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8화. 홍보와의 전쟁. (3) >
1.
조쉬 킹은 신임 감독이 좋았다.
물론, 처음부터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도 엄연한 프로 축구선수.
비선출인 경력도 일천한 풋내기의 지시에 따르기에는 선수의 프라이드가 용납하기 어려웠으니까.
암만 어리더라도.
‘날 제대로 봐줬어.’
첫인상은 첫날에 바뀌었다.
자신의 힘이 보기보다 훨씬 세다는 걸 정확히 파악했으며 몰래 꿈꿔왔던 포워드 자리로 점지해주다니.
가려운 곳을 아주 시원하게 긁어줬다.
그리고 이어지는 각종 퍼포먼스.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정식 감독직이 처음인 사람이 보여줄 그것이 아니었다.
강도는 높지만, 효율적인 훈련.
어려운 전술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지도력.
선수의 능력을 파악하는 안목.
22명의 선수 모두에게 딱 알맞은 개인 훈련 프로그램의 제공.
식단 관리를 통한 선진적인 스포츠과학 시스템.
거침없는 미디어 핸들링.
20대 후반의 애송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을 행보였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모든 것을 일주일 만에 처리했다는 것.
‘정말 능력 하나만큼은 대단한 형이야. 천재. 이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어.’
조쉬 킹은 소하를 천재로 단정 지었다.
그가 천재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은 모조리 바보였으니까.
그만큼 감독의 능력은 놀라웠다.
프로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실력.
실력만 있다면 다른 문제는 아무런 장애물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임 감독의 능력은 그의 출신을 완전히 잊게 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혹은 괴짜일지도···. 천재와 괴짜는 종이 한 장 차이니까.’
마냥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성격이 더러웠으니까.
입은 또 얼마나 거칠던지.
조쉬 킹은 근 한 달 동안 한국어 욕을 완전히 통달했다.
‘씨발은 조금 화났을 때. 씨발 새끼는 꽤 많이 화가 났을 때. 개새끼는 눈이 뒤집혔을 때.’
다른 이가 욕을 했다면 화가 났겠지만, 소하는 예외였다.
저렇게 욕을 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며 끝까지 가르쳐주었으니까.
오버헤드킥 훈련을 시킬 때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이해시켜줬으니까.
그리고 감독의 노력은 조쉬 킹 본인이 가장 절절히 느꼈다.
‘나 자신도 느껴져. 축구선수로서 엄청난 발전을 했다는 게.’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선수가 성장했음을 본인들이 뼈저리게 느꼈다.
최소한 감독의 능력에 의심을 가진 선수는 몇 없었다.
오히려, 감독 이야기가 나오면 서로 칭찬하느라 바빴다.
“감독님이 대단하긴 해. 개인 면담에서 내 장단점을 모조리 설명하고선 해결책을 내주더라.”
“처음엔 곤욕이었지만, 지금은 식단대로 밥을 먹지 않으면 불안해졌어.”
“이번 프리시즌만큼 몸이 가벼웠던 적이 없어.”
“훈련에 잘 따랐을 뿐인데, 어느샌가 감독님의 전술이 이해되더라.”
극찬 일색이었다.
물론 몇몇 선수들은 아직도 부정적인 태도였지만 이젠 주류가 아니었고.
‘그리고 재밌잖아?’
신임 감독은 재밌었다.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하루하루를 즐겁게 한다.
오늘도 마찬가지.
감독 본인이 솔선수범해서 훈련을 건너뛰고 산책이나 하러 가자니.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여어. 조쉬 킹. 이번 시즌 기대한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주민 한 명이 알아보고선 응원을 해줬다.
“네! 이번 시즌은 기대하세요!”
“15골만 넣어줘!”
“에이. 좀 더 기대해주시죠. 30골 정도 박아주고 득점왕 할 건데.”
“하하! 그럼 네가 득점왕 한다는 것에 전 재산 베팅해야겠네.”
“잃으시면 보상은 해주지 않을 거예요.”
조쉬 킹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절로 힘이 난다. 감독은 이런 것을 노린 게 아닐까?
감독의 명령은 단 한 가지.
친한 선수들과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점심시간 전에 훈련장으로 복귀.
단순한 주문이었다.
‘솔직히 뭔 미친 짓인가 했지.’
겁도 났다.
강등을 당했으니까.
밖에 돌아다니다가 욕이나 얻어먹을 줄 알았다.
저번 시즌에도 경기장에서 온갖 욕을 다 먹었던지라. 두려웠다.
하지만 의외로 포츠머스 시민들은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오히려 조금 전처럼 응원해줬을 뿐.
‘이미 알았다는 건가. 감독님은.’
아직 이번 산책에 대한 감독님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부정적인 영향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음은 분명해 보였다.
“와. 조쉬 킹이다!”
“사인받자!”
“생각보다 훨씬 말랐네.”
이번에는 꼬마들이 달려들었다.
조쉬 킹은 감독이 나눠준 펜을 들고선 사인을 해달라는 요청에 응한다.
“킹. 이번 시즌은 잘할 거지?”
