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37화 (37/306)

< 037화. 리그2, 전반기. (7) >

1.

알피 벨, 42세의 중년.

밀러 아저씨와 동갑이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정반대다.

밀러 아저씨가 좀 푼수라면,

알피 벨 씨는 좀 더 진중한, 어디 은행에서 일하는 지점장 같은 느낌이랄까.

체형도 정반대다.

밀러 아저씨는 짤막한 배가 나온 체형.

알피 벨 씨는 키가 큰 마른 체형.

검은 중절모까지 착용한지라 ‘영국 중년’의 맛이 제대로 살아있다.

“고맙소.”

알피 벨 씨는 기품있게 찻잔을 받들며 한 모금 입술을 적신다.

“흐음. 차 맛이···. 큼큼. 조, 좋소.”

중국산 싸구려 녹차는 알피 벨 씨 같은 진짜배기 영국 중년에게는 맞지 않나 보다.

“감사합니다. 제가 차를 잘 내리는 편이죠. 그런데 협회 감사과의 감사원이 저에겐 어쩐 일로?”

이미 이유는 알고 있었기에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감사과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건 누구나 다 싫어하지 않겠는가.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빨리 볼일 보고 꺼지라고.

“흠흠. 성 감독님은 성격이 급한 편이신가 보군. 대충 알고는 있었소. 경기장에서의 행동을 본다면 매우 유추하기 쉬운 일이오.”

“급하다기보다는 실리적이라고 해주시죠.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 잡아먹기엔, 인생은 짧잖아요.”

당신과 하는 이야기는 쓸데없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인생이 짧진 않소. 쉬지 않고 계속 달리기엔 인생은 매우 긴 시간이오. 한낱 짐승도 휴식 시간을 가지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여유를 가지지 않는다면 품격이 떨어지지 않겠소?”

“휴식과 여유라. 물론 필요하죠. 하지만 불편한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과연 휴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때때론 불편함도 감내해야 진정한 어른이 되는 거요. 아직 성 감독이 젊어 잘 모르겠지만 말이오.”

뭔 신선놀음하는 개소리야.

어디에 대고 뜬구름 잡는 헛소리로 내 귀를 오염시키는 거지?

물론 왜 이딴 개소리를 줄줄이 읊는지는 잘 안다.

이쪽 계통의 뻔한 수작질이다.

천천히 시간을 끌며 사람의 피를 말리는 치졸한 수법.

그렇다면 내가 먼저 헛소리를 멈추게 할 비법을 사용해줘야겠지.

“어이쿠야. 차를 벌써 다 마시셨네요. 잔 이리 주세요. 제가 채워드릴게요.”

“···괘, 괜찮소.”

“어허. 차를 거절하는 건 예의에 매우 어긋나는 일 아니던가요? 어른이라면 예의를 지켜야죠.”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듯싶소.”

“아하. 전 또. 이야기가 엄청 길어질 줄 알았네요. 그래도 한 잔 드시죠?”

“내가 병원에서 카페인을 줄이라는 처방을 받았소. 짧게 끝날 터이니 조금 무례를 범하겠소.”

효과는 좋았다. 자꾸 혓바닥 길게 늘이면 목구멍에 중국산 녹차를 부어버려야지.

“먼저, 본 협회는 감독의 품위를 떨어뜨린 성 감독의 행동에 대해 매우 크게 실망했소.”

“감독의 품위라. 처음 들어보는 품위네요. 벤치에서 무게 잡는 것이 품위인가요?”

어디서 품위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감독이란 전에도 말했듯, 광대다.

최대한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직업의 목표란 말이다.

싸구려 연필심 하나 만들지 못하는 나부랭이들이 고액연봉을 받고, 미디어에 노출되며 인기를 얻는다는 것.

이것은 모두 관중 덕분이다.

그런 관중들 앞에서 재롱을 떠는 것이 목표인 직업에서 품위를 찾다니.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또 없다.

오히려 승리하기 위해 개인의 품위를 희생한 점을 크게 칭찬해줘도 못할망정. 쯧쯧.

“···또한, 협회 소속의 심판에 대한 거친 욕설은 본 협회에 욕설을 한 것과 다를 바 없소.”

“그건 그 새끼가 판정을 더럽게 해서 그런 거고요.”

그럼 댁 논리로 치자면, 협회의 눈깔도 썩은 동태눈깔이라는 이야기잖아.

오뉴월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개 짖는 소리를 하지?

“마지막으로 한번 경고를 했음에도 미디어에서 협회와 심판을 비판한 점은 그냥 넘어가기엔 매우 과격한 행동이오.”

그럼 그냥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가만히 있으라고? 내가 그러곤 못 살지.

“그래서 요점은요?”

