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1화. 리그2, 전반기. (1) >
1.
다음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필립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알버트 위버와 필립스의 에이전트가 이미 협상을 마친 덕분.
사인만 하면 끝이었다.
필립스가 사인을 마치자, 바로 구단 간의 팩스가 교환되었고 이적은 마무리되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달까.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자 마음이 푸근해진다.
내일 오전 중에 메디컬 테스트와 유니폼을 들고 사진 한 방 찍으면 완전히 끝이다.
“휴우. 얼추 일이 끝났네요. 그럼 돌아가 볼까요?”
“···바쁜 하루였습니다. 감독님.”
내 말에 기술재무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래저래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하루였나보다.
왜 그럴까. 난 재밌었는데. 오랜만에 폭주했더니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자, 잠깐!”
협상을 마무리 짓고 리즈 유나이티드의 클럽하우스를 떠나려는 찰나.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는 무언가가 다급하게 다가온다. 혹은 형광등일지도 모른다. 둥둥 떠다니는.
‘뭐, 뭐지?’
U.F.O인가?
자세히 보니 아니다.
반질반질한 민머리에 빛이 반사된 것일 뿐.
“헉헉. 자,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신원미상의 인물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누구···?”
“나, 난 리즈유나이티드의 감독 브라이언 맥더멋이라네.”
“···아, 안녕하세요. 근데 어떤 일로?”
난 영문을 몰라 일단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즈의 감독이 왜 찾아왔단 말인가. 그것도 반송장이 돼서 말이다.
“헉헉. 자,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나? 내, 자네가 여기를 방문했다는 소식에 서둘러 왔다네.”
“집에서 오신 거예요?”
“아닐세. 마감일인데 내가 어찌 퇴근했겠나. 협상도 끝나지 않았는데.”
“그럼 왜 이제 와서···.”
“깜빡 졸아버렸네.”
“···.”
하긴. 연세가 꽤 들어 보이시니까. 꽤 피곤했겠지. 28세의 청춘인 나도 온몸이 노곤해지는 날이 8월 31일이니까.
“나와 이야기 좀 합세.”
“어···. 음. 지금 시간이 시간인지라.”
힐끗 시계를 바라보며 난감해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곧 자정에 가까웠으니까. 피곤해서 1분 1초라도 빨리 포츠머스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지 말고, 내 몇 가지만 물어봄세. 제발.”
“흐음.”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피곤하기도 했을뿐더러 맥더멋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브라이언’ 맥더멋. 지금쯤 포츠머스의 사장실에서 꿀을 빨고 있을 그, 개자식과 이름이 같다.
아오. 상상만 해도 혈압이 확 오르네.
“10분만 시간을 내주게. 그럼 내, 비행기 표를 알아봐 주겠네.”
“호오.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
빠른 태세 전환이었지만 난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럼이 없었다.
지금 차를 타고 가면 포츠머스엔 새벽 2시에 도착하니까.
“큼큼. 그럴 거까진 없네.”
“좋아요. 뭐든 물어보시죠.”
내 허락이 떨어지자, 맥더멋 감독은 먼저 리즈의 프런트에게 비행기 표를 요구한다. 서둘러 감독의 요청을 이행하러 가는 직원들. 과연 구할 수 있을까.
“내, 자네의 경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보았다네.”
“그런데요?”
“그 전술!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건가! 난 순간 눈을 의심했다네. 전술에 선수들이 잘 따라오지 못함에도 강력하기 짝이 없었어. 정발 윙어를 사용하는 이유 하며, 왜 4-2-3-1로 바꾼 건지 궁금하고. 정말 자네는 천재야. 천재. 나에게도 꿈꾸는 전술이 있는데 말이야···. 그게 뭐냐면···.”
중얼중얼.
이 리즈의 브라이언은 한참을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해낸다. 대부분 내 전술에 대한 찬양이다.
이봐요. 잠시면 된다면서요.
“하여튼. 정녕 자네의 머릿속에서 나온 전술이 맞는 건가?”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솔직히 자신이 있게 ‘내 것이다!’라고 하기엔 부끄럽다. 난 천재 감독들의 지식을 미래에서 가져와 미리 사용하는 것일 뿐.
내 소유라고 하긴 힘들었으니까.
사실 내가 그들만큼 전술적으로 천재적이었다면 포츠머스에서 그렇게 빌빌거리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창조는 못 하지만 내 방식대로 개조는 잘하는 편. 2차 창작에 재능이 있달까.
하여튼 이런 이유로 선수 영입에 열을 올리는 거다. 자고로 선수빨만큼 성적에 좋은 약은 없는 법이니까.
“오오. 정말 자네는 전술 천재야! 클롭이나 펩 감독하고도 맞먹을 걸세.”
“···과, 과찬이에요. 전 그냥 그분들이 닦은 길을 걸었을 뿐이에요.”
부끄럽다. 날 당황하게 만드는 사람이 리즈에 있을 줄이야.
역시 브라이언이란 이름은 나랑 잘 맞지 않아.
