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0화. 리그2, 후반기. (2) >
1.
조쉬 킹.
18세.
그는 새해를 앞두고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하루 종일 인상을 찌푸릴 정도.
오후, 개인 훈련 시간.
근력 운동을 하는 중에도 딱딱히 굳은 얼굴은 좀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평소 장난을 잘 치는 사이인 존 말로리도 그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좀처럼 말을 걸지 못한다.
이럴 때 나서야 할 사람은 포츠머스란 작은 구단에서는 단 다섯뿐.
감독, 성소하.
절친, 칼빈 필립스.
절친2, 델리 알리.
주장, 케빈 도슨.
부주장, 잭 해리슨.
이 다섯이 아니라면 괜히 말을 걸었다가 본전도 건지지 못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매우 불행하게도 주장과 부주장은 오늘 근육운동을 하는 날이 아니었고, 델리 알리는 기초훈련을 하러 훈련장 필드에 나가 있다.
점점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웨이트 트레이닝 룸.
원래 뿔난 애새끼는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 아니던가. 모두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덜컥.
“어, 뭐야? 왜 이렇게 분위기가 싸해요? 겨울이라 그런가.”
마침, 구세주가 등장했다.
모습을 드러낸 어린 선수의 이름은,
칼빈 필립스.
리즈 유나이티드의 열렬한 서포터이자, 여름 이적시장 마감일에 포츠머스에 합류한 신성.
같은 자메이카계인 조쉬 킹과 4달 만에 죽마고우가 된 선수였다.
“너 표정은 왜 그러냐? 똥 싸다가 스마트폰 변기통에 빠트렸어?”
절친한 친구답게 표정이 어떻든 일단 말을 던져보는 칼빈 필립스.
순간, 둘을 제외한 웨이트를 하는 선수들의 시선이 둘에게 쏠린다.
“···시끄러워.”
“뭔 헛소리야? 너무 조용해서 물어보는 거잖아. 오히려 니가 입술 내놓고 씩씩거리는 게 제일 시끄러워.”
그렇다.
칼빈 필립스, 18세.
순박한 외모와는 다르게 꽤 입이 거친 친구였다.
겉모습과 성격이 다른 선수는 꽤 많았는데, 앤디 로버트슨은 모범생처럼 생겼지만 엄청난 까불이였고.
“···.”
“자꾸 분위기 싸하게 만들면 너희 아버지한테 다 말할 거야. 분위기 지랄 냈다고.”
“그건 안돼!”
버럭! 조쉬 킹의 반응은 빨랐다.
그의 아버지이자, 킹 가문의 가장인 라이언 킹! 이름답게 성격은 사자 그 자체라 조쉬 킹이 소하 다음으로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그럼 왜 이러는지 설명이나 해봐. 넌 선배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그,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진짜 안 되겠네. 너희 아버지로는 안 되겠어. 감독님 찾아뵈러 간다.”
“아, 알았어. 가지 마!”
덤벨을 내팽개치고 칼빈 필립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조쉬 킹.
소하에게만은 안된다. 소하에게만은!
그 성격 더럽고 입도 더러운 감독님에게 이 일이 알려진다면 최소한 일주일은 오버헤드킥 훈련이었다.
“그럼 빨리 말해.”
“···그 있잖아. 아침에 말이야···.”
꿀꺽.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사태를 지켜보던 선수들이 마른침을 삼킨다.
과연, 어떤 일이길래 온종일 생떼를 부린단 말인가. 무척 궁금하다.
“알리가 자랑하더라고.”
“뭘?”
“어제 개인 면담 시간에 감독님이 최고급 차를 직접 내려주셨다고···.”
“···그게 끝?”
“응.”
“···.”
웨이트 트레이닝 룸은 전보다 훨씬 싸해졌다. 다들,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고작 이딴 사소한 이유로 이 난리를 피우다니. 역시, 이 자식은 애새끼였다.
“겨우 그딴 거 때문에?”
“겨우 그딴 거라니. 넌 이미 받아마셔서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뭐, 맛있긴 했지. 내가 마셔본 최고의 차였어.”
“···시끄러워. 잘난 척하지 마. 나랑 몇몇 빼고는 모두 한 번씩은 마셔봤는데, 나만 못 마셔봤어.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으아아!”
지랄발광을 떠는 조쉬 킹.
얼굴엔 억울함이 가득하다.
그도 고급 차를 대접받기 위해 이것저것 다 해봤거늘.
주장과 부주장처럼 모범 시민인 척도 해봤으며, 필립스처럼 기초훈련을 따로 해보기도 했다.
이뿐이겠는가? 한 달 전엔 하비 셸비가 대접받았다는 소문에 머리를 밀어버린 적도 있다.
하비 셸비라 하면, 감독과 사이가 썩 좋지 않은 선수. 그가 내세울 거라곤 반들반들한 대머리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조리 실패. 오히려 머리를 빡빡 깎고 온 날에는 빈 생수병을 집어던졌다. 개기는 거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말이다.
