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13화 (13/306)

< 013화. 신입생과 쥐새끼. (2) >

1.

포츠머스.

잉글랜드 남부 햄프셔주의 항구도시.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군항을 건설한 이후로 수백 년간 잉글랜드의 중요한 해군기지를 맡은 도시였다.

이토록 역사가 깊은 도시지만 의외로 오래된 건물은 별로 없다.

이유는 한 가지. 세계 2차대전.

루프트바페의 무차별적인 공습으로 작살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군 관련 시설 때문에 주요 관광지로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도시다.

“흐음.”

포츠머스 중심가에 위치한 고급식당의 귀빈실에서 한 노인이 누군가를 기다린다.

노인의 이름은 리처드 맥닐.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속담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사업가다.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농장에서 도망칠 때만 해도 손가락질을 받았거늘. 지금은 영국의 농수산 유통업을 손아귀에 쥔 거부이자 포츠머스 FC 소유주다.

“아! 미리 와 계셨군요.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허허. 나도 방금 왔다네. 앉게나.”

검은 머리의 푸른 눈을 가진 청년이 얼굴을 보이자 맥닐은 눈가에 작은 주름을 만든다.

다른 이가 봤다면 놀랄 일이다.

맥닐이라 하면 철혈의 재상이라던 비스마르크에 비견되는 인물.

그의 눈웃음을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일주일 만에 뵙네요. 구단주님.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더 좋아지셨어요. 한 3개월쯤 젊어지신 거 같은데. 좋은 거 있으면 좀 나눠주시죠.”

생글생글 웃으며 농담은 건네는 검은 머리의 청년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 맥닐에게 저리도 친근하게 굴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맥닐이 풍기는 특유의 위압감에 주눅이 들었겠거늘. 여간내기가 아님은 틀림없다.

“허허. 따로 챙겨 먹은 건 없다네. 그저 요즘 자네가 만들어낸 좋은 소식 덕분이라네.”

“제 업무 처리가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다행이에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마음에 들었다네. 기대만큼 잘해주었네.”

“기대를 꽤 많이 하셨나 보네요. 보통은 기대보다 많이 해줬다고 하지 않나요? 하하.”

검은 머리의 청년, 성소하는 너스레를 떨었다.

“내 기대를 올린 건 다름 아닌 자네라네. 취임식 기자회견에서 3년대로 프리미어 리그로 가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기대치가 높아질 수밖에 없지.”

풍성한 흰 수염을 매만지며 인자한 미소를 짓는 맥닐.

성소하의 폭탄선언에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거. 이거.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전 오늘 불호령을 내리실 줄 알았거든요.”

“실패한다면 그렇겠지.”

맥닐은 눈빛을 빛냈다. 불호령은 아니겠지만 주저함 없이 백수 신세로 만들 심산이다.

“큼큼. 눈빛이 부담스럽네요.”

눈빛의 의미를 이해한 성소하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미래를 아는데도 이토록 상대하기 까다롭다니. 정말 만만찮은 노인네가 아니라며 혀를 내두른다.

“긴장하지 말게나. 당분간 자네의 자리는 굳건할 테니. 거는 기대가 크다네. 가장 어려울 거라 생각한 선수단 장악을 쉽게 끝마쳤다는 건 상정 외였네.”

“이제 겨우 관계라는 다리를 놓은 것뿐이에요. 보수공사는 한참 걸릴걸요.”

“그렇겠지. 그리고 아직 시한폭탄이 많이 남았으니 힘들 나날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네.”

“···생각 이상으로 구단 상황을 잘 알고 계시는군요?”

이번에는 성소하가 눈을 빛냈다.

이것은 브라이언의 보고로는 알 수 없는 사실. 어떻게 알았을까.

잠시 생각해보자 답은 하나였다.

“브라이언은 그저 수족이라네. 눈은 따로 둬야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쉽지.”

맥닐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이렇게 빨리 밝힐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영특한 청년은 금방 알아낼 것이 뻔했다. 이럴 땐 숨기는 것보단 밝히는 게 이득.

“구단에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난 사업가라네. 투자상품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호오. 그러시단 말이죠?”

성소하는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슨 꿍꿍이일까 싶지만, 맥닐은 이미 그의 속셈을 눈치채고 있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게.”

“어이쿠야. 어떻게 아셨죠?”

“처음 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날 바라보는 눈빛이 뭣 좀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것 같더군. 주지 않으면 때릴 기세였어.”

“하하···하. 서, 설마요.”

비지땀을 흘리는 성소하.

‘궁예야? 관심법이라도 쓰나. 눈만 보고 사람 속마음을 훤히 내다보네. 미륵보살 납시셨어.’

불경한 속마음을 숨기며 애써 미소를 짓는다. 사업 운운하면서 돈 좀 뜯어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역시 돈이겠군. 그렇지 않은가?”