“날이 늦었으니 여기까지 합세. 이렇게 헤어지면 너무 아쉬우니, 우리 번호를 교환하는 게 어떠한가? 전술적으로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으니 말일세.”
별로 아쉽진 않은데.
그래도 나보다 2배 가까이 나이를 잡수신 분의 부탁을 거절하긴 힘들다.
좀 불편하긴 했지만, 후배에게 조언을 구하는 모습이 꽤 좋게 보였다.
“알겠어요. 종종 연락하죠.”
“허허. 고맙네.”
밝게 웃는 리즈의 브라이언.
조금 전의 반송장 같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10년은 젊어 보인다.
저런 열정.
꽤 괜찮단 말이야.
맥너멋 감독과 번호교환이 끝나자, 타이밍 좋게 리즈의 직원이 표를 가져다준다. 그것도 석 장이나.
내일까진 전부 다 매진이었을 텐데. 참 용하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근본 넘치는 구단의 유능한 직원 아닐까 싶다.
부럽다. 아주 부럽다. 우리 프런트도 저 정도만 해주면 좋을 텐데.
“앗.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한 사람을 정해야겠군요. 저기, 기술재무팀장님?”
내가 슬쩍 뱀눈으로 쳐다보자 위버 씨는 애써 내 시선을 무시한다.
“···.”
“들으신 거 다 알거든요?”
“···크흡. 설마 감독님 차를 몰고 혼자서 포츠머스로 가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와우.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도 잘 아실까. 의외로 위버 씨는 쓸만한 인재일지도 모르겠다.
“사람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시네요. 어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맞추시죠? 이참에 돗자리 깔아보시죠.”
“오···. 감독님···.”
“제가 여기까지 운전했는데, 또 하라고요? 그렇다고 킹이 할 순 없잖아요.”
옆에서 킹이 제가 혼자 몰고 가죠, 라는 헛소리를 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크, 크흠.”
“제 차 내일 아침 훈련장에 세워두세요. 맨날 주차해두는 자리 아시죠?”
“가, 감독님.”
“아. 프런트엔 말해둘게요. 내일 쉬신다고. 괜찮죠?”
“···그건 나쁘지 않네요. 알겠습니다. 제가···. 차를 끌고 포츠머스로 가도록 하죠.”
위버 씨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방법이 없었으니까. 요즘 구단 내부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내 비위를 거스를 순 없겠지.
더군다나 휴가까지 허락했으니 3시간 정도의 운전은 참을 만할 거다.
그럼 출발해볼까.
“이거 한 장은 환불 하셔도 돼요.”
마무리는 지어야겠지.
2.
데드라인, 22분 전.
포츠머스는 새로운 영입과 방출을 공표했다.
올 시즌 주전 자리를 꿰찬 데클렌 마이어스의 리즈유나이티드행.
그리고 새로운 영입생인 18세의 미드필더 칼빈 필립스.
서포터들의 반응은 호불호가 갈렸다.
-또. 또. 십 대 선수 데려오는 거 봐라. 감독 진짜 로리콘 아니야?
-전생에 보육원 원장이 확실해.
-오른쪽은 어떻게 하고? 유망주 영입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우린 주전 오른쪽 풀백을 리즈에 넘겼다고!
-감독님이 다 생각이 있겠지!
-맞아. 나는 성소하 감독을 믿습니다.
잘하든 못하든 늘 따라오는 비판.
무리를 이끈다는 것 항상 이런 법이었으니까 별로 대수롭지 않다.
소하는 오히려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드디어 해바라기단이 생겼군.’
일단은 뭐가 됐던 감독을 옹호하는 추종자들. 일명 해바라기단.
이들이 생겼다는 건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최소한 비판을 분산시켜줄 세력이 생겨났다는 거니까.
요컨대, 갈라치기.
전세계에서.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권력자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던 통치 방법이다. 대표적으론 계급제도가 있겠다.
서로 싸우느라 감독에게 오는 비난이 줄어들 터.
앞으로의 여정에 든든한 콘크리트 층이 되어줄 세력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물론, 과한 칭찬에 자만에 빠지는 건 조심해야겠지만.
3.
다음 날, 9월 1일.
클럽 하우스에서 짐을 챙긴 마이어스는 동료들과 스태프진 앞에 섰다.
작별 인사.
어지간한 선수, 즉 원클럽맨이 아니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경험하는 이별이다.
“잘 있어라.”
꽤 덤덤한 목소리다. 리그2에서 챔피언십리그의 팀으로 이적하는 선수답지 않다. 오히려, 상당히 아쉬워하는 모습.
“마이어스. 가서 잘 먹고 잘살아라.”
“선배 챔십이라고 너무 겁먹지 말고요. 뭐, 지금이라도 원하시면 제가 대신 가드릴게요.”
“이야. 바닷가 촌 동네에서 대도시로 이사하네. 부럽다 야.”
“프로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는다면 어렵지 않게 적응할 겁니다.”
동료들은 저마다 덕담을 건넨다.
