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28화 (28/306)

< 028화. 데드라인. (2) >

1.

세상에는 유독 바쁜 날이 존재한다.

아르바이트생들은 금요일이 제일 바쁠 것이고,

직장인들은 연말정산 시즌이 가장 바쁠 것이다.

혹은 전 세계적으로는 크리스마스가 가장 바쁠지도 몰랐다.

이렇듯 바쁘다는 기준은 개인마다 모두 다른 법.

하지만, 축구의 시초로 유명한 영국은 남녀노소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매우 바쁜 날이 존재한다.

그날은 바로. 8월 31일.

이적시장의 마감일이었다.

별들의 리그인 프리미어리그부터 9부리그까지. 더 나아가 아마추어의 끝이자 시작, 20부리그까지.

모든 구단의 관계자들과 축구계 인물들이 종일 과한 업무에 치여 좀비가 되어버리는 날이다.

다른 구단에 비하자면 매우 잠잠하던 포츠머스도 노동의 신의 축복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2.

“응. 안팔아.”

“···.”

“···.”

어제부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자 브라이언과 각 팀의 여러 팀장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뭘 봐. 안 판다고. 너희들 같으면 이적시장 마감일에 핵심 선수를 팔겠어?

꺼져, 그냥.

아, 차라리 얘네들한테 영입 제의가 오지. 한 치의 고민 없이 돈 주고 넘길 텐데.

일단 이적 제의가 온 선수는 3명.

조쉬 킹.

마이클 반즈.

데클렌 마이어스.

예상외였다.

적어도 겨울 이적시장은 돼야 슬슬 입질이 올 거라 생각했거늘. 마감일을 앞두고 이렇게 치고 나올 줄이야.

예상 범위 밖이었다.

아마도 8월의 4경기가 원인일 터.

압도적인 승리에 이목을 너무 끌어버린 후폭풍일 테지.

너무 잘해도 이게 문제다.

안팎으로 설레발은 엄청 치고, 다른 상위 구단에서는 선수에 침을 묻히니까.

하여튼, 모처럼 회귀자의 미래시를 박살 내버린 사건이었지만 내가 취할 행동은 한가지.

NFS.

Not For Sale.

이적 불가.

어차피 오늘은 엔드라인. 하루만 버티면 이적시장은 끝이다.

“감독님. 이건 꽤 좋은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상대는 지금 급합니다.”

“응. 안 팔아.”

“원래 시장가의 수배는 넘게 후려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응. 안 팔아.”

“먼저, 데클렌 마이어스부터 살펴봅시다. 무려 챔피언십리그의 리즈 유나이티드로부터 제의가 왔습니다.”

“응. 안 팔아.”

“···.”

“응. 안 팔아.”

데클렌 마이어스.

이번 시즌 주전을 차지한 선수.

내 전술의 핵심까지는 아니지만, 꽤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다.

중앙수비수와 오른쪽 풀백, 오른쪽 윙백, 오른쪽 윙어까지.

이런 다재다능한 선수를 마다하는 감독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경기 내내 3백과 4백을 오가는 팀 전술의 수비진에서 가장 안정적인 활약을 하는 선수였다.

“그들이 제시한···.”

“응. 안 팔아.”

“금액은 꽤 상당···.”

“응. 안 팔아.”

“옵션 포함 100만 파운드···.”

“응. 안 팔···. 에? 뭐라고요?”

잠깐. 내가 잘못 들었나? 백 어쩌고 한 것처럼 들렸는데.

잘못 들었겠지. 설마.

“큼큼. 이제야 제 말을 들을 생각이신가 보군요. 100만 파운드입니다.”

“10만이 아니라요?”

“네. 정확합니다.”

“왜요?”

“···.”

아니 10만도 아니고 100만이라니.

한화로 15억이나 하는 거액이잖아?

“그게···. 리즈의 오른쪽 수비수가 모조리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특히나 주력으로 육성하던 샘 바이람이 장기부상을 끊었다고 하더군요.”

“···호오.”

과거에선 없었던 일이다.

샘 바이람.

한때 리즈 유나이티드의 기대주.

웨스트햄으로 이적해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성장하지 못했던 선수다.