“도대체 방법이 뭘까. 좀 알려주라. 친구야. 이러다가 저기서 석 달째 오버헤드킥 연습 중인 스펜서 형씨랑 동급이 되겠어.”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난 첫날부터 대접받아서···. 종종 녹차를 받기도 했는데, 그날마다 내 훈련성취가 썩 좋지 않기는 했지.”
칼빈 필립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녹차를 받은 뒤로는 훈련에서 집중을 잃지 않았더니 항상 고급 차를 대접받았으니까. 왜 조쉬 킹이 못 받는지는 잘 몰랐다.
“나 훈련 진짜 열심히 하는데.”
“그건 그렇지.”
훈련량으로만 따지면 조쉬 킹을 따라올 자가 없다.
이미 4달 전과 비교해선 육체 레벨의 차원이 다를 정도.
겉보기에도 엄청난 벌크업을 이루었다.
이제 마른 체형의 큰 키는 옛말.
제2의 영양 총괄 겸 피지컬 코치라고 불리고 있다.
“근데 왜 안 주실까?”
“물어봐봐. 아, 맞다. 너 감독님이 오라고 했어. 이거 전하려던 거 깜빡했네.”
“설마 드디어 차를 주시려고 하나?”
“그건 나도 모르지. 하여튼 빨리 가봐. 니 생떼 부리는 거 받아주다가 시간 잡아먹었으니까. 이제 1분 남았네. 늦으면 혼날걸?”
“미친! 이 자식아, 너무 늦게 말했잖아! 너 때문에 감독님한테 혼나면 진짜 복수한다!”
후다다닥. 두 눈을 부릅뜬 채 전력 질주를 하는 조쉬 킹. 어지간히도 놀랐나 보다.
“휴우.”
칼빈 필립스는 친구의 얼빠진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이기는 한데, 좀 많이 부끄러웠으니까.
“죄송합니다. 선배님들.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꾸벅. 피식피식 웃으며 촌극을 바라보던 고참 선수들에게 대신 사과를 전하는 칼빈 필립스.
그런 그에게 존 말로리를 비롯한 선배 선수들은 가만히 그의 등을 토닥여줬다.
네가 고생이 많다는 뜻이었다.
2.
3분이나 늦은 조쉬 킹.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봤지만, 너무 시간이 촉박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마음의 각오를 마쳤다. 분명, 불호령이 떨어질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이게 웬걸.
“어이구. ‘우리’ 킹이가 왔구나?”
귀신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알았건만. 웬 천사 하나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반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아직 방심은 이르다. 더 큰 공포를 느끼게 하려는 수작일지도 모른다. 많이 당해봤던 시나리오였다.
“가, 감독님. 조, 조금 늦었네요.”
슬쩍. 눈치를 보는 킹.
시선을 돌려보니 소하의 책상엔 세 가지 물건이 눈에 띈다.
빈 생수병.
중국산 녹차 티백
그 전설의 고급 찻잎.
이것은 앞으로의 행동에 따라서 받게 될 포상이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후후후. 늦긴. 겨우 3분 14초 정도 늦었는데. 그 정도는 ‘우리’ 킹이니까 충분히 봐줄 만하지.”
“···.”
변명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참았다. 여기서 변명을 입에 담았다간 아예 일이 틀어짐을 몸으로 체득했으니까.
“자, 이리 와서 앉으렴.”
“네, 넵 감독님.”
조쉬 킹이 자리에 앉자 소하는 미리 책상 위에 올려둔 물건 세 개를 번갈아 가며 만지작거리다 입을 뗀다.
“킹아. 넌 우리 팀의 유소년 출신이잖니?”
“그렇죠. 저야말로 로얄 블러드죠.”
“그래, 그래. 참 자랑스러워. 성골 유스가 팀 내에서 득점 1위라니.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나올 거 같달까.”
소하는 고급 찻잎 통을 만지작거리며 방싯 웃는다.
그 웃음과 칭찬에 조쉬 킹의 경계심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원체 단수한 성격인지라.
“우헤헤. 제가 바로 구단의 자랑이긴 하죠! 하하핫!”
샤샥. 순식간에 빈 생수병으로 손을 옮기는 소하.
물론 이 손놀림은 조쉬 킹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무, 물론, 위대한 감독님의 수준이 높은 지도 덕분에 제가 이렇게 골을 많이 넣는 거죠. 그렇고 말고요.”
“그렇지? 우리 킹이의 빨아주는 솜씨가 제법 늘었어. 대견해.”
“헤헤. 다 감독님 덕분이죠.”
다시금 고급 찻잎으로 향한 소하의 손을 보며 조쉬 킹은 매우 좋아한다.
“그럼 우리 로얄 블러드, 킹이는 그거 알고 있니?”
“뭘요?”
“우리 팀에 너랑 똑같은 성골 유스 선수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째릿. 입은 웃지만, 눈빛만은 예리한 명도처럼 날카로운 소하.
조쉬 킹은 바로 느꼈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한다면 바로 빈 생수병이 날아올 거란 걸.
‘꿀꺽.’
두뇌 풀가동!
