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12화 (12/306)

< 012화. 신입생과 쥐새끼. (1) >

1.

“훌륭한 경기였습니다. 성소하 감독.”

MK돈스의 감독, 칼 로빈슨이 악수를 청했다. 33세의 나이로 영국에서 가장 어린 감독이다. 아니, 이었다. 내가 부임하기 전까지.

머지사이드 출생으로 후덕한 인상의 그는 나와 과거에 여러 번 대결을 펼쳤었다.

처음엔 무참히 발렸지만, 슬슬 따라잡아 갈 때쯤 경질당해 도망간 남자다.

도망 당한 남자랄까.

“멋진 승부였어요.”

내민 손을 겸손하게 맞잡았다.

꽤 괜찮은 사람이다.

딱 한 가지, 나를 이긴 다음에 경질로 도망쳐버렸다는 점만 빼면.

적어도 복수할 기회는 줬어야지!

“팀을 잘 준비했더군요. 내년에 포츠머스를 ‘리그’에서 만나게 되길 기대합니다.”

“후후. 저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도전하도록 할게요.”

“저도 이번의 패배를 만회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현 잉글랜드 최연소 감독이라는 타이틀은 꽤 무거울 겁니다. 언제든 조언이 필요하다면 연락하십시오.”

싱긋. 역시 좋은 사람이야. 난 자고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신조다. 우리 프런트처럼 좆같이 굴면 똑같이 좆같이 굴어주지만 이런 사람은 예외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겠지.

“네. 부담 없이 선배 감독님의 조언을 받아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큼큼. 기탄없이 말해주십시오.”

내가 이렇게 바로 물어올 줄은 몰랐는지 살짝 당황한다.

하기야. 나였어도 ‘이 새끼 뭐지?’ 이 생각이 절로 들었을 거다.

“델리 알리 선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아···. 음. 훌륭한 잠재력을 가진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주전으로 기용하실 생각이신가요?”

“그건 아직 정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경기에 자주 뛴다면 급성장할 선수라고 믿습니다.”

“그러셨군요. 잘 알겠습니다. 답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었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난데없는 질문에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로빈슨은 정중하게 작별을 고했다.

좋아. 대충 떡밥을 던질 각은 보였군. 그럼 바로 떡밥을 던져볼까.

2.

비록 친선 경기였지만, 짜릿한 역전승에 흥분한 선수들을 칭찬하고 다시금 기자들 앞에 섰다.

이 망할 놈의 기자회견. 감독 생활 내내 따라다니는 귀찮음의 화신이다.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참 악몽이 따로 없다.

“짜릿한 역전승이었습니다! 과감한 전술 변화와 교체가 인상적이었어요.”

미녀 여기자가 환하게 웃으며 칭찬을 날렸다.

보아하니 포츠머스 팬임이 확실하다.

아주 얼굴이 폈어. 저 기자도 전반전 끝나곤 내 욕을 옴팡지게 했겠지?

“칭찬 감사합니다.”

“후반전의 전술이 앞으로 포츠머스가 주력으로 삼을 전술인가요?”

종종 소설이나 만화를 보면 상대에 맞춰 전술을 무궁무진하게 바꾸며 한 시즌을 통째로 보낼 때가 있다.

그저 웃음만 나온다. 거듭 말하지만, 선수는 게임데이터나 로봇이 아니다.

부분 전술도 아니고 허구한 날 큰 틀을 바꾸면 선수들이 적응을 하겠는가.

월드 클래스급 감독과 선수들도 길게는 1년 이상이 걸리는 것이 전술 적응이다.

맞춤전술도 어디까지나 큰 틀에서 부분 조정을 할 뿐. 그런 의미에서 주력으로 삼을 기본 전술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글쎄요. 그건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말했듯이 영업비밀이라서요.”

아. 왜 자꾸 물어보냐고. 리그 시작하기도 전에 전술을 파훼 당하면 책임질 거야? 요망한 여자일세.

“후후. 그렇게 감추시니 점점 궁금해지네요. 그럼, 한 달 후에 있을 개막전까지 꾹 참아봐야겠네요.”

“실망하진 않으실 겁니다.”

“그럼, 경기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프리시즌은 다른 말로 이적시장이죠. 지금 선수단에 만족하시나요?”

만족이라. 리그2 수준에서 생각하자면 일단은 만족한다.

