기세가 붙은 애크링턴의 공격진들은 달리는 속도를 늦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애크링턴! 로버트슨의 실수로 동점 골 찬스를 얻습니다!]
[2:2 상황! 수비수와 공격진의 숫자가 같아요! 이러면 공격 쪽이 훨씬 유리하죠.]
추격 골을 얻어맞았을 때와 똑같은 그림.
왼쪽 중앙수비수인 케빈 도슨은 지침대로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상대를 지연한다.
이른바, 백스틱(Back Stick) 수비.
역습상황에서 순간적인 방향 전환에 역동작이 걸린다면 매우 위험.
이를 방지하기 위한 수비 기술 중 하나다.
번질 반다이크,
라파엘 바란.
등등.
체격이 큰 선수들이 즐겨하는 수비 방법이기도 하다.
케빈 도슨은 아직 그 선수들과 비교되기엔 한참 모자라지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과연, 소하가 믿는 선수다운 움직임.
“쳇.”
거침없이 질주하던 애크링턴의 11번, 말랑 자르는 인상을 찌푸린다.
케빈 도슨의 수비가 너무나도 단단하고 침착해, 거대한 빙벽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자력으로는 도저히 뚫을 길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끈다면 뒤에서 맹렬하게 달려오는 로버트슨이 뒤를 덮칠 터.
남은 건 패스밖에 없다.
“받아!”
말랑 자르의 패스는 애크링턴의 주전 공격수이자, 추격 골을 넣은 요셉 번에게 향한다.
다시금 찾아온,
요셉 번과 찰스 말로리의 일대일 매치!
후반전의 첫 골을 넣은 상황과 복사 붙여놓기라도 한 듯 똑같다.
“후훗. 이번엔 어떻게 요리해 줄까요? 전임 포츠머스 주장?”
슬쩍 상체를 흔드는 요셉 번은 잔뜩 이죽거리며 찰스 말로리를 도발한다.
딱히 찰스 말로리한테 악감정을 가지지는 않았다.
다만, 좀 전에 자신에게 당하고 나서 매우 화내던 모습을 봤을 뿐.
요컨대, 트래쉬 토크다.
종종 인성 나쁜 놈들은 진심으로 험한 말을 하며 상대의 기를 죽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상대를 동요하기 위해 도발하는 모습은 매우 흔했다.
트래시 토크로 이득을 본 대표적인 예는 2006년 독일 월드컵 결승전.
지단과 마테라치.
마테라치와 지단.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지단의 박치기 사건도 트래시 토크로부터 시작됐으니까.
물론, 여기서 마테라치는 ‘안느’에게 인종차별을 했던 쓰레기 선수였지만 말이다.
“흥.”
다행스럽게도 찰스 말로리는 쉽게 도발에 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빛이 가라앉으며 좀 더 집중력을 끌어올릴 뿐.
이것이 바로 짬밥, 아니, 프로선수로서 쌓아온 경력이다.
왜 굳이 공보다 입을 먼저 움직였는지 찰스 말로리 본인이 가장 잘 알았으니까.
‘쳇. 이거 안 통하는데?’
무게중심이 낮고 집중력이 극한으로 오른 상태. 요셉 번은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한다.
‘먼저 미끼를 던지자.’
슬쩍 오른발로 잔발을 치며 혼란을 유도하는 요셉 번.
이 정도로 통할 거라고 생각지 않지만, 일단은 미끼를 던져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어?!’
찰스 말로리가 그대로 잔발에 속아 넘어가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회다.’
민첩성은 체구가 작은 요셉 번이 몇 수 위. 이미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린 찰스 말로리를 요리하기엔 쉬운 일이다.
재빨리 왼발로 드리블을 치고 나가려는 요섭 번!
이대로 달려 나가 찰스 말로리를 무장해제 시키고 동점 골을 넣어버린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쿵.
“어억.”
마음껏 몸을 놀리며 동점 골을 노리려고 했건만. 두툼한 근육질의 어깨에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흥. 아직 배울 게 많다.”
결정적인 가로채기를 기록한 찰스 말로리는 빼앗은 공을 케빈 도슨에게 침착하게 건네며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공격수만 미끼를 던질 줄 알았나?”
“···하하. 한 수 배웠네요.”
요셉 번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과연, 프리미어 리그 출신은 남달랐다.
오히려 수비수가 페이크를 주고 길을 유도할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위험천만한 상황에!
큰 덩치와 근육질의 몸에 비해 머리가 영민하기 짝이 없다. 이것이 바로 경험이란 말인가. 과감하면서도 침착한, 아무나 흉내를 내기 힘든 수비였다.
‘흐음.’
멋진 수비로 한 골을 막아낸 찰스 말로리. 그는 슬쩍 테크니컬 에어리어의 감독을 훔쳐본다.
그보다도 어린 신임 감독은 그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그저,
“야이 로보 새끼야! 너 경기 끝나고 축구화 닦을 준비 하고 있어!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트래핑을 그따위로 하냐? 느그 나라 스코틀랜드에서 그렇게 가르치디? 축구 때려치우고 가서 럭비나 해!”
실수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로버트슨을 욕하기 바쁘다.
얼핏 보기엔 환상적인 수비를 해낸 찰스 말로리에게 관심조차 없다.
흔한 칭찬 한마디 던져줘도 될 텐데 말이다. 사람에 따라선 매우 실망할지도 모르는 태도다.
매우 훌륭한 수비였으니까.
한 골을 막아낸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칭찬을 열 번 받아도 부족한 엄청난 플레이였으니까.
하지만, 말로리는 피식 웃음 짓는다.
‘훗. 그래야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칭찬이 필요하겠는가.
오히려 소하가 칭찬을 했다면 존 말로리는 실망했을지도 몰랐다.
‘감독, 당신은 날 믿어주는군. 그럼 계속 믿음에 보답해줘야겠지.’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존 말로리.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자신의 나이 따위는 저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 043화. 리그2, 후반기. (5) > 끝
ⓒ 블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