“제발 잘해줘! 런던 사는 친구가 강등당했다고 맨날 놀려.”
“이번에 9번 받는다는 소문이 돌던데. 9번 받으면 유니폼 사달라고 엄마 조를 거야.”
“올 시즌은 꼭 많이 이겨주라. 제발 약속해줘!”
한 꼬마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사인을 마친 조쉬 킹은 평소 그답지 않게 푸근한 미소를 짓는다.
다정하게 손가락을 마주 거는 조쉬 킹.
“그래. 약속할게. 이번 시즌에 무조건 승격할 거야.”
자신에게도 하는 약속이었다.
2.
‘산책’을 끝내고 돌아온 선수들의 표정은 예상대로 밝았다.
조금 걱정돼서 몰래 따라다니긴 했지만, 기우였을 뿐.
“어떠냐? 기분 좀 풀리지?”
넌지시 반응을 탐색하자, 대부분이 어깨를 으쓱하며 긍정한다.
“그건 모르겠고 조금 동기부여는 되네요.”
“나쁘지 않았어요.”
“의외로 응원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길가에 쓰레기가 조금 많아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시간임은 부정하기 힘들었습니다.”
조금 이상한 반응이 섞였지만 넘어가자. 잭 해리슨. 쟨 나로서도 이상한 애라.
“그래 그러면 됐다. 다들 느꼈을 거야. 이래저래 경기장 안에서는 맨날 욕만 하는 사람들이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다르다는 걸. 누구보다 너희들을 믿고 응원하지.”
“···.”
“프로축구선수가 된 이유는 각자 다를 거야.”
그저 유명해 지고 싶어서.
그저 돈을 벌고 싶어서.
그저 어쩌다 보니까.
저마다 오리진, 근원은 다르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우리가 공놀이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야. 서포터지. 펜 하나 만들지 못하는 우리가 누군가의 신앙이 된다는 거. 이건 전부 다 우리를 응원하며 비판하는 서포터 덕분이다. 무슨 일이 닥쳐도 이 사실만 잊지 마라.”
“···네.”
짜식들. 이럴 땐 좀 우렁차게 대답하면 덧나나? 대답 소리 봐라. 하여튼 싹 다 군대 보내야 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행동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참아야겠지.
이번 산책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사기의 고취.
둘째는 서포터의 관심.
개막을 앞두고 사기를 끌어 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정신론을 예찬하진 않지만, 멘탈리티가 경기력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리.
그리고 생판 남이 암만 설교해봤자, 자신이 느끼지 못하면 그저 개소리일 뿐.
이번 일로 오리진을 떠올린 선수들은 당분간 사기가 크게 오를 거다.
덤으로 서포터의 관심도도 상당히 올랐다.
조금 전, 에밀리아를 통해 보고받은 SNS 및 티켓 판매량은 긍정적이다.
-와. 선수들이랑 이야기했어요.
-조쉬 킹, 생각보다 훨씬 착하더라.
-도슨과 해리슨은 쓰레기를 줍고 다니더라고. 축구도 잘하고 인성도 괜찮네.
-승격하기 전까지 포츠머스가 똥볼 차는 거 안 보려고 했는데, 개막전 티켓을 사버림.
-그래, 딱 한 번만 더 기대해본다.
멈췄던 개막전 티켓 판매량은 눈에 띄게 상승곡선을 탔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서양이든 동양이든 사람들은 정에 약하다.
선수들이 직접 돌아다니며 소통하자 얼어붙은 마음이 녹았을 터.
‘대참사는 막았어.’
홈 개막전에 관중석이 비는 대참사는 미리 방지했다. 전에는 30%나 비어 굉장히 곤혹스러웠거든.
“그럼, 이참에 주장이나 뽑아보자.”
말을 꺼내자, 전과는 다르게 눈빛이 달라진다.
역시, 정이 가지 않는 놈들이야.
일단 후보는 정해놨다.
케빈 도슨과 잭 해리슨. 그리고 가장 연장자인 말콤 우드와 전 주장이었던 찰스 말로리.
사실 누구를 선택해야 결정하기가 힘들었다. 어제까지는.
확 끌리는 선수가 없었다. 일단 주장이라 하면 성깔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데, 모두 순둥순둥하다.
그렇다고 성깔만 더러운 녀석을 뽑을 수도 없고. 꽤 고민이었다.
“클럽 주장은 케빈 도슨이다. 그리고 바이스 캡틴은 잭 해리슨.”
결정은 굳히게 된 건 조금 전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모범생과 젊은 꼰대.
이 둘은 나에게 오랜만에 신선함을 선사했다.
특히 잭 해리슨. 이 젊은 꼰대는 손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손을 들고 말이다!
저 나이 먹고 저걸 하다니.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다. 각자 봉투 하나 들고 길가의 쓰레기를 줍고 다녔다.
이때 받은 내 충격이란.
오랜만에 두 눈의 기능에 의심이 갔다.
“으아. 아, 안돼!”
주장을 발표하자 킹이 울부짖었다.
