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35화 (35/306)

< 035화. 리그2, 전반기. (5) >

1.

지금 나는 기분이 좋지 않다.

매우, 아주 기분이 좋지 않다.

구단주 영감님이 집 사준다고 한 게 구라여서? 아니다. 지금 이사준비 중이다.

감독이 기분이 좋지 않을 일이 몇이나 있겠는가.

잘하고 있는데 경질을 당하거나,

선수가 감독에게 개긴다거나,

핵심 선수가 팔린다거나,

잘 키운 유망주가 런 한다거나,

동료 감독들이 무시한다거나,

프런트가 일을 더럽게 못 한다거나,

등등.

어? 잠깐. 이상한데. 왠지 모르게 경험해본 일인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하여튼, 감독이 열 받을 만한 일은 생각해보니 생각보다 꽤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 받는 건 역시나, 경기에서 졌을 때 아닐까 싶다.

9월까지 무패.

6승 2무의 미친 성적. 개인적으로도 놀라울 정도의 성과였다는 건 인정한다.

그리고 이어진 AFC윔블던과 챌트넘과 치렀던 홈경기에서 1승 1무를 거둘 때만 해도 마음속으로 혹시? 라는 생각이 조금은 들었다.

그 있지 않은가.

전설적인 업적.

‘무패우승’

잉글랜드에서는 프레스턴 노스엔드와 아스날.

단 두 구단만이 달성한, 전 세계적으로도 따낸 구단이 극히 적은 하드코어 난이도의 업적.

‘아직 업적작 하기엔 일렀나.’

새삼 아르센 벵거 감독님이 존경스러워진다. 어디 듣도 보도 못한 리그도 아니고 프리미어 리그에서 무패우승을 하신다니. 자서전이라도 다시 사야겠다.

‘애초에 혹시? 정도였으니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졌다는 거. 그것도 아주 좆같이.’

10월 중순, 7승 3무.

그 후 이어진 지옥의 원정 3연전.

체스터 필드, 스컨소프, 옥스퍼드.

하나같이 한가락 하는 구단이었다.

특히나 체스터 필드는 회귀 전에 13-14시즌 리그2를 우승했던 팀.

만만찮은 상대다.

심지어 스컨소프 유나이티드도 리그2 준우승을 하고 리그1로 승격을 달성하는 팀이었으니. 꽤 어려운 경기의 연속임은 부정하기 힘들다.

솔직히, 져도 면죄부가 생긴달까.

1, 2위 팀하고 연속으로 원정경기를 하는데 말이야, 져도 이해가 가능한 범위 아니던가.

‘그냥 졌으면 그러려니 했지.’

내 팀은 아직 완성이 덜 되었다. 고작 3개월. 이 시간으로 완벽한 팀을 어떻게 만들겠는가. 그저 미래의 지식으로 팀의 잠재성을 빠르게 채워줬을 뿐.

애초에 가진 잠재성이 그리 높진 않았다.

그래서 언젠간 질 줄 알았고 마음의 준비도 끝냈지만, 이런 식이라니.

이건 용납하지 못한다.

이건 아니지. 씨발.

‘엿 같은 심판 새끼들.’

완벽한 편파 판정이었다.

경기 결과는 3-0.

한 골도 넣지 못한 패배라 더욱 가슴이 시리다.

굳이 변명하자면,

체스터필드의 세 골은 모두 PK였으며,

같은 상황에서도 우린 PK가 아니었고,

모든 PK에는 논란이 있었으며,

매우 거친 경기지만 카드를 좀체 꺼내지 않는 심판의 횡포 때문에 졌다.

요컨대, 심판이 경기를 말아먹을 수 있는 상황의 예시를 모두 보여줬달까.

그 때문에 나는 기자회견에서 매우 공격적인, 아니, 폭력적인 시간을 가졌고.

“아주 엿 같은 경기였습니다. 곧 있으면 할로윈 데이인데, 벌써부터 심판이 사탕 대신 눈깔을 뽑아 준비했나 보군요. 저도 찾아가서 눈깔사탕 하나 받아와야겠습니다. 무슨 맛일지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아마도 썩은 동태눈깔 맛이겠지만요.”

기자회견장을 싸늘하게 만든 폭력적인 경기 소감이었다.