“어디까지나 옵션 포함 100만 파운드입니다.”

“옵션이 뭔데요.”

내가 이제야 관심을 보이자, 브라이언은 얼굴에 화색을 띤다.

솔직히 절대 팔 생각은 없었지만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었다.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선 이적료는 20만 파운드. 40경기 출장 달성 시 20만 파운드. 잔류 성공 시 20만 파운드, 승격 시 40만 파운드입니다.”

“흐음. 실질적으론 60만 파운드짜리 제안이네요.”

“그렇게 봐도 좋을 겁니다.”

리즈의 승격은 19-20시즌.

13-14시즌에는 15위로 딱 중간에 머물렀던 팀이다.

한마디로 승격은 불가능.

거기에 주전 선수까지 장기부상을 끊었으니, 순위가 더 떨어질지도 몰랐다.

이거 완전 개양아치들이네.

이적료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을 거품으로 채워놓다니. 상당한데?

한 수 배웠어. 나중에 잘 써먹어야겠다.

“60만 파운드도 상당한 금액입니다.”

“흐음. 글쎄요.”

일단 이적료 20만 파운드.

잔류 성공 옵션 20만 파운드.

두 가지는 확실하다.

그리고 출장 수 옵션도 무난할 테고.

데클란 마이어스는 부상이 없는 선수이니까.

이번 시즌에 바로 경기 출장 옵션을 발동시키기는 어려워도 다음 시즌엔 확실하다.

“어차피 우리 팀에는 오른쪽 풀백이 가능한 선수가 두 명이나 더 있습니다.”

“쯧쯧. 가능한 거랑 잘하는 거랑은 다른데요.”

“감독님이라면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라고 전 확신합니다.”

브라이언이 번들번들한 주둥이를 쉴 새 없이 놀리며 비행기를 태워준다.

녀석은 이미 60만 파운드라는 금액에 눈알이 뒤집혔으니까.

어떻게든 주머니를 채우고 싶어서 지랄이 났다.

“무슨 선수들이 로봇인 줄 아세요? 키우기가 쉬운 줄 아나. 어지간히도 팔고 싶으신가 보네요.”

“60만 파운드는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마이어스의 현 평가 금액은 20만 파운드. 3배를 벌 기회를 놓치기엔 아깝습니다.”

“그건 그렇죠. 패닉 바이니깐.”

패닉 바이.

스포츠 선수의 공황 구매를 뜻하는 말.

의외의 사고로 계획에 없던 영입에 큰돈을 지출하는 행태다.

특히나 이적시장 마감일, 데드라인에는 이런 일이 꽤 자주 나왔었다.

대표적으로는 아스날.

11-12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8-2 가르마 대첩을 당한 아스날은 눈이 뒤집혔다.

그렇게 부랴부랴 4명의 선수를 데려왔는데,

박주멘, 미켈 아르테타. 페어 메르테자커, 안드레 산토스.

아르테타와 메르테자커는 성공이었지만, 나머지 둘은 아니었다.

박주멘과 안드레 산토스.

이들은 아스날 역사상 최고의 먹튀로 명성을 드높이게 된다.

리버풀도 마찬가지.

난데없이 헬기 타고 런던으로 향한 페르난도 토레스.

그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3달 전에 재계약을 한 뉴캐슬의 앤디 캐롤을 데려온다.

무려, 35M 파운드로.

3,500만 파운드. 한화 600억에 가까운 엄청난 금액.

그리고 그는 역대급 먹튀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즉, 패닉 바이는 썩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파는 측에서야 호구 하나 물어서 탭댄스가 절로 나오겠지만.

“일단 선수랑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네요. 적어도 마이어스하고는. 물론, 승격 옵션은 지우고 다른 거로 채워 넣어야겠지만.”

“큼큼.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조쉬 킹은···.”

부릅.

난 조쉬 킹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살기를 품고서 브라이언을 노려봤다.

조쉬 킹은 절대 안 판다.

최소한 30M 파운드를 받지 않는 이상은. 왜 30M이냐고? 훗날 프리미어리그에서 그 금액으로 이적하니까.

