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27화 (27/306)

< 027화. 데드라인. (1) >

1.

개막전 대승.

이는 선수단과 프런트, 서포터 모두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안겨줬다.

즉, 맹렬한 기세를 탔다는 이야기.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기세란 스포츠에서는 더더욱 중요한 법.

자신감은 좋은 경기력을 만들어내고, 좋은 경기력은 더욱 큰 자신감을 얻게 하니까.

선한 순환고리였다.

-포츠머스가 또 이깁니다! 홈에서 하트풀 유나이티드를 4-2로 제압! 개막 2연승을 달려나갑니다! 정말 화끈한 축구네요.

-개막 3연승! 포츠머스가 이번에는 원정에서 뉴포트 카운티를 3-1로 끝장내 버립니다! 이번에도 압도적인 승리! 포츠머스가 날아오릅니다!

-미쳤습니다! 개막전 포함 4연승! 홈으로 불러들인 토키 유나이티드를 6-3으로 부숴버렸습니다! 그 누구도! 포츠머스를 막을 순 없습니다!

-다음은 너다! 성소하 감독의 선전포고에 겁에 질린 상대들!

-다음 상대인 플릿우드 타워의 감독은 머리를 감싸 쥘 거예요. 포츠머스를 이길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포츠머스의 기세는 맹렬했다.

아두를 구하기 위해 조조의 수십만 대군을 가로지르던 조자룡의 기세!

8월의 모든 경기를 패배는 물론, 무승부조차 없이 전승으로 끝낸 성소하의 포츠머스 FC.

덕분에 남쪽의 작은 항구도시인 포츠머스는 하루하루가 축제 분위기.

식을 만하면 또 이기고, 또다시 식을 만하면 또 이기니까.

도시 전체에 활기가 샘솟고 시민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요즘 일할 맛 난다.”

“도시 분위기가 한층 올랐어. 5월에 강등당할 때만 해도 우울했는데.”

“성소하! 성소하! 난 커서 성소하가 될 거야.”

“이러다가 정말 한 시즌 만에 승격하는 거 아니야? 미치겠네. 시즌권 사러 간다.”

“승격은 이미 달성했고, 우승하냐 못하냐가 중요하지.”

“그냥 포츠머스에 우승컵 주고 시즌 다시 시작하자.”

“조쉬 킹 - 델리 알리 조합, 진짜 개지립니다. 무패우승 가자!”

설레발은 대한민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영국이야말로 대표적인 설레발의 성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영국은 무난한 조 편성을 받았고 다음 날, 신문지 ‘The Sun’에서는 십 년이 지나도 회자하는 전설의 설레발을 친다.

그 유명한 설레발은 바로,

EASY.

England – 잉글랜드.

Algeria – 알제리

Slovenia – 슬로베니아.

Yanks – 미국.

비틀스 이래 최고의 잉글랜드 그룹.

그야말로 설레발의 끝판왕.

물론, 쉬운 조이긴 하다. 그래서 이토록 오만한 설레발이 나왔고.

하지만. 결과는 처참.

1승 2무, 승점 5점. 2위.

다득점으로 미국에 조 1위를 내줬을뿐더러 3위인 슬로베니아와 승점 1점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그리고, 조1위를 달성하지 못한 대가는 너무 컸다.

16강에서 독일을 만나고 4-1로 털린 뒤 빠른 귀국을 했으니까.

‘시팔. 설레발은 필패인데.’

과한 설레발의 결과를 남들보다 10년 치는 더 아는 소하. 괜한 불안감에 싸였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외부에서의 과한 흥분은 어느 정도 허용범위 안.

하지만 내부적으로도 이미 축제 분위기로 들끓는 건 문제였다. 괜히 망해버린 게 아니랄까. 꽤 좋지 않은 현상이었다.

“허허허허! 홍보팀이 이룬 엄청난 실적이 눈에 부시지 않습니까!”

홍보팀장 벤슨 모건은 요즘 어깨를 당당히 펴고 다녔다.

그야말로 천하대장군.

요 며칠 소하에게 구박당해 잔뜩 쭈그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전년 대비 시즌권 판매량 20% 상승.