친 포츠머스 언론은 격하게 공감하며 같이 분개했으며,

친 체스터필드 언론은 망언이라면서 격하게 나를 까 내렸다.

더불어 축구협회에서도 공식적인 경고가 날아왔다.

-과격한 언동으로 인해 공식적인 경고를 내립니다. 앞으로의 언사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이와 같은 일이 또 발생할 시 벌금이 부과될 가능성이 크므로 알아서 잘 처신하시리라 믿습니다.

거의 협박이었다.

아니, 협박 맞다.

내 방식으로 해석하자면,

또 아가리 함부로 놀리면 벌금 먹일 테니까 알아서 잘 처신해라.

감히 심판을 비난해? 감히 우리 협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거야? 조심해라.

이런 느낌.

아주 빌어먹을 일이었지만 난 매니저였다.

마음 같아선 이슬이 세 병 정도 나발 불고선 깽판을 치고 싶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관리자이자 책임자였으니까. 벌금 내기도 싫고.

하지만 너튜버라면 어떨까?

“아주 끔찍하고 역겨운 경기였습니다. 축구는 선수와 감독이 지배하는 경기지만 오늘의 경기는 카드 들고 설치는 불량배 한 명이 경기를 지배했습니다.”

뚱보와 삐쩍이.

당근과 채찍.

그중 당근을 주던 톰 힉스마저 유례없이 강력한 비판을 날렸다.

“구토가 나오는 더러운 경기.”

의외로 독설의 대가인 나단 필립스는 짤막하게 경기를 논평했다.

짧은 몇 마디.

오히려 이것은 평소에 독설을 길게 내뱉던 나 단 필립스의 입에서 나와 훨씬 효과가 좋았다.

-열 받은 표정 봐봐. 삐쩍이가 말을 아낄 정도면 얼마나 역한 거야?

-심지어 오늘 뚱보가 독설했어. 이건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이지.

-오늘 경기 진짜 더럽긴 했지.

-체스터 필드, 롤렉스 시계라도 뿌렸냐? 리그2라 돈은 없을 테니 세이코라도 뿌렸나 보네.

-선수들 얼굴이 맛이 갔더라. 심판이 대놓고 저렇게 편파 하는 데 집중을 어떻게 해?

온라인도 난리가 났다.

오랜만에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본문을 들어주는 이 상황.

얼마나 더러운 경기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반면교사다.

“너무 마음 쓰지 마라. 너희들은 최선을 다했어. 좀. 아니, 좀 많이. 재수가 없었을 뿐이야. 기운 내라.”

첫 패배.

그리고 더러운 패배.

경기 종료 후 영혼이 이탈한 듯한 선수들에게 해줄 말이라곤, 위로밖에 없었다.

이런 패배를 당한 선수들에게 어찌 심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나라도 선수들을 질책한 순 없는 일이었다.

“아주 좆같은 경기였어요! 감독님.”

할 말 다 하고 사는 조쉬 킹은 축구화를 집어 던지며 분개했다.

평상시 같았다면, 주장인 케빈 도슨과 부주장인 잭 해리슨이 크게 꾸짖을 버릇없는 행동.

하지만 오늘은 별말 없이 묵묵히 고개가 끄덕였을 뿐이었다.

“알아. 아주 좆같은 경기였지. 하지만 이건 앞으로도 종종 겪을 일이야. 다음번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침착함을 유지해라. 냉정하게, 순수한 실력으로 발라버리란 말이야. 알겠냐?”

“네. 감독님.”

“알겠어요.”

“명심하겠습니다.”

심판이 오판을 자주 범할 때의 문제는 선수들이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거다.

왜 우리는 휘슬 안 불러줘?

왜 우리는 PK 안 줘?

왜 우리는 카드를 줘?

사람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으면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 분노.

분노는 때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해 투쟁심을 불러일으켜 기적을 만들기도 하지만 100에 99는 아니다.

보통은 경기의 리듬을 잃어버리게 만들며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특히 젊은 선수가 많은 선수단일수록 오심에 쉽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피 끓는 청춘이니깐.

이럴 땐 냉정함을 유지하는 선수가 필요하다. 우리 팀의 경우 마이클 도슨이 그 역할이었는데, 그런 그마저 화가 났을 정도였으니. 내가 손쓸 방법이 없었다.

