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24화 (24/306)

< 024화. 개막전. (5) >

1.

잭 해리슨이 공을 잡자 필립스가 짤막하게 평가한다.

“그는 오늘 폼이 좋지 않아 보여요.”

“어째서입니까?”

“그의 주특기인 드리블 돌파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거든요. 아마도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지···. 그러지 않고서야 설명할 수 없어요.”

필립스의 말처럼 오늘 잭 해리슨은 단 한 번도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지 않았다. 얼핏 보면 몸에 이상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

그의 선택지는 오직 패스.

오버래핑하는 로버트슨이나, 중앙에서 상대를 찢어버리는 알리를 지원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때문에, 베리FC의 선수들은 해리슨이 공을 잡자 근접하기보다는 교묘하게 패스 길을 막는 움직임을 취한다.

몸이 무거워 보이니까.

오로지 패스만 하니까.

그들이 봐도 오늘의 잭 해리슨은 영 아니었으니까.

이견이 없는 합리적인 선택.

어차피 패스만 하려는 상대에게 무리하게 붙는 행위는 낭비 그 자체다.

위험지역이면 몰라도 중앙선 부근에선 더더욱.

하지만 이 일련의 행동은 잭 해리슨과 소하가 전날에 설계한 꿍꿍이였다.

‘역시. 감독님이야.’

잭 해리슨의 마음 속에서는 그저 감독에 대한 감탄만 나왔다.

보였으니까.

드리블할 공간이 생겼으니까.

‘이지선다. 상대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만들어줘라. 더 많이 만들어주면 더 좋고.’

소하의 조언. 그 효과는 바로 나왔다. 이제 패스를 경계한 나머지 드리블을 소홀히 한다.

로벤이 한계를 극복한 방법도 마찬가지. 그는 펩의 지도하에, 패스에 눈을 떴고 막을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우선은 두 가지부터.’

드리블이란 선택지.

패스란 선택지.

일단, 이 두 가지 선택지를 만든다.

선택지의 다양성.

이것이 최우선과제였다.

스텝 업을 하기 위해선.

‘간다.’

불끈. 잭 해리슨은 경기 시작 후 처음으로 허벅지의 모든 근섬유를 짜낸다.

-툭.

이어지는 전매특허, 드리블 돌파!

거침없이 공을 앞으로 치고 나가는 모습은 호쾌함마저 느껴진다.

어느 정도 드리블 길을 열어줬던 터라 그의 앞길을 막을 선수가 없다.

[아! 드디어 해리슨이 시동을 겁니다! 그간 힘을 아껴놓았군요!]

[속이 다 시원해지는 시원한 드리블입니다. 이게 바로 잭 해리슨이죠.]

폭발적인 드리블이 터져 나오자 장내 아나운서가 목소리를 드높였다.

“와아아아! 해리슨! 해리슨!”

“가라아아아!”

그야말로 무아지경.

야생마 같은 질주에, 식어버리려던 경기장 분위기도 후끈 달아오른다.

‘패널티 에어리어 안에 셋.’

순식간에 엔드라인 부근까지 내달린 잭 해리슨. 깊게 고민하지 않고 날카로운 크로스를 시도한다.

-뻥.

골키퍼와 수비수 사이를 섬전같이 가르고 지나가는 매우 훌륭한 크로스!

휙. 아슬아슬하게 조쉬 킹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며 존 말로리를 향해 날아간다.

‘애매한데.’

존 말로리의 신장은 177cm.

너무 작지도 않지만 크지도 않다.

잭 해리슨의 크로스는 날카로웠으나, 머리나 발로 처리하기엔 존 말로리에게는 애매모호한 높이!

‘에라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고 다이빙 헤더를 시도하는 존 말로리. 날카로운 곡선을 그리며 다가오는 공을 어찌어찌 머리에 맞춘다.

-터어엉!

회심의 다이빙 헤더.

아쉽게도 골대를 강하게 강타하며 골라인 아웃이 된다.

-지이이잉!

어찌나 크로스의 힘이 좋았던지, 골대가 부르르 진동할 정도!

