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9화. 잘 먹어야 잘한다. (2) >
1.
브라이언은 당황스러웠다.
갑작스럽게 신임 감독이 직접 찾아왔으니까.
요 며칠, 그렇게 부탁해도 만나주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무슨 일이지?’
반가움보다는 불안함이 엄습한다.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5분이 넘게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
브라이언의 눈에 비친 젊은 감독의 모습은 시한폭탄, 그 자체.
“큼큼. 오, 오셨으면 대화를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
“그, 그렇게 빤히 본다고 제가 감독님의 의중을 파악하진 못합니다.”
“···.”
브라이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저 눈빛을 보라!
흡사 어떤 장난을 칠지 고민하는 악동 같기도 하며, 사냥감을 어떻게 사냥할지 고민하는 맹수 같기도 하다.
-꼬르륵.
“큼큼. 제, 제가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아서. 죄, 죄송합니다.”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브라이언. 일이 바빠 미쳐 배를 채우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호오. 배가 고프신가 보군요?”
“아침도 먹지 않아서···.”
“그렇다면 지금 당장 눈앞의 검은 머리 애송이를 치워버리고 식당으로 달려가고 싶으시겠군요?”
“아, 아닙니다. 감독님과의 면담만큼 중요한 사항은 없습니다.”
“그럼, 면담이 끝나면 헬렌 이모님이 차려주시는 식사를 하시겠네요?”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점점 더 불안감이 가중된다. 계속 의미 없는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뭘까? 도통 짐작조차 어렵다.
“그렇죠? 헬렌 이모님의 요리는 아주 훌륭하니까요.”
“네. 헬렌 카터 씨의 요리는 위에 부담이 없어, 공복에 먹어도 탈이 나지 않으니까요. 맛은 말할 것도 없고요.”
“무척 소중한 분이에요. 사장님도 같은 생각이시겠죠?”
“그렇습니다. 저희 프런트가 구멍이 많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래도, 카터 씨는 예외입니다. 구단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재입니다.”
별다른 고민 없이 긍정했다. 딱히 고민할 가치가 없는 주제였으니까.
적어도 그가 아는 한, 헬렌 카터만큼 자기 일에 충실한 직원은 없었다.
“바로 그거에요!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중한 직원!”
“···.”
환하게 웃는 신임 감독. 정말 잘생겼다. 단정한 흑발과 짙은 푸른빛의 눈동자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준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해, 서양보단 동양에서 인기가 많은 상이다.
“오늘 점심 메뉴가 뭔지 아세요?”
“···그, 글쎄요.”
“제가 알려드릴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란 말인가.
그냥 친목을 다지러 온 건가?
그건 아니다.
적어도 취임 첫날부터 느껴지던 묘한 적개심은 변함없다.
“애피타이저는 옥수수 수프에요. 옥수수의 구수한 향이 오장육부에 스며들며 몸을 따듯하게 데워주죠. 그리고 입안에서 퍼지는 노란빛 옥수수의 파티! 그냥 침이 줄줄 흐르죠.”
“꿀꺽.”
절로 군침이 넘어간다.
“거기에 고소한 팔라펠이 바삭한 식감으로 혀를 춤추게 하죠. 이성을 잃고 접시에 코를 박고 싶을 거예요. 하지만 끝이 아니죠. 마지막으로 준비된 새콤달콤한 애플 크럼블! 그 맛에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한 줌 후회는 없을 테죠. 아, 허리띠 풀고 또 먹고 싶다.”
“···.”
-꼬르륵.
브라이언의 위장은 다시 한번 요동을 쳤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망할 검은 머리 애송이를 앞차기로 밀어버린 뒤 식당으로 뛰어가고 싶다.
“이런 훌륭한 음식을 만드는 헬렌 이모님은 정말 구단의 소중한 존재예요.”
“네. 앞서 말했듯이, 정말 소중한 직원입니다.”
“그렇다면 헬렌 이모님을 자를 생각은 없으시다는 거죠?”
“네. 그럴 리는 없습니다.”
“정말로요?”
“그분이 직접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지 않는 이상 절대 제 손으로 해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쉽게 대답했다. 가뜩이나 프런트의 실력이 떨어지는데, 유능한 직원을 해임할 리가 있겠는가.
“좋아요. 대답 한 번 시원하네요. 그런데 말이죠. 이게 공복 중인 사장님에게 어울리는 식사일까요?”
“···무슨?”
“사장님은 보통 저녁 식사를 일찍 하시는 분이시죠. 맞죠?”
“그걸 어떻게···”
“12시간이 넘는 공복 상황에서 기름기 많은 팔라펠이 어울릴까요? 아니라고 봐요. 사장님께 필요한 건 좀 더 담백한 음식이죠. 게다가 요즘 자주 피곤하시죠? 비타민이 부족해서 그럴걸요? 하지만 아쉽게도 식단에는 비타민은 매우 적네요. 만성피로가 불알친구처럼 따라다닐 게 뻔해요. 헬렌 이모님의 실수죠. 아니지, 실수라기보다는 무지가 정확하죠.”
