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6화 (6/306)

< 006화. 홀란드와 제라드. (1) >

1.

기자회견은 성공적이었다.

노이즈 마케팅이랄까.

지역지의 1면은 물론이고 메이저 신문에서도 짧게 포츠머스의 이야기를 다뤘다.

하지만 브라이언을 위시한 프런트는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공식적인 경고입니다. 미스터 성.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었습니다.”

다음 날, 오전.

브라이언은 나를 불러 엄하게 추궁했다. 영국신사의 표본이라고 불릴 만큼 점잖던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우리 구단을 조롱거리로 만들 속셈이셨습니까? 3년 내로 프리미어 리그라니. 6살 먹은 어린아이도 불가능하다고 여길 일입니다.”

3년 내로 프리미어 리그. 이 말은 해마다 승격을 달성하겠다는 말과 똑같다. 요컨대, 축구계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전무후무한 업적이라는 뜻.

“그런가요?”

나는 뻔뻔하게 커피를 홀짝이며 반문했다. 그러자, 브라이언은 얼굴을 붉히며 탁자를 쾅 쳤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구단에 대한 신뢰가 뿌리째 흔들릴 일이었단 말입니다!”

“구단에 대한 신뢰라. 웃기는군요.”

절로 조소가 머금어진다.

신뢰? 이 구단에 대한 신뢰는 이미 바닥이야.

좆도 알지도 못하는 새끼가.

“웃음이 나오십니까? 지금?”

“당연하죠. 이미 포츠머스의 신뢰는 땅바닥에 떨어졌어요. 모두 유능한 프런트와 감독 덕분이죠. 안 그래요? 이 상황에서 신뢰 운운하는 헛소리를 들었더니 웃음이 절로 나오네요.”

“···.”

슬슬 비꼬자 브라이언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난 혓바닥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리그 2, 4부 리그까지 강등당한 구단이 신뢰를 운운하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네요. 염치라는 단어를 아시는지?”

“···운이 좋지 않았을 뿐입니다.”

“운? 아니에요. 구단주의 지원만 믿고 방만하게 구단을 운영한 프런트의 인과죠. 운 같은 말로 포장하지 마세요.”

포츠머스는 작은 구단이다. 운 좋게 돈 많은 전임 구단주를 만나 공격적인 영입을 했지만, 바닥이 보였을 뿐.

2만석 정도의 작은 홈구장을 가진 구단은 구단주가 먹여주는 돈을 소화하지 못하고 배가 터져버렸다.

“엄청난 빚더미에 앉아 선수도 수급하지 못해, 리저브팀도 없는 상황이잖아요? 불과 3년 전에는 선수들의 임금체납도 했었죠.”

“···그, 그건.”

“3개월 전, 지금 구단주님이 이 망해버린 구단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법정관리 중이었겠죠.”

“···.”

“신뢰? 팬들에게 이 구단에 신뢰가 남았을 거 같나요? 프리미어 리그 때 평균관중이 어땠죠? 거의 100%에 달했지만 이젠 반 토막이 나버렸죠.”

정말 제대로 망한 구단이다. 이쪽 계통으로 유명한 구단은 리즈와 QPR이다.

그나마 리즈는 내 시대엔 어떻게든 프리미어 리그로 올라가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줬지만, QPR는 당연히 쫄딱 망했다.

“우리는 신뢰 운운할 단계를 이미 넘어섰어요. 팬들의 마음속에는 칙칙한 비관만 가득하죠.”

“···.”

“그러니, 이제는 그들에게 화사한 희망을 줘야 할 차례에요. 비록 그것이 풋내기 감독의 치기 어린 계획일지라도요.”

“일 리가··· 있군요.”

“그리고, 오늘 신문 안 보셨나 봐요?”

“아직입니다.”

“그러니 이런 태도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실력미달이시네요. 어떻게 잘리지 않고 자리 지키시는지 몰라.”

“···.”

난 미리 챙겨온 지역신문을 탁자 위에 쫙 펼쳤다. 내 잘생긴 얼굴이 신문 1면을 장식했다. 흐음. 인물은 참 났어.

-군인 출신 신임 감독. 3년을 논하다.