“충분히 승격에 도전할 만한 선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포츠머스의 선수단은 수가 매우 부족합니다. 감독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승격에도 충분한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주전과 후보의 실력 차를 좁힌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리그2의 경기는 총 46경기. 리그2의 경우엔 상위 세팀은 승격이고 4~7위까지 플레이오프를 해서 한팀이 승격한다.

현 1군 선수단은 22명. 재수 없게 플레이오프에 가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버틸 만하다.

부상 악재가 덮치지 않는다면 말이지.

“그렇다면 이적시장에서 어떤 선수도 영입하지 않을 예정이란 말씀이신가요?”

“글쎄요.”

영입하면 나도 좋지. 근데 돈이 없어. 한 푼 보태줄래?

“상식적으로 22명의 선수로는 한 시즌을 온전히 치르기 힘듭니다. 어떠한 영입도 하지 않는다면 팬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요.”

아주 그냥 협박해라.

‘영입하지 않으면 너 욕 먹을 거야’를 참 예쁘장하고 길게 포장했다.

“알다시피, 불행하게도 구단의 재정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난 사무적인 어조로 현실을 보험 약관 읽듯 말해주었다. 그러자, 여기자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실망한다.

역시, 저 여자도 서포터였네.

“짜릿한 역전승에 찬물을 끼얹는 소식이네요.”

“그렇죠. 아쉽게도 이번 시즌에는 ‘영입’은 없을 겁니다. 제가 보증하죠.”

“···.”

내가 말뚝을 박자 기자회견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진다. 그래도, 헛된 희망을 품었다가 배신당하는 상황보다는 좋지 않을까?

다 경험해 본 일이라 미리 찬물을 뿌린 거다. 나도, 과거에는 엄청나게 기대했었거든.

어찌 됐든 영입은 불가능하다. 돈도 문제였지만 날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내 손아귀에 들어온 선수단이지만 아직 시한폭탄이 많이 남았다. 그것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들이.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선수의 영입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만 늘릴 테지.

게다가 어차피 승격할 건데, 굳이 리그2급 선수를 돈 주고 살 이유는 없지 않은가?

차라리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꼭 영입해야 할 선수에게 보태는 것이 이득이다.

“후후. 분위기가 너무 썰렁해졌네요.”

“···.”

기자들은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 이대로라면 길 가다가 돌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영입은 없을 거지만 임대는 고려하고 있습니다. 혹은 자유계약 정도.”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언제 침울했냐는 듯 활짝 웃는 여기자. 팬질하려고 기자가 된 거 아닐까 싶다.

일반인보다 정보를 빨리 얻는 자리 아니던가. 아는 척도 할 수 있고.

“이제야 얼굴이 펴지시네요. 임대 정도라면 한둘 정도 가능할 테니 오늘은 승리의 즐거움을 만끽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웃으니까 훨씬 이쁘시네요.”

임대영입은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포츠머스의 현 상황에서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이적료에 비하면 임대료는 매우 저렴했으며 주급도 소유 구단에서 어느 정도 부담해서 재정적 부담이 덜하다.

그리고 어차피 1년 있다가 복귀하는 선수라문제를 일으켜도 돌려보내면 그만.

이 얼마나 좋은 제도란 말인가!

“호호. 칭찬 감사합니다. 정말 희소식이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임대 관련 질문 드리겠습니다. 혹시 임대선수로 점찍어둔 선수가 있으십니까?”

“네.”

“와! 감독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큼큼. 그렇죠.”

뭐야, 이 여자. 미래에서 기생충이라도 보고 왔나. 어떻게 저 대사를 치지.

저 여자의 말처럼 전부터 계획을 세워둔 건 아니다. 그저, 오늘 즉흥적으로 생각했을 뿐.

“그 선수가 누구인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 비밀이시겠죠?”

“아닙니다. 비밀이 너무 많다면 서포터분들이 거리감을 느끼실 테니까요.”

“그럼 감독님께서 점찍은 선수는 누구인가요?”

여기자를 필두로 모든 기자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진다.

신임감독의 첫 영입 목표라. 기사감으로는 최고의 소재 아닐까?

물론, 금시초문이던 프런트는 서로의 얼굴을 훔쳐보며 당혹스러워한다. 표정에 ‘너 뭐 아는 거 있어?’라고 써둔 것 같다.

“제 최우선 임대 목표는 여러분들도 잘 아는 선수입니다.”