뭐지? 왜 저래 쟤. 다른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이는데 무엇이 불만일까?
“저 두 선배 너무 꽉 막혔다고요! 잔소리를 얼마나 하는지. 아. 숨이 턱턱 막히네.”
“그래서 뽑은 건데. 너 괴롭히려고.”
“정말 너무 하시네요. 저 선배들 맨날 클럽하우스 쓰레기 주우라고 귀찮게 한단 말이에요.”
“그거야 네가 땅바닥에 갖다 버려서 그런 거 아니야.”
“앗. 어떻게 아셨죠.”
“안 봐도 뻔하니까.”
난 매정하게 조쉬 킹을 외면하고 새로운 주장과 부주장을 바라봤다.
“잘 부탁한다. 지금처럼만 해. 아주 재미있으니까. 너무 신선해.”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제 주장이 되었으니 조금 더 솔선수범해서 팀의 기강을 확립하도록 하겠습니다.”
“감독님다운 훌륭한 인선이라고 판단됩니다. 모름지기 프로란 프로다워야 하는 법. 앞으로도 프로로서의 규칙과 마음가짐을 단단히 설파하겠습니다.”
“···.”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다.
이 정도면 오히려 성질이 더러운 거 아닐까?
앞으로 재밌겠어.
임명이 끝나자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눈을 돌려보니 찰스 말로리가 편안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다.
그 미소를 따라 나도 미소를 지었다.
-그래. 무거운 짐은 이 이상한 놈들에게 넘겨줄게. 그러니 넌 축구선수로서 황혼기를 불태워라.
-감사합니다. 감독님.
말을 주고받진 않았지만, 그와 나는 서로를 이해했다.
3.
리그 프레스 컨퍼런스.
시즌을 앞두고 각 팀의 감독과 주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자 회견을 가지는 자리.
쉽게 생각하면 그냥 홍보다.
경기 많이 봐주세요, 라던지.
우리가 승격할 거야, 라던지.
강등은 너희야, 라던지.
홍보와 더불어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게 주목적이다. 이래저래 스포츠는 스토리가 있어야 더욱 재밌는 법이니까.
“아오. 불편해.”
꽤 격식 있는 자리라, 오랜만에 입은 정장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마음 같아선 운동복을 입고 싶었지만, 욕먹기 싫어서 꾹 참았다.
분명,
-잠옷을 입고 나타난 젊은 감독. 신세대의 자기표현인가?
-감독의 서민 흉내. 흔한 정장 한 벌 사 입지 못한다며 동정심을 유발해.
-개념을 벗고 온 아시안.
이런 개소리를 지껄이겠지.
상상만 해도 부정맥이 온다.
“감독님. 정장이 잘 어울리시는군요. 앞으로 이런 모습으로 지휘하시길 기대합니다.”
같이 참가한 주장 도슨이 무미건조한 칭찬을 건넸다.
그의 언어 구사력으로는 상당한 극찬이겠지만, 눈치는 조금 챙겨줬으면 좋겠다.
“싫어. 이거 불편해.”
“서포터들의 평가도 달라질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조금의 불편함 정도는 감내해야 하는 자리가 감독이지 않습니까?”
“네가 아직 잘 모르는구나. 정장 빼입고 경기에서 지면 겉멋만 들었다고 욕할걸? ‘옷을 입는 시간에 전술 공부나 더해라’라면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발 물러났다. 하기야, 자기가 생각해도 충분히 생길만한 일일 테지.
“감독님에게 말을 거는 다른 감독님들이 없군요. 그럼 먼저 나서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
웃음꽃이 남발하는 자리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뷔페 음식이나 먹자, 도슨이 신경을 긁었다.
킹의 울부짖음이 조금 이해가 되는걸. 정론이지만 은근히 꼴 받네.
“어차피 다 경쟁자들이야. 친해져서 뭐 하게.”
말은 이렇게 했지만, 과거에는 어떻게든 친해져 보려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었다.
선배에게 배우는 노하우야말로 어떠한 교과서보다 뛰어난 법이었으니까.
“선배 감독에게 팁이라도 배우면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더 잘해.”
“물론 감독님이 매우 뛰어나십니다. 그래도. 배움은 끝이 없는 법입니다.”
“···실수했어. 차라리 킹한테 주장 자리를 줬어야 했는데···.”
“네?”
“아니야. 아니, 근데 말이야. 넌 왜 다른 선수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나한테 붙어있냐?”
“···친한 선수가 별로 없습니다.”
묘하게 축 처진 어조다.
이해는 된다. 이런 녀석하고 친하게 지낼 선수가 몇이나 있을까. 해리슨 정도가 아니고서야. 감히 엄두도 못 내겠지.
“어차피 놀러 온 건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그래도 내 새끼인지라 나름대로 건넨 위로는 끝을 맺지 못했다.
예상외의 방해꾼 때문에.
“오. 요즘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킨다는 성 감독님이시군요.”
느글느글하며 사람을 깔보는 듯한 재수 없는 목소리.
아! 기억났다.
적은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 018화. 홍보와의 전쟁. (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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