축구 경기를 할 때 빼곤 좀체 사용하지 않는 CPU가 맹렬히 회전한다.
잠시 뒤.
드디어 답을 도출. 속으로 자신의 머리를 칭찬하며 해맑게 웃는다.
“감독님이죠! 감독은 12번째 선수! 거기다가 감독님이야말로 미스터 포츠머스의 아들이자, 유소년출신! 하하! 알고 보니 저랑 감독님은 같은 근본이었네요! 동류랄까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도 완벽한 대답이었다. 백 점 만점의 만점이랄까.
하지만,
“이 새끼가···?”
뿌드득. 이 갈라는 소리가 조쉬 킹의 고막을 날카롭게 후벼판다.
오답이다. 완벽한 오답!
“12번째 선수는, 팬이고. 이 자식아. 지금 나랑 장난해?”
“가, 감독님.”
“그리고, 은근슬쩍 지랑 나랑 동급으로 놓고 있었나 보네? 하 안 되겠다. 오늘 한 푸닥거리 해야겠네.”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계를 푸는 소하의 모습에 조쉬 킹은 다시 한번 두뇌를 혹사한다.
그리고 결국 정답을 도출.
“자, 잠깐만요. 매튜. 매튜 다이스가 저랑 같은 유소년선수 출신이죠. 그렇죠. 맞죠? 이게 정답이죠?”
“···.”
잠시 싸늘하게 조쉬 킹을 내려다보던 소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그래 맞아. 매튜. 너보다 한 살 많은 형 말이야.”
“아, 저보다 형이었어요?”
“···넌 매튜랑 별로 친하지 않은가 보구나? 어떻게 나이도 모르니.”
동료의 나이도 모르다니. 물론 선후배 문화가 그리 강하지 않은 서양은 다들 친구처럼 지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래도, 같은 아카데미 출신으로서 수년은 함께한 사이이거늘.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네. 애가 좀···. 뭐라고 해야 하지. 말이 없잖아요. 음침하기도 하고. 예전엔 몇 번 친해져 보려고 했는데, 별로 반응이 없길래 그만뒀어요.”
“그랬구나. 그럼 다이스에 대해서 아는 건 아무것도 없겠네?”
“뭐···. 그렇죠.”
소하는 눈을 샐쭉하게 뜨며 생각에 빠진다.
‘흠. 좀 친한 사람한테 사적으로 어떤 친구인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 이정도면 어렵겠는걸?’
매튜 다이스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도통 경기력에 발전이 없다.
그렇다고 엿같은 인종차별주의자 스펜서 보이드를 기용할 순 없는 노릇.
‘암만 개인 면담을 해봤자 항상 무미건조한 놈이라 효과가 없어서 차선을 선택했건만. 일이 꼬였어.’
더 골치가 아픈 건 신체적 데이터는 계속 우상향 중이라는 사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분명 쓸만한 선수라는 이야기였다.
‘공적으로는 흠잡을 곳이 없어. 훈련도 잘하고, 연습경기에서도 준수하고. 근데 왜 경기만 나가면 평범해지냐고.’
사적인 부분이 문제임이 확실하다.
그래서 뒷조사를 해보려고 했지만, 그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조쉬 킹마저 아는 게 없으니. 답이 없다.
“아! 맞다. 저는 별로 친하지 않긴 한데요. 팀에서 친한 사람이 한 명 있어요. 아마 구단 내에서 유일할걸요?”
“오! 누군데!?”
녹차나 한 잔 타주고 조쉬 킹을 내보내려던 소하는 반색을 하며 되물었다.
“러셀이요. 커너 러셀이랑 친해요.”
“러셀? 내가 아는 러셀이 맞아?”
커너 러셀.
25세의 활동량이 많은 수비적인 미드필더. 이번 시즌 소하가 상당히 중용하는 선수였다.
특징으론 말이 전혀 없다는 점.
덕분에 벙어리라는 별명마저 붙었다.
“그럼요. 제가 아는 러셀도 한 명뿐인걸요.”
“진짜야? 믿기지 않는데.”
소하는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러셀과 다이스.
둘 다 말이 없기로는 소하의 인생을 통틀어서도 한 손에 꼽혔으니까.
‘뭐 텔레파시라도 쓰나?’
친해지려면 대화가 기본.
기본마저 되어있지 않은 둘이 사이가 좋다는 게 농담처럼 들린다.
“진짜라고요. 한 달 전쯤인가? 그때 다운타운에서 둘이 같이 다니는 걸 봤다니까요. 둘이 뭐라 뭐라 말하면서 웃기까지 하던데요. 진짜예요!”
소하가 좀체 믿지를 않자, 조쉬 킹은 억울하다는 듯 열변을 내뿜었다.
“호오. 이정도면 믿을 만하겠군.”
“지금 당장 러셀 형을 불러봐요. 아직 수영장에 있을 테니까요.”
“좋아. 한번 믿어볼게. 아주 훌륭한 정보였어. 그럼 온 김에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갈래? 뭐 마실래?”
“그거야 당연히···.”
물론, 조쉬 킹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040화. 리그2, 후반기.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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