마이어스가 포츠머스에 머문 시간은 단 1년 2개월.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정이 꽤 많이 들었다.
훈련소 동기 같은 느낌.
리그2로의 강등과 법정관리까지. 구단이 가장 힘들 때 함께한 사이라 더욱 각별하다.
“고맙다. 혹시라도 리즈에 온다면 연락해라. 밥 한 끼 살게.”
꽤 훈훈한 장면이지만 여지없이 초를 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방출이나 당하지 마세요. 막상 갔더니 없는 거 아니에요?”
역시, 조쉬 킹.
덕담을 나눌 때도 개소리를 하더니 여지없이 치고 들어왔다. 분명, 어제 새벽까지 영국을 주유했을 텐데, 지치지도 않고 훈련에 나왔다.
“후후. 그래. 방출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
평소 같았으면 서로 공격을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오늘은 묘하게 잠잠하다.
여러 감정의 소용돌이 때문.
두 단계나 위인 상위리그에 도전한다는 부담감.
새로운 장소와 사람에 대한 걱정.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아쉬움.
하지만 전부 ‘프로’로서 이겨내야 할 일들.
마이어스는 속으로 잘 해낼 거라 다짐하며 소하 앞에 선다.
“감독님.”
“잘 가라.”
소하는 평소답지 않게 인자한 눈빛으로 마이어스를 바라본다.
데클란 마이어스. 23세.
겉보기에는 5살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15살 차이. 조카뻘이다.
비록 떠나게 됐지만, 그의 앞날이 밝길 어른으로서 진심으로 바란다.
“비록 두 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걸 배웠습니다. 감독님의 지도 덕분에 축구에 눈을 떴습니다.”
“후후. 알긴 아는구나.”
“역시 감독님은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저도 그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나중에 자서전 같은 거 쓰면 내 이름 꼭 넣어라.”
“후후. 알겠습니다.”
마이어스는 잠시, 소하의 눈을 응시한다. 감사함이 담긴 눈빛을 한 차례 보낸 그는 손을 내민다.
“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꽈악. 내민 손을 맞잡은 소하는 씨익 웃으며 마이어스의 도발에 맞대응한다.
“2년만 기다려라. 킹 말처럼 방출당하지 말고.”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 프리미어 리그 가면 너 안 찾을 거니까, 그때 가서 섭섭해하지 말고. 다 네가 선택한 이적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
“하하.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가져가라.”
소하는 주머니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 마이어스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마법 노트다.”
“그게 무슨···.”
마법 노트라니. 도통 이해하기 힘들다. 평상시에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말이다.
호기심이 일은 마이어스. 소하가 건넨 수첩을 재빨리 펼쳐 읽어내린다.
한두 장 수첩을 넘기던 마이어스의 손이 이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수첩의 처음과 끝을 도배한 내용은 오로지 한가지.
‘데클렌 마이어스의 성장법.’
보완해야 할 단점과 더욱 발전해야 할 장점, 그에 따른 훈련법.
그뿐만 아니라, 간단한 그림으로 각 상황에 따른 전술적 움직임까지 자세하게 그려놨다.
그야말로, 마이어스에게는 억만금보다 귀한 자료.
“···가, 감독님.”
“왜? 감동했냐? 그러지 마. 닭살 돋으니까. 원래 날 위해서 작성한 건데 이제 쓸모없잖냐. 버리기엔 저거 쓰느라 날린 시간이 아까워서 주는 거니깐 울진 마라.”
“···우, 울긴 누가 웁니까.”
“아니면 말고. 그럼 가봐라.”
“예.”
꾸벅 고개를 숙인 마이어스는 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포츠머스의 클럽하우스를 떠났다.
이제 앞만 보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그의 스승인 소하를 위해서.
“후우. 갔군. 그럼 이제···.”
“저 감독님?”
마이어스가 떠나고 누군가가 소하 근처에 다가왔다. 소하는 직감적으로 ‘또’ 킹일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외의 인물이다.
케빈 도슨. 팀의 주장.
“왜?”
“저···. 그게 말입니다. 저도 마이어스에게 준 수첩이 있습니까?”
“···.”
부러웠나 보다. 혹은 질투했거나.
후우. 잠시 한숨을 내쉬는 소하. 나날이 선수들의 정신상태가 맛이 가는 거 같다. 자기 탓은 아닐 거라 위안해보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신빙성이 없다.
“어. 있으니까 빨리 훈련이나 조지러 가. 가지고 싶으면 너도 런 하던가.”
“아, 아닙니다. 그럼 훈련장에서 뵙겠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도슨. 이적할 마음 따위는 없음을 걸음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도슨을 내쫓은 소하는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영국답게 우중충한 날씨.
이젠 날씨도 꽤 서늘하다.
9월의 첫째 날.
슬슬 더위가 가시고 가을이 다가오는 계절.
그리고 A매치 기간이 끝나고 시작되는 본격적인 리그 레이스.
8월부터 12월 말일까지.
전반기의 본격적인 시작이 다가왔다.
< 031화. 리그2, 전반기. (1)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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