평균 좌석 점유율 97%.

유니폼 밑 굿즈 판매량 500% 상승.

엄청난 상업적 성적표!

무능력한 돼지가 천하대장군으로 진화할만한 놀라운 상승률이었다.

그렇다면 홍보팀이 잘해주었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그들은 늘 똑같이 했으니까.

그저 낙수효과를 받았을 뿐.

시즌권 판매량은 압도적인 경기력과 승리 행진 때문에 올랐으며,

홈구장 좌석 점유율도 이하동문.

유니폼 판매량의 증가도 성적이 가장 큰 이유다. 여기에,

신인 선수들의 대거 발탁.

바뀐 등번호.

스타의 탄생.

등등도 플러스 요소였고.

한마디로 모두 ‘소하의 덕.’이었다.

소하의 노림수가 제대로 먹힌 격.

덕분에 벤스 모건은 아주 그냥 신이 나서 탭댄스를 추고 다녔다. 한 것도 없는 주제에.

물론, 소하의 검은 머리만 보였다 하면 바로 쭈구리가 됐지만.

‘중요한 건 선수단이야.’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프런트의 자만은 당분간 큰 영향이 없을 터. 집중관리에 들어갈 정도도 아니다.

하지만, 선수들의 자만은 자칫 최악의 결과를 불러올지도 몰랐다.

자만, 방심. 태만.

이 세 가지는 승리할 경기도 비기거나 지게 했으며 비길 경기를 지게 만드는 죄악이었으니까.

자칫하다간 공들여 세운 탑을 한번에 무너뜨릴 맹독이다.

사전에 무조건 막아야 하는 상황.

그리고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은 오직 감독인, 소하였다.

2.

-똑똑똑.

또다시 누군가가 내 사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이로써 오늘로 9번째.

아마 클럽하우스 내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사무실이지 않을까?

“들어와요.”

지친 목소리로 내방을 허락하자, 모습을 드러낸 건, 조쉬 킹.

요즘 4경기 연속골에 힘입어 표정이 아주 그냥 자신만만하다.

“감독님. 부르셨다면서요.”

“그래 앉아라.”

“넵.”

조쉬 킹은 위풍당당하게 자리에 앉아 날 빤히 바라본다. 뭐, 차라도 내오라는 신호인가?

“뭘 야려.”

“커흑. 그 뭐냐,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한잔 내오는 게 예, 예의잖아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한테 지고 지엄한 감독님께서 손수 차를 대령해야 한다, 이거지?”

요즘 꽤 잘나간다고 많이 건방져졌다.

꼴랑 4경기 해두고선. 도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저 콧대를 한번 부러뜨려줘야 할 필요성이 다분하다. 그러기 위해서 무한 개인 면담 열차를 운행하는 거니까.

“아, 아니에요.”

“그러면 요즘 골을 많이 넣어 ‘줘서’ 좋을 테니 함 빨아줘라. 이거였어?”

“···죄, 죄송합니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욕부터 얻어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아니야. 네 말이 맞아. 손님이 왔으면 차를 대접하는 게 예의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라니까. 자 받아.”

난 한번 다독여준 뒤 서랍에서 싸구려 중국산 녹차를 꺼내 타 주었다.

“한잔해.”

“···노, 녹차네요.”

“싫어? 싫으면 말고.”

“그게 아니라···.”

잠시 우물쭈물하는 조쉬 킹.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괜히 꺼냈다가 불호령을 당할까 봐 망설이는 게 눈에 훤했다.

“괜찮으니까 말해봐. 설마, 4경기 8골을 넣고 있는 슈퍼스타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

“···. 다, 다 감독님 덕분이죠.”

오호라. 이제야 좀 정신을 차렸군.

짐짓 화가 풀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바꿔야겠다.

하. 정말 연기실력만 느는 중이다.

“알긴 아는구나. 난 또. 다 제 덕에 잘된다고 생각하고 방자하게 구는 줄 알았잖니. 이 못난 감독이 우리 킹을 너무 나쁘게 생각했구나. 미안해.”

