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5화. 신입생과 쥐새끼. (4) >
1.
사람이 너무 많아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기가 힘들다.
‘브라이언과 저 모자 쓴 사람은 뭐지?’
브라이언의 사무실 앞에서 두 남자가 실랑이를 벌인다.
소하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고 자연스럽게 인파에 스며든다.
-스르륵.
원래부터 구경하던 사람 같다.
목격자가 있었다면 ‘퍽킹 닌자’라고 인종 드립을 내뱉었을 움직임!
다행스럽게도 너무 자연스러워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무슨 일이에요?”
“앗! 감독님!”
홍보팀의 신입사원, 에밀리아 존슨은 소하의 물음에 화들짝 놀란다.
언제 옆으로 다가왔을까? 인기척도 없어,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너무 가깝다.
얼굴에 슬며시 홍조가 피어오른다.
‘이렇게 가까이서 뵙는 건 처음이야···. 잘생겼어.’
가까이서 보니 정말, 잘생겼다.
서구권의 한류 팬 1세대라고 자부하는 그녀 아니던가.
그녀의 취향은 동양권 꽃미남.
영국에서 소하만큼 그녀의 취향에 부합하는 인물도 없었다.
‘심지어 능력도 출중해···.’
지난 3주간, 이 잘생긴 푸른 눈의 젊은 감독은 모두의 상식을 깨부수며 질주했다.
수준 높은 코칭과 전술안.
방송가 출신이라도 한 수 접을 거침없는 미디어 핸들링.
하루도 선수들과의 개인 면담을 빼먹지 않는 열정.
미래를 보는 것만 같은 통찰력.
단순한 감독직을 넘어 스포팅 디렉터의 역할까지 모조리 소화한다.
그것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같은 사회초년생일 텐데···. 괴물이야.’
말 그대로 괴물.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덕분에 나이를 막론하고 구단 내 모든 여성 직원들에게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는 소하였다.
능력과 외모를 모두 가진 남자에게 호감을 품지 않는 여자는 없었으니까.
정작 당사자인 소하는 아무런 눈치도 못 채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뭐야? 왜 얼굴이 빨개? 숙취가 덜 풀렸나? 하여튼 이 망할 놈의 구단. 멀쩡한 직원이 없어.’
이상한 방향으로 오해까지.
에밀리아가 들었다면 피눈물을 흘렸을 생각.
그 사실을 모르는 소하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댄다.
“쉿. 조용히 하세요.”
“아, 네. 쉿.”
“무슨 일이에요?”
“그게 말이죠···.”
잠시 뜸을 들이는 에밀리아.
소하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드디어 범인이 잡혔어요.”
“범인이요?”
“감독님도 아시지 않나요? 요즘 계속 정보가 새어갔잖아요. 정보를 언론에 몰래 팔아넘긴 사람이 드디어 잡혔어요.”
“오! 씹어먹을 브라이언, 그 씹새끼가 자수라도 한 건가요?”
“네? 누구요?”
“아, 아니에요. 못 들었으면 됐어요. 그래서, 범인은 누군데요?”
소하가 얼굴을 들이밀며 물어보자, 얼굴이 더더욱 빨개지는 에밀리아.
두근두근.
심장이 거칠게 요동친다.
“그 있잖아요? 청소부이신 핀리 보먼 씨가 범인이래요!”
“네?!”
소하는 얼굴을 구겼다.
전혀 상상치 못한 제3의 인물 아닌가.
핀리 보먼.
당연히 아는 사람이다.
회귀 전에도 10년간 근면 성실하게 근무했던 직원이니까.
소하가 아는 청소부 보먼 씨는 골수 포츠머스 팬이라 돈을 줘도 구단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말도 안 돼요. 보먼 씨는 3대째 포츠머스 팬이신데.”
“와···. 그런 것도 아시는군요?”
“감독으로서 당연한 거죠.”
“아, 그렇군요.”
에밀리아는 혀를 내둘렀다.
선수는 물론, 직원의 신상까지 암기하다니. 젊은 나이에 성공하려면 저 정도는 기본인가 보다.
“정확히 어떻게 된 거죠?”
“보먼 씨가 사장실의 문을 따고 들어가서 중요자료를 훔쳐보는 것이 카메라에 찍혔대요.”
“엥? 카메라요? CCTV? 우리 회사에 그런 거 없잖아요.”
사무실 내에 CCTV이라니.
사생활 침해로 구단이 징계 먹을지도 모르는 위법이다.
“당연히 없죠. 근데, 어제 사장님이 첩자를 잡기 위해서 사장실에 임시로 몰래 소형카메라를 설치해두셨대요.”
“···.”
“그리고 그 영상에서 딱! 보먼 씨가 문을 열고 들어와 사장님의 책상을 뒤지는 모습이 찍힌 거죠.”
“···킁킁. 뭔 구린내 안나요?”
“네?”
“아니에요.”
썩은 구린내가 물씬 풍기는 사건의 자초지종이었다.
킁카. 킁카.
30km 행군 뒤에 맡는 발 냄새랄까.