그리고 녀석이 뒤통수를 치지 않는 이상 훨씬 더 많은 금액을 받을지도 모르는 선수다.

3년 계획.

3년 내로 프리미어리그에 복귀한다 치자. 그렇다면 팀의 주전 공격수인 조쉬 킹의 주가는 하늘을 찍을 거다.

심지어 그의 나이는 올해 18세.

3년 뒤면 겨우 21세다.

21세의 잉글랜드 초신성.

어떠한가? 돈 냄새가 풀풀 풍긴다.

영국인 프리미엄까지 붙으면 이적 협상은 최소 50M부터 시작이다.

“큼큼. 셰필드 유나이티드에 조, 조쉬 킹은 판매 대상이 아니라고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그쪽도 꽤 많은···.”

“응. 안 팔아.”

“200만 파운드···.”

“응. 안 팔아.”

“아, 알겠습니다.”

“응. 안 팔아.”

13-14시즌의 셰필드 유나이티드는 리그1 소속.

바로 윗동네다.

내년이면 만날 놈들이 감히 조쉬 킹을 탐내? 고작 200만 파운드로? 진짜 어이가 없네.

물론 200만 파운드는 엄청나게 큰 금액이다. 리그2 선수에게는 역사에 남을만한 큰 금액.

셰필드에 새로 부임한 나이젤 클러프 감독의 선수 보는 눈은 훌륭한가 보다.

조쉬 킹의 잠재성을 꿰뚫어 보고 엄청난 금액을 제시했으니까.

하지만 어림도 없지.

구단의 돈을 싹싹 긁어모은 거 같은데, 열 배는 더 들고 와야 조쉬 킹의 귀 한쪽 정도는 살 수 있을걸요.

“그리고··· 반즈는···.”

“응. 안 팔아.”

“반즈의 주급은 꽤 고액이라 이참에 정리한다면···.”

“응. 안 팔아.”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응. 안 팔아.”

“···.”

반즈도 리그1 구단, 브래드퍼드에게 제안을 받았다. 이적료는 80만 파운드.

이것도 리그2, 4부리그 수준에는 엄청난 금액이지만 고민할 가치도 없다.

훗날 최소 10M 파운드를 받을만한 선수에게 1M도 되지 않는 푼돈을 들이밀다니. 기가 찰 뿐.

물론 반즈의 주급이 부담스럽긴 하다.

그래도. 승격만 한다면 허용범위 안.

어차피 이번 시즌만 버티면 되는 거다.

“그럼 일단 마이어스만 고려하시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전 셋 전부 다 팔기 싫으니까.”

세상천지에 주전 선수를 팔고 싶은 감독은 한 명도 없다.

그저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구단에 넘길 뿐.

나도 마찬가지다.

물론, 팔 땐 팔아서 미래의 지식을 활용해 좋은 선수를 사야겠지만, 첫 시즌에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도 조금 아쉽다.

패닉 바이로 인한 엄청난 이적료를 챙길 기회.

미래시를 사용해 보자면 마이어스의 최대 몸값은 300만 파운드 정도.

지금 판다면 꽤 손해다.

하지만 지금 당장 100만파운드를 손에 쥔다면.

지금은 무명일지라도 미래에는 수백억을 호가하는 대단한 선수의 영입도 가능하다.

더군다나 구단 내부의 식충이들도 어느 정도 현금을 원하는 시점.

하나를 내주고, 하나를 취한다.

이것은 정치의 기본.

항상 모든 것을 취하긴 힘들다.

게다가 난 세상의 법칙 따위는 이미 초월한 몸.

하나를 내주면 최소한 두 개는 챙겨야 직성이 풀린다. 프런트에게 더 빼앗을 물건은 없으니, 다른 쪽에서 챙겨와야겠지.

어디까지나 마이어스가 이적을 원한다면 말이다.

이적은, 선수의 의향이 가장 중요한 법이었으니까.

3.

난 서둘러 이적 요청이 온 세 명의 선수를 사무실로 호출했다.

우선은 조쉬 킹.

이 영국에서 환생한 위연의 반응이 조금 걱정되기도 한다.

이미 한번 전적이 있던 놈이니까.

다행스럽게도 기우였나 보다.

