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8화. 리그2, 전반기. (8) >
1.
평소보다 훨씬 일찍 출근한 브라이언. 얼굴엔 초조함이 가득하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소하의 징계 때문.
징계 정도에 따라 향후 행방이 갈렸으니까.
현 리그 상황은 굉장히 치열하다.
1위. 포츠머스 8승3무1패. 27점.
2위, 체스터필드 6승4무2패. 22점.
3위, 옥스퍼드 6승3무3패. 21점.
4위, 사우스엔드 5승5무2패 20점.
5위, 로치데일 6승1무5패 19점.
6위, 요크 시티 5승2무5패 17점.
7위, 버턴 앨비언 4승4무4패 16점.
리그 12라운드까지의 순위.
포츠머스를 제외하고선 2~7위까지는 승점 1점 차이로 순위가 뒤집히는, 굉장히 치열한 시즌이다.
2위와 승점 5점 차이로 단독 선두에 오른 포츠머스는 당연하게도 화제의 중심.
반년 전만 해도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며, 구단해체 위기를 맞이하던 구단의 성적이라고 보기엔 믿기지 않는다.
이 모든 일에는 동양계 혼혈인 젊은 감독, 성소하의 공이 가장 컸다는 데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을 정도.
물론, 이 사실은 브라이언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아니,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구단의 CEO였으니까.
‘그래도 앞으로 더 치고 나가야 한다. 미래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브라이언, 그도 축구계에서 10년 가까이 구르고 구른 인물. 지금의 순풍을 잘 타야지 거대한 대양을 헤쳐나갈 수 있을 터.
‘감독이 자리를 비운다면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참, 어쩌다가 한낱 방패막이가 이리 중요해졌는지 모를 일이군.’
성 감독의 선임은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었다.
방패막이.
구단의 상황은 너무나도 좋지 않아 내셔널 리그, 즉 아마추어 리그로 강등당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면피용 선임이었다. 모든 것을 감독 탓으로 돌려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하지만.
성소하는 태풍을 일으켰다.
최악의 상황에서 몇 없는 선수들의 잠재성을 폭발시켰으며,
팀에 관심이 없는 구단주를 설득해 자금을 투자받기도 했으며,
빈곤하기 짝이 없는 재정 상황 속에서 뛰어나고 어린 선수들을 매우 싼값에 팀에 합류시켰다.
더는 단순한 방패막이가 아니란 이야기.
오히려 포츠머스란 망해버린 구단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자리를 잡았다.
그것도 고작 4개월 차 만에!
‘아직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야. 어떻게든 협회에 고개를 숙이게 해야 해.’
그간 봐왔던 성소하의 성격으로 짐작하건대, 협회에 절대 굴복하지 않을 거다.
그 대상이 FA일지라도.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야만 했다.
팀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성 감독은 매우 일찍 출근하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밥을 먹기 위해서, 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브라이언.
최대한 일찍 출근해 소하를 기다리고 있었건만.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홍보팀의 신입, 에밀리아 존슨이다.
“앗. 사장님. 이 시간에 왜 클럽하우스 정문에서 서성이세요?”
에밀리아는 초조한 기색의 브라이언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질문을 던졌다.
“큼큼. 별일 아닙니다. 그나저나 매우 일찍 출근하시는군요.”
“아, 한국어 공부를 하느라요.”
“잘되고는 있습니까?”
“네. 요즘 들어 꽤 많이 늘었다고 감독님이 칭찬해주셨어요.”
방실방실 웃는 에밀리아.
브라이언의 속도 모르고 세상 해맑다.
‘호오. 성 감독이 존슨 씨의 공부를 도와주고 있다, 라. 좋은 정보군.’
지금은 소하에게 완벽히 판정패 당한 구단 내부의 권력투쟁.
하지만 아직 브라이언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금 권력을 잡기 위해선 이런 작은 정보도 중요하다.
“그것참 좋은 소식이군요. 아, 그나저나 존슨 씨는 성 감독이 몇 시쯤 출근하시는지 아십니까?”
“아! 감독님을 기다리고 계셨군요. 보통은 제가 출근하고 30분 뒤에 나오시죠.”
“얼마 남지 않았군요.”
일찍 출근한 것이 헛수고는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그런데···.”