“헤헤. 당연하죠! 저 혼자였다면 어림도 없는 기록이죠. 감독님의 지도와 동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예요.”

짝짝.

완벽한 대답이었어. 절로 박수가 나오는구나 킹아.

“아주 훌륭한 마인드야. 자, 그럼 이제 아까 하려던 말은 뭐야?”

“저 그게···. 제가 로보에게 듣기로는요. 감독님께서 로보한테는 직접 밀크티를 타주셨다고 해서요···.”

“그래서?”

“전··· 녹차인 게 좀. 하하···.”

그러니까 로보, 다시 말해 로버트슨에게는 정성스레 밀크티를 줬는데 왜 자기는 이런 거나 주냐, 이거로군.

“밀크티가 다 떨어져서 그래. 이해해주렴.”

“아! 그렇군요. 전 또. 하하.”

“그럼 그만 가봐도 좋아. 나쁜 마음을 먹은 줄 알고 혼내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네. 잘했어.”

“푸흡. 나, 나쁜 마음이라뇨. 전 항상 초심을 잃지 않는 남자예요. 그럼 다음에도 불러주세요.”

“그래.”

자리를 뜨려는 조쉬 킹은 아직도 한이 맺힌 듯 마지막으로 날 부른다.

“아! 감독님.”

“뭐.”

“그··· 뭐냐···. 다음에는 꼭 밀크티 타 주시면 안 될까요? 로보가 엄청나게 자랑하던데요. 맛이 좋다고···.”

“너 하는 거 봐서. 잘하면 내 특제 홍차를 타 줄게.”

“앗.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봬요!”

잔뜩 신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떠나는 조쉬 킹.

후후. 단순한 녀석. 다 계획대로다.

차를 이용한 성소하 식 길들이기랄까.

조만간 전부 다른 차를 받은 사실이 소문으로 퍼질 테고, 선수들은 알아서 깨닫겠지. 어떻게 하면 맛있는 차를 받을 수 있는지. 한번 두고 보자고.

-똑똑.

조쉬 킹이 사무실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10번째 손님이 방문했다.

이번 손님은 케빈 도슨.

“안녕하세요. 감독님.”

“어이구야 어서 와. 일단 자리에 앉아. 우리의 주장이자 ‘내’ 자랑 도슨아.”

난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랍에서 최고급 잎 차를 꺼내 정성스럽게 차 한 잔을 내주었다.

“흐음. 와우. 훌륭한 풍미입니다. 감독님. 어디서 사신 차입니까?”

차를 한 모금 마신 도슨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가볍게 탄성을 내질렀다.

“저번 주에 3연승 했다고 구단주님이 선물해 주신 거야. 맛이 어떨지 모르겠네.”

“매우 뛰어납니다. 더군다나 고급 찻잎을 완벽하게 우려내셨습니다. 감독님의 차 내리는 솜씨가 대단하시군요.”

“그냥 취미 삼아서 연습해본 거야. 입에 맞다니 다행이네.”

다도.

내 유일한 취미.

축구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십 년을 넘게 투자한 기술이라 솜씨에 꽤 자신이 있었다.

“역시. 감독님은 못 하는 게 없으십니다. 이 정도면 찻집을 차리셔도 될 겁니다.”

“이야. 역시 우리 도슨이는 실력도 좋고 인성도 좋고 미각도 좋네. 훌륭해.”

“후후.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절 보자고 하셨습니까?”

“나랑 있기 싫어?”

슬쩍 실망한 말투로 말하자 도슨은 격렬하게 손사래를 친다.

“아, 아닙니다! 저야 항상 영광입니다. 다만, 감독님의 시간은 금보다 가치가 높은 자원입니다. 그런 귀중한 시간을 저에게 사용하시는 이유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감독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싫어할 리가 있겠습니까?”

“···.”

농담 한번 해본 건데.

대경실색하며 말을 쏟아내는 모습이 참 재밌다.

“그냥, 요즘 열심히 한다길래 감독으로서 칭찬의 의미로 차를 대접하고 싶었을 뿐이야.”

“아! 그러셨군요. 그럼 앞으로도 더욱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난 우리 케빈이를 믿으니까. 그럼 이제 가봐도 좋아.”

