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3화. 리그2, 전반기. (3) >
1.
로치데일AFC의 케이스 힐 감독은 A매치 휴식기 동안 대(對) 포츠머스 FC 전술을 정성 들여 깎아왔다.
개막 4연승을 달리는 포츠머스의 4-2-3-1을 봉쇄하기 위한 4-1-4-1포메이션의 채용이 바로 그것.
매 경기 어시스트를 쌓는 공격형 미드필더, 델리 알리를 원천 봉쇄하기 위한 수비형 미드필더의 기용.
포츠머스의 넓은 공격 간격에 휘둘리지 않고 박스 안쪽 밀집도를 촘촘히 유지하는 팀 너비.
최전방 원톱마저도 수비에 가담하는, 극단적인 수비축구.
평소의 포츠머스였다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지도 몰랐다.
‘망할, 애송이가!’
힐 감독은 속으로 욕을 내질렀다.
3백이라니.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전술이다. 이로써 그간 준비해왔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놈! 내 계획을 알았던 건가?!’
전술적으로도 완패했지만, 선수 기용도 대참패였다.
먼저, 오늘 로치데일의 수비는 제공권은 달리지만, 운동능력이 좋은 선수들로 이루어져있다.
제공권이 좋지 않은 조쉬 킹,
키는 작지만, 민첩성이 뛰어나고 순간 속도가 빠른 존 말로리.
이 둘을 겨냥한 선발이었다.
포츠머스는 골잡이들의 특성상 낮은 크로스를 주로 활용했으니까.
물론, 애초에 위협적인 크로스를 차단하는 방법이 제일 좋다.
허나,
잭 해리슨과 앤디 로버트슨.
리그2, 좌측면의 지배자이자 공포를 어찌 막으리. 뭘 해도 어차피 날아올 크로스 아니던가. 힐 감독이 고를만한 선택지는 오직 하나였을 뿐.
바로, 받는 선수를 잡는 것.
항상 그렇듯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었다.
처맞기 전까진.
‘안토니오 그린이 선발이라니.’
안토니오 그린.
제공권이 뛰어난 선수.
제공권만으로는 리그2 최고의 선수라고 자타가 공인할 정도였다.
그의 예상치 못한 선발은 애써 고심한 선발 라인업을 똥 묻은 휴짓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격이다.
‘당했다. 광대질 따위에 이 내가.’
그간 엄청난 활약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조쉬 킹의 오른쪽 윙으로의 귀환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뛰어난 골잡이인 존 말로리가 선발이 아닌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할 줄이야.
완벽한 카운터 펀치였다.
‘그리고 알리의 3선 기용. 정말 잔재주에 도가 텄군.’
뿐만 아니라 알리까지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한 칸 내려온 중앙 미드필더에 위치.
이렇게 된다면 맨투맨 마크를 지시받은 수비형 미드필드가 붕 뜰 터.
도저히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너무 늦어버렸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대대적인 변화는 불가능하니까.
최소한, 전반 45분은.
이래저래 제대로 물을 먹은 로치데일의 케이스 힐 감독이었다.
2.
“후후후. 표정 봐라. 내가 이 맛에 감독질 하는 거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아. 항상 새로워. 맛있어.”
너무 달다. 뭐랄까. 신병 휴가 때 어머니가 해주신 돼지고기 김치 볶음이랄까.
밥도둑이 따로 없다.
바득바득.
이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쯧쯧. 저렇게 가시면 10년 안에 틀니 하나 장만하셔야 할 텐데.
“감독님···. 사악하시네요. 허허.”
밀러 아저씨가 옆에서 나와 함께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후후. 아저씨도 이제 꽤 쓸만한 미소를 만드시는군요?”
“다 감독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 미소를 워낙 자주 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짓게 되더라고요.”
“아주 훌륭해요. 더 가르칠 구석이 없을 정도네요. 후후후.”
“허허허. 그런데 말입니다. 어떻게 힐 감독의 선수 기용을 완벽히 알아채신 겁니까?”
