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26화 (26/306)

< 026화. 신임 감독의 평범한 하루. >

1.

짹짹.

이름 모를 작은 새의 울음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시간은 오전 6시.

“씨팔.”

아직 더 자도 되는데.

아쉽게도 한 번 눈을 뜨면 다시 잠들지 못하는 체질이라.

출근 준비나 해야겠다.

어제의 약속대로 선수들에게 휴식을 줬지만, 이 망할 놈의 직업은 훈련 말고도 할 일이 넘쳐서 말이지.

사실은 오후에 출근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훈련을 제외한 감독 업무는 오후에 처리해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배가 고프다.

내 주머니 사정은 극히 열악.

모든 주급을 비트코인에 때려 박는 중이라 식비가 간당간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짜로 일류요리사들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마다할 인간이 어디 있으리.

그래. 인정한다.

밥 먹으려고 출근하는 거다.

저녁도 싸 와야지. 후후.

밖에 나오니 날씨가 영국답지 않게 참 맑다. 왠지 오늘 하루는 운수 좋은 날이 될 거란 묘한 기대감이 부푼다.

출근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이참에 공원에서 산책이나 해볼까.

터벅. 터벅.

걸어서 5분 거리인 밀턴 공원에 도착.

아침 운동에 매진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보인다.

어제의 축제 분위기가 꿈처럼 느껴지는 느긋하고도 평화로운 일상.

오랜만에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순 없겠군.”

후우. 모처럼 평화를 즐기려고 했건만.

100m 밖에서도 눈에 띄는 거구의 군대 동기 때문에 불가능할 듯싶다.

“음. 소하. 이 시간에 공원에는 어쩐 일인가. 너도 드디어 운동할 마음이 생긴 건가?”

“···.”

이상한 말투지만 저 친구는 원래 저랬다. 저런 말투면 세상 사는 데 불편하지 않냐고?

물론, 보통 사람이면 불편하지.

보통이라면 말이다.

저 친구의 덩치와 면상을 보라.

이상한 말투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실제로 군대에서도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을 정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달까.

맞선임은 낄 자리도 아니고 실세인 상병과 말년병장까지 설설 기었다.

아니, 애초에 사병 레벨을 언급하는 것이 수치다.

간부들까지도 잘 대해줬으니까.

꽤 아쉽긴 하다.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꽤 좋은 성격을 가진 친군데 말이야.

“일단 뛰도록 해보지. 구보야말로 모든 운동의 시작이다.”

“싫어. 힘들어.”

“소하. 지금은 20대라 팔팔하겠지만 몇 년 안에는 급격히 몸 상태가 나빠질 거다.”

“나도 알거든.”

세상 누구보다 잘 안다. 지금으로부터 4년 후부터 급격히 몸 상태가 나빠졌으니까.

노화 따위가 아니다. 30대 초반에 노화로 인한 건강 악화라니. 말도 안 된다. 조선 시대도 아니고.

그저 과중한 업무와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골골거렸을 뿐.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자아! 공원 열 바퀴만 가볍게 뛰는 거다! 구보 간에 군가 한다. 군가는 전선을 간다! 높은 산~ 깊은 골~”

“꺼져! 군가 부르지 마! 그리고 열 바퀴면 10km가 넘어!”

“겨우 10km 아닌가. 군대에서는 30km 행군도 했었다.”

“언제 적 이야기야. 그리고 이제 난 민방위거든? 너도 마찬가지고.”

“전시에 소집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

으아아. 운수 좋은 날은 개뿔.

시작부터 꼬였다.

그리고.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어? 저, 저 사람 성소하 아니야?”

“와. 신임 감독이야!”

“덩치가 크고 무섭게 생긴 사람은 이번에 영입했다는 영양 총괄이지?”

“이 시간에 저 둘이 뭐 하는 걸까. 이상한 노래를 부르던데.”

“사인해달라고 할까?”

아주 그냥, 이목을 제대로 끌어버렸다.

겨우 취임 두 달 차라 알아보는 사람이 적어서 좋았는데.

이제는 끝이다. 끝.

모처럼 상쾌한 아침 공기를 폐로 섭취하며 평화를 즐기려 했건만.