“이거 완전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행자였네요.”

“무슨 뜻인가?”

“구단주님 손바닥 위인 줄도 모르고 탭댄스 췄다는 이야기에요.”

“허허. 너무 자책하지 말게나. 살아온 시간과 여정이 다르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정말 독특한 편이라네.”

맥닐에겐 성소하는 아주 독특하고 흥미로운 청년이었다.

분명 자신의 반도 살지 않은 어린 친구일 텐데, 종종 드러나는 행동은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 본 자의 그것이었다.

몰래 뒷조사를 해보았지만, 과거는 평범 그 자체. 그저 많고 많은 사회초년생에 불과했거늘.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독특하긴요. 그냥 어렸을 때부터 이 길만 걸었기 때문이죠.”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심드렁하게 대꾸하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지 않는다.

강렬한 눈빛을 잠시 맞받아주던 성소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본론으로 들어간다.

“얼마까지 주실 거예요?”

“벌써 준다고 못을 박았군.”

“주실 생각이 없으셨다면 굳이 먼저 대화를 꺼내지 않으셨겠죠. 가장 소중한 자원인 시간을 투자하셨으니 끝을 보시겠죠.”

“허허허. 자네는 나를 나 자신만큼 잘 파악하는군. 그래, 얼마를 원하는가?”

“20만 파운드. 어때요? 솔직히 이 정도면 구단주님한테는 코 묻은 돈이잖아요. 한 달 밥값 정도?”

코 묻은 돈이라. 한화로 3억이란 금액은 맥닐에게 푼돈이긴 했다.

“알겠네. 생각보다 적은 금액이라 의외로군. 적어도 100만 파운드는 요구할 줄 알았네.”

“···그, 그럼.”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닐 거라고 믿고 있네만. 자네 생각은 어떤가?”

“무, 물론이죠. 20만 파운드. 알뜰살뜰 야무지게 써볼게요. 하하···.”

썩은 미소를 지으며 뒤통수를 긁는 성소하. 오랜만에 맛본 완패에 속이 부글거렸다.

2.

-짜릿한 역전승! 성소하 감독의 비전을 엿보다!

-그동안 포츠머스의 축구는 축구가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축구’.

-성소하 감독의 전술을 알아보자.

다음 날, 역전승에 환호하는 기사가 물밀듯이 쏟아져나왔다.

비록 친선 경기였지만, 오랜만에 맛본 역전승과 공격축구에 서포터들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엔도르핀을 분출시킨 멋진 경기는 꽤 많은 수의 추종자를 양산했다. 하지만,

-성소하 감독의 임대영입 목표인 델리 알리는 누구인가?

-포츠머스가 노려볼 만한 임대 대상.

-17세 어린아이를 영입하려는 성소하 감독의 무모함.

-꼬마는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구단 재정 상황은 얼마나 심각할까?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존재하는 법.

성소하가 내뱉은 몇몇 정보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구단 재정 상황은 이해한다 치더라도, 17세의 어린이를 임대하려는 감독의 의중을 모르겠다는 세간의 평가였다.

‘후후.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들.’

반면 성소하는 여유만만했다. 어차피 알리는 13-14시즌, 그러니까 올해부터 두각을 보이는 대형 유망주였으니까.

실패할 가능성은 제로.

어차피 찬사로 바뀌게 될 비난에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새로운 영양관리사의 영입. 작은 구단에 두 명이나 필요한 이유는?

-무명의 영양사를 영입한 배후에는 신임 감독의 강한 입김이 존재했다.

-휘청거리는 성소하 감독의 행보.

새로운 영양관리사의 영입도 정보가 흘러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물론 반응은 최악. 오프라인은 어느 정도 예의를 차렸지만, 온라인은 매웠다.

-감독 전용 영양사임?

-돈도 없다면서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네. 성재앙.

-중화요리라도 땡겼나?

└중국인이라던데?

-강등당한 새끼들한테 얼마나 잘 처먹이려고 하는 건지. 그냥 굶겨!

익명성이란 방패 뒤에서 독설을 쏟아내었다.

‘시발. 영국인이기도 한데. 이 새끼들은 뭐만 하면 중국인이래.’

성소하는 그저 다른 곳에서 불만을 가졌을 뿐. 다른 의견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일주일 만에 선수들의 성장데이터가 눈에 띄는 변화를 보였기 때문.

구단 내부에서는 이미 최고의 영입이라고 칭찬하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자꾸 내부 정보 흘리는 쥐새끼를 검거해야 하는데.’

자꾸만 정보가 샌다.

어느 정도 성과가 나왔을 때 공식적으로 발표하려고 했거늘. 숨어있는 쥐새끼 한 마리 때문에 욕부터 먹었다.

