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19화 (19/306)

< 019화. 홍보와의 전쟁. (4) >

1.

과거 십 년간 빌어먹을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무수히 많은 ‘적’이 날 괴롭혔었다.

내부의 적으로는,

무능한 프런트.

감독을 개똥으로 아는 코치진.

프로의식 없는 선수.

등등이 대표적.

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라 지옥이 따로 없었다. 물갈이를 끝내기 전까진 너무나도 스트레스받았다.

어느 정도냐면 발기부전까지 왔을 정도. 지금의 불끈불끈함은 정말이지 꿈만 같다.

회귀해서 이게 제일 좋아.

‘이것뿐이었다면.’

여기까진 감독이란 직업의 기본이라 치자. 솔직히 이 정도는 평범한 직장인들도 한둘 정도는 만날 법한 빌런이라 본다.

이 정도는 버텨야 진정한 사회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외부의 적까지 합공을 퍼붓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외부의 적으로는,

개소리로 어그로만 끄는 기레기.

무지성으로 억까만 하는 네티즌.

뭘 해도 불만인 과격 서포터.

불특정 다수에게 욕을 얻어먹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기분 더러웠다.

그래도, 어찌어찌 버티는 노하우는 몸으로 체득했다. 특별한 방법은 아니다. 그저 눈감고 귀 닫은 채 버티고 버텨야 할 뿐.

덕분에 인터넷 공포증이 생겨, 지금도 인터넷은 잘 들어가지 못한다.

‘최악은 동료 감독의 지랄.’

굳이 카테고리에 집어넣는다면 외부의 적. 그것도 난적이다.

다른 빌런은 귀여운 새끼고양이처럼 보일 만큼 지독한 녀석들이다.

요컨대 빌런계의 끝판왕이라 하겠다.

“유명한 인물을 보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번들번들한 낯짝을 가진 이 버러지 새끼의 이름은, 리 그랜트.

3년째 베리 FC의 감독.

그리고 며칠 뒤 있을 개막전의 상대이기도 하다.

한 손에 술잔을 든 채 날 내려다보는 모습이 거만하기 짝이 없다.

“별로 안 유명한데요.”

싫은 티를 팍팍 냈다.

저 개자식이 과거에 했던 일을 떠올리면 숨이 턱 막힐 정도다.

기자 회견에서 툭하면 날 언급하면서 조롱을 일삼던 작자였으니까.

예를 들면,

-챌트넘 타운에게 승리했다는 건 저희가 포츠머스보다 강한 증거입니다. 그들은 챌트넘에게는 졌으니까요.

왜, 다른 팀 경기에서 이기고 나서 날 소환하는데. 좆만아.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가 포츠머스를 봐주었나 보네요. 신임 감독이 불쌍했나 봅니다.

왜, 우리 팀 경기의 결과에 네가 미쳐 날뛰는데. 씨발아.

-새로 영입한 선수를 보아하니 어린 감독의 안목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저라면 저 돈 주고 안 사죠.

왜, 내가 영입한 선순데 네가 평가질을 하는데. 개새야.

하여튼, 저 올해 42세인, 부모님의 생존 여부를 묻고 싶은 녀석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상도덕도 없는 새끼랄까.

보통, 감독들은 서로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원만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직업적 스트레스가 엄청나동병상련을 느꼈거든. 뭐, 종종 예외는 있지만.

재수 없게도 저 인간이 예외였다.

내가 젊은 나이에 본인과 같은 감독이란 사실을 굉장히 고까워했다.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싶어 온갖 언플을 해, 탈모가 왔을 정도.

같은 감독의 비아냥은 진정한 상처로 다가와 날 엄청나게 괴롭혔다.

“하하. 유명하지 않긴요.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감독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랜트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나한텐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그럼 나도 받아줘야 예의겠지.

동방예의지국의 예절 주입 일발 장전.

“그래요? 전 딱히 확인해보진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뭐, 인기 많으면 좋겠죠. 누구처럼 없는 것보다야. 하하. 매우 부러우신가 보네요?”