한참을 나와 함께 썩은 미소를 짓던 밀러 아저씨는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이 아저씨를 보소. 진짜 점점 지능이 개화되는 느낌이란 말이지.
다, 잘난 감독 덕분이려나.
“손자병법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영어로는 아트 오브 워, 라고 할 텐데.”
“처음 들어보는데요?”
“···.”
하, 참. 코쟁이들은 이게 문제야.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란 생각을 뿌리 깊게 박아놔 동양의 신비에 관심이 없다는 거.
“감독이 되려면 한번 읽어보는 걸 추천해 드릴게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빨리 대답이나 주세요. 궁금해 죽겠으니까요.”
“알았어요. 그, 어디까지 했더라···. 아! 손자병법에서 말이죠.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라는 말이 있죠.”
“지피어지귀?”
“에이, 따라 하진 말고요. 하여튼, 요컨대 이거죠.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백전백승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잘못된 상식이다.
백전백승이면 춘추전국시대 때 오나라가 천하통일을 했겠지.
“아하. 이해했습니다. 감독님은 힐 감독을 자세히 분석하셨다는 이야기군요?”
“정확해요. 감독의 성향은 전술에 드러나는 법이니까요. 뻔했죠.”
사실은 미래를 알기에 선발 기용만 조금 바꿔준 거다. 힐 감독이야 꽤 자주 싸워봤던 상대. 그의 머릿속 정도야 이미 옛 저녁에 꿰뚫었으니까.
“이야. 대단하십니다!”
속사정을 모르는 밀러 아저씨는 침을 튀기며 물개박수를 쳤다.
“감독님의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하실 텐데, 감독들의 성격마저도 공부하시다니. 정말 감탄만 나오네요. 정말 바닥이 보이지 않는 능력이십니다.”
줄줄이 튀어나오는 찬사.
큼큼. 조금 부끄럽군.
“하, 하하. 뭐, 겨, 겸사겸사 알아본 거죠. 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허허. 평소답지 않으시게 겸손을 떠시네요. 그냥 하던 대로 하시죠.”
이 사람이? 나만큼 겸손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난 건드리지만 않으면 젠틀한 사람이라고.
그간 날 건드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뿐이지.
“그나저나 후보 선수들이 잘 해줄까요? 안토니오는 종종 경기에 나왔다 치더라도 프레디 스톤은 선발이 처음이잖아요. 윙백도 처음 해보고.”
“잘 해줘야죠. 앞으로의 여정을 위해서라면.”
주전만 잘해선 승격은 불가능.
모두가 잘해줘야 한다.
46경기의 레이스는 11명으론 완주하기 어려운 마라톤이니까.
“그렇죠. 그나마 위안인 건 녀석들이 훈련은 정말 열심히 했다는 거죠.”
“이야. 정말 이제 감독직 맡아도 되겠는데요?”
“허허. 아직 멀었습니다. 감독님과 함께한 지 이제 겨우 두 달 아닙니까. 최소한 20년은 쭉 곁에서 보고 배우겠습니다.”
아니, 보통은 2년이라고 하지 않나?
“···큼큼. 20년은 좀. 하여튼 손자병법은 꼭 한번 읽어보세요. 이래저래 스포츠는 전투니까요.”
“경기 끝나자마자 서점에 들를 예정입니다. 동양의 신비. 무척 관심이 가네요. 허허.”
“아주 좋아요. 그럼 이제 경기에 집중하도록 하죠.”
“옙. 감독님.”
문득 드는 생각인데, 혹시 이 아저씨가 내 노하우를 빨아먹으려고 이렇게 태도를 바꾼 건가?
전에 나눴던 대화만 보면 그럴 리는 없겠다만.
뭐, 능력을 키워서 반역을 일으키려는 야심가를 싫어하진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지.
그러니까 열심히 정진하세요, 밀러 아저씨. 아직 500년은 이르니까.
3.