“본 협회의 징계위원회에서는 성 감독에게 5경기 출장 금지 처분을 고려하고 있소. 반성하는 기미가 없다면 7경기까지의 출전금지를 논의 중이오. 이번에는 아예 관중석으로 들어오지도 못할 것이리라 장담하오.”

그러니까, 지금 대가리 박고 사과하면 5경기 출전금지를 받고,

지금 사과하지 않으면 7경기 출전금지를 받는다?

씨발. 어디서 장난질이야?

아직 리그 초반.

선수단의 폼이 좋고 부상선수가 없으며, 분위기를 탔을 때 승점을 벌어놓지 못한다면 큰일이다.

만약, 부상선수가 속출한다면?

만약, 선수들의 폼이 나빠진다면?

만약, 사기가 떨어진다면?

미래는 변수가 너무나 많다.

즉, 지금 상황에서 5경기나 7경기 출전금지를 당한다면 우승은커녕 승격도 장담하지 못하겠지.

고로, 팀 성적을 가지고 뻔뻔하게 협박하고 있는 거다.

“감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냥 사과를 받으러 오셨군요?”

“증거는 확실하지 않소. 그날 일에 대해서 따로 들을 이야기는 없을 거라 생각되오만?”

“하, 참.”

“진정으로 반성하는 마음을 보인다면 통상적인 3경기로 줄여줄지도 모르오.”

대한민국 축구협회도 꼰대라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The FA, 영국 축구협회에 비하자면 갓 걸음마를 뗀 갓난아기 수준일 뿐.

내가 보기엔 FA에서 사람을 뽑을 땐 ‘꼰대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부터 볼 거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없지 않겠나.

“이러시는 이유가 뭐죠?”

“다 절차일 뿐이오.”

“다른 감독들에게 청탁을 받은 건 아니겠죠? 젊은 애송이의 기 좀 죽여달라고.”

서면으로 벌금과 징계처분만 보내면 될 일을 감사원까지 오게 한다니.

도가 조금 지나치다.

그렇다면 이유는 뻔하다.

나에게 면박을 받은 감독들이 FA에 은근슬쩍 말을 해두었겠지.

요컨대, 청탁이라는 거다.

영국이라고 사람 사는 데가 다를 게 있겠는가. 오히려 혈연 지연 학연은 외국이 더 심했지.

그중 지연을 통해 압박을 넣는 것이 분명하다.

“큼큼. 억측은 그만두시오.”

짧게 헛기침을 하는 알피 벨.

정확히 요점을 짚었나 보다.

“그래서 지금 저보고 어쩌라고요. 알피 벨 씨 앞에서 머리라도 박을까요?”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소? 이틀 내로 반성문, 아니. 공식 사과문을 협회 측으로 보내주신다면, 징계 처리에 큰 영향을 줄 것이오. 그것도 아주 긍정적으로 말이오.”

뭐? 반성문? 본심이 은근슬쩍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구만.

“알겠습니다. 심사숙고해서 곧 응답하도록 할게요.”

“좋소. 좋은 판단을 내리길 바라겠소. 그럼 전 이만.”

알피 벨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내가 속사정을 파헤치자 심히 당황스러웠나 보다.

‘후우. 그냥 얌전히 벌금이나 내려고 했더니. 이거 못 참겠네.’

판정이 뭐가 됐던 욕을 한 건 죄.

그래서 죗값을 달게 받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법.

당하곤 못산다.

사과하라고?

내가 사과를 받아야겠다.

두고 봐.

2.

축구계에는 엄청난 수의 농담이 있다.

그중에서는 심판에 관한 농담도 당연히 존재했고.

‘관중들이 이름을 아는 심판은 병신’

진리에 가까운 농담.

깔끔한 진행을 한다면, 심판의 존재감조차 느끼지 못할 테니까.

즉, 병신같은 판정이 심판의 이름을 널리 알린다는 얘기다.

선수들을 배제하고 경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암적인 존재들이랄까.

‘마이크 엣킨스.’

이번 사건의 원흉인 빌어먹을 심판의 이름이다.

전부터 병신새끼라 익히 알고 있던 이름이고. 꽤 유명한 놈이다.

이상한 판정으로 경기 흐름을 어지럽히는 미꾸라지 같은 작자.

‘확, 집에 찾아가서 강냉이 털어버릴 수도 없고.’

놈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혈압이 급상승했지만, 지금은 FA를 상대할 방법을 떠올려야만 한다.

하지만 일개 감독이 FA를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우리 구단주 할배의 힘을 써도 협회를 이기긴 불가능.

암만 식품왕이라 할지라도 영국 축구협회의 힘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정말 대가리를 박아야 하는 걸까.

“으아아아아!”

퇴근 후, 아직 익숙하지 않은 고급저택의 침대 위에서 난리를 쳤다.

머리를 암만 쥐어짜 봐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정녕 치욕을 감내해야만 하는 건가.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례를 하던 인조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간다.