“···부럽긴요. 걱정될 뿐입니다.”

“초면에 제 걱정까지 해주시고. 업계 선배님의 아량에 심히 감사를 드립니다.”

“후후. 다 선배 된 도리 아니겠습니까. 제가 무엇이 걱정되냐면···.”

와. 이렇게까지 했는데 꿋꿋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저 모습!

놀랍기 그지없다. 내가 아주 제대로 독종에게 물렸던 모양이다.

“부담감은 독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담감이요? 그러니까 제가 과도한 관심에 부담감을 느껴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 말씀이시죠?”

“그렇죠. 아무래도 비선출의 초보 감독 아닙니까.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아니, 분명히 그럴 테죠.”

은근슬쩍 ‘비선출’과 ‘초보 감독’을 강조하는 솜씨가 예사 놈이 아니다. 묘하게 음색을 높여 비꼬는듯하면서도 아닌 듯한 혀 놀림!

확 혓바닥을 뽑아버릴라.

“다 경험담이신가요?”

“전 아쉽게도 선수 출신에 수석코치 경험도 길어 그러진 않았습니다. 감독님과는 매우 다른, 정반대의 경우죠.”

“아. 그러셨구나. 이상하네요. 그럼 부담감을 좀 느끼셔야 하지 않을까요?”

“무슨···?”

드디어 반응이 왔다. 살짝 좁아진 미간에 지건이 마렵다.

“아니, 그렇잖아요. 만년 리그2에서 빌빌거리는데,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다니. 양심이 없는 건가? 오해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

“너무 감독직을 편하게 하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하! 그냥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비선출의 애송이 감독이 풋내기다운 발상을 한 거니까요.”

“이···이···.”

그랜트는 내 말뜻을 이해하더니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불룩. 불룩.

굵은 힘줄이 대서양같이 넓은 이마를 징그럽게 수놓는다.

후욱, 후욱.

거친 콧바람을 내뿜는 모습이 예전 군 생활할 때 봤던 멧돼지가 떠오른다.

“지, 지금 뭐라고 했냐?”

그랜트는 드디어 거만 섞인 친절한 선배 가면을 벗어던졌다.

“귀가 안 좋으신가. 부담감 좀 가지시라고요. 양심이 있으시면.”

“이, 이, 좆같은 원숭이 새끼가!”

와우. 인종 드립까지 나왔다. 저 인간이 날 싫어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구나. 동양계라 싫어한 거였어?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그랜트가 고함을 버럭 지르자 일순 주위가 조용해진다.

무슨 일일까?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장내의 사람들이 나와 그랜트를 주시한다.

물론, 매우 흥분한 그랜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야. 원숭이요? 솔직히 저보다는 그랜트 감독님이 더 원숭이 같지 않나? 뭐랄까. 하마랑 개코원숭이가 이종교배해서 낳은 돌연변이처럼 생기셨잖아요.”

난 슬쩍 그랜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자,

“이런 퍼킹 잽스가!”

-쩌렁쩌렁.

-쨍!

그랜트는 침을 튀기며 술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동시에 내 멱살을 부여잡고 발광을 한다.

“퍽킹 옐로우몽키가 감히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 너희 개 같은 잽스 때문에 임팔 전투에서 할아버지가 전사하셨다고···!”

“저 일본인 아닌데요.”

“퍽! 나라를 빼앗긴 새끼가 무슨!”

씨발럼이. 독립한 지가 언젠데. 이 새끼는 인간이 되기 전에 역사교육 좀 다시 받아야겠는걸?

그나저나 임팔 전투라. 어둠의 독립운동가 무타구치 렌야 선생이 하드캐리한 전투 아니던가. 아마 이 머저리의 할아버지가 그 전투에서 전사한 영국군인가보다.

호부견자.

훌륭한 할아버지 밑에서 이런 개 같은 손주가 나오다니. 지하에서 땅을 치고 슬퍼하시겠구만.

“진정하시죠. 보는 눈도 많은데.”

“뭐, 뭣?!”