아니, 나조차도 화가 나서 하프 타임 때 선수들을 제대로 진정시키지 못했으니. 이래저래 수행이 더 필요하다.

하여튼, 이런 이유로 기분이 좋지 않다.

정확히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야. 기똥차네.”

난 따로 챙긴 이삿짐을 든 채 입을 벌리고 탄성을 내질렀다.

처음 와본 ‘내 집’.

위대한 수령 동지 리처드 맥닐께서는 내 상상보다 훨씬 배포가 크신 분이었다.

일이 바빠 말로만 2층짜리 주택이라고 들었거늘.

이거 완전 2층짜리 ‘저택’ 아니던가.

작은 정원이 딸린, 28세의 젊은 총각이 살기엔 너무나도 고급스러운 저택이다.

포츠머스가 암만 대도시가 아니더라도, 런던 근교의 유명한 관광지.

집값이 만만찮은 곳이다.

솔직히 집 가격이 감히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최소한 백만 파운드는 하지 않을까?

‘사실은 좋은 영감님이었군.’

이런 곳을 포상이라고 덥석 던져주시다니. 심지어 명의 이전도 깔끔하게 끝났고 세금도 처리해주신다.

덕분에 일주일 내내 저기압이었던 나는 오랜만에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그나저나 너무 넓은 거 아니야? 청소할 시간도 없는데.’

배부른 걱정을 하며 스윽, 세련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풍스러운 정원과,

“어서 오십시오.”

멋들어진 정장을 빼입은 중년 남자가 나를 반긴다.

“댁은 누쇼?”

누구지? 원래 살던 집주인인가.

아니면 부동산 중개업잔가.

“전 당분간 성소하 감독님을 모시게 된 집사입니다.”

“네? 뭔 사요? 저 고양이 아닌데요.”

“···큼큼. 집이 너무 넓어 남자 혼자 관리하기 힘드신 거라 여기신 리처드 맥닐 고용주께서 절 파견하셨습니다.”

와. 구단주 할배가 부자긴 하구나. 개인 집사‘들’이 있나 보네.

“아하. 근데 딱히···. 없어도 되긴 한데.”

솔직히 불편하다. 내 집에 다른 사람이 산다는 게. 그것도 리처드 맥닐이라면 구단 내에도 눈을 키우는 사람 아니던가. 감시당하는 기분을 떨쳐내기 힘들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당분간만 도와드릴 테니까요. 그리고 저, 출퇴근합니다. 저택에 거주하지는 않으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오호. 그렇군요.”

이러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출퇴근이면 대충 서로 마주칠 일도 별로 없을 테니까.

“알겠어요. 잘 부탁드릴게요.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전 성소하입니다. 포츠머스의 감독이죠.”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제 이름은···.”

“잠깐. 제가 한번 맞춰봐도 될까요?”

“네?”

“세바스찬이죠? 그렇죠?”

집사의 이름이라면 세바스찬 아니던가.

이건 정해진 법칙이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과 같은 이치!

“···큼큼. 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 놀랍습니다.”

“역시. 집사 이름은 세바스찬이죠. 하여튼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 짐 좀 들어주세요. 너무 무겁거든요.”

“네. 안으로 드시지요. 짐을 풀고 집안 구조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세바스찬은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날 인도했고, 그 뒤에 펼쳐진 별천지에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이게 상류층이 사는 곳이구나.

‘어머니, 아들 성공했습니다. 조만간 같이 사시죠.’

그 후, 멀리 한국에 계실 어머니를 떠올리며 정신없이 집을 구경했다.

2.

지옥의 원정 3연전.

그 두 번째 상대는 바로,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한 적은 없지만, 하부리그에서는 나름 잔뼈가 굵은 구단이다.

회귀 전 원래 순위는 2위.

리그2에서는 내놓으라 하는 강팀이다.

여기에, 원정경기.

여기에, 지난 경기의 불합리한 패배.

꽤 좋지 않은 상황이다.

선수단의 사기도 아직 회복하지 못했으며 심판마저 체스터필드전과 같은 인간이다.

‘씨발. 일부러 이러나?’

같은 주심이 연속으로 두 번이나 내 경기를 맡다니. 더러운 냄새가 풀풀 풍기지만 애써 무시해야겠지.

