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34화 (34/306)

< 034화. 리그2, 전반기. (4) >

1.

9월 초, A매치데이의 시작.

그때쯤 영국 너튜브계에는 기묘한 채널이 하나 개설되었다.

뚱보와 삐쩍이.

삼십 대 후반의 두 남자가 후줄근한 차림으로 거침없이 축구 토크를 진행하는 방송이다.

뚱보 힉스

삐쩍이 필립스.

포츠머스의 서포터즈 ‘폼페이 서포터즈 트러스트’의 지원과 관심에 힘입어, 빠르게 구독자 만 명을 달성.

개설 한 달이 지난 시점, 5만 명에 달하는 구독자 수를 가지게 되었다.

점차 입소문을 타, 구독자가 오르는 속도는 전례가 없을 정도!

영국 너튜브계의 신성으로 주목을 받는 중이다.

“오늘도 돌아왔습니다. 프리미어 리그를 씹고 뜯고 맛보는 시간! 뚱보, 톰 힉스입니다.”

톰 힉스가 쾌활한 어조로 진행을 시작한다.

“반가워요. 나단 필립스에요. 밥은 잘 먹고 다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필립스는 항상 그랬듯 무미건조하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10월입니다. 오늘은 6라운드까지 진행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디펜딩 챔피언이 많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미 8라운드까지 진행된 리그2보단 상당히 느린 프리미어 리그다.

“위대한 감독, 퍼거슨 감독이 떠난 맨유가 흔들리고 있어요. 퍼거슨 감독의 뒤를 이은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은 에버튼에서 훌륭한 성과를 냈지만요.”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 6라운드 웨스트 브로미치 전은 끔찍했습니다. 홈에서 1-2로 패배하다니요.”

힉스가 슬쩍 운을 떼자, 필립스가 그의 장기인 독설에 시동을 건다.

“그렇죠. 전반전에 잘하던 선수를 후반에 교체해버리질 않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신중한 축구를 구사하지 않나. 솔직히 맨유 팬으로선 하마가 목욕한 웅덩이에서 헤엄을 치는 듯한 기분일 거예요.”

“하하! 그건 도대체 무슨 기분인가요?”

“더럽고 무서운 기분이란 뜻이죠. 벌써 ‘퍼거슨 감독의 복귀’가 거론되고 있어요. 맨유의 팬들은 화병이 나서 쓰러지겠죠.”

13-14시즌.

퍼거슨 감독이 우승과 함께 은퇴하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힘을 잃었다.

리그 6라운드, 2승 1무 3패.

리그 12위.

디펜딩 챔피언이, 아니, 프리미어 리그를 지배했던 위대한 구단의 성적이라기엔 수준 미달 그 자체.

퍼거슨의 뒤를 이은 모예스 감독은 벌써 경질설에 시달렸다.

“일단 저도 한 팀의 서포터로 심히 공감됩니다. 저희 팀도 나락까지 갔으니까요. 하하.”

힉스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사실, 그가 응원하는 팀인 포츠머스의 성적만 떠올리면 절로 물구나무가 서졌으니까.

포츠머스의 8라운드까지 결과,

6승 2무.

두 달 동안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브리스톨 로버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세트피스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면,

플리머스 아가일과의 홈경기에서 오심으로 PK를 헌납하지 않았다면,

8승 전승을 달성했을지도 몰랐다. 꽤 아쉬운 두 번의 무승부.

하지만, 포츠머스 서포터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많은 전문가를 포함해 본인들도 승격은 답도 없다 여겨지는 상황이었거늘.

이대로만 쭉 유지한다면 승격은 물론, 우승까지 바라볼 가능성이 컸다.

이래저래 포츠머스는 축제 분위기였다.

“큼큼. 사실, 저희 팀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죠. 맨유가 강등을 당하거나 법정관리를 받은 건 아니니까요. 비교가 실례에요. 힉스 씨. 맨유 팬분들의 심기를 건드리시고도 무사하실 거 같아요?”