선천적인 득점 감각 덕분에 공을 머리에 맞추긴 했지만 아쉽게도 방향이 좋지 않았다.

정말 아쉬운 노골.

“야! 미안해! 난 머리는 전공이 아니라서! 좀 낮게 주던가!”

완벽한 찬스를 날려 먹은 존 말로리는 뻔뻔하게 손을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공격수에게 가장 필요한 마인드 아닐까? 뻔뻔함 말이다.

소하였다면 귓방망이를 후렸을지도 모르지만, 착하고 점잖은 잭 해리슨은 슬쩍 고개를 흔들며 용서한다.

[골아웃! 정말 아쉽습니다.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요.]

[전 앞니 근처까지 골이란 단어가 튀어나왔습니다. 자, 베리FC의 골킥으로 경기가 재개됩니다.]

베리FC의 공격으로 재개되는 경기. 여지없이 들어오는 포츠머스의 강력한 전방 압박에 다시금 부질없는 롱패스를 시도.

공은 골대 맞힌 지 1분 만에 다시 케빈 도슨의 소유가 됐다.

케빈 도슨.

올해 새롭게 주장으로 임명된 바른 생활 사나이.

그는 패스를 보내기 전, 슬쩍 마이클 반즈를 바라본다.

그 짧은 순간, 둘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지금의 키 플레이어는 잭 해리슨입니다. 그가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부주장의 기세가 좋네요.’

축구 지능이라면 리그2에서는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두 선수는 변화를 동시에 잡아냈다.

지난 20분은 델리 알리가.

지금부터는 잭 해리슨이.

폭풍의 중심이 바뀌었다.

팀의 플레이메이킹을 담당하는 둘은 공을 집중해야 할 동료를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툭.

케빈 도슨은 공을 받기 위해 내려온 마이클 반즈에게,

반즈는 오른쪽 미드필더 러셀에게,

러셀은 잠시 조금 전진하다가 다시 반즈에게,

여유롭게 공을 잡은 반즈는 마지막으로 잭 해리슨에게 패스를 건넨다.

잭 해리슨에게 정확히 떨어지는 패스.

순식간에 이루어진 순환 패스에 베리FC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편안히 공을 잡은 잭 해리슨.

다시금 소하의 조언을 떠올린다.

‘두 가지 선택지만으로는 아직 부족하지. 그럼 한 가지 더 만들어.’

‘어떤 걸···?’

‘넌 크로스가 장기잖아? 그럼 빨리 올려봐.’

마지막 선택지는 얼리 크로스.

뒤쪽공간에서 한 타이밍 빨리 올리는 크로스의 일종.

상대의 의표를 찌르기 좋은 수단이다.

케빈 더브라위너나, 베컴의 주특기이기도 하다.

상대가 수비진형을 잡기 전에 크로스를 올려 혼란을 일으키는 방법이지만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박스 안으로 충분한 숫자의 동료들이 침투해줘야 하는 것이 필수조건.

그러지 않는다면, 그저 공을 헌납하는 악수에 불과할 뿐이다.

‘예전 같았으면···.’

예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다.

수비 지향적인 팀 특성상, 박스 안에 침투하는 선수는 한두 명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델리 알리, 조쉬 킹, 존 말로리, 커너 러셀까지.

4명이나 침투 중이다.

상대의 수비 숫자와 똑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헛발질이 아닐 터.

-휘릭.

크로스의 장인답게 얼리 크로스도 수준급!

[아! 날카로운 크로스였는데요. 아쉽게도 상대 수비에 걸리고 마는군요.]

장내 아나운서의 탄식.

종이 한 장 차이로 상대 수비수에 머리에 걸리고 말았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높았다면 조쉬 킹의 머리에 맞고 0.9골을 만들뻔한 위력적인 크로스!

이제 베리FC의 선수는 잭 해리슨이 공을 잡자 혼란에 빠진다.

‘패스? 드리블? 얼리 크로스?’

패스라는 선택지.

드리블이라는 선택지.

얼리 크로스라는 선택지.