콧속이 뻥 뚫린다.
소하는 코를 움찔거리며 잠시 머리를 굴려본다.
답은 쉽게 나왔다.
그냥 개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군. 보먼 씨는 사장실 열쇠가 없어. 그리고 브라이언은 항상, 적어도 내가 아는 10년간 단 한 번도 사장실 문을 잠그지 않고 퇴근한 적이 없다. 심지어 예비 열쇠도 없지.’
기억이 생생하다.
거의 편집증 환자처럼 사장실 문을 잠그던 브라이언의 모습이.
실수로 문을 잠그지 않고 그냥 퇴근하면 돌아와서라도 꼭 문을 직접 잠그는 정신병자였다.
‘어제 쥐새끼라는 말을 듣고 먼저 움직였군.’
시기가 공교롭다.
쥐새끼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소형카메라를 사서 설치하고, 바로 당일에 범인이 찍혔다? 거기에 전 직원이 구경하는 장소에서 소란스럽게 밝히기까지?
3류 콩트만도 못하다.
미리 준비해둔 거겠지. 역겨운 연극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은,
‘어째서 보먼 씨가 브라이언과 손을 잡고 오욕을 뒤집어쓴 거지?’
소하의 가설은 보먼이 협력했다는 전제가 깔려야 한다.
금전적 이유인가? 가장 그럴싸한 원인이었지만 알아보기는 힘들다.
그는 그저 감독일 뿐.
탐정 놀이를 할 재능도 없고 시간도 부족하다.
“보먼 씨. 매우 실망입니다.”
보먼을 책망하는 브라이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떨리는 음색에는 분노가 스며들었다.
“사장실에 들어와 정보를 빼내다니. 당신이 그 정보를 언론에 흘렸습니까?”
얼핏 진심으로 화가 난 모습. 대단한 연기력이다. 소하가 미래의 경험으로 브라이언이란 사람의 습관을 몰랐다면 껌뻑 속았을 거다.
‘시발럼. 오스카상 급이구먼. 디카프리오보다 먼저 오스카상 받겠어.’
대단한 연기력에 구토가 올라온다.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한편의 희극을 바라보는 소하.
역겨운 연극의 결말을 구토감을 참으며 지켜본다.
“죄, 죄송합니다.”
“이건 엄연히 소송감입니다. 하지만···. 그간 헌신적으로 맡은 바 직책에 최선을 다한 바, 해고로 끝내겠습니다. 불만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너그러운 처벌에 감사드립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구는 핀리 보먼.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린다.
“어떻게 이런 일이···. 너무 안타까워요.”
에밀리아는 이 애처로운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말 그대로 어떻게 이런 일이네요. 정말 놀라워요.”
“역시 감독님도 놀라셨군요.”
“···뭐, 그렇죠.”
소하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저 정도의 인간이었을 줄이야. 생각보다 더한 놈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인파를 헤치고 달려가 토네이도 DDT를 브라이언에게 꼽아버리고 싶다.
“이번 사건은 모두 엠바고입니다. 만에 하나 이번 일이 외부에 흘러나간다면 어떻게서든 잡아내어 법의 심판을 받게 할 겁니다.”
“···.”
“그리고, 비록 순간 잘못된 판단을 했지만 그간 구단을 위해 헌신한 핀리 보먼 씨에 대한 험담도 금지하겠습니다. 시즌 시작을 앞둔 지금,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하니까요.”
브라이언은 일장 연설을 펼쳤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애절한 마음이 절절히 퍼진다.
거의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치던 제갈량이 현신한 모습이다.
‘역겨운 새끼.’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역겨운 자작극의 끝은 역시나 역겨웠다. 저 발언으로 브라이언은,
‘직원을 존중하는 이미지’
‘공을 위해 사를 내치는 이미지’
두 가지 이미지를 얻는다.
이는 희미해져 가는 브라이언의 존재감을 뽐낼 뿐만 아니라 그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효과를 가져다줄 터.
요즘 잠잠하다 싶었는데, 한 방 제대로 얻어터진 소하였다.
“역시, 저희 사장님이 인간미가 넘치시죠. 이 자리가 아니었다면 눈물을 흘리셨을 거예요.”
에밀리아가 빠르게 반응했다.
브라이언의 노림수가 제대로 먹혔다는 증거였다.
소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눈물을 흘리긴 하겠죠.”
기쁨의 눈물이겠지만.
소하는 부글부글 끓는 속마음을 간신히 숨기며 브라이언은 노려봤다.
-째릿.
순간, 브라이언과 눈이 마주치는 소하.
흔들림 없는 눈동자.
맑고 투명한, 한 줌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소하는 자신의 추리를 확신한다.
그리고.
아주 찰나의 시간,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눈.
저건 눈웃음이다.
분명히. 저 눈은 잠시나마 웃었다.
‘개새끼가.’
욱해서 욕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왜?’
쥐새끼의 정체는 브라이언이 확실하다. 그러나. 진짜 목적을 모르겠다.
왜 정보를 누설했는지.