이제야 주위를 살핀 그랜트가 매우 당황스러워한다.

“뭐야? 싸우나?”

“방금 인종 차별성 발언하지 않았나?”

“성소하 감독은 한국인 아닌가?”

“와 잽스라는 말을 아직도 쓰는 사람이 존재하는구나.”

웅성웅성.

타 팀의 감독과 선수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찰칵찰칵.

이때다 싶어 연신 셔터를 누는 피라냐 떼. 아니, 기자들.

아아. 내일 신문의 1면은 보지 않아도 내용이 짐작 가는구나.

“잘됐네요. 이 정도면 부담감을 느끼실 테죠? 하하. 전 믿습니다. 선배님이라면 이 난관 잘 헤쳐나가실 거예요.”

내가 생글거리며 비꼬자 그랜트는 눈알을 뒤룩뒤룩 굴린다.

무슨 변명을 할까. 굉장히 궁금해진다.

그리고 내 예상을 뛰어넘는 답이 귀를 강타한다.

“···차, 착각했군. 미안합니다.”

“네?”

이건 또 뭔 수작이야?

“아,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요즘 날 따라다니던 파파라치인 줄 알았습니다. 이런 착각을 할 줄이야. 용서하십시오. 동양계는 다 비슷하게 생겨서···.”

“···.”

큰소리로 개소리를 읊는 모습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이거, 진짜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이네.

이런 어거지로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하다니. 머리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그리고, 외국인 눈에는 동양계가 다 비슷해 보일진 몰라도 난 아니지. 검은 머리에 퍼런 눈을 가진 놈이 또 어디 있는데.

“그딴 게 통할 거라···.”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시길. 녀석이 워낙 사생활 침해를 하는 바람에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

허리를 90도로 접으며 폴더 사과를 하는 그랜트. 겉으로만 본다면 진심으로 실수에 용서를 비는 모습이다.

덕분에 여론은 급반전되어, 큰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라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하. 화가 날 만하지.”

“하긴. 내가 아는 사람도 스토커 때문에 이민 갔더라.”

“너무 화가 나면 말실수를 할 때도 있으니까. 게다가 착각이니···.”

“평소에 성격 좋으시기로 소문이 난 감독이니깐. 실수겠지.”

아니, 병신들인가. 이게 먹힌다고?

파파라치가 여기에 어떻게 들어오는데? 진짜 씨발. 같은 영국인이라고 쉴드쳐주는 건가.

하 참. 냉정하게 생각해보자면, 아마도 저 망할 인간이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 덕분일 거다.

이렇게 된 이상.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엿 먹는 건 다름 아닌 나다.

“···그, 그럴 수도 있죠. 아, 앞으로 조심해 주시길.”

썩은 미소를 지으며 간신히 입을 뗐다. 나름 숙달됐다고 자부했는데, 얼굴 근육을 움직이기가 버거울 줄이야.

“감사합니다. 그럼, 개막전 때 뵙겠습니다. 전 그만, 자리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다시 한번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예.”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기사는 나겠지만 별로 큰일은 아니겠지. 여러모로 대단한 놈이다.

“감독님. 의외로 그냥 넘어가시는군요? 이유가 있으십니까?”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도슨이 다가와 의문을 던졌다.

“왜? 그냥 넘어가는 게 이상해?”

“제가 아는 감독님의 성격상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냥 욕을 해라. 욕을 해.”

“언짢게 들리셨다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저런 모욕을 듣고도 그냥 넘어가기엔 의문이 많습니다. 감독님께서 마음만 먹으셨다면 이렇게 끝나진 않았을 겁니다. 솔직히, 조금 화가 나기도 합니다. 감독님은 제가 만나 본 최고의 감독이시니까요. 이런 부당한 대우는 참기 힘듭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나설뻔했습니다.”

“···잘 참았어.”

어우야. 무슨 보험 약관 읽는 보험설계사처럼 내 편을 들어주냐.

그래도 내 편 들어주는 건 내 새끼밖에 없구나.

짜식. 기특해.

