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5화. 개막전. (6) >
1.
-삐이익!
“와아아아아!”
전반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관중들의 환호성이 동시에 울려 퍼진다.
전반 종료 스코어 4-0.
선수들은 소하의 바람을 훌륭하게 이루었다.
잭 해리슨의 추가 골을 얻어맞고 그대로 무너진 베리FC.
권투로 비유하자면 현란한 잽에 정신 팔리다 묵직한 훅을 턱에 허용한 격.
선제공격을 당한 뒤,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그대로 가드가 터져버렸다.
가드가 풀리면 어쩌겠는가.
그냥 비가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을 수밖에.
각성한 잭 해리슨은 실신 직전의 베리FC 상대로 무쌍 난무를 펼쳤다.
경기장을 누비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종횡무진.
그의 전반전 성적은,
1기점, 1골, 1어시스트.
드리블 돌파 5회 성공.
엄청난 지표!
앤디 로버트슨의 지원에 힘입어 왼쪽 측면을 말 그대로 부숴버리며 베리FC의 숨통을 끊었다.
그렇다고 앤디 로버트슨이 잭 해리슨의 지원에만 힘을 쓴 건 아니다.
잭 해리슨의 패스를 멋진 크로스로 연결해, 존 말로리의 멀티 골을 도운 앤디 로버트슨도 당당히 이름을 알렸다.
리그2를 공포에 떨게 할 파괴적인 왼쪽 측면조합의 등장!
소하가 준비한 강력한 무기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순간이었다.
2.
4대0.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방적인 전반전 경기 결과.
포츠머스 팬들은 웃통을 벗어젖히며 축제 분위기에 빠졌고,
절반이 넘는 베리FC의 원정 팬들은 빠른 귀갓길에 올랐다.
그레이터맨체스터주는 멀었으니까.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테고.
하프 타임, 포츠머스의 라커룸.
휴식을 취하는 선수들의 얼굴은 매우 밝다. 서포터와 마찬가지로 축제 분위기.
그들도 전반전에만 4골을 넣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하지만. 유독 표정이 좋지 않은 18세의 어린 선수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조쉬 킹.
상당한 활약 덕분에 자신이 10대임에도 불구하고 왜 주전 원톱인지 보여줬거늘.
그의 주위에만 어두운 안개가 낀 듯한 착각이 든다.
“하하하. 미안하다니까. 너무 가슴 쪽으로 공이 와서 처리하기 힘들었거든.”
존 말로리가 잭 해리슨의 크로스를 날려 먹은 건에 대해서 연신 사과한다.
실상은 그냥 장난이었지만.
“몇 번을 말하지만 괜찮습니다. 당신은 두 골이나 넣었으니까요.”
“그래도. 잘만 했으면 공격 포인트를 서로 쌓았을 텐데 말이야.”
“잘만 했으면, 이라는 가정은 필요 없습니다. 과거는 바뀌지 않으니까요. 물론, 두 기회를 모조리 놓쳤다면 존 말로리 씨의 평가를 무능력자라고 하향 조정했겠지만요.”
“···큼큼. 잘할게.”
기계같이 싸늘한 어조에 존 말로리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덤덤한 얼굴에서 무능력자라는 말이 나오다니. 순간 소름이 돋았다.
종종 신임 부주장을 보면, 미래에서 온 꼰대 로봇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 근데 우리 주전 공격수님께서는 왜 이리도 표정이 어두울까?”
존 말로리의 다음 목표는 조쉬 킹.
평소처럼 놀려주려고 했지만,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 의아하다.
덤으로 우중충한 기운까지.
심상치 않다.
“···저리 가세요.”
“왜 그래?”
“···저만 공격 포인트가 없거든요.”
“···.”
역시 애새끼였다.
공격 포인트만 없었을 뿐.
조쉬 킹의 활약은 눈부셨다. 모든 골에 적절히 관여하며 신체조건만 좋은 선수가 아님을 증명했지만, 불만이 많아 보인다.
‘아니지. 저게 진짜 공격수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일지도.’