왜 하필 핀리 씨인지.
“장두노미. 그저 기다릴 수밖에.”
“네? 그게 무슨말이죠? 장쥬로미?”
소하의 중얼거림을 들은 에밀리아가 어눌한 발음으로 따라했다.
“장.두.노.미. 사자성어에요.”
“아하. 중국의?”
“네. 진실은 감추어도 언젠간 밝혀진다는 뜻이죠.”
“아하. 좋은 거 배워가네요. 지금 상황과 어울리네요. 진실은 결국 밝혀졌으니까요. 그럼 이제 사건도 일단락되었으니, 전 일 하러 가봐야겠네요. 할 게 너무 많아요.”
에밀리아는 책상의 서류뭉치를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손이 부족해 업무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
“아, 에밀리아 씨.”
“네넷?!”
소하가 붙잡자 화들짝 놀란다.
“이따가 점심 드시고 제 사무실로 와주세요. 긴히 할 말이 있으니까.”
“···.”
갑작스러운 제안에 에밀리아는 순간 뇌 정지가 왔다.
할 말이라니. 할 말이라니!
말단직원인 자신과 나눌 업무 이야기는 없을 터. 즉, 개인적인 볼일이란 말인가!
“무, 물론이죠. 꼭 갈게요.”
“···?”
상당히 들뜬 에밀리아.
소하가 뚱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미 머릿속은 온갖 망상에 절여졌으니까.
2.
에밀리아는 역대급으로 체감시간이 긴 오전 근무를 보냈다.
어찌나 시간이 느리게 가던지.
자기도 모르게 말년병장 체험을 한 에밀리아는 점심도 후다닥 해치웠다.
그리고 달려간 곳은 화장실.
수십 분간 풀메이크업을 마친 그녀는 조심스럽게 감독 사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깔끔한 사무실이 그녀를 반긴다. 아니, 깔끔하기보다는 썰렁하다.
흔한 화분 하나 없어 삭막한 느낌마저 든다.
“앞에 앉으세요.”
“네.”
“에밀리아 존슨, 나이 24세. 입사 두 달 차. 담당은 온라인홍보. 맞죠?”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질문하는 소하.
그 무덤덤한 모습에 조금 실망한 에밀리아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대답한다.
“네. 정확하시네요.”
“감독이니까요.”
“아, 그럼 업무 때문에 절?”
“음?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 그쵸···.”
소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에겐 저런 모습이 익숙했을 뿐.
잘생긴 남자.
흔히들 존잘남이라 불리는 타입.
그에게 에밀리아 같은 젊은 여자의 반응은 항상 보던 일상이었다.
평범한 일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보니까, SNS 관리를 굉장히 잘해주시고 있더군요.”
싱긋 웃으며 칭찬하는 소하.
이 미소는 익히 누군가를 부려 먹기 전에 짓던 썩은 미소다.
불행히도 에밀리아의 눈에는 세상에 다시없을 멋진 미소였지만.
“앗. 감사합니다. 제, 제 일인걸요.”
“자기 일이지만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이 널리고 널린 세상이잖아요. 자부심을 가져도 돼요.”
“헤헤. 그, 그렇군요.”
“그런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랑 일 하나 같이 해보실래요?”
그런 의미는 뭘까. 소하만 아는 의미였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일 이야기에 에밀리아가 이성을 되찾는다.
“이, 일이요?”
떨리는 목소리.
겁에 질렸다.
지금도 하는 일이 엄청나게 많은데 여기서 또 일이 추가된다면?
지옥. 그 자체겠지.
“후후. 걱정하지 마세요. 저의 제안을 받아주신다면 다른 쓸데없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소하의 목소리는 악마의 유혹이 따로 없다. 악마의 속삭임을 이겨내며 잠시 고민하는 아멜리아.
이내, 깨달음을 얻는다.
‘잠깐. 같이? 같이라고?’
기껏 되찾은 이성이 저 멀리 콩고민주공화국까지 날아간다.
“알겠어요. ‘같이’ 해보죠!”
“보기보다 호쾌하시네요. 후후후. 마음에 들어요. 아주 마음에 드네요.”
“헤헤. 그럼 어떤 일을 같이하시려고 하는 거죠?”
“너튜브···라고 아시나요?”
“그럼요. 요즘 너튜브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최근 가장 빠르게 성장 중인 비디오 플랫폼이잖아요?”
역시, 정보미디어학과 출신이라 상세히 알고 있다.
“알고 계시는군요. 이야기가 잘 통하겠어요. 후후.”
“···도,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
흠칫.
에밀리아는 소하가 자꾸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자, 밀려오는 불안감에 한차례 몸을 떨었다.
그녀가 아는 소하는 할 말을 빙 돌리지 않고 직진으로 박는 남자.
도대체 어떤 일이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저랑 유튜브 채널 하나 개설하죠.”
소하의 제안에 에밀리아는 눈앞에 잠시 근로 지옥이 펼쳐지는 아찔함을 맛보았다.
< 015화. 신입생과 쥐새끼.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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