-젊은 감독과 함께 불어오는 포츠머스의 새로운 바람!

-20대의 거침없는 발언. 치기인가?

비판적인 시선도 있지만, 대부분이 호평 일색이다. 기자들이 신이 나서 타자를 두들긴 흔적이 여실히 보인다.

아마 재밌었겠지. 오랜만에 단물 듬뿍 담긴 껌을 씹는 느낌이었을 테니까.

“자 보세요. 어때요? 오랜만의 긍정적인 기사죠?”

“그렇군요···.”

“팬들이 바라는 건 신뢰가 아니에요. 없는 걸 주려고 하니까 통하지 않죠. 그들이 바라는 건 이 암흑기를 헤쳐나갈 희미한 불빛입니다.”

젊은 감독의 치기 어린 계획일지라도.

팬들은 좀 더 나은 미래를 바란다.

그 불빛을 조금이나마 보여줬을 뿐.

신뢰를 강조했다가 실패해 봤기에 다른 방법을 써봤다.

“자, 그럼 제 할 말은 다 했으니 사장님의 공식적인 경고를 계속 듣도록 하죠. 귓구멍 열고 경청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면담은 여기까지 하기로 합시다. 제 시야가 짧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조만간 직원 하나 뽑아주시죠. 아마도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고려해 보겠습니다.”

고려는 무슨.

아, 그냥 쟤 고려장하고 싶다.

오늘처럼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 귀찮은데.

그럼, 오늘은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하니 이만 자리를 떠야겠다.

2.

홀로 남은 브라이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하다.

‘사람이 바뀌었어. 왜?’

일주일 전의 성소하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다.

전술적 지식이 해박하며 모나지 않은 성격을 가진 착한 청년이었다.

오히려 조금 소심해 보일 정도.

그의 말로는, 혼혈은 이렇게 살아야 평탄한 하루하루를 지낸다고 했거늘.

너무나도 달라졌다.

‘지금은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따로 없어.’

거침이 없었다. 이제 막 취임하고 만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거침없는 행동으로 모든 난관을 풀어냈다.

‘혹은 폭군, 리처드 3세 같기도···.’

선수단과의 일은 밀러 수석코치의 보고를 익히 들어서 안다. 상식을 벗어나는 내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뿜어내다니.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폭군처럼 행동하는 듯 보이나 결과물은 항상 그가 챙긴다.

‘그렇다면 계산했다는 건데. 하. 이건 말이 되지 않아.’

본인이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신임 감독의 행동은 계산의 영역이 아니다. 쉴 새 없이 주사위를 던지는데, 무슨 눈이 나올지 어떻게 계산하겠는가.

만약, 구단주가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면,

만약, 밀러와 되지도 않는 내기 시합에서 패배했다면,

만약,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반응이 부정적이었다면.

그는 축구 역사상 가장 빠르게 경질되는 인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일련의 행동들은 자신의 손에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었다. 타인의 반응에서 발현된 결과였지.

사람의 반응은 계산의 영역이 아니다. 암만 잘해주더라도 삐딱선을 타기도 하며 싫어해도 달라붙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인격체였으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데, 이건 더 말도 안 된다.’

저 친구가 해리포터의 예언가, 시빌 트릴로니는 아니지 않은가.

지끈지끈.

머리가 아프다. 3개월 전 구단인수와 함께 완치되었다고 생각한 편두통이 다시 찾아왔다.

-똑똑.

머리를 부여잡던 브라이언은 노크 소리에 내방을 허락했다.

모습을 드러낸 건 가슴팍에 서류뭉치를 잔뜩 짊어진 홍보팀의 신입, 에밀리아 존슨. 이 직원이 여긴 무슨 일일까.

아니, 이유를 떠나서 직원이 왜 ‘직접’ 보고하러 온단 말인가. 보고 체계마저 잡히지 않은 모습을 보니, 신임 감독의 독설이 더욱 와 닿는다.

지끈.

다시금 편두통이 찾아온다. 상당한 고통이었지만 브라이언은 내색하지 않고 이유를 묻는다.

“어쩐 일입니까.”

“사장님. 큰일 났어요. 큰일!”

“···일단 앉으시죠.”