“꿀꺽.”

기자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내 얼굴에 날아와 꽂히는 모두의 시선을 즐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델리 알리. 오늘 우리 팀을 상대로 골을 넣은 17세의 선수입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자회견장은 일대 소란이 일었다. 우리 쪽 기자는 물론이요, 돈스 쪽 기자들도 쉴 새 없이 랩톱의 자판을 두들긴다. 프런트 또한 서로 의견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다.

후후. 나도 한번 써보자고. 월드클래스에 근접했던 초신성을 말이야.

3.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긴 일주일이 지났다. 잃은 것도 많았지만 얻은 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다.

‘어느 정도 꽉 잡은 선수단. 그리고 구단주와 절반이 넘는 서포터의 지지. 마지막으로 언론과의 친분.’

나쁘지 않다. 10년 전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좋은 출발이다.

모바일 게임으로 치자면, 깡통 계정에서 리세마라로 모든 인권 캐릭터를 들고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지금은 프리시즌이자, ‘이적시장’.

위를 확실히 노리기 위해서는 선수단의 보강이 절실하다. 내가 암만 미래를 아는 감독이라도 언제든 돌발상황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부상이라던지. 통수라던지.

‘그렇다고 이 병신구단의 스카우트 진을 믿을 순 없는 노릇.’

40줄에 가까워 선수기의 황혼에 들어섰다곤 하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라는 위대한 선수를 영입목록에 넣었던 머저리들이다.

이들의 보고서를 보고 선수를 영입하기엔 내가 데인 게 너무 많다. 실제로 몇 번이나 물을 먹었던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다.

‘병신들 말 믿고 영입했다가 부모님 안부를 질문받았지.’

아직은 저 병신들을 갈아치울 권력이 없기에 내가 직접 찾아다녀야 한다. 다시는 패드립을 듣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돈이 없다. 이적 자금은 겨우 5만 파운드.’

한화 8천만 원 정도의 금액. 이걸로는 리그2 수준을 넘는 선수를 영입하기 불가능하다.

그래서 꺼낸 것이 임대라는 임시방편.

심지어 그 대상이 훗날 굉장한 선수가 될 유망주라면 더할 나위 없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노림수가 있다. 만약 임대에 성공한다면, 과거보단 빅클럽의 관심이 적을 터. 알리의 몸값은 상당히 저렴해질 소지가 다분하다. 내가 가로챌 가능성이 늘어난다는 이야기.

그럼 알리를 영입하지 못한 토트넘은 어쩌냐고?

그거야···. 난 모르지. 알 바인가?

어차피 10년 뒤면 제발 팔아치우자고 울부짖는 선수다.

미리 처리해주는 셈 치자.

‘그래도 돈이 부족해.’

5만 파운드는 너무 적다. 알리의 임대료로서도 부족할지도 모른다.

많이는 바라지도 않는다. 딱 20만 파운드 정도. 그 정도만 있으면 알리를 비롯해 두세 명 더 임대할 수 있겠지.

“씁. 전화가 오지 않네.”

기자회견장에서 그 지랄을 떨었는데 구단주 영감은 잠잠하다. 일부러 영감의 관심을 끌기 위한 쇼였건만. 입질이 없자 머리가 띵하다.

아니, 이 노친네가. 식사 시간에 초대한다며. 그냥 빈말이었나? 부른다고 말하고선 부르지 않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기분이 나쁘다.

-부으으응.

오. 마침 스마트폰이 몸을 부르르 떨며 전화가 왔음을 알린다. 발신자는, 다행스럽게도 할배다.

“네. 성소하입니다. 어쩐 일이시죠? 구단주님.”

“허허. 기자회견은 잘 보았네.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어. 그 즐거움을 저녁 식사 때 같이 나누고 싶네만.”

옳지. 물었다. 손맛 한번 짜릿한데.

낚시를 왜 하는지 알 것 같다.

“저야 환영입니다. 마침, 밥을 먹기 전이기도 했고요.”

“다행이군. 그럼 잠시 후에 만나도록 합세.”

“전 많이 먹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적어도 음식이 부족하지는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

“다행이군요. 그럼,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후우. 좋아.

그럼 이제,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 구단주 할배의 주머니를 털어보자고.

< 012화. 신입생과 쥐새끼. (1) > 끝

ⓒ 블라님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