경기는 포츠머스가 주도권을 꽉 휘어잡고 진행되었다.
3명의 수비수.
2명의 중앙 미드필더.
이들은 5각형을 만들며 끊임없이 후방 빌드업을 하며 점유율을 늘려나간다.
물론, 주공격 루트는 왼쪽.
앤디 로버트슨이 거의 윙처럼 높은 포지션을 잡으며 잭 해리슨과 위협적인 장면을 수없이 연출한다.
[아! 포츠머스의 파상 공세가 이어집니다. 로치데일 너무 두들겨 맞는데요!]
장내 아나운서의 탄식.
그와 동시에 무너지는 로치데일 팬들의 억장.
전반 20분 동안 공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채, 말 그대로 구타를 당한다.
원인은 당연하게도 완벽한 전술적 패착에 있었다.
임무를 잃어버린 로치데일의 수비형 미드필더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날아오는 크로스는 족족 안토니오 그린이 따내며 공격을 주도했으며,
좁은 진형은 넓게 날개를 펼친 포츠머스의 양 윙백이 마음껏 날뛰게 도와줬으니까.
덕분에 그간 경기장에 후보로 두 번밖에 나오지 못했던 프레디 스톤이 물 만난 물고기 같은 활약을 펼친다.
‘윙백은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그냥 윙이랑 다를 게 없잖아?’
프레디 스톤. 23세.
플레이 스타일은 오른쪽의 잭 해리슨.
오늘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오른쪽 윙백을 맡았지만, 어색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본직인 오른쪽 윙보다 훨씬 편해서 의아함을 느낄 정도.
‘공간이 너무 많아.’
그에게 주어진 공간은,
거의 만주벌판 수준.
왼쪽으로 쏠린 공격작업 탓에 공만 받았다 하면 허허벌판이었다.
심지어 오른쪽 윙을 맡은 조쉬 킹마저 투톱 같은 움직임을 보여줬기에, 더더욱 공간이 남았다.
‘진짜 축구는 감독 놀음이구나.’
감탄만 나온다.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은 리그2에서 그저 그런 선수였거늘. 솔직히 은퇴하면 뭐 먹고 살지 고민하느라 비트코인도 공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이 고양감.
이 자신감.
오늘만큼은 뭐든 해낼 수 있을 거란 근거 없는 생각이 폭주한다.
[아! 또다시 프레디 스톤이 공을 잡습니다! 오늘 정말 엄청난 활약 중인데요. 이번에도 거침없이 질주합니다.]
[말 그대로 막아서는 선수가 없어요. 평야를 달리는 야생마입니다!]
프레디 스톤은 뻥 뚫린 공간을 내달려 어김없이 크로스를 시도한다.
-뻥.
6번째 크로스.
이번에 느껴지는 발의 타격감은 상당히 느낌이 좋다.
-휘릭.
감각이 말해주듯 채찍 같은 날카로운 크로스가 안토니오 그린을 향해 휘어져 나간다.
[안토니오 그린! 공중볼의 지배자! 이번에도 공을 따낼 수 있을까요!]
물론이다. 이미 전반 30여 분 만에 10개의 공중볼 경합을 이겨낸 안토니오 그린 아니던가.
-툭.
지금껏 계속 공중볼을 동료에게 떨궈주기만 했지만, 이번엔 스윽, 궤도만 바꿔준다. 목표는 왼쪽 포스트 바 상단.
골 욕심 때문에? 아니다. 그저 크로스가 너무 좋았으니까.
이렇게 좋은 크로스를 땅으로 향하게 한다면 예의가 아니니까.
-철썩!
[골입니다! 골! 안토니오 그린! 결국은 헤더 골로 선취점을 달성합니다! 1-0으로 앞서나가는 포츠머스!]
[아, 홈구장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선취골이 나왔습니다.]
“우오오오오!”
울부짖는 안토니오 그린!
성난 고릴라가 따로 없다.
“나이스 크로스!”