“그런데?”
“오늘 날짜를 잘못 잡으셨어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날짜를 잘못 잡다니. 성 감독이 오늘은 늦게 출근하는 날이란 말인가?
“저··· 그게···. 오늘 감독님은 월차를 내셨거든요. 어제저녁에 전화로 일방적으로 말씀하시고 끊어버리셔서···.”
브라이언은 다소곳이 사정을 설명하는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오늘 꼭두새벽부터 고생한 보람이 사라지는 충격에 그만, 잠시 넋을 놓아버렸을 뿐이었다.
2.
승부 조작.
어느 스포츠이건, 어느 나라에서건(?) 강력히 처벌하는 심각한 범죄행위.
자칫하다간 스포츠의 존재 의미마저 부정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금기시되는 행위다.
영국에서도 마찬가지.
아니, 영국만큼 승부 조작에 깨끗한 나라는 몇 없을 거다.
축구는 영국의 종교 그 자체.
종교가 사기를 친다면 사이비 종교 아니겠는가.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일.
“흐음. 여기가 맞나.”
아침 일찍 집을 나와 도착한 곳은 포츠머스의 한 근교.
적당한 벌이의 중산층이 사는 동네다.
내가 찾는 집의 주인은 ‘샘 소제.’
전 포츠머스 소속의 나이지리아 국적을 가진 중앙수비수다.
놈의 죄목은 승부 조작.
돈을 받고 일부러 레드카드를 받은 희대의 쓰레기.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뛰었으며, 나이지리아 국가대표까지 뛴 녀석이 도대체 왜 승부 조작에 가담한 건지.
나로서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딩동딩동.
아직 소속팀을 찾지 못했을 테니 이사를 하지 않았을 거라고 판단, 프런트에 물어봐 어찌어찌 찾을 수 있었다.
벨을 누르자, 잠시 뒤.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누구쇼?”
아프리카 억양이 심한 영어.
샘 소제가 분명하다.
좋아 잘 찾아왔어. 역시 내 공간지각 능력이란. 후후.
“나? 포츠머스의 감독.”
“···그 검은 머리 중국인?”
“한국인이거든. 영국인이기도 하고.”
“한국? 거긴 어디야? 태국 근천가? 하여튼 내 알 바 아니지. 얼굴을 보니 진짜인 거 같은데, 날 왜 찾아오셨수?”
“할 이야기가 있어서.”
“난 할 얘기 없는데.”
새끼. 싸가지 하곤.
애써 사람이 찾아왔건만.
“그럼 어쩔 수 없지. 경찰서부터 가볼까. 조만간 조서 쓰고 케밥 먹을 준비나 하라고.”
휙.
주저함이 없이 등을 돌리는 척을 했다.
그리고 역시나.
“자, 잠깐. 무, 무슨 이야긴데?”
어찌나 급했던지 샘 소제가 현관문을 열어젖히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떡대 보소. 진짜 밖에서 만나면 2초 안에 지갑을 포함한 모든 귀중품을 모조리 꺼내야만 할 거 같다.
“할 말 없다며?”
난 애써 무섭지 않은 척을 하며 뚱하게 반문했다.
그러자,
“에이. 그러지 말고. 아직 아침 먹기 전이지? 내 와이프가 요리 잘해. 먹고 가.”
“그럼 그럴까?”
“이야. 중국인치고 성격이 화통하시네. 내 편견이 깨졌어. 자자, 일로 들어와.”
“···.”
새끼가 중국인 아니라니까.
하여튼, 동양인 인종차별은 흑인 애들이 제일 많이 해.
자기들도 그렇게 인종차별을 받았으면 역지사지의 정신을 가져야 하는 거 아닌가?
어휴. 말을 말자. 말을 말아.
“아침 일찍 실례할게요.”
거대한 소제의 등 뒤를 따라 들어가니 그의 말처럼 아침 식사 시간이다.
고급 주택을 얻은 건 사실이었으나, 주머니 사정은 여전히 최악. 그런 내가 음식 대접을 거절할 리가 있겠는가.
상당히 맛있는 아침을 대접받은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슬슬 일 이야기를 하지.”
“좋아. 여보, 애들 데리고 잠시 2층에 가줘.”
짐짓 심각한 분위기에 샘 소세의 아내는 별말 없이 사라져주었다.
