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2화. 개막전. (3) >
1.
경기 당일 하루 전,
베리FC의 감독 리 그랜트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매우 공격적인 발언을 퍼부었다.
“베리FC의 콧대를 분질러 버리겠다는 성소하 감독의 발언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풋내기의 주제넘음이 도를 지나치다 못해 넘쳐흐르는 상황입니다. 프로축구계가 얼마나 힘든 세계인지 선배 된 도리로서 호되게 혼내줄 생각입니다. 예로부터 건방진 어린아이에게는 어느 정도 물리적 교육이 필요했으니까요.”
콧김을 쉬익 내뿜으며 거칠게 반응하는 그랜트. 얼굴이 시뻘게져, 못생긴 토마토가 따로 없다.
“단언컨대, 애송이 감독은 자신의 오만방자함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는 이번 년을 넘기지 못하고 백수 신세가 될 거라 제가 장담합니다.”
앞서 내뱉은 폭언이 부족했는지 연이어 거친 말을 쏟아냈다.
매우 여유로웠던 소하의 기자회견과는 분위기가 정반대.
기자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쏟아져 나오는 기삿거리를 받아 적었다.
2.
톰 힉스와 나단 필립스.
이 둘도 한창 바쁘던 너튜브 채널 준비를 멈추고 중계에 들어섰다.
“아, 오늘 성 감독의 데뷔전입니다. 과연 그가 호언장담했던 것만큼 훌륭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중계인 힉스의 질문에 필립스는 별다른 고민 없이 포문을 연다.
“글쎄요. 이번 시즌 포츠머스는 정말 예측하기가 힘들어요. 성 감독의 빛나는 재능은 저와 모두가 얼핏 느꼈겠지만, 구단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요. 법정관리를 간신히 벗어난 지 겨우 4개월 째잖아요.”
“그렇다면 부정적으로 보신다는 이야기 같은데···. 맞습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최소한 승격은 충분할 거라 확신해요. 내부정보에 의하면 선수들의 사기는 굉장히 높다고 들었거든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고작 28세의 어린 감독이 선수단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힉스는 얼핏 놀랍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기야, 꽤 놀라운 일이다.
한 달 만에 선수단을 휘어잡다니. 어지간한 명감독이 아닌 이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28세의 어린 감독이라면 더욱더.
“성 감독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싶네요.”
리더십이라.
맨날 투덜거리고 열 받아서 한국말로 욕을 내뱉는 게 리더십이라면 리더십이겠다.
소하가 선수들에게 인정을 빨리 받은 이유는, 그의 압도적인 능력 덕분.
역시 성질 더럽고 입이 걸어도 능력만 충분하다면 사람이 따르는 법이다.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더 기대되는 감독이지 않습니까?”
“정확해요. 전 그가 자신이 했던 말을 이뤄낼지도 모른다고 추측해요.”
무미건조한 목소리였지만, 속에는 은은한 열기가 담겼다.
사실, 이것은 추측이 아닌 확신.
필립스가 만나본 신임 감독은 구단의 어려운 상황 따위는 가뿐하게 눌러버릴 거란 확신을 심어주었다.
“저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힉스도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간절히 바랐다. 이어서 대화 주제는 경기로 바뀐다.
“오늘 선발명단이 참 독특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소하가 발표한 선발명단은,
[GK-말콤 우드.
DL-앤디 로버트슨.
DC-케빈 도슨
DC-찰스 말로리.
DR-데클렌 마이어스.
MC-마이클 반즈.
MC-커너 러셀.
AML-잭 해리슨.
AMC-델리 알리.
ACR- 존 말로리.
ST-조쉬 킹.]
프리시즌에 보여줬던 4-3-3 포메이션이 아닌, 4-2-3-1 포메이션이었다.
더군다나 선발 평균나이는 고작 24세.
당연히 난리가 났다.
-미친. 감독은 미친 게 분명해. 프리시즌 내내 4-3-3 포메이션을 보여줬으면서 실전에서는 다른 걸 들고 오다니.
-망조의 냄새가 난다.
-애새끼들로는 이기지 못해. 원톱과 공미가 18세와 17세라고! 심지어 왼쪽 윙백은 19살이야.
-진짜 지랄 났다.
-존 말로리를 또 오른쪽 윙포워드로 쓰네. 감독 FM 하냐? 씨-발?
-명장병 좆되네.
바뀐 포메이션과 꼬맹이들의 선발은, 온라인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물론, 필립스도 마찬가지.
개인적으로는 소하가 마음에 들었지만, 그의 입장상 팩트를 짚어줄 건 짚어줘야 하는 법.
“사실, 선발명단을 보고 나서 두 눈을 의심했어요. 조쉬 킹은 프리시즌에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지만, 알리와 로버트슨은 아니거든요.”
“재능만은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정말 엄청난 재능을 지녔다고 해요. 하지만. 프로 무대는 어린 선수들이 재능만으로 이겨내기엔 무리가 있어요. 물론 그들이···.”
필립스는 잠시 말을 늘였다.
만약 그들이 준수한 유망주 수준이 아닌 세계급 재능이라면.