암만 욕에 익숙하더라도 결코 달갑지 않은 일.

하지만, 미래를 알지라도 쥐새끼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회귀 전에도 밝혀내지 못했으니까.

‘잡아내고 만다. 더러운 쥐새끼야.’

첩자의 존재는 훗날 있을 영입 작전에도 큰 장애물이다. 비밀리에 진행하던 영입이 까발려진다면, 가격이 오를지도 몰랐다. 최악에 경우에는 하이재킹을 당할지도.

‘그렇다면 덫을 놔야겠지.’

쥐새끼들 잡는 방법은 단순하다.

덫을 쳐두면 될 뿐.

꽤 영리한 놈이겠지만 외면하기 힘들 정도로 먹음직한 미끼라면, 놈은 물 거다.

3.

7월의 마지막 날.

성소하는 평소처럼 아침 신문과 커피를 양손에 나눠 들고 집무실의 의자에 몸을 맡겼다.

“후후. 그래그래. 날 숭배하거라.”

신문을 읽으며 썩은 미소를 짓는 성소하.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비열함이 한가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문의 일면엔 그에 대한 찬양 일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친선 경기 무패! 끝도 없이 팽창하는 성소하 사단의 기대감!

-무적군단 포츠머스. 친선 경기를 제패하다. 이 기세로 승격까지.

-점점 완성되어가는 성의 축구.

5경기나 잡혀있던 모든 친선 경기를 패배 없이 마무리했다.

총 4승 1무의 압도적인 성적.

“친선 경기 가지고 무적군단은. 너무 설레발 아닌가. 헤헤.”

말과 얼굴이 다르다. 아주 입이 귀에 걸렸다. 빨간 마스크가 따로 없달까.

지난 10년간 욕만 얻어먹었던지라, 이런 일방적인 칭찬에는 면역이 없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2주간 끌어왔던 델리 알리의 임대영입 협상이 마무리되는 날이다.

‘생각보다 힘든 협상이었어. 로빈슨 감독. 생각보다 훨씬 더 만만찮은 사람이군.’

솔직히 순수한 호감을 이용하는 것이 약간 양심에 찔렸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임대 이야기가 오가자 미약한 양심의 가책은 눈이 녹듯 사라졌다.

-알리는 우리 구단의 최고 유망주입니다. 그에게 경험이 필요한 건 맞지만 임대를 보내지 않더라도 가능합니다.

일말의 여지도 없는 단호한 거절.

나쁜 시작이었지만 성소하는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렇다면, 최소한 10만 파운드는 주셔야 가능합니다. 여기서 더 이상의 협상은 없습니다.

리그1 선수를 10만 파운드로 임대하라니. 쉽게 말해 꺼지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난 꺼지지 않는 남자.’

성소하는 포기하지 않았다.

프런트는 너무 비싸고 불확실한 선수라고 결사반대를 했지만 소하는 쿨하게 10만 파운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몇 가지를 덧붙이긴 했지만.

[10만 파운드의 임대료와 주급 100% 부담. 경기 출장 수 80% 이상과 완전 이적 시 100만 파운드의 이적료]

최종적으로는 리그2 역사에 남을 거대한 규모의 임대로 합의가 끝났다.

‘꽤 무리했지만, 완전 이적 조항을 넣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500만 파운드짜리 선수를 100만 파운드에 가져올 절호의 기회. 400만 파운드를 아끼려면 무리를 할 수밖에.

구단주의 호감도가 괜찮은 지금. 승격만 한다면 100만 파운드 정도는 지원해 줄 거라는 철저한 계산도 들어가 있었다.

그대로 구단 레전드로 키워도 이득이었으며 팔아도 수십 배의 이윤을 남길 기적의 협상이었다.

“쥐새끼 때문에 일이 꼬일뻔했지만.”

임대 협상은 나름대로 보안을 엄수하며 세부 사항을 조정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협상의 진행 정도가 다음 날 지역지의 1면을 장식했다. 정말 미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덕분에 몇몇 다른 구단이 관심을 보여 아예 파투가 날 뻔했으니, 성소하의 분노가 골수까지 치밀었음은 당연지사.

“개 쌍놈의 새끼.”

바득바득 이를 가는 성소하.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불순분자를 솎아 낼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비밀리에 진행한 또 하나의 영입.

‘앤디 로버트슨’.

훗날 리버풀에서 재능을 만개해 월드클래스 윙백으로 성장하는 선수였다.

자유계약 신분의 보석을 버려둘 순 없지 않은가.

“잡아서 족쳐주마.”

잔뜩 찡그리고 있던 소하의 얼굴에 순간, 무시무시한 미소가 걸린다.

이로써 덫의 설치가 끝났다.

남은 건, 사냥감이 먹이를 물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 013화. 신입생과 쥐새끼.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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