“허헛.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요즘 워낙 기분이 좋아서.”

이 방송의 주 패턴이었다.

필립스가 공격하고 힉스가 탱킹하는.

여기에, 종종 방패로 필립스를 후려치는 힉스의 모습이 깨알 같은 시청 포인트였다.

“하여튼, 맨유의 프런트도 문제에요. 이적시장 내내 세스크 파브레가스의 영입에만 목을 매달았죠. 때문에 제대로 된 보강을 하지 못했어요.”

“세스크의 이피엘 리턴이라니. 너무 과한 목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렇죠. 프런트는 정신을 차려야 해요. 이젠 ‘그 위대한’ 퍼거슨 감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시점이에요. 이러다간 정말 챔피언스리그도 나가지 못하는 비상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라요.”

거침없는 비판!

뚱보와 삐쩍이가 잘나가는 이유다.

무조건 서포터들 입장에서 강한 비판을 주저 없이 해주며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는 것. 이것이 이 채널이 급격하게 성장한 이유이자, 소하의 주문이었다.

“이거. 이거. 너무 강한 발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챔피언스 진출 실패라니요.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힉스가 너스레를 떨며 분위를 슬쩍 부드럽게 바꾼다.

이것 또한 인기 포인트.

너무 강경한 비판만 해서는 적을 많이 만들 테니까.

“그만큼 큰 위기라는 이야기죠. 그리고 다시 한번 밝히지만, 분위기를 반전하지 못한다면 제 말은 사실이 될 거예요.”

“허허, 참. 대쪽 같은 분이십니다. 참고로 저, 톰 힉스는 본 발언과 일체 관계가 없으니 나중에 때리실 때 전 피해주시길 바랍니다.”

능청맞게 몸을 사리는 톰 힉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서, 이번엔 리버풀을 맛봐봅시다.”

“리버풀의 기세가 매섭지요. 개막 3연승 이후, 4라운드 스완지 원정경기 무승부. 5라운드 사우샘프턴 홈경기 패배로 조금 휘청거렸습니다. 하지만 6라운드, 선덜랜드 원정경기에서 다시 승리를 거머쥐며 우승 경쟁에 불을 붙였어요.”

“드라큘라, 루이스 수아레스의 복귀가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루이스 수아레스.

우루과이 국적의 전설적인 포워드.

12-13시즌, 첼시의 수비수 이바노비치의 팔을 말 그대로, 크앙! 하고 물어버린 희대의 사고를 친 악동.

그 때문에 4경기나 출장 금지를 당한 터라 뒤늦게 리그에 합류했다.

그리고.

합류하자마자 멀티 골을 기록하는 미친 존재감을 과시.

자신이 리버풀의 에이스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아스날 이적설로 뜨거웠던 수아레스였죠. 참, 실력 하나만큼은 월드클래스인데, 기행만 줄여줬으면 좋겠어요.”

“허허. 그렇습니다. 30년 넘게 축구를 보면서 팔을 물어뜯는 선수는 처음 봤습니다.”

1년 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또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를 거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마, 축구 역사의 한편을 장식하게 될 거예요. 하여튼, 이번 시즌은 리버풀이 모처럼 우승에 도전할 만한 시즌으로 보여요. SAS 라인의 파괴력은 유럽 최고급이니까요.”

“SAS 라인이 뭡니까?”

“수아레스와 스터리지. 이 둘을 부르는 말이죠.”

“또, 또. 이상한 말을 지어내시네요.”

힉스가 질책하자, 필립스는 단호하게 못 박는다.

“이상한 말이라뇨. 앞으로 공격진 조합을 무슨 무슨 라인이라 부르는데 유행할 거예요. 두고 보시죠.”

“네네. 근거 없는 주장 잘 보았습니다. 그럼, 요약으로 넘어갑시다.”

째릿. 나름대로 고심한 명칭이었건만. 필립스는 힉스를 한껏 째려보고선 정리에 들어간다.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챔피언스리그에 합류하지 못할 것이며 리버풀은 우승을 하거나 아쉽게 2위를 달성한다고 봐요.”