“네? 이적 제안이요? 셰필드가 어딘데요? 리그1이요? 거길 제가 왜 가요? 내년이면 승격해서 뛰게 될 리근데. 최소한 챔피언십리그는 돼야 고민이라도 해보죠. 전 안 가요.”

조쉬 킹은 뭔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건지.

야망이 커진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매우 기특하므로 맛있는 차나 한잔 대접해줘야겠다.

“우리 킹아. 밀크티 마실래?”

난 세상에 다시없을 푸근한 미소로 차를 권했다.

“그럼 좋죠. 아, 챔피언십이었다면 바로 에이전트한테 전화 정도는 해봤을 텐데요. 리그1이라니. 어디서 감히. 조금 더 활약해야겠네요. 저런 구단에서 눈독을 들이지 못할 만큼.”

“···.”

이 새끼가? 만약 리즈가 조쉬 킹에게 제의했다면 갈지도 몰랐다는 거잖아.

역시. 위연이야. 쌍놈의 새끼.

너에게 밀크티는 아깝다.

“아차차. 밀크티가 다 떨어졌네.”

“···또요?”

“어제 사둔다는 걸 깜빡했어. 냉수나 마시고 나가지 그래?”

“···제가 또 뭔 잘못을 했나요?”

“그냥 나가라고! 가!”

“흑.”

조쉬 킹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사무실을 나섰다. 꽤 처량해 보였지만 일말의 동정심조차 생기지 않는다.

다음은 마이클 반즈.

느긋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방문한 그는 세상 편해 보인다.

득도한 표정이랄까.

어떤 고민도 번뇌도 없는, 세상에서 반쯤 이탈한 얼굴이다.

이 표정은 이적 제안을 말해줬을 때도 마찬가지.

“브렌트퍼드요?”

“그래 런던의 리그1 팀.”

“바다와 멀군요.”

잉? 런던인데 바다랑 멀 리가.

암만 브렌트퍼드가 서런던이라도 차 타고 한 시간이면 바다다.

“가까운데?”

“포츠머스에 비하면 엄청나게 멀죠.”

“그건 그렇지.”

포츠머스는 삼면이 바다인 도시.

그냥 걸어가도 바다는 금방이다.

“감독님. 감독님은 저의 꿈이 뭔지 아세요?”

“글쎄. 뭐, 우화등선?”

“우하둥슨? 그게 뭔지요?”

“그런 게 있어. 하여튼, 뭔데?”

도대체 뭘까. 저 공허한 눈은 도무지 생각을 읽기가 어렵다.

“전 말이죠. 포츠머스시 최고의 낚시꾼이 되는 게 꿈이에요.”

“···.”

“요즈음에 최고의 명당을 찾았으니까. 당분간은 팀을 옮기기 싫어요. 물론 감독님이 원하신다면 어쩔 순 없겠지만요.”

너무나도 느긋해 잠을 부르는 목소리는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아무리 봐도 저 녀석은 직업을 잘못 골랐다.

“큼큼. 나야 네가 있겠다면 환영이지.”

“그럼 이야기는 끝났나 보군요. 전 가볼게요. 아직 낚시잡지를 다 읽지 못했거든요.”

“···어. 그래···. 잘 가.”

난 떨떠름하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냥 팔아 버릴 걸 그랬나? 저놈은 이미 축구선수가 아니잖아!

에라 모르겠다. 지금은 잘하니까. 저 정신 상태는 차차 고쳐줘야겠군.

반즈가 나가자, 곧이어 마이어스가 사무실을 방문했다.

“아, 안녕. 일단 앉아.”

“네.”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마도 이미 구단 내에서 이적 소문이 쫙 퍼진 듯한 모양. 코딱지만 한 구단이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야기는 이미 들었구나.”

눈빛만 보아도 번뇌와 갈등이 한가득하다. 후우. 일단 남아주는 게 최선인데.

“네.”

“짧게 가자. 너의 마음은 어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마이어스는 눈을 내리깐 채 고민한다.

내준 차가 미지근하게 식을 때쯤.

마이어스의 말문이 트였다.

“일단 제 에이전트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감독님.”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 028화. 데드라인.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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