리그2 정도는 정벌하고도 남았으니까.
쉽사리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겠다. 그런 엄청난 재능이 리그2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그런 재능이라면.
상상만 해도 혈류가 빨라진다.
감히 입 밖으론 내뱉지는 못하겠다.
입 밖으로 내뱉어 버린다면 부정을 탈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단순히 선수에 대한 기대감과 경외가 아니었다.
이것은 감독에 대한 경외.
‘안목이 좋은 수준이 아니라 거의 예지력에 가까운 엄청난 능력.’
숨이 가빠진다. 정말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젊은 감독이 그런 능력자라면 축구계의 판도를 뒤집을지도 몰랐다.
“저, 필립스 씨?”
말을 하다 말고 혼자 상상의 나래에 빠지자, 힉스가 주의를 환기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들이 잘하기를 응원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다 감독이 생각이 있을 겁니다. 그럼 경기에 들어가도록 합시다.”
경기장을 바라보는 둘의 두 눈은 묘한 기대감과 흥분감으로 번들거렸다.
3.
난 경기 시작에 앞서, 베리FC의 감독인 리 그랜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 신청.
저 인간의 족발을 잡긴 죽도록 싫지만, 이것은 기본적인 예의다.
암만 트래시 토크와 어그로를 일삼는 감독이라도 지킬 건 지켜야 ‘쇼맨십’으로 취급해 줬으니까.
그러지 않으면 그저 무개념 관심종자로 낙인찍힌다.
아, 손 세정제 가져와서 다행이야.
“잘 부탁드려요. 후후.”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지만, 그랜트는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흥.”
내민 손을 잡지 않고 그대로 원정팀 벤치로 걸어가는 리 그랜트.
관례를 따진다면 이것은 거의 얼굴에 침을 뱉은 행동과 다름없는 격.
다음 날 신문의 1면을 장식할 만한 행동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아무렇지도 않다. 덕분에 손 세정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니깐.
기자들만 신나겠지.
“저 돼지 새끼가 미쳤나 보네요. 감독님. 악수를 거절해? 저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다 있네.”
오히려 날 보좌하던 수석코치, 밀러 아저씨가 되려 성질을 냈다.
그나저나 근 한 달간 참 욕이 많이 느셨다. 다 이 몸의 공로가 아닐까.
훌륭한 성장이에요. 아저씨.
“진정하세요. 전 괜찮으니까요.”
“아니요. 감독님. 이건 저희 스텝 모두를 무시하는 짓이에요.”
“알죠. 알죠. 제 성격 잊으셨어요? 경기 끝나고 나서 제대로 면박을 줄 거니깐 기대하고 계세요.”
내가 달래자 밀러 아저씨는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흐흐. 그것참 기대되는군요. 감독님이 한번 물었다 하면 고혈압이 올 테니까요.”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잠시 밀러 아저씨와 시시덕거리자 이윽고 경기 시작이 다가왔다.
선공은 원정팀인 베리FC.
삐익!
휘슬 소리와 함께 센터서클에서 베리의 선수들이 공을 주고받는다.
“가라.”
내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자 밀러 아저씨가 소곤거린다.
“아 맞다. 아까 공격진에게 따로 주문하시던 이야기는 뭡니까?”
“후후. 못 들으셨나 보군요.”
“네. 이것저것 챙길 게 많다 보니···.”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긴요. 궁금해 죽겠으니 제발 뭔지 말해주세요.”
“에이. 깜짝 놀라게 해 드리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죠. 그게 뭐냐면요···.”
씨익. 난 내 트레이드 마크인 썩은 미소와 함께 밀러 아저씨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선제공격.”
4.
최전방 3톱인 해리슨, 킹, 말로리.
그리고 공미의 델리 알리.
이들은 경기 시작 전 소하에게 특별한 주문을 명령받았다.
‘휘슬이 울리자마자 전방으로 압박해라.’
특히 킹에게는,
‘킹 특히 너는 그냥 공만 따라가. 평상시에 하던 데로 말이야.’
킹은 소하의 주문을 제대로 실행에 옮길 작정이다.
의문은 없다.
그냥 까라면 깔 뿐.
-삐익.
휘슬이 울리자, 베리FC 투톱이 공을 서로 주고받는다.
그러든지 말든지.
킹은 다짜고짜 공을 향해 전력 질주를 시행한다.
“엇.”
베리FC 9번이 옅은 신음성과 함께 재빨리 공을 뒤로 넘긴다.
킹이 당도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발끝을 떠나는 공.
‘칫.’
킹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다시 한번 공을 향해 전력 질주.
사람은 공보다 빠를 순 없다. 허나, 그것은 제대로 된 패스일 때의 이야기.
갑작스러운 킹의 쇄도.
그 때문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은 비실비실한 패스.
속도가 빠를 리가.
그래도.
어찌어찌 중앙미드필더에게 공이 연결되긴 한다. 조금만 늦었다면 킹이 공을 탈취했을지도.
다급하게 공을 받은 베리FC의 8번 잭 케네디가 순간 움찔한다.
‘어, 어디에다가 줘야 하지?!’
