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0화. 친선 경기. (1) >
1.
축구는 영국의 신앙이자 종교다.
덕분에 구단의 사소한 사건마저도 지역지에 실린다.
예를 들면, 내가 며칠 전 휴가를 썼던 이야기도 실릴 정도.
-취임 이틀 차에 휴가를 쓰는 감독. 목적지는? 이유는?
-정신 놓은 감독의 달달한 북유럽 여행기. 과연 무엇을 했을까.
-신임 감독이 다녀온 노르웨이는 어떤 나라인가.
욕을 옴팡지게 먹었다.
귀신같은 정보력이다.
목적지는 아무한테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하여튼, 말로리의 주장직 해임은 당연하게도 다음 날 지역지에 실렸다.
아무리 봐도 구단 내부에 빨대가 꼽힌 게 확실하다.
쥐새끼 같은 놈. 잡아내고 만다.
-검은 머리 감독의 과감한 행보.
-신임 감독의 어리석은 선택.
-말로리의 주장해임은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신임 감독의 기습공격.
-취임 6일 만에 선수단과 불화. 포츠머스는 이대로 괜찮은가?
지랄이 났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날 물고 뜯고 맛본다. 뭐, 예상했던 결과라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뭐야? 이거 감독님의 폭거 아닌가?”
“잘한다 싶더니 사고를 쳤네.”
“선수단 분위기는 어때요? 말로리 선수는 주장으로서 5년간 팀을 잘 이끈 선수잖아요? 반발이 심할 텐데.”
“후. 아쉽네요. 신임 감독답지 않게 잘 수행하고 있었는데. 실수네요.”
프런트의 반응도 대동소이했다.
기어코 풋내기가 사고를 쳤다는 반응이 대다수.
종일 수군거리는 꼴을 보자니, 귓구멍이 간지러워 미치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선수단의 반응은 의외로 잠잠했다. 일단 사건의 중심인물인 말로리가 조용한 이유가 가장 컸다.
다른 이유로는, 인간의 탈을 쓴 고릴라의 발칙한 유쾌함? 덕분이기도 했고.
“하하하! 말로리 선배를 제압한 저를 주장으로 앉히기 위한 노림수이군요! 감독님의 안목은 역시 대단하세요. 게다가 제가 바로, 유소년 때부터 포츠머스 외길 인생을 걸어온 제2의 미스터 포츠머스 아닙니까!”
조쉬 킹은 신이 나서 떠벌였다.
영국의 위연 같은 녀석의 입에서 ‘미스터 포츠머스’라는 소리가 나오다니.
혈압이 올라 목덜미가 뻐근하다.
‘하여튼, 기고만장해서는. 당시 말로리의 집중력은 바닥이었다고.’
강등에 대한 죄책감.
신임 감독에 대한 불신.
주장 완장의 압박감.
이런 여러 감정이 뒤섞여 온전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뿐.
지금은 모든 것을 내려두고 축구에만 집중할 터. 전처럼 쉽게 제압하진 못하겠지.
“어때요? 감독님. 저를 한번 주장직에 올려주시죠!”
천성이 활발한 녀석이라 선수들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제지하지 않는다.
막냇동생 포지션이랄까.
자칫 무거울뻔한 팀 대화의 분위기를 환기하게 시켜준 공로가 꽤 크다.
그럼 상을 줘야겠지.
“진심이냐?”
“그럼요.”
“그래. 주장 한 번 해봐.”
“···.”
꽤 훈훈하던 라커룸을 순식간에 무거운 적막이 집어삼켰다.
“저··· 감독님? 잘 못 들었슴다?”
“킹이 주장 한번 해보라고. 저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동료가 된 도리로서 한 번쯤 시켜주는데 의리 아닐까?”
“···.”
꽤 진지하게 말하자 선수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저 농담인 줄 알았나 보다.
“저··· 감독님.”
밀러 아저씨가 소곤거렸다. 지진이 난 두 동공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느껴진다.
“왜요?”
“킹은 겨우 18살입니다. 아직 고등학생이라고요. 주장은 좀 무리 아닐까요?”
“저도 그건 알아요.”
“그런데 왜···.”
“재밌잖아요.”
“···.”
밀러 아저씨에게 침묵 마법을 건 뒤, 선수들을 바라봤다.
“임시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내일 친선전에서만 일일 주장이다.”
“임시라면, 다음엔 다른 사람이 한다는 겁니까?”
케빈 도슨이 눈빛을 빛내며 질문을 했다. 항상 올곧던 눈빛이 갑자기 조금 탁해진 것 같다.
“물론이지. 킹이 주장으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그럼 저도 해볼 수 있는 건가요?”
“당연하지. 엄청 하고 싶은 거 같은데, 그럼 다음엔 도슨이 주장을 맡자.”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슨을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착하디 착한 모범 시민에게 권력욕이 있을 줄이야. 예상외다.
“자! 또 주장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그렇게 팀 면담을 마치려는 찰나, 한 선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든다.
“감독님의 의사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제 의견을 말해도 되겠습니까?”