“야, 시끄럽고 난 출근할 거야.”

“음. 아하. 그렇군. 사람들의 이목이 많으니 훈련장에서 운동하겠다는 생각이겠군. 나도 따라가지.”

“···.”

말이 통하지 않는다.

꽤 괜찮다는 말은 취소.

이 망할 자식이 왜 군대에 말뚝 박지 않은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2.

“안녕하세요. 감독님.”

회사로 들어서니 이쁘장한 여직원이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여직원의 이름은 에밀리아 존슨.

긴 밤갈색 머리를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은 신입사원이다.

외모는 수준급. 늘씬한 서구형은 아니고 꽤 귀여운 얼굴이다.

‘근데 뭐 저리 일찍 나왔데.’

아직 오전 8시.

출근 시간까진 1시간이나 남았거늘. 참 빨리도 출근한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얼굴이 멀쩡하다. 저번에는 숙취가 덜 풀려서 불그스름했는데.

드디어 이 빌어먹을 구단이 정상궤도에 올라섰나 보다.

“안녕하세요. 오늘 일찍 출근하셨네요. 일이 바쁜가 보죠?”

“아, 아니에요. 전 보통 한 시간 일찍 출근하거든요.”

“···왜요?”

영국에도 열정페이가 있었나? 아니, 다 떠나서 너튜브채널개설에 집중하라고 모든 업무에서 빼줬는데.

“그게··· 하, 한국어 공부 중이거든요.”

“오. 한국어요? 아, 씹새끼···가 아니라 브라이언이 말했던 직원이 에밀리아였군요?”

“네. 이제 막 한 달 정도 됐어요.”

“근데, 왜 일찍 출근해서 공부하세요? 퇴근하고 집에 가서 하면 되지.”

“퇴근하면 너무 힘들어서··· 공부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차라리 이렇게···.”

큼큼. 나 때문인가?

하기야. 내가 요구한 사항이 엄청 많았지. 10년 후의 감성을 살리면서도 현재에서 어색하지 않도록 이러저러한 주문을 엄청나게 했으니까.

자세히 보니 눈가에 옅은 다크서클마저 보인다. 조금 미안해지는걸.

“흠흠. 한국어 공부는 잘되세요?”

“조, 조금요. 자기소개 정도?”

“오! 한번 해보세요.”

내가 이래 봬도 원어민 아니던가. 영국의 1타 강사보다 한국말 잘한다고.

“우, 웃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시면··· 짧게 해볼게요.”

“좋아요. 약속할게요.”

“아, 알겠어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에밀리아.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어눌한 한국말로 자기소개를 한다.

“아뇨우 하세요우. 나는 이름입니다. 존슨 에밀리아. 방그와우요. 마놔서.”

“푸웁.”

난 오랜만에 약속을 어겨버렸다.

솔직히 저걸 듣고 어떻게 웃음을 참으란 말인가.

나는 이름이래.

아. 숨쉬기 어려워.

“우, 웃지 마세욧! 약속하셨잖아요! 너, 너무하세요!”

에밀리아는 빼액 소리쳤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에밀리아의 얼굴은 이미 백인이 아닌 홍인이다.

이야. 단군 할아버지의 홍익인간이 영국에서 태어났구나.

어쩐지 한국에는 없더라고.

“큼큼. 미안해요. 아, 웃으면 안 되는데. 그 뭐냐. 하여튼 후우. 미안해요.”

“···정말 너무하세요!”

“미, 미안하다니까요. 제가 사죄의 의미로 종종 한국어 가르쳐 드릴게요. 어때요?”

쫑긋.

고개를 숙이고 좌절했던 에밀리아가 바로 반응한다.

“저, 정말요?”

“그럼요. 근무시간엔 좀 그러니까 퇴근하고요. 어때요? 에밀리아 씨도 밀턴 공원 근처에서 사시잖아요.”

“그, 그러니까! 사석에서요?!”

젊은 나이에 귀가 먹었나.

당연히 사석이지. 공적인 자리에서 개인적인 일을 도와줄 순 없으니까.

시간도 없고.

“당연하죠.”