골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
이것이야말로 공격수가 가져야 할 필수 덕목 중 하나였으니까.
“로보도 어시스트를 했고 알리는 1골 1어시스트를 했다고요. 십 대 중에 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진짜 쪽팔리고 부러워죽겠어요.”
그저 질투였나.
순간 관자놀이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낸 존 말로리.
항상 장난기 가득한 그였지만 이번에는 선배 노릇을 해보려 한다.
“넌 잘했어. 네가 없었다면 우린 한 골도 넣지 못했을 거야. 흠. 아니지. 한 골은 넣었겠다.”
급히 말을 바꿨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의 잭 해리슨이라면 어떻게든 한 골 정도는 만들었을 테니까.
“그딴 걸 위로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두 골이나 넣은 사람한테 위로 같은 거 받기 싫거든요.”
“난 다 주워 먹었잖아. 하여튼, 후반전엔 내가 팍팍 밀어줄 테니까 기분 풀어.”
슬쩍, 조쉬 킹의 얼굴을 훔쳐보는 존 말로리. 이 정도로 풀릴 기분은 아니라고 본다. 항상 쾌활하던 녀석이라면 마이너스 에너지도 훨씬 클 터.
하지만,
“정말요?! 하하. 역시 선배밖에 없어요. 그럼 믿고 슛할 준비만 하고 있을게요. 약속 잊지 마세요.”
“···그, 그래.”
생각보다 훨씬 더 단순했다.
소하가 아니라면 킹의 기분을 풀어주기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벌컥.
작은 해프닝이 끝나자, 소하와 거대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라커룸 안으로 들어왔다.
“자자. 일단 이 친구가 주는 거 받아먹어. 그다음에 작전 회의다.”
소하의 말이 끝나자, 그 뒤에 서 있던 덩치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소하의 친구이자, 포츠머스의 영양 총괄 겸 체력코치인 김용한이었다.
꿀꺽.
선수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볼 때마다 놀랍다. 저것이 정녕 아시아인의 덩치란 말인가.
신장 198, 몸무게 110kg.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근육질의 남자는 묘한 위압감을 풍기며 선수들에게 다가간다.
“뭐, 뭐에요. 그건.”
애써 용기를 낸 조쉬 킹이 묻자, 김용한이 묵직하게 답한다.
“파워볼. 귀리에 다크초콜릿 분말을 굴린 거다. 에너지 보충에 좋지. 그리고 이건 카페인이 든 과일주스다.”
“자, 잘 먹겠습니다.”
“하나도 남기지 말고 먹도록. 후반전을 치르는 데 도움을 줄 거다.”
싱긋.
나름대로 푸근한 미소를 지어봤지만, 흉신악살이 따로 없다. 덕분에 라커룸에서는 그저 음식 씹는 소리만 나기 시작했다.
오도독. 꿀꺽.
“역시 맛은 좋네요.”
벌써 다 먹어버린 조쉬 킹이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몇 개 더 먹고 싶을 만큼 훌륭한 별미.
무서운 외모와 덩치가 무색할 만큼 대단한 요리 솜씨다.
맛뿐만이 아니라 효능도 상당하다. 이미 무수히 많은 엘리트 스포츠에서는 쉬는 시간에 에너지 보충을 위해서 음식을 섭취했으니까.
단지 리그2, 4부리그라는 한계상 처음 경험해보는 문화라 어색했을 뿐.
차차 적응해 나간다면 앞으로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거다.
덤으로 김용한의 외모에도 적응해야겠지만.
“자자. 다 먹었으면 이제 후반전 작전을 성명할게.”
소하가 입을 열자, 선수들은 입을 닫고 귀를 기울인다.
“전반전. 아주 훌륭한 경기력이었어. 본 감독은 대단히 만족했다.”
칭찬에 인색한 소하의 입에서 극찬이 나오자 선수들의 얼굴엔 화색이 만연하다.
“여기서 질문 한 가지만 할게. 전반전에 4골을 넣었다면 후반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하의 질문에 몇몇 선수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걸어 잠그는 겁니다. 단단히 틀어막는다면 승리는 쉬울 겁니다.”