드디어 단둘이 남은 상황.
말문을 먼저 튼 건 샘 소세였다.
“경찰서 운운하던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더라고.”
“에이. 알면서.”
“글쎄. 난 경찰서에 갈만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야.”
내가 빙긋이 웃으며 은근히 찔러보았지만, 밥을 먹으면서 생각을 바꿨는지 샘 소제가 일단은 잡아뗀다.
“정말? 그럼 진짜 경찰서 간다?”
“머, 멈춰라. 뭔지 이야기를 들어봐야 내가 어떻게 대꾸하지.”
데굴데굴. 눈알 굴러가는 소리 보소.
시간 끌기도 아까우니 빠르게 급소를 찔러줘 볼까.
“승부 조···.”
“그, 그만!”
“아직 말 안 끝났는데.”
“아, 알겠으니 잠깐만 기다려라.”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떨구는 샘 소세. 그러니까 왜 승부 조작질을 한 거니?
“···.”
스윽. 녀석이 날 훔쳐본다.
눈빛이 번들거리는 게 흉한 방법까지 고려하는듯하다. 살기 어린 눈빛이랄까.
“헛수작 부리지 마. 지금은 최소한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지만, 네가 생각하는 짓을 실행에 옮긴다면 저 2층의 부인하고 자식도 험한 꼴 당할 거야.”
“···.”
“그리고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널 찾아왔을 거 같아? 이거 왜 이래? 나 포츠머스 감독이야.”
이 녀석을 만나러 오기 전, 이미 안전장치는 해두었다. 세바스찬에게 1시간마다 연락을 하기로 약속해 뒀거든.
연락이 오지 않는다? 바로 이곳으로 경찰 1개 부대는 몰려올 테지.
만약 정말 날 어떻게 할 속셈을 품었다 하더라도 쉬이 건드리지는 못한다.
이래 봬도 나는 포츠머스 내에서는 꽤 유명인.
이런 사람을 함부로 건드리기엔 부담이 매우 클 거다.
아니, 애초에 다 떠나서.
살인과 승부 조작.
죄의 무게감이 비교되질 않는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결국 승복한 샘 소세.
내가 어떻게 승부 조작을 한 사실을 알았는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다 방법이 있지.”
진짜다. 미래에서 회귀한다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조용히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라는 거냐?”
“아니. 그럴 거면 내가 널 왜 찾아왔겠어. 바로 경찰서로 가고 말지.”
“그럼?”
“이 녹음기에 대고 자백만 하면 돼.”
난 미리 사둔 녹음기를 꺼내며 샘 소세에게 넌지시 제안을 던졌다.
“경찰서에 가는 것과 뭐가 다르지?”
“이 녹음은 협회로 갈 거야. 그것도 직원이 아닌 임원급한테. 그리고 넌 양심적 고백을 한 거지. 그렇다면 협회 측에서는 굉장히 고마움을 느끼고 널 변호해 줄 거야. 경찰서에서 자수하는 것보단 훨씬 좋을걸?”
요컨대 이거다.
승부 조작.
비록 하부리그 담당이지만 협회 소속의 심판까지 연루되어있는 대사건.
즉, 협회 얼굴에 똥칠하는 사건이다.
그 좋아하던 품위 따윈 이미 저세상 멀리 사라진 거고.
하지만, 남의 똥을 얻어맞는 것보다는 자기 똥에 얻어맞는 것이 훨씬 기분이 좋은 법.
협회 측에서 미리 승부 조작 정황을 파악하고 자정 작업을 한 상황.
언론이나 사법기관에서 발견해서 협회 측에 알리는 상황.
이 둘은 다가오는 느낌이 천양지차다.
만약, 협회 측에서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억만금을 주더라도 전자를 고를 거다.
자연스럽게 ‘양심적 고백’을 한 샘 소세에게 고마움을 느끼겠지.
덤으로 나도.
“내 말만 따라오면 네가 받을 죗값은 정말 가벼울 거야. 어때? 협력할래? 아, 참고로 날 통하지 않는다면 임원급은 만나지 못할걸?”
잘못을 뉘우치고 협회에 자진신고를 한다면 죗값은 가볍게 받을 거다.