‘에라 반성문이나 쓰자.’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팔자에도 없는 글을 써야 한다니. 글발 좀 세우려고 했지만 도통 써지지 않는다.

웹소설 작가 중엔 3~4연참을 하는 사람도 있던데, 괴물들이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워하며 펜 돌리기만 할 때, 집사인 세바스찬 씨가 찾아왔다.

“아직 퇴근하지 않으시고 뭐 하세요?”

“오늘은 집주인님의 심기가 불편하신 거 같아야식을 준비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땐 달짝지근한 쿠키와 홍차가 제격입니다.”

세바스찬은 우아한 손놀림으로 차와 다과를 건넸다.

오. 마침 당 떨어졌는데. 확실히 일류 집사는 뭔가 다르구만.

“그럼 잘 먹겠습니다.”

난 보기만 해도 침이 줄줄 흐르는 쿠키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입안에선 달콤한 축제가 열렸다.

달달하면서도 고소한, 종일 퍼먹어도 질리지 않을 엄청난 맛이다.

“와. 미친. 엄청 맛있는데요?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미숙하지만 제가 한번 솜씨를 부려봤습니다.”

이걸 이 아저씨가 만들었다고?

저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중후한 중년 남자가 이런 쿠키를?

“왜 집사를 하세요. 쿠키 집만 차려도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겠는데. 아니, 그리고 집사가 원래 요리도 할 줄 알아야 하나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원래 집사의 덕목 중에서 요리는 없습니다. 그냥 제 취미일 뿐입니다.”

취미로 이런 쿠키를 만들어내다니. 정말 재능 낭비다. 지금이라도 쿠키 만드는 너튜브 채널을 만든다면 집사가 아닌 집사를 고용할 사람이 될 텐데.

“그나저나,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이십니다.”

“일이 좀 꼬여서요.”

“듣기로는 이번에 FA에서 징계를 받게 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소문 참 빠르네요.”

“후훗. 저도 포츠머스의 서포터입니다. 그것도 아주 열렬한. 한 사람의 서포터로서, 감독님을 모시게 된 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래서 저번에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라고 했던 거구나.

“아이참. 제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서포터분들에게 좋지 않은 꼴을 보여주게 됐네요.”

“아닙니다. 솔직히 저도 속이 뻥 뚫렸습니다.”

“아니요. 그거 말고요. 곧 협회에 죄송하다고 머리 숙여야 하거든요. 도저히 협회를 이길 방법이 떠오르질 않네요.”

답이 없다. 맛난 쿠키와 홍차를 마신 뒤 반성문이나 써야지.

나름대로 글발을 살리면, 3경기 금지로 봐주지 않을까? 제발.

“흠. 이 나라에서 협회를 상대로 이길만한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제 짧은 소견으론 여왕 폐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죠.”

“하지만. 제가 조심스럽게 조언하자면, 굳이 협회를 상대할 필요가 있냐는 겁니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협회에서 징계를 받는 건데 협회를 상대하지 말라는 이야기 같은데.

“초점을 한사람에게 맞춰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한 사람이라면···?”

“사건의 원흉 말입니다. 마이클 엣킨스, 그날의 심판입니다. 실로 어리석은 시야를 가진 사람이지요.”

“호오···. 심판을 물고 늘어져라···? 마이클 엣킨스···. 조작을 의심케 하는 편파적인 판정···. 자, 잠깐. 어? 어어? 맞아! 그거야!”

위대한 집사, 세바스찬 씨의 조언에 난 미래의 사건 하나를 떠올렸다.

2013년.

잉글랜드 축구 승부 조작 사건.

심지어 이 사건엔 전 포츠머스 선수까지 연루되어 화제가 되었던 큰 사건이다. 심지어 그 전 포츠머스 선수는 내가 부임하기 다섯 달 전까지만 해도 포츠머스 소속이었으니까.

이걸 잊고 있었다니! 멍청한 새끼.

당시에 전 포츠머스 선수가 잡혀들어가 구단에서도 한바탕 큰 난리가 났었거늘.

“후훗. 그럼, 전 이만 퇴근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방법을 구상해보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난 환희에 젖어 밝게 웃으며 세바스찬을 배웅하고 다시금 기억을 찬찬히 떠올렸다.

‘범인이 잡힌 건 12월 초. 그때 기사도 나고 난리가 났지.’

그리고 이 승부 조작 일당의 목록에는 ‘마이클 엣킨스’의 이름도 당당히 올려져 있었고.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한가지.

한 달 반쯤 먼저, 범인을 잡는 것.

난 이를 바득바득 갈며 쓰고 있던 반성문을 갈기갈기 찢어 휴지통에 집어 던졌다.

뭐? 감히 나더러 머리를 숙이라고?

머리 숙일 준비나 하고 있어라.

망할 새끼들아.

< 037화. 리그2, 전반기. (7)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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