이지선다를 넘어선 삼지선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드리블 원툴 일 때도 막기 힘든 선수였는데 지금은 답도 없다.

이제 무엇을 할지 예측해서 미리 막아서는 짓은 불가능.

그렇다면, 반응을 보고 나서 움직여야 한다는 건데.

‘반응만으로는 날 막지 못합니다.’

이미 알고서도 당하는 것이 잭 해리슨의 드리블 돌파.

그의 돌파가 막혔던 이유는 상대가 미리 드리블을 ‘예측’했기 때문.

하지만 이제 예측은 여러 가지 선택지 앞에서 당첨되지 못한 로또 용지다.

한마디로 쓸모가 없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이제 그의 시간이다.

-툭.

꾸드득. 다시금 온몸의 근육을 쥐어짜 치고 달리기를 전개하는 잭 해리슨!

[또다시 달립니다! 잭 해리슨! 포츠머스의 한줄기 섬광!]

[아, 정말 빨라요! 아무도 막아서지 못합니다. 이대로 엔드라인에서 날카로운 크로스까지 이어지겠는데요?!]

아무도 막아서지 못한다.

그가 빨라서? 아니다.

‘고맙습니다. 동료분들.’

왼쪽엔 로버트슨이 같이 전력 질주를 하며 한 명을 끌어준다.

중앙엔 델리 알리가 같이 전력 질주를 하면서 한 명을 끌어준다.

팀원 모두가 그의 길을 열어준다.

‘그래. 난 이제, 혼자 달리지 않아.’

그동안 항상 혼자였다.

그저 혼자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릴 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으니까.

이젠 아니다.

이젠 그가 뛰면 같이 뛰어주는 훌륭한 동료들이 있었으며,

다 같이 앞을 향해 뛰라고 닦달하는 멋진 감독마저 있었다.

‘난 이제 혼자가 아니다.’

멋진 미소를 품은 잭 해리슨.

순식간에 왼쪽 페널티 에어리어 모서리에 도착한다.

한 번 더 드리블을 치고 크로스를 올릴까? 꽤 괜찮은 기회를 만들겠지.

그런데 왜.

왜, 오른쪽 파 포스트가 비었을까? 저기로 슛을 때린다면 골일 텐데.

‘아까 날려버린 사죄야.’

씨익. 저 멀리, 오른쪽 측면에서 존 말로리가 상쾌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훌륭한 더미런으로 상대 수비수를 자기 쪽으로 유인해준 상태!

그뿐만이 아니다.

알리와 킹마저도 오른쪽으로 움직여 주며 각을 만들어준다.

‘알겠습니다.’

잭 해리슨은 동료들의 의도를 단박에 눈치챘다. 소중한 팀 동료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 순 없는 노릇.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부주장이었으니까. 부주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해야 할 시간이다.

-뻥!

[아니?! 잭 해리슨이 슛을 시도합니다. 각이 좋지 않은데요!?]

[자칫 무모한 시도일지도 모릅니다!]

장내 아나운서는 물론, 모든 관중이 경악한다.

분명 크로스를 올릴 줄 알았거늘.

잭 해리슨이 왼발로 골대 오른쪽 아래를 향해 강력한 슛을 한다니.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한 플레이다.

공이 골대를 향하는 그 찰나의 시간, 모두가 입을 다물고 결과를 지켜본다.

-촤아아.

잔디 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강력한 땅볼 슛.

한줄기 벼락처럼 곧은 직선을 그리는 슛은 정확하게 목표로 한 위치로 꽂힌다.

-철썩!

[골입니다! 골! 전반 25분. 잭 해리슨이 추가 골을 기록합니다아아아아!]

[고오오오오올! 잭 해리슨의 믿기지 않는 멋진 골입니다!]

“와아아아! 해리슨! 해리슨!”

“포츠머스! 포츠머스!”

잠시 드리웠던 침묵은 땅을 뒤흔드는 열기로 탈바꿈했다.

2.

“좋았어!”