정중하게 작별을 고하고 떠는 케빈 도슨. 저런 친구만 있다면 감독질 하기 참 편할 텐데 말이야.

-똑똑똑.

오늘의 마지막, 11번째 손님.

하비 셸비. 28세.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

요즘은 잠잠하지만 내 철천지원수 중 하나였던 개노답 삼형제. 그 중 부심러가 바로, 이 자식이다.

“무슨 일로 불렀어요?”

구단 유일의 대머리임을 자랑하려는지 머리를 매만지며 불손하게 묻는다.

쯧쯧. 저러니깐 머리카락이 없지.

“부르면 안 되냐?”

“그건 아니지만···. 경기에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한 선수를 부를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 그냥 가던가.”

“···. 일단 앉겠습니다.”

연이은 호재로 강력한 권력을 손아귀에 쥔 지금. 문어 한 마리가 분탕을 쳐봤자 아무런 타격도 없다.

놈도 이걸 알겠지. 그래서 순순히 따르는 거고.

“불만이 많아 보이네.”

“···놀리시는 겁니까?”

아이. 새끼. 뭔 말만 하면 존나 날카롭게 반응하네. 확 타코야키로 만들어버릴라.

“그냥 물어본 거야. 얼굴에 나 불만 있소, 라고 써뒀길래.”

“···그야 당연하죠. 이제 주전은 물론이고 벤치에도 앉지 못하고 있는데.”

“뛰고 싶냐?”

“물론.”

새끼. 말 짧은 거 보소. 그래도 뛰고 싶긴 엄청 뛰고 싶나 보다. 바로 대답이 튀어나오는 꼬락서니를 보니까.

“비선출의 허접쓰레기 같은 지도를 받으면 뛸 순 있을 텐데. 어쩔래?”

녀석은 과거엔 비선출의 지도 따윈 쓸모없다며 내 훈련을 거부했던 후레자식.

결국 점점 성장하는 선수들에게 밀려 영원히 명단제외를 당했었다.

끝까지 내 훈련을 거부하던 대쪽 같던 모습. 과연 이번에는 어떨까.

“···좋습니다. 뭐든 시켜만 주시죠. 어떻게서든 다시 주전 자리를 따낼 테니까.”

“깡다구 좋네. 알았어.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

이번에는 알리에게 줬던 밀크티를 한잔 타 주었다.

“흐음?!”

깜짝 놀라는 문어.

아마 끝내주게 맛있을 거다. 나한테 쌓인 불만 때문에 칭찬을 하지 못할 뿐.

알리는 한잔 더 타 달라고 생떼를 부리기도 했으니까.

“그럼 잘 가.”

“네.”

처음과는 다르게 많이 얌전해진 문어, 하비 셸비. 그렇다고 녀석을 용서해줄 생각은 없다.

혹시 아는가? 비싼 소고기는 비싼 풀을 먹고 산다는 것을?

이 소들은 웬만한 사람보다 잘 먹고 잘 잔다.

이유는 하나.

잘 먹히기 위해.

고기 맛을 위해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 거다.

그리고 나도 똑같다. 갱생하기도 어렵고 하기도 싫은 녀석.

그렇다고 자유계약으로 풀어줄 순 없잖은가.

어느 정도 스텝 업을 시켜준다면 살이 두둑이 오른 돼지처럼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버릴 놈이 몇십만 파운드를 벌어준다면 금상첨화!

후후후. 난 쉽게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럼 이제 슬슬 퇴근을···.

-똑똑.

뭐야? 오늘 개인 면담은 문어가 마지막이었을 텐데.

“들어오세요.”

알버트 위버. 기술재무팀장.

저 양반이 여긴 어쩐 일로 왔지?

“가, 감독님. 감독에게 먼저 알려야 할 거 같아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일이길래···.”

“이, 이적 제안이 왔습니다.”

흐음.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였기에 그리 놀라진 않았다.

처음에는.

“세, 세 명이나 이적 제안이 왔습니다!”

“···오. 씨발.”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 027화. 데드라인. (1) > 끝

ⓒ 블라님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