“뭐, 미친개처럼 물고 늘어지면 망신을 줬긴 했겠지.”

도슨의 말처럼 한발 물러서지 않아도 끝을 볼 수는 있었다.

잘만 풀린다면 경질까지 갔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대로 경질되기엔 녀석에게 쌓인 원한이 많다. 그랜트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최고의 벌이거든.

‘베리 FC. 6년 뒤면 재정이 파탄이 나서 EFL 제명처분을 받는 구단.’

재정난으로 아예 훅 가버린다.

그때까지 감독이던 그랜트는 베리 FC의 영원한 원수가 됐고.

아예 영원히 감독직을 맡지 못하게 된다. 이보다 더 완벽한 최후가 어디 있으리. 당시, 이 소식에 탭댄스를 추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도슨아. 하나만 알아둬라. 진정한 복수는 때론 묵혀야 익는 법이야.”

“···그렇습니까?”

“그래. 저런 모지리가 계속 사령탑을 맡아줘야 우리가 쉽게 이기지.”

“아하.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구단의 성적을 위해 일시적인 모욕을 참아내시다니. 다시금 존경스럽습니다. 또한, 축구인이라면 축구로 복수하겠다는 마음가짐! 한 가지 또 배워갑니다.”

“···하하. 그, 그래. 그런 거지. 하하.”

얜 가끔 멍청한 건지 착한 건지 구분이 어렵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자.

2.

일종의 해프닝이 끝나고 각 팀의 감독과 주장이 단상에 올라 올해의 포부를 발표한다.

잘라 말해, 식상하다.

이런 식으로 하면 홍보가 되겠냐고.

매콤한 발언을 해주어야 인지도도 올라가지. 가뜩이나 관심도 없는 리근데.

“다음은 포츠머스 FC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감독과 주장은 단상 위로 올라와 주십시오.”

우리 팀의 차례가 다가왔다.

단상에 올라가자 제일 먼저 플래시 세례가 열렬한 환영 인사처럼 반긴다.

찰칵. 찰칵. 찰칵.

눈 따갑다.

이윽고, 사회자가 신나게 소개한다.

“요즘 가장 화제가 되는 감독님이시죠. 현 잉글랜드의 최연소 감독! 포츠머스의 성소하 감독님과 이번에 새롭게 주장 완장을 차게 된 케빈 도슨 선수입니다. 모두 박수로 맞이해주십시오!”

짝짝짝짝.

우렁찬 박수 소리가 식장을 가득 채웠다. 쓱 훑어보니, 각 팀의 감독들이 날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박수가 잦아들자, 사회자가 평범한 질문부터 던졌다.

“드디어 성소하 감독님을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어찌나 인기가 많으시던지. 인기가 체감되시나요?”

인기라. 난 인기를 느껴본 적이 없는데. 화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그게 인기라고 생각하진 않거든. 욕만 죽도록 먹었지.

“밖에 잘 안 나가서 모르겠네요.”

“앗. 인터넷에서도 난리인데, 모르시나 보군요?”

“네. 전 인터넷 잘 하지 않아서요. 그래도, 많은 축구팬들께서 저에게 관심을 두신다니, 영광으로 여길게요.”

“하하.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많은 분이 궁금해하시는 질문부터 하겠습니다. 첫 부임 기자 회견 때, 3년대로 프리미어 리그로 올라가시겠다고 했는데, 그 생각은 변함없으신가요?”

당연하지. 이 사람아.

남아일언 중천금 몰라?

이후로도 심심한 질문 몇 개를 심심하게 받아주었다.

“리그에 앞서 어떤 포부를 가지셨는지 여기 모인 감독님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밍밍한 피시 앤 칩스를 대신할 얼큰한 김치찌개의 시간이.

“아아. 잘 들리시죠?”

끄덕끄덕.

“귀 닦고 잘 들으세요. 가장 높은 위치에서 2등 싸움 구경 잘하겠습니다! 하하!”

아아. 이러다가 어그로 끄는 맛에 중독되어버릴지도.

< 019화. 홍보와의 전쟁.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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