“맞아요. 상대는 공격적으로 나올 테니까요. 수비를 단단히 해야죠. 제풀에 지쳐 쓰러지게 끔요.”
“전반전이랑 똑같이 플레이하면 되지 않을까요? 4-0으로 이긴 전반전이니까요. 똑같이 해도 이기겠죠.”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
아쉽게도 소하가 원하던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본 감독은 실망이 크다.”
“···.”
“그동안 많은 지도편달을 내렸거늘. 답을 맞히는 녀석들이 한 명도 없다니. 내일은 훈련을 쉬려고 했지만 안 되겠어. 인터벌 훈련이나 빡세게 조져보자.”
“···.”
울상이 되는 선수들.
소하의 훈련은 매우 강도가 높아, 하루만 쉬어도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였다.
그러든지 말든지.
소하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열변을 토한다.
“간단한 산수잖아! 전반전에 4골 넣었으니까 후반전도 4골을 넣어야지!”
“···.”
“4골 넣고 와. 안 그럼 내일 전원 훈련 참석이니깐.”
그저 어안이 벙벙한 선수들이었다.
3.
삑-삑-삐이익!
[화끈한 경기가 여기서 끝납니다! 최종스코어는 8-2. 포츠머스의 압승!]
[개막전에 걸맞게 압도적으로 재밌던 경기가 이렇게 끝납니다!]
경기는 끝났다.
최종 스코어는 8-2.
내 개막전은 가르마 대첩 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후반전만 따로 놓고 보자면 꽤 재미있었다. 4-2였으니까. 꽤 비등비등한 경기라고 봐도 좋았다.
후반, 5분.
수십 번의 시도 끝에 롱패스에 성공한 베리FC는 빠르게 한 골 따라잡았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 다음이 문제.
솔직히 괜찮기보단 좀 쫄렸다.
워낙 빠르게 먹힌지라.
후반 10분.
아직 공중볼에 미숙한 케빈 도슨은 위치선정에 실패, 공을 뒤로 흘려버리고 말았다.
골키퍼와 1대1 찬스를 얻은 베리FC는 놓치지 않고 득점에 성공.
순식간에 두 점 차까지 따라잡혔다.
10분 만에 두 골을 얻어맞다니.
오랜만에 불알이 오그라들었다.
그대로 경기가 흘러갔다면 동점은 물론이고 역전도 불가능하지 않았으니까.
축구란, 기세가 매우 중요한 법.
기세만 탄다면 압도적인 점수 차를 뒤집거나 훨씬 강한 상대도 잡아낼 수 있다.
이게 바로 축구의 묘미랄까.
당연한 말이지만 역풍을 맞는 쪽은 달갑진 않다. 그래서 기세를 한풀 꺾어줘야 할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리고, 그 주인공은 바로,
조쉬 킹.
전반전, 공격진 중에 유일하게 공격 포인트가 없었던 녀석은 후반부에 골 폭풍을 몰아쳤다.
놈의 해트트릭은 백미 중의 백미.
후반 13분.
두 골을 실점한 지 3분 만에 조쉬 킹의 발에서 불꽃이 터졌다.
“우오오오오!”
[조쉬 킹이 포효합니다! 무지막지한 대포알 강슛! 골네트가 찢어지지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전반전에는 움직임은 좋았지만 공격 포인트가 없는데요, 기어코 시동을 거네요!]
25m 밖에서 쏟아진 대포알 중거리 슛.
잔뜩 힘이 실린 공은 골키퍼가 반응도 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골네트를 찢어발겼다.
아마 누군가 머리에 맞았다면 뇌진탕에 걸렸을 거다.
후반 25분.
잔뜩 기세를 올린 조쉬 킹은 알리의 멋들어진 대지를 가르는 패스를 받았다.
순수한 피지컬만으로 베리FC의 중앙 수비수 둘은 떨쳐낸 킹은 골키퍼까지 제치며 추가 득점에 성공.
경기는 6-2가 되었다.