“조, 좋아요! 알겠어요!”

“···그럼 다음에 봐요. 전 사무실로 가서 할 게 좀 있어서.”

“네! 자, 잠깐만요. 야, 약속은 어떻게 잡죠? 직접 찾아뵐까요?”

“아, 그럼 번호나 교환하죠.”

난 순순히 에밀리아와 번호를 교환했다.

“그, 그럼 꼭 연락하겠습니다!!”

쌔앵.

번호를 받자마자 저 멀리 사라지는 에밀리아. ‘나이스으으으으!’ 라는 괴성이 들리는 건 기분 탓이겠지?

역시 요즘 피곤이 많이 쌓인 듯싶다.

3.

빙글빙글.

에밀리아에게는 할 일이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할 일이 없다.

푹신한 중역 의자에 몸을 묻고 한참을 빙글빙글 돈 지 근 수십 분째.

“흐음. 신문이나 읽어볼까.”

무료함에 지쳐갈때쯤.

드디어 할 일이 생각났다.

어제 경기에 대한 반응이나 봐볼까.

-‘다음은 너다.’ 앞으로 만나게 될 팀들에 대한 선전포고!

-8대2 대승! 비상하는 신생 포츠머스. 천재 감독의 탄생.

-말 그대로 베리FC를 찢어버린 포츠머스. 감독의 장담이 허언이 아닐지도.

-28세의 젊은 감독. 진짜 축구를 경기장에서 보여주다.

-어린 선수들을 기용한 이유가 밝혀졌다. 젊은 축구엔 젊은 선수가 필요하니까.

-초신성. 델리 알리. 데뷔전에서 1골 2어시스트의 맹활약!

-구단 유소년시스템의 희망. 18세의 해트트릭의 주인공, 조쉬 킹은 누구인가?

-구질구질한 경기력. 구질구질한 매너. 리 그랜트의 추잡함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한 경기에서 악수를 두 번이나 거절한 최초의 감독. 축구계의 수치.

찬양 일색.

나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린다.

특히나, 마지막 기사는 내 마음에 아주 쏙 든다. 이렇게 글빨 좋은 사람이 왜 기자질이나 하고 있을까.

제2의 조앤 롤링이 될 재능을 썩히고 있는 게 아닐까?

일단 마지막 기사는 스크랩해두자.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꺼내 보게.

“그럼···. 이제 인터넷도 한번 봐볼까. 좀 무섭긴 하지만.”

인터넷 공포증은 지금도 마찬가지.

익명성이란 방패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날 무참히 베어버렸다.

가시 방패랄까.

하여튼 워낙 험한 말을 많이 들어 과거에도 접속해본 적이 드물었다.

그래도. 이 정도 대승이면 한 번쯤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난 떨리는 손을 부여잡은 채 인터넷에 접속했고, 축구 관련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그리고. 고민 없이 바로 나왔다.

욕설 때문에? 아니다.

악플 때문에? 아니다.

이유는 하나.

메인을 장식한 인기 글 때문.

[일본이 벌벌벌. 중국이 굽신굽신. 한국축구를 무시하던 나라들이 설설 기는 이유는? 바로, 한국인 천재 감독의 등장!]

“···.”

우욱. 이거 거의 수년은 앞서나간 섬네일 아닌가. 저 글을 작성한 사람이 미래에 가질 직업이 어렴풋이 예상된다.

아니, 확신한다.

국뽕 너튜버겠지.

누군진 몰라도 적당히 좀 하자.

내가 다 부끄럽잖아.

4.

때가 되었다.

드디어 아침 식사 시간.

선수들은 출근하지 않았지만, 스태프들은 꽤 많이 나왔기에, 헬렌 카터 이모님이 수고를 해주셨다.

메뉴는 간단한 가정식.

선수들이 없는 날이라 건강보단 맛에 치중한 식단이다.

“어! 감독님. 오늘 늦게 나오실 줄 알았는데요. 왜 이리 일찍 나오셨어요?”

밀러 아저씨가 앞자리에 앉으며 날 반긴다.

“아저씨는요?”

“전, 그, 할 일이 많아서.”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솔직히 말해봐요. 식사하러 오신 거죠?”