이건 또 뭐란 말인가.
한참을 헬렌 카터와 그녀의 음식을 칭찬하던 인간이 이제는 침을 튀기며 비판한다.
“···도대체 감독님이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겐 새로운 영양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죠. 헬렌 이모님과 손을 잡고 식단을 발전시킬 뛰어난 영양사가!”
“···.”
이게 목적이었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새로운 영양사의 필요성과 두 명의 영양사의 시너지에 대한 일장 연설.
브라이언은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질어질한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은 브라이언은 일단 일반적인 대응을 한다.
“···저희 같은 작은 구단에 영양사 두 명은 사치입니다.”
“본인이 했던 말을 부정할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팀의 수준을 향상하려는 신임 감독의 계획을 정면에서 막아서는 건가요?”
외통수. 이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만약 여기서 거절한다면, ‘누군가’의 의해 소문이 퍼질 거다.
-팀을 4부리그로 떨어뜨린 CEO는 원대한 야망을 품은 신임 감독의 요청을 거절했다. 또한 했던 말을 번복하는 치졸함 마저 보였다.
신임 문제다. 가뜩이나 브라이언, 자신의 자리는 위태위태하다. 구단주의 방임 같은 지지가 없었다면 당장 자리를 잃어도 할 말이 없다.
‘이 상태에서 소문이 퍼져 신뢰를 잃는다면, 난 끝이다.’
말 그대로 끝이다.
물론 신임 감독도 절대적인 지지를 얻은 건 아니다. 선수단을 완전히 장악한 것도 아니었고 서포터나 프런트도 호불호가 갈렸다. 아직, 성과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자신보단 나은 상태였다. 이제는 단순한 바람막이로 사용할 위치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바람막이가 될지도···.’
브라이언은 슬쩍, 눈앞의 신임 감독을 바라보았다. 싱글싱글 웃는 모습이 속을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치적 감각은 정말 뛰어나다.’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아직 잘 모르지만, 정치가로서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의 위치와 상대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해 원하는 것을 끌어내는 능력!
이것은 정치였다.
“후우. 거절할 수 없군요. 그럼, ‘감독님’의 강한 주장에 ‘어쩔 수 없이’ 승낙해야겠군요.”
“후후. 걱정하지 마세요. 일이 잘못되면 모두 제가 뒤집어쓸 테니까요.”
“···.”
역시, 이 감독은 정치가다.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속뜻을 제대로 알아차렸다.
“혹시, 숟가락 올리실 생각은 하지 않으시겠죠? 설마.”
“···일이 잘 풀린다면 모두 감독님의 넓은 혜안 덕분입니다.”
“좋네요. 그럼 조만간 날을 잡아 제가 점찍어둔 사람과 이야기하고 올게요.”
“알겠습니다.”
브라이언은 패배를 선언했다. 어차피,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감독이 진다고 하지 않은가.
그리고 숟가락을 올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잘 풀린다면 낙수효과의 덕을 볼 거다. 어찌 됐든 승인은 브라이언, 자신이 했으니까.
물론 신임 감독도 이 부분은 알 거다.
그런데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건, 목적을 달성해 베푸는 아량이겠지.
보면 볼수록 뛰어난 사람이다. 흡사, 미래에서 날아와 모든 상황을 알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전 가볼게요. 일이 바빠서. 식사 맛있게 하시고.”
“···잠깐.”
브라이언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려는 신임 감독을 멈춰 세웠다.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신임 감독에게, 브라이언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조건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구질구질하게 이러시기에요?”
“하하. 사소한 조건이니 부담 없으실 겁니다. 감독님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라면 부담 없이 승낙하실 거라 자부합니다.”
“···말해보세요.”
“조만간 저와 단둘이 술 한잔합니다. 이게 저의 조건입니다.”
“···.”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영 저 신임 감독은 자신과 어울려주지 않을 거다.
잠시 고민하는 신임 감독. 온몸으로 싫다는 기색을 내비치지만, 결국 승낙한다.
“술값은 댁이 내세요.”
“물론입니다.”
술값 정도야, 저 정치 감각이 뛰어난 감독과의 친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도 상관없는 브라이언이었다.
2.
“씹새끼. 하여튼 여우 같은 새끼야.”
은근슬쩍 책임을 회피하며,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를 가늠해 마지못해 수락했다는 그림을 그 상황에서 그리다니.
역시 만만치 않은 인간이다.
‘지금 상황을 미래를 아는 나와 비슷할 수준으로 분석하고 있다니. 괜히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어.’
정말 싫은 녀석이지만 적어도 정치 능력은 인정해야겠다.