미약한 희망을 품었던 베리FC는 그대로 침몰.
그 후에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일방적인 구타.
압도적인 폭력.
싸울 의지를 잃은 상대만큼 때리기 좋은 샌드백이 어디 있을까.
선수들은 내 속을 아주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후반 33분경 멋진 헤딩골로 조쉬 킹은 해트트릭을 달성했으며 44분엔 세트피스 훈련의 성과를 얻었다.
[반즈의 깔끔한 코너킥! 파 포스트 근처, 찰스 말로리의 머리로 향합니다. 아! 아쉽게도 머리에 잘못 맞았습니다. 그러나 잘못 맞은 볼이 도슨에게 향합니다! 케빈 도슨! 골오오오올!]
[상징적인 골입니다! 전 주장이 현 주장에게 어시스트를 한 장면입니다!]
그리고 경기는 종료.
압도적인 결과에 베리FC의 감독 리 그랜트는 또다시 악수를 거절하고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후후. 진짜 열 받겠는데.
얕잡아 보던 상대에게 쌍코피 터지니까 기분이 어때? 아마 쪽팔려서 쥐구멍에 숨고 싶을 거다.
“와아아아! 포츠머스!”
“성소하! 성소하!”
손을 번쩍 치켜들자, 2만여 명의 관중들은 내 이름을 연호한다.
아주 만족스러운 성적표다.
이번 대승으로 난 많은 걸 챙겼다.
선수선발에 대한 비판을 분쇄.
포메이션을 바꾼 이유를 증명.
구단 내외로 입지를 강화.
마지막으로는, 그랜트의 피눈물.
당연히 마지막 전리품이 가장 달콤하고 원하던 것이었다.
새끼. 좀만 기다려. 원정 가서도 작살을 내버릴 테니까.
난 잠시 관중들의 환호를 온몸으로 만끽하다가 기자회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시작된 기자회견.
분위기는 역시나 화기애애하다.
“와우! 엄청난 대승입니다. 감독님 이번 경기에 대한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내 담당이라도 된 건가.
이쁘장한 여기자는 두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첫 소감을 요청했다.
“아프네요.”
“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는 여기자.
내가 또 뭔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주먹이요. 하도 때렸더니 주먹이 얼얼하네요. 이거, 이거. 맞은 사람보다 부상이 심할 거 같네요.”
“하하하.”
“푸흡.”
가뜩이나 좋았던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는 이제 전성기 개그콘서트 못지않다.
오늘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들의 대부분은 포츠머스가 속한 햄프셔주의 언론사 소속.
리 그랜트의 위트 없는 과격한 기자회견에 반감을 품은 기자들이 많았다.
심지어 베리FC는 노동당 우세인 그레이터맨체스터주에 속한 도시.
보수당 우세인 햄프셔주와는 사이가 썩 좋지도 않았고.
고로, 내가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준 격. 웃음이 절로 나오겠지.
“후우. 언제나 절 웃음 짓게 해주시네요. 항상 즐거운 시간이에요. 그럼, 베리FC에 따로 하실 말씀은 없나요?”
“뭐, 심심한 위로를 표하겠습니다. 살다 보면 피똥 쌀 정도로 처맞는 날도 몇 번 있으니까요. 아, 마지막으로, 또 맞기 싫으면 실력을 연마하셔야 할 겁니다. 저흰 더 강해질 테니까요.”
사심을 듬뿍 담아 베리FC와 리 그랜트를 마구마구 헐뜯어줬다.
아. 속이 시원해. 성불해도 여한이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자회견.
이후 나오는 질문들에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답변하며 무난한 시간을 가졌다. 외부의 적은 만들어도 내부의 적은 만들지 말아야 하는 법.
“마지막으로, 앞으로 만날 상대 팀들에게 한마디 해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답변이라. 자극적인 답변이 기억에 오래 남겠지.
난 오만한 표정과 함께 오른손 검지를 들며 카메라를 강렬하게 응시했다.
“다음은 너다.”
딱 대. 쥐어 패줄 테니까.
< 025화. 개막전. (6)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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