“···크흠. 아, 아닙니다.”

“전 맞는데.”

내가 사실을 실토하자 연신 헛기침을 하던 밀러 아저씨도 결국 뒤통수를 긁으며 고백한다.

“네. 사실 저도 맞습니다. 아실진 모르겠지만, 제 와이프가 요리를 못해서···.”

“얼마나 못하시길래···.”

“제일 잘하는 요리가 피쉬앤칩스거든요. 그것도 길거리 음식 수준이죠.”

“···마, 많이 드세요.”

난 동정 어린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내 접시의 소시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힘내세요. 그래도··· 사랑하시잖아요?”

“요즘은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감독님. 제가 감독님보다 축구는 훨씬 모르지만, 인생 선배잖습니까?”

“그건 그렇죠.”

회귀 전의 나이까지 합쳐도 몇 살 더 많다. 밀러 아저씨는 올해로 딱 마흔이었으니까.

“인생 선배로서··· 진지한 조언을 한 가지 해드리자면, 결혼은 정말 고민하고 하세요. 진심입니다. ‘꼭’이에요!”

“···아, 알겠어요.”

묵직한 진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절함이 이렇게 와닿는 조언은 이번이 두 번째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이라 묘하게 어색하다.

더군다나 난, 아직도 갑작스럽게 변한 밀러 아저씨의 태도도 이해하지 못했고.

에라 모르겠다. 질질 끄는 건 이제는 취향이 아니니까. 그냥 대놓고 물어보자. 그동안 했던 것처럼.

“아저씨.”

“네?”

허겁지겁 위장을 채우던 밀러 아저씨는 내가 지긋이 부르자 재깍 반응했다.

근데 말이죠. 입가에 묻은 기름 좀 닦으시면 좋겠는데.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사실 이렇게 단둘이 대화하는 건 처음이니까요.”

“예, 뭐든 물어보세요. 제가 입은 팬티 색도 알려드릴게요.”

“커흠. 그, 그건 됐거든요. 저··· 그게 말이죠. 첫날 기억하세요?”

첫날의 밀러 아저씨는 밉살맞은 백돼지 한 마리였다.

“첫날이요? 그럼요.”

“그땐 절 엄청나게 싫어하셨잖아요. 맞죠? 솔직히 말해봐요.”

“···에, 뭐···. 맞습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굉장히 안 좋게 봤죠.”

이유는 이미 아니까 생략.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아! 불편한 건 아니에요. 그냥 순수한 호기심.”

진짜다. 순수한 호기심.

어떠한 과장도 없다.

내 인생 경험상,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았으니까. 갑자기 변한 이유를 정말 모르겠다.

“별거 없어요. 그냥 시간이 흐르다 보니 저절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냥요? 뭐, 군인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군인 출신도 가산점이죠. 하지만, 흐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감독님이 아닌 다른 청년이 군인 출신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겁니다.”

“···.”

“연습경기가 끝나고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았죠. 그리고 제 아집을 깨달았습니다. 감독님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니, 얼마나 힘든 상황일지 공감이 되더군요.”

“쉬운 상황은 아니죠. 지금도.”

“후후. 아직도 어렵긴 하죠.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난관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끌리더군요. 게다가. 왠지 모를 연륜이 느껴지시기도 하고요. 군인 출신은 그 방점을 찍었을 뿐입니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부끄럽네요. 이런 건 술이 들어가야 나오는 말인데.”

멋쩍게 웃는 밀러 아저씨.

꾸밈 하나 없는 순박한 웃음이다.

나는 그 미소에 결국 이해했다.

변한 건 밀러 아저씨가 아니다.

‘나였지.’

내가 변했기에,

주위가 따라왔을 뿐.

쉬운 이야기였다.

“술이요? 그럼 오늘 퇴근하고 한잔 걸칠까요? 괜찮은 바 하나 아는데.”

“오! 저야 당연히 좋습니다! 하하. 술값은 감독님이 내시는 건가요?”

“물론이죠.”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 하지만 지금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

···주말은 굶어야겠네.

< 026화. 신임 감독의 평범한 하루.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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