“잭 해리슨. 당연하지. 허심탄회하게 말해도 된다.”
잭 해리슨. 24세.
날카로운 왼발이 장점인 클래식 윙어.
저번 시즌에 모든 대회를 통틀어 12어시스트나 한 핵심 선수.
“주장직이란, 팀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정식적 지주의 역할입니다. 이에 감독님도 동의하십니까?”
“어. 동의해.”
“그렇다면 이렇게 장난식으로 정할 만한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팀의 화합을 헤쳐 경기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겁니다.”
“···.”
허 참. 말 잘하네. 야무지게 팩트만 날려대서 반격할 여지가 없다.
“보아하니 주장 해임은 전임 주장인 찰스 말로리 선수와 합의로 진행된 일이라 봅니다.”
“그렇지.”
“그렇다면 새로운 주장직도 선수들의 합의로 임명해야 형편에 맞습니다.”
“···.”
아 맞다. 얘 별명이 젊은 꼰대였지.
고지식하기 짝이 없어 도슨을 웃도는 바른 생활 청년!
녀석 덕분에 오랜만에 한 방 먹었다.
사도는 정녕 정도를 이길 수 없는 법이란 말인가!
“그, 그래. 그럼 우리 민주시민답게 투, 투표로 정하자. 킹을 임시 주장으로 찬성하는 사람, 손?”
대부분의 선수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하긴 녀석들도 재밌겠지. 저 천둥벌거숭이가 주장으로 뭘 할지 예측이 어려우니까.
다만, 도슨과 해리슨은 굉장히 실망한 기색이다.
뭐야. 도슨은 그렇다 치더라도 해리슨, 너도 주장이 탐났던 거야?
하. 생각보다 권력욕이 많았구만. 주의할 인물로 체크 해둬야겠다.
2.
친선 경기.
프리시즌 일정 중에서 굉장히 중요한 행사다.
선수들의 팀 전술 적응도와 몸 상태를 확인하는 중요한 경기다. 여기에 시즌에 들어설 경기력도 만드느니. 참으로 중요하다.
그렇다 해도 프리시즌이 시작한 지 일주일만의 친선 경기는 조금 이른 감이 있다.
여기엔 프런트의 추악한 꿍꿍이가 내포되었기 때문이다.
‘엿같은 퍽킹 머니.’
돈 때문이다. 친선 경기의 관중 수입은 리그2에 처박힌 구단엔 짭짤한 수입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강등당한 구단의 재정은 아주 거덜이 난다. 중계권료는 물론이고 지원금도 줄어드니까.
수입은 줄어드는데, 지출은 상위리그 구단 급이라면 거덜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거다.
그래도.
한참 몸을 만들어야 하는 선수들에게 이른 친선 경기는 부상의 위험이 컸다.
“개새끼들.”
간단한 기자회견에 앞서, 기다리는 중에 욕설이 절로 나왔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 이미 일정을 전부 다 짜두다니. 제법이야.”
내가 일정을 조절했다면 절대 일주일 만에 친선 경기를 잡지 않았다.
새로운 전술에 대한 적응도 끝마치지 못했는데 친선 경기라니? 아직 휴가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수단의 몸 또한 무겁다.
하지만, 존나게 유능하신 프런트는 망할 종이 쪼가리를 벌기 위해 참으로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축구 구단이란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인 선수들을 갈아버리기로 작정하다니.
참으로 씨발,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감독님 친선 경기에 임하시는 각오는 어떠십니까? 그래도, 첫 경기이신데요.”
지역지 여기자 한 명이 의례적인 평범한 첫 질문을 던졌다.
“일단 프리시즌이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친선 경기를 잡아, 선수들에게 리그2로 강등당한 절박함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 훌륭한 프런트에 심심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절로 승리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큼큼.”
평범한 질문에 평범하지 않은 답변이 나오자 장내가 일순 광역 침묵 마법에 걸린다.
동시에 옆에서 지켜보던 브라이언과 기타 프런트 대가리들의 표정은 썩어버렸고.
뭐! 꼬우면 경기를 잡지 말던가.
“아···. 그러니까, 프리시즌이지만 승리하고 싶다는 말씀이시죠?”
여기자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잘 포장했다.
“네. 일단 이겨야죠. 어차피 하는 건데 이겨서 돈이라도 조금 더 벌어야 그나마 보람차지 않겠습니까?”
우리 유능한 프런트는 이번 시즌 친선 경기를 꽤 재밌게 잡았다.
N빵이 아닌 관중 수입.
평범하게는 6:4.
많게는 7:3에서 8:2까지.
승리한 팀이 더 많이 가져간다.
경기의 질을 높이기 위한 내기다.
나도 이 부분은 꽤 만족한다.
모름지기, 승부란 무언가가 걸려야 제맛 아니겠는가.
그래도, 한탕주의에 물든 우매한 머리통에 사랑이 담긴 무릎 차기를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는다.
지면 어쩌려고 새끼들아.
“···어, 음. 후후. 승리하시겠다는 의지가 넘치시는군요.”