난 잠시 정신줄을 놓고선 두 손을 불끈 쥐고 미친 듯이 어퍼컷 셀레브레이션을 날려댔다.

체면이 구겨지겠지만 어쩌겠어.

존나 기분 좋은걸.

게다가 엄청 멋진 골이 아닌가.

흡사, 토트넘 시절 가레스 베일이 인테르를 상대로 넣었던 골과 똑 닮았다.

전개 과정은 달랐지만 말이다.

휴. 아무래도 이 망할 공놀이 중독자 신세를 벗어나긴 힘들 거 같다.

“감독님 해냈어요! 잭 해리슨이 저런 모습을 보여주다니! 도대체 어떤 마술을 부리신 거예요?!”

밀러 아저씨는 내 어깨를 미친 듯이 흔들어 대며 침을 튀긴다.

아저씨. 체면 좀. 아니, 그것보다 침 좀 어떻게 해봐요. 드러워 죽겠네.

“큼큼. 진정하세요. 뭘 그리 놀라세요? 후후. 다 공격적인 전술 덕분이죠.”

“공격적인 전술이요? 그것만으로 저렇게 스텝 업 하는 게 가능합니까?”

“그럼요.”

어휴. 이 아저씨의 전술적 안목은 정말 아메바와 동급 아닐까. 이런 분이 왜 감독직은 탐내선. 쯧.

아니지, 애초에 수석코치를 하는 것도 기적이다.

그래도 전술적 역량만 제외한다면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살림꾼이라 곁에 두면 편한 사람이긴 하다.

“잘 봐봐요. 잭 해리슨은 그간 없었던 무수히 많은 선택지를 선물 받았잖아요.”

“선택지요? 뭐, 패스나 얼리 크로스는 전에도 했는데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게 과연 위협적이었을까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백패스, 똥크로스.

둘 다 상대 팀에게 도움을 줬을 뿐.

“아! 조금 이해가 가네요.”

밀러 아저씨는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 나와 나체 스트립쇼를 하던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제 패스나 얼리 크로스는 엄청나게 위협적이군요? 알리나 로버트슨은 매우 위협적인 선수니까요. 그들에게 가는 패스는 위험도가 높죠.”

“정확해요! 이야. 조만간 일일 감독으로 경기 한번 지휘해도 되겠는데요?”

“흐흐. 아직 멀었습니다.”

뒤통수를 긁적이는 밀러 아저씨.

농담으로 해본 말이지만 재밌을 거 같다. 언젠간 한번 시도해 봐야지.

“종합하자면 선택지는 위협적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위협적이지 않은 선택지는 가치가 없으니까요. 그러기 위해선 팀적인 움직임이 필요하죠.”

“그렇군요. 전술이 달라지면 폼이 확 살아나는 선수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다 이유가 있었군요!”

“다 감독 놀음이죠. 후후.”

“오오. 역시 감독님은 남다르십니다.”

“뭘요. 기본이죠.”

이건 기본이라고요. 밀러 아저씨.

“그리고 방금 골로 잭 해리슨은 한가지 선택지를 더 챙겼어요.”

“흐음. 아! 슛! 슛이군요.”

“맞아요. 슛이죠. 이제 마무리 단계에서 크로스냐, 슛이냐, 패스냐. 세 가지 선택지가 생겼죠. 상대 선수들은 머리통이 빠개질걸요. 흐흐.”

이제 잭 해리슨은 정말 위협적인 선수가 될 거다.

마무리에서도 패스, 슛, 크로스라는 세 가지 선택지를 보유하게 됐으니까.

물론, 상황에 맞는 올바른 선택은 시간이 지나야 농익겠지만.

그리고 팀적으로도 잭 해리슨의 각성은 엄청난 도움이 되겠지.

여러 무기를 가진 팀만큼 무서운 팀은 없다.

“전반전은 앞으로 20여 분! 두 골 정도 더 넣어라!”

서로를 껴안으며 멋진 셀레브레이션을 하는 선수들에게 버럭 외쳤다.

난 아직 졸라 배고프거든.

< 024화. 개막전. (5)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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