적어도 숨기고 있다가 경찰에게 붙잡히는 것보다는 말이다.
“···.”
잠시 고민하는 샘 소세.
물론,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알겠다. 너를 믿어보지.”
3.
샘 소제와 만난 후 곧바로 포츠머스 중심가의 고급 레스토랑을 찾았다.
약속 상대는 구단주 할배.
솔직히 나도 임원급은 만나기 어렵다.
그래서 할배의 힘을 얻으러 왔건만.
만난 지 30분이 넘었지만, 이 망할 노인네는 스마트폰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뭘 그렇게 보세요?”
벌써 열 번째 질문.
벌써 열 번째 침묵.
이번에도 벽보고 이야기하는구나, 라는 자책이 들 때쯤.
드디어 콘크리트를 바른 듯한 입이 열린다.
“자네의 멋진 춤을 감상하고 있었다네.”
슬쩍. 스마트폰을 기울이며 시청하던 영상을 보여준다. 물론, 야광봉 들고 설치는 치욕적인 내 모습을 보는 건 사양인지라 시선도 주지 않았다.
“···춤이 아니라 지휜데요.”
“뭐, 그게 그거 아니겠나. 내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네.”
“그렇다면 대성공이네요. 근데, 너튜브 자주 보시네요? 설마 저랑 만날 때만 보시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겠나. 내 요즘 취미가 너튜브 방송을 보는 것이라네. 자네 덕분에 신선한 취미가 생겼어.”
겉모습과는 매우 다른 취미다.
이것도 내가 퍼뜨린 악영향은 아니리라 믿어본다.
“그리고··· 이것도 재미있었다네.”
“···또 뭔데요?”
“자네가 욕을 하는 영상이라네. 거참. 내 평생 이렇게 험한 욕은 처음 들어본다네. 요즘 포츠머스 시민들 사이에선 한국 욕을 배우는 게 인기라는 소문은 들었나?”
“알고 싶지도 않네요.”
제기랄. 암만 광대라도 초상권은 지켜줘야지. 그리고 말이에요, 제 욕은 욕도 아니에요. 리그 오브 협곡 한국 서버 한번 해보실래요? 부모님이 생겼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지옥도거든요.
“그럼 영상은 충분히 즐겼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가 웬일로 나를 먼저 찾은 것인가?”
“아시잖아요? 부탁할 게 있어서요.”
“부탁이라. 미리 말해두지만, 협회를 상대로 힘 싸움을 해줄 순 없네. 내가 글레이저 가문도 아니고 아부다비 재단도 아니지 않나.”
글레이저 가문은 맨유의 소유주.
아부다비 재단은 만수르가 맨시티를 인수할 때 이용한 곳이고.
둘 다 엄청난 자금력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곳이다. 맥닐 구단주도 돈이라면 남부럽진 않지만, 저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힘 싸움이라뇨. 그런 사서 고생하는 짓을 왜 합니까?”
“···또 재미있는 일을 벌였나 보군. 말해보게.”
스윽.
난 주머니에서 은밀하게 녹음기를 꺼내 구단주 할배에게 건넸다.
별말 없이 녹음기를 받은 구단주 할배는 잠시 녹음을 들어보더니 보기 드물게 매우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걸 자네가 어떻게?!”
“나름 재주를 부려봤죠. 후후.”
“허헛. 참 놀라운 재주로군. 뜻은 알겠네. 내 협회 사람에게 전달하도록 하지.”
여기서 협회 사람이란, 말단 직원 따위가 아니다. 최소 임원급.
나로서는 만나기 힘든 높은 분!
괜히 시간을 들여가며 영감님을 만난 게 아니다.
구단주 할아버지 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 녹음기를 쥔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적어도 사건이 묻힐 일은 없겠지.
내가 말단직원에게 준다면?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아예 은폐할지도 모르고 공을 빼앗길지도 몰랐다.
“제 이름을 꼭 언급해 주셔야 합니다. 알고 계시겠지만요.”
“허허헛. 암. 잘 알고 있다네. 이로써 자네는 징계 대신 감사패를 받겠군. 정말 뛰어난 재주야. 허허허.”
“후후후. 제가 한 재주 하죠. 후후후.”
레스토랑엔 때아닌 노인과 청년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038화. 리그2, 전반기. (8)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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