새끼, 잘하는 거라고는 정치 하나뿐인 인간이 뭣 하러 축구구단 CEO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다.
-똑똑.
쉴 새 없이 브라이언을 씹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잡아둔 약속이다.
“들어오세요.”
-달칵.
문이 열리며 얼굴을 드러낸 사람은 저번 시즌의 주장이자, 아직도 주장을 역임 중인 찰스 말로리.
‘꼰대.’
개노답 삼형제에서 꼰대를 담당한 선수.
나이는 32세, 포지션은 중앙 수비수.
포츠머스에서 10년을 넘게 뛴 나름 리빙 레전드다.
실력도 괜찮은 수준.
챔피언십 리그베스트 후보 정도?
폼이 좋다면 말이다.
“첫 면담이군요. 감독님.”
“그래, 일단은 주장과 먼저 개인 면담을 하는 게 관례니깐.”
이 자식이 날 찾아온 이유는 개인 면담 때문이다.
개인 면담,
감독과 선수가 단둘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감독의 업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다.
감독은 존나게 바쁜 직업이다.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기도 했고.
그냥 전술이랑 훈련을 짜고 경기를 돌리면 이보다 세상 편한 직업이 없겠지만, 아쉽게도 선수들은 ‘사람’이다.
사람이라 하면, 자신을 제외하고는 속을 알 수 없는 생명체. 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경기장에 내보내는 것이 바로 감독의 역할이다.
암만 잘하는 선수라도 개인 면담에 실패해 불만을 품거나 사기가 떨어진다면 본 실력을 내지 못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인격체였으니까.
‘아. 하기 싫다.’
정말 하기 싫다. 무척 하기 싫지만,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 도망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맞서 싸워야겠지.
난 표정 관리를 하고 말문을 뗐다.
“편하게 대해주시면 됩니다. 감독님.”
“그래? 좋아. 나도 빙빙 돌리면서 말하는 건 이제는 취향이 아니니까.”
예전에는 눈치를 보느라 빙빙 돌려 말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갑자기 왜 나에게 감독 대접을 하는 거냐? 너, 나 별로 안 좋아하잖아.”
“···.”
“네 성격상 나이도 어리고 경력과 실력이 없는 사람이 위에 오르는 건 참을 수 없을 테고.”
“저에 대해서 잘 아시는군요.”
“뭐, 일단은 내 선수니까.”
선수들의 신상 파악은 감독의 기본. 더군다나 눈앞의 이 자식은 날 오랜 시간 귀찮게 했던 녀석. 잊을 수 있을 리가.
“사실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감독님도 아시다시피 우리 구단은 강등당했으니까요.”
“···.”
“전 구단이 프리미어 리그에 있을 때 영입된 선수입니다. 즉 구단의 흥망성쇠를 모조리 체험했죠.”
“···.”
“그리고 전 10년간 함께 한 이 포츠머스란 구단을 사랑합니다.”
몰랐다. 적어도 내가 아는 말로리는 충성심과는 연이 없어 보였거늘.
“구단이 똥통에 빠졌는데, 애송이가 감독직에 앉는 모습은···. 솔직히 참기가 힘들더군요.”
“솔직하구만.”
씨발. 너무 솔직하잖아. 면전에서 애송이 소리를 듣다니. 이거 처음 아닌가?
“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군인 출신이라서?”
“아니요. 그것도 가산점이긴 합니다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뭔데.”
“감독님의 실력은 아직 의문이 붙지만, 꿈만큼은 진심이라고 느꼈습니다. 기자회견의 자리에서 보여준 모습은 정말··· 제가 상상하던 그 모습이었거든요.”
“얼치기의 허언 같지 않았나?”
“그렇게 보는 선수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니었습니다.”
본심을 털어놓는 말로리의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이제야 말로리가 과거에 나를 그토록 괴롭힌 이유를 알 거 같다.
“구단을 위해서 날 내쫓고 싶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이건가?”
“네. 선수단과 불화를 유도해 검증된 감독님을 얻고 싶었습니다. 이젠 아니지만요.”
“···왜 하필 총대를 멘 거지?”
감독에게 대든 선수의 끝은 좋지 않다. 실제로, 개노답 삼형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말로리는, 팬들의 욕설과 함께 다른 구단에 팔려 갔다.
그리고 포츠머스의 팬들은 그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주장이니까요.”
“···.”
주장이란, 선수들의 지도자다.
즉, 선수단의 대변인을 맡은 자리.
그렇다면 그는 그저 주장의 소임을 다했을 뿐이란 말인가.
“말로리. 넌 정말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냐?”
“네. 프리미어 리그로 복귀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겁니다.”
굳게 닫은 입술과 의지가 넘실거리는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감독으로 응당 이 의지에 답변해줘야겠지.
“좋아.”
나는 말로리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직하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오늘부터 네 주장직을 박탈하마.”
< 009화. 잘 먹어야 잘한다.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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