“당연하죠. 축구는 이겨야 제맛이니까요. 기자님도 그렇죠?”
“네! 그렇다면 포츠머스의 스타일을 바꾸실 거라는 이야기입니까? 포츠머스는 본디 선 수비 후 역습 축구를 하는 수비 지향적인 팀이었으니까요.”
일반적인 수비축구도 아니고 늪 축구였다.
승리가 없다면 볼 가치도 없는 쓰레기.
이런 축구를 하는 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대단하다.
아, 그러고 보니 1년 뒤면 늪 축구의 대가 슈틸리케가 한국 국가대표에 부임하겠군. 그저 인내하시길. 미리 한국 축구 애호가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수비 지향적인 전술을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만, 전 보다가 잠이 오는 경기는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와! 이유가 있으실 거 같은데요?”
“팬들을 위해서입니다. 질 땐 지더라도 0패는 당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골수팬들도 사람이다. 팬이라서 응원하는 거지 수비축구가 좋아서 응원하는 건 아니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수비적인 플레이로 승리를 쟁취해낸다면 조금 얘기가 다르다.
하지만 지금은 한 명의 팬이라도 구장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야 할 시간.
그러기 위해선 재미있는, 공격 위주의 축구는 선택이 아닌 필수!
정말, 난이도가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높은 감독 자리다.
“멋지네요. 공격축구라니. 어떤 방식의 전술을 구사하실 예정인가요?”
“그건 리그에서 직접 보시면 될 겁니다. 전술은 영업 비밀이거든요.”
“에이. 그래도, 기대하는 팬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흐음···.”
여기자가 헤실헤실 웃으며 보챘다.
그럼 대답해 줘야 인지상정이겠지.
“음···. 본프레레식 축구랄까요.”
3골 먹히면 4골 넣는다. 이것이 나의 이번 시즌 전술이었다.
3.
상대 팀은 MK돈스.
정확히는 밀턴킨스 던스FC.
한국 축구팬들에게는 꽤 유명한 팀.
지금으로부터 1년 뒤.
14~15시즌의 리그컵에서 거대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4-0으로 개박살을 내버린 팀이었으니까.
십 년이 지나도 종종 튀어나와 맨유 팬들의 목덜미를 잡게 만드는 움짤을 만든 팀이 바로 이 팀이었다.
킥오프 전. 자기 자리를 잡는 선수들의 모습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아 맞다. 여기 델리 알리의 친정팀이었지?’
소농민 선수와 토트넘에서 같이 동고동락하는 ‘델리 알리’ 선수의 친정팀.
‘마침, 13-14시즌이면 델리 알리가 세간에 이름을 알리는 시즌이군.’
17세의 나이로 모든 대회를 통틀어 7골이나 넣는 이 선수는 빅클럽들의 어마어마한 관심을 받는다.
그렇게 1년 후, 2015년 2월에 토트넘으로 이적하고, 그 후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천재였거늘. 어쩌다가 압둘 알리로 실력이 퇴화하게 되는지. 쯧쯧.’
축구 좀 안다는 사람들이라면 백이면 백, 모두 월드클래스가 될 거라고 단언한 선수.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빠르게 끝났다.
‘수염이 문제야. 좆같은 겉멋이 들었기 때문이지.’
객관적으로 보자면 재능은 넘쳤지만, 노력이 부족해 대성하지 못한 선수다.
그게 겉멋 든 거 아닐까.
아님 말고.
‘그나저나, 한번 감아볼까?’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델리 알리라는,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큰 발자취를 남긴 선수를 영입해보겠다는 발상이 말이다.
‘아냐. 아냐. 불가능해.’
경쟁자는 리버풀과 토트넘.
가진 선수를 한 명 팔면 포츠머스 따위는 가뿐히 인수할 초거대 구단이다.
내 기억으론 토트넘에서 500만 파운드나 주고 영입했다.
한화로 80억이 넘는 엄청난 금액.
우리 구단은 한해 이적 자금이 10만 파운드 정도 되니까··· 50년만 알뜰살뜰하게 모으면 살 수 있을지도?
그래도 꽤 아쉽다. 뭔가 수가 떠오를 거 같기도 한데. 일단은 당장의 경기에 집중하자.
-삐익!
“와아아아!”
휘슬이 울렸다. 우렁찬 함성이 홈구장, 프래튼 파크를 들었다 놨다 한다.
엄청난 숫자다. 2만여 명을 수용하는 구장에 70%나 들어찼다. 고작 친선 경기일 뿐일 텐데 말이다.
“포츠머스! 포츠머스!”
거대한 응원 소리 속에서 문득 한 가지 기도문이 떠오른다.
-하나님, 아버지. 축구가 우리 공동체에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축구가 우리를 어떻게 결속시켜주는지 보여주시옵소서. 우리 팀의 성공은 우리 도시에 성공과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영국의 신앙이자 종교다.
그 종교를 주무르는 감독은 신이겠지.
그렇다면, 신으로서 신자에게 복음을 내려 줘야 할 시간이 왔다.
< 010화. 친선 경기. (1)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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