“정말 과감한 요약이었습니다. 말씀드리지만, 나단 필립스의 발언은 저와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거듭 밝힙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는 포츠머스의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여기까지, 뚱보와,”

“···삐쩍이었습니다.”

못마땅한 얼굴을 숨기지 않는 필립스.

언젠간 오늘의 치욕을 제대로 갚아주겠다고 단단히 벼르는 그였다.

2.

“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구단주님이 보시기에는 제가 한가해 보이겠지만, 무척 바쁜 사람이거든요.”

난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을 마구마구 입에 집어넣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니, 바쁜 사람 불러놓고 스마트폰만 보는 건 또 무슨 경우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근데 여기 음식 진짜 맛있네.

“뚱보와 삐쩍이.”

“네?”

지금 뭐라고? 잘못 들었나?

“너튜브 방송이라네. 내 돈으로 지원한 건데 나도 봐야지 않겠나.”

“어떠신가요?”

“재밌네. 나도 좀 후원을 해줬지.”

“···설마, ‘올드보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시는 건 아니겠죠?”

요전번에 들었다. ‘올드보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구독자가 한 번에 2,000파운드나 후원을 했다고.

한화로 300만 원. 신생 채널이 받기엔 꽤 큰 금액이었다.

“커흠···. 아, 아닐세. 오, 올드보이라니. 너무 유치한 아이디 아닌가.”

“···.”

맞네. 맞아. 저 근엄하고 묵직하기 짝이 없는 구단주 영감님이 저렇게 당황하다니.

“하여튼, 꽤 재미있다네. 오랜만에 무언갈 기다려보는 경험은 무척 가슴을 들뜨게 했다네.”

“재밌긴 하죠. 인기도 많고.”

“참 재주가 좋은 친구야.”

“힉스랑 필립스 씨요? 그렇죠. 축구를 보는 안목도 뛰어나고, 입담도 좋고, 케미도 잘 맞으니까요.”

괜히 훗날 엄청난 대기업이 되는 게 아니다.

“아니, 그 둘 말고. 자네가 말이야.”

“···여기서 제가 왜 튀어나오죠?”

“허허. 아직 연기가 조금 서투르군.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이번 너튜브 채널 개설의 배후에 자네가 있다는 사실은 내 익히 알고 있다네.”

“이런. 이미 알고 계셨군요?”

딱히 숨긴 건 아니지만 귀신같이 알아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뭐, 전에 말했던 ‘눈’이 보고를 했겠지.

눈의 정체를 밝혀보기 위해 짱구를 데구루루 열심히 굴려보긴 했지만 실패했다. 직원이 한둘도 아니고. 직원이 아닐지도 모르고.

혹시 아는가? 선수가 눈일지도.

“역시 자네는 감독을 하기엔 너무나 아쉬운 인재야. 어떠한가? 4부리그의 조그마한 영세 구단 말고, 내 회사에서 일해봄이. 말단 사원이 아니라네. 내 십 년 내로 임원에 오를 거라 장담하지.”

호오. 꽤 파격적인 제안이다.

리처드 맥닐, 구단주 영감의 회사는 영국에서 농수산 식품업과 유통업의 일인자.

즉 영국의 먹거리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밥을 굶고 살 순 없는 법.

그런 의미에서 이 영감님의 힘은 엄청나다. 솔직히 포츠머스 같은 망한 구단의 감독직보다 저 회사 들어가서 임원 배지 다는 게 훨씬 성공한 인생이겠지.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전에 말했듯이 전 포츠머스의 감독직 말고는 관심이 없어서요.”

내가 싱긋 웃으며 거절하자, 맥닐 구단주는 꽤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진심이었어?

멀쩡히 잘하는 감독을 자르고 회사에 영입하려던 게?

이로써 한 가지 확실해졌다.

이 영감님은 포츠머스라는 축구구단에 관심이 없다는 것.