[자 경기가 시작됩니다! 드디어 첫 패배를 당한 포츠머스와 3경기 무패행진 중인 스컨소프의 대결!]

[꽤 흥미진진한 경기에요. 기세가 한풀 꺾인 포츠머스와 기세가 등등한 스컨소프의 대결이니까요.]

-삐익.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공은 우리의 것.

감독이 보는 경기장은 꽤 독특하다.

위에서가 아닌 동일 선상에서 보니까.

그래서 감독에게 필요한 능력 중에 공간지각 능력과 상상력이 들어간다.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머릿속에서 선수들의 움직임을 완벽히 구현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큼큼. 난 꽤 이쪽 방면으로는 재능이 있는 편이다.

‘역시. 좋지 않아.’

같은 심판이라는 탓일까.

아직 패배를 극복하지 못한 탓일까.

선수들의 움직임이 조금 방만하다.

조금씩 머뭇거리기도 하며,

평소보다 몸을 사리기도 한다.

-삐익.

[반칙이에요! 스컨소프의 미드필더가 태클을 너무 깊게 했어요.]

[아, 이게 뭐죠? 오히려 포츠머스의 반칙을 선언하는데요?]

한 번.

-삐익!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잡는 포츠머스!]

[어···. 잠깐만요. 또다시 포츠머스의 반칙이라도 선언하는군요?]

두 번.

-삐익!

[마이클 반즈가 발목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이건 무조건 옐로카드죠!]

[아, 구두 경고로 끝나네요. 다행스럽게도 반즈는 몸을 털고 일어납니다.]

세 번.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다 개소리다.

“씨발. 꼴 받게 하네.”

내가 으르렁거리자 밀러 아저씨가 재빨리 다가와 등을 토닥인다.

“감독님 진정하세요. 이미 경고 한 번 드셨잖아요. 퇴장당하실지도 모릅니다.”

“큼큼. 아, 알겠어요. 아니, 근데. 판정이 너무 개 같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래도 진정하셔야 합니다. 저도 울화통이 터지지만 참고 있지 않습니까.”

밀러 아저씨의 간곡한 부탁에 반쯤 누른 발작 버튼에 손을 떼었다.

하지만,

-삐익!

[또다시 거친 태클! 뒤에서 양발로 들어왔어요. 이건 퇴장감입니다. 오늘 모처럼 선발 출전한 커너 러셀이 매우 고통스러워하는군요.]

[아, 옐로카드군요. 이걸 옐로카드를 주나요?]

-뚝.

인내심의 끈이 끊어졌다.

고통스러워하며 땅을 내려치는 러셀의 모습에 그만, 남았던 한 줌의 인내심마저 사라졌다.

“야이! 개 씨발새끼야! 태어날 때 어머니 뱃속에 눈깔 두고 왔냐? 씨팔새끼가 해도 해도 너무하네! 얼마 받았냐? 얼마 받았어! 개새끼야!”

온갖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와버렸다.

심지어 말리는 사람도 없다.

좀 전까지 말리던 밀러 아저씨마저도 육두문자를 내뱉고 있었으니까.

[아! 카드! 카드가 나왔습니다. 무슨 색일까요. 빨간색. 빨간색입니다!]

[누구에게 주는 걸까요?!]

장내 아나운서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의 홈구장, 글랜퍼드 파크에 울려 퍼졌다.

뭐, 누가 카드 받을지는 대충 예상이 간다. 아마도,

[아! 벤치로 심판이 달려가는데요!]

[이게 뭔가요. 심판이 레드카드를 들고 포츠머스 벤치 쪽으로 달려가는군요!]

잔뜩 인상을 구기며 내 앞으로 빗살 같은 속도 달려온 심판.

이야. 우사인 볼트 저리 가라네.

이참에 심판하지 말고 육상선수로 전향하는 게 어때?

“퇴장이오. 성 감독.”

[아! 포츠머스의 젊은 감독, 성소하 감독이 레드카드를 받았습니다!]

[과한 불만 표출이 원인이었나 보네요. 경기 내내 판정에 불만이 많아 보였거든요! 솔직히 성 감독의 심정이 이해되긴 합니다.]

그렇다.

난 이번 시즌 선수 포함, 최초로 레드카드를 받은 구단원이 되었다.

씨발.

< 035화. 리그2, 전반기. (5)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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