앞에서는 킹이 미친 듯이 달려든 드는 중. 그렇다고 양옆으로 패스를 주기도 힘들다.
이미 잭 해리슨과 존 말로리가 교묘하게 패스 길을 막아섰으니까.
“제, 젠장.”
앞으로 패스를 주려고 했지만 이미 델리 알리가 언제든 패스를 강탈할 위치다.
‘뒤, 뒤밖에 답이 없다.’
유일한 패스 길은 후방.
하지만.
판단이 너무 늦어버렸다. 고작 1초도 되지 않을 시간. 포츠머스 선수들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툭.
어느새 코앞까지 당도한 조쉬 킹이 목적지를 잃은 공을 잽싸게 탈취했다.
“잘 가져갈게요. 히히.”
감독에게 옮았는지 한껏 이죽거린 조쉬 킹은 주저하지 않고 전방을 향해 질주한다.
그와 동시에 해리슨, 알리, 말로리 또한 다 같이 서로의 간격을 좁히며 내달린다.
순식간에 4:4 상황이 되어버린 베리FC 패널티 아크.
여기서 템포를 잡아먹는다면 상대의 백업이 올 터!
“받아요! 부주장!”
조쉬 킹은 소하에게 코딩 당한 그대로, 잭 해리슨에게 짧은 패스를 건넨다.
잭 해리슨의 주발인 왼발에 정확히 안착하는 패스!
“좋은 패스입니다.”
잭 해리슨은 패스의 힘을 죽이지 않은 채 그대로 한번, 왼쪽으로 드리블을 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의 전매특허인 사이드돌파 후 날카로운 크로스가 나오기 일보 직전.
상대의 오른쪽 윙백도 그의 장기를 익히 아는바.
고민 없이 잭 해리슨에게 달라붙는다.
“훗.”
잭 해리슨은 그답지 않게 옅은 미소를 얼굴에 그리었다.
이 미소는,
그의 감독에게 보내는 찬사.
‘감독님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의 눈에는 보였다.
상대의 오른쪽 윙백이 자신을 따라 나와 비어버린 하프 스페이스라고 불리는 공간이.
그리고, 그 공간으로 쇄도하는 17세의 미친 재능 알리가.
“아쉽지만 당신은 속았습니다.”
“무 무슨?!”
드리블 모션은 페이크.
잭 해리슨은 잘 사용하지 않는 오른발로 알리에게 패스를 건넨다.
“앗!”
대경실색하는 베리FC의 오른쪽 윙백과 오른쪽 중앙 수비수.
서둘러 알리에게 달라붙는다.
하지만.
이것도 페이크.
미친 재능의 알리는 공을 잡는 척하다가 가랑이 사이로 공을 통과시켜버리고 다시 침투한다.
알리를 통과한 공의 종착역은 다름 아닌 조쉬 킹.
“굳 브로.”
공간이 널찍한 조쉬 킹.
충분히 슛을 시도해도 될만한 상황!
킹은 득의양양한 미소와 함께 슛 동작을 가져간다.
“안돼!”
다급하게 왼쪽 중앙수비수와 왼쪽 윙백까지 달라붙어 본다.
아쉽게도 허사였지만.
“미안하지만 또 속았네.”
이번에도 속임수였다.
조쉬 킹은 슛을 가장한 패스로 공을 흘린 알리에게 리턴패스를 건넸다.
완전한 노 마크 상황.
하지만 슛 각이 좁았고 알리도 슛 따윈 머릿속에 없다.
어차피 팀 내에서 가장 뛰어난 골잡이가 노 마크 상황이었으니까. 굳이 확률이 낮은 슛을 시도할 필요가 있겠는가.
“존 선배. 못 넣는 건 아니겠죠?”
알리는 지체 없이 먼 포스트를 향해 컷백을 시도한다.
목적지는 먼 포스트에서 싱긋 웃는 존 말로리.
이미 여러 번의 속임수로 완전히 무너진 수비진형은 알리의 컷백을 차단하지 못한다.
“이거 너무 쉽네.”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정확한 인프런트 슛을 하는 존 말로리.
공은 아슬아슬하게 사이드 포스트바를 스쳐 지나가며 골대 안쪽으로 빨려 들어간다.
-철썩!
전반 12초 만에 나온 멋진 골!
“와아와아아아아아아!”
“포츠머스! 포츠머스!”
폭발하는 관중석!
믿기지 않았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도저히 구분이 어렵다.
경기 시작, 12초 만에 골이라니. 이게 정녕 포츠머스란 말인가.
엄청난 골을 만들어낸 4명의 선수는 멋들어진 골 셀러브레이션 대신 어딘가로 질주한다.
그들의 목적지는 벤치.
그들의 감독인 성소하에게.
“감독님! 성공했어요!”
“믿고 있었다고요!”
“야바위가 통했어요!”
각자 감상을 외치며 달려오는 선수들을 보며 소하는 어깨를 으쓱거린다.
“이야. 선제공격, 이게 되네?”
불량스럽게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경기를 주시하던 성소하.
선수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모처럼 썩은 미소가 아닌 진짜 미소가 걸려있었다.
< 022화. 개막전. (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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