그렇다면, 어째서 법정관리 중인 구단의 지분을 모조리 사들이며 인수를 한 거지?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포츠머스의 서포터즈, ‘폼페이 서포터즈 트러스트’가 인수를 했을 텐데 말이야.

“아쉽군. 언제나 입사의 문은 열려있으니 언제든 의사를 표명해주길 바라네.”

“일단은 알겠어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근데, 이게 절 부르신 이유입니까?”

“아닐세. 말이 나온 김에 제안을 해본 거라네. 난 사람 욕심이 많아서.”

“정말 많으신가 보네요. 그럼, 절 부르신 이유가 뭐예요?”

“일 잘하는 직원에게 구단주로서 포상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포상이라···. 맛있는 식사이긴 하죠. 그러니까 자주 좀 불러주세요. 제가 지갑이 가벼운지라.”

쩨쩨하긴. 무패행진 중인 감독에게 겨우 밥 한 끼 사주는 게 포상이라니.

개인 자산만 수조인 사람이 말이야.

“허허. 이건 그냥 애피타이저라네.”

“오. 다른 포상이 있단 말이에요? 감질나게 하지 마시고 포상이 뭔지나 말해주시죠.”

내가 보채자 구단주 할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참 좋은 향기야. 여기 음식은 평범하지만 차는 영국 최고일 거라네.”

“···입이 참 고급스러우시군요.”

“허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난 이 나라의 식량을 담당하는 사람이라네.”

하긴. 음식은 조리법도 중요하지만, 재료가 가장 중요한 법.

아마 최상급 재료로만 배를 채울 거다.

덕분에 우리 구단도 최상급 재료를 받는다. 아마 영국 내에서 우리 구단보다 밥 잘 나오는 곳도 없을 거라 단언한다.

“내가 듣기로는, 자네가 꽤 빈궁하게 산다고 하더군. 맞는가?”

“···뭐 그렇죠.”

영국은 월세가 진짜 높다. 주급 받아서 월세 내고, 비트코인 사고 나면 남는 돈이 없을 정도.

“밀턴 파크 근처의 원룸에서 산다고 들었네만.”

“그렇죠.”

“불편하겠군.”

“그냥저냥 살만해요. 원룸이라서 아늑하기도 하고.”

꽤 만족하는 편이다. 물욕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별수 있겠나. 돈이 없는데.

바퀴벌레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만으로도 매우 훌륭한 방이다.

“하지만 영국 축구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젊은 천재에게 어울리는 거주지는 아니지.”

“···네?”

뭐지? 이 영감이 뭔 약을 팔려고 하는 거지? 연봉을 대폭 인상한 재계약이라도 해주려고 하나?

그럼 나야 무척 고맙겠지만 말이야.

“자네를 보니 물욕이 없진 않아 보이네.”

“저 돈 좋아해요.”

포츠머스가 더 좋을 뿐이지만.

“그럼 잘되었군. 아쉬운 이야기지만 사람은 상대가 걸친 것들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네.”

“···동의해요.”

“요즘 잘나가는 포츠머스의 감독이 원룸에서 산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러니까 구단의 품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일세.”

이거 갑부가 서민 사는 꼬락서니가 품위 없다고 깎아내리는 거 맞지?

나날이 돌아가면서 꼭지를 돌게 하네.

“···그래서요?”

자연스럽게 내 어조가 올라갔다.

상당히 날카로운 반문이었지만 구단주 영감탱이는 재밌다는 미소를 지을 뿐.

“훗. 진정하게나. 자네를 비꼬려는 것이 아니니. 우린 ‘포상’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나.”

“그랬었죠. 자, 잠깐. 그렇다면 혹시?!”

내가 이제야 포상의 의미를 깨닫고 화들짝 놀라자 위대한 리처드 맥닐 구단주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신다.

“내, 집 한 채 선물해 주겠네.”

오. 위대한 구단주님이시여.

이 불쌍한 어린 양에게 내리는 복음을 달게 받겠나이다.

감독 3개월 차.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었다.

< 034화. 리그2, 전반기.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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