한차례 열정적인 골 셀레브레이션 이후, 안토니오 그린은 프레디 스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나이스 골!”
그에 화답하는 프레디 스톤.
그간 후보 선수였던 둘.
후보 신분임에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들은, 끝내 달콤한 과실을 얻어냈다.
4.
삑-삐익-삐이이익!
경기 종료.
포츠머스의 2-0 완승.
전반전에만 멀티 골을 기록한 후보 선수 안토니오 그린.
이번 시즌 첫 공격 포인트를 달성한 후보 선수 프레디 스톤.
후보 선수답지 않은 대단한 활약으로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오늘 전반전은 무척 끔찍했는데요, 전술적으로 완전히 패착을 저질렀다는 점에 대해서 동의하시나요?”
경기 종료 후 이어진 기자회견.
케이스 힐 감독은 대단히 공격적인 질문을 받았다.
잠시 입술을 씰룩거린 힐 감독은 매우 공격적인 어조로 답변한다.
“감독이 아닌 야바위꾼의 농간에 잠시 장단을 맞춰줬을 뿐입니다. 같은 수준으로 상대해 줬지만, 소용이 없더군요. 제대로 한 후반전을 보신다면 선배가 후배의 귀여운 장난질에 어울려 줬다고 느끼실 겁니다.”
저세상 답변이었다.
물론, 하프 타일 때 빠른 전술 수정을 통해 추가 실점을 하지 않은 공로는 컸지만 말이다.
‘시팔. 뭔 지가 원펀맨이야? 진심모드를 자기 꼴리는 대로 켰다 껐다 하게?’
소하는 그저 코웃음만 나왔다.
2-0으로 진, 아니. 0-0인 후반전만 봐도 슈팅 수가 두 배는 차이 났으니까.
덕분에 소하도 오랜만에 굉장히 공격적인 기자회견을 진행한다.
“깜짝 전술을 가져오셨는데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하하. 알다시피 주전 선수가 빠졌기 때문이죠. 설마 아무 생각 없이 선수를 팔았겠어요? 게다가 누가 핵심 선수를 팔고 같은 전술을 쓰겠습니까.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하하하.”
힐 감독에 대한 핀포인트 저격.
주전 선수를 판매한 사실을 알았음에도 똑같은 전술을 쓸 거라고 생각한 판단 착오. 이 부분을 힘차게 꼬집었다.
“역시. 감독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하기야, 아무 생각 없이 주전 선수를 마감일에 놓아주진 않으셨겠죠.”
뜨끔.
주마다 보는 예쁘장한 여기자의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뭐, 대책 없이 팔긴 했지만, 바로 대책안을 마련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빠른 자기합리화.
점점 뻔뻔해지는 소하였다.
“경기 종료 후 힐 감독이 상당히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배로서 후배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일 거라 믿어요. 그래도 이렇게 한 경기 한 경기가 중요한 정규리그에서 이런 식으로 사랑을 베푸실 줄 몰랐지만요.”
독설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아니. 열 대는 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소하.
기자회견 내내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힐 감독의 비난에 할애했다.
“마지막으로 후보 선수들이 승리의 주역이 되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다리던 질문.
소하야말로, 이번 경기에서 후보 선수들이 보여준 눈부신 활약에 가장 크게 기뻐했던 사람이니까.
“아주, 매우, 대단히, 엄청, 무척. 훌륭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덧붙이자면 이번 승리의 일등 공신은 선발이 아님에도 훈련에 매진한 선수들 덕분이죠. 항상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있어요.”
오늘 경기로 얻은 것이 너무나 많다.
핵심 선수의 빈자리를 채운 점.
극단적인 수비 전술의 파훼법.
후보 선수들의 약진.
단 한 경기로 이 모든 것을 얻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소하의 포츠머스가 ‘팀’으로서 성장한다는 증거.
이제 전반기의 남은 경기는 18경기.
앞으로의 행보에 청신호가 켜진 포츠머스였다.
< 033화. 리그2, 전반기. (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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