“앗. 네.”

구단에서 가장 어린 여직원은 허둥지둥 자리에 앉는다. 서류는 탁자에 놓아둬도 될 텐데. 그 어리숙한 모습에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다.

“큼큼. 서류는 그냥 탁자에 내려두면 됩니다.”

“앗! 죄, 죄송합니다.”

“···홍보팀장은 어디 가고 왜 존슨 씨가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저, 그게, 팀장님은 오늘 병가를 내셔서요. 어제부터 몸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

기가 찬다. 상급자한테 일언반구도 없이 병가를 내다니. 감독의 말은 토씨 하나 틀리는 부분이 없다.

“후우. 아프면 어쩔 수 없죠. 그래서 그 큰일이 도대체 어떤 일입니까?”

“후후. 놀라지 마세요.”

에밀리아는 신이 나서 들고 온 서류뭉치를 쫙 펼친다. 각종 지표와 그래프가 한가득하다.

“···이건?”

“SNS 반응이 폭발적입니다. 순식간에 팔로워 수가 두 배 이상 증가했어요. 포츠머스 지역민은 물론, 한국의 팔로워도 급증했습니다.”

“호오···.”

“지난 3개월 동안 무슨 짓을 해도 관심조차 없었는데, 한 방에 이목을 끌었습니다. 신임 감독님의 기자회견이 엄청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고밖에 보이지 않아요.”

“놀랍군요.”

브라이언은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신임 감독은 분명 이것마저 계산했던 게 분명하다.

“또한 전년 동월 동일 대비 시즌권 판매량이 소폭 상승했습니다. 꽤 고무적인 일입니다. 강등 후에 판매량이 오르다니. 전례가 없던 일이에요.”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네?”

“아닙니다. 또 보고할 사항이 남아있습니까?”

“아, 네. 한국 축구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신임 감독님의 이야기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어인지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지만요.”

“그렇다면,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는 게 어떻습니까. 구단에서 지원하겠습니다.”

브라이언은 선뜻 제안했다. 얼굴엔 놀라움이 가득하다. 감독은 도대체 어디까지 내다본 것일까. 인간의 능력이 아니었다.

“저, 정말이요? 저야 환영입니다.”

에밀리아는 브라이언의 제안을 쉽게 승낙했다. 온라인 홍보 담당이라는 직책에도 도움이 될뿐더러 한류에도 관심이 있었으니까.

“좋습니다. 그럼, 다른 보고 사항은 없습니까?”

“네.”

“앞으로도 온라인에 대한 반응은 직접 보고해 주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직원으로서도, 서포터로서도요.”

방긋 웃는 에밀리아의 모습을 보니 브라이언은 감독이 말한 작은 불빛이 무엇인지 감이 잡혔다.

이참에 그와 좀 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온다.

“아, 그리고 성 감독님이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아마 훈련장일 것 같습니다만.”

“저··· 그게···.”

머뭇거리는 에밀리아. 그 모습에 브라이언은 의아함을 느낀다. 반응을 보아하니 훈련장에 없다는 건데, 그럼 도대체 어디를 갔단 말인가.

“말해보세요.”

“저도 지나가면서 들은 거라···. 그, 감독님은 오늘 반차를 내셨어요.”

“···네? 다, 다시 한번 말해주시겠습니까? 지금 반, 반차라고?”

“네···. 내일 오후까진 돌아오신다고···.”

“···.”

할 말을 잃었다. 취임 이틀 차에 반차를 쓰는 감독이라니.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황당한 사건이다. 혹시, 가족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

“혹시 어떤 이유인지도 들으셨습니까?”

“저··· 그게···.”

에밀리아는 머뭇거리더니 간신히 답을 내놓는다.

“약을 치러 가신다고···.”

3.

내가 향한 곳은 복지로 유명한 북유럽의 한 나라. 엄청 추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선선하다. 더군다나 공기가 참 맑아 폐가 뻥 뚫린 기분이다.

“흐음. 경관이 참 좋군.”

여행하러 온 기분이다. 하기야, 내 사비를 털어서 왔는데 여행 기분은 내줘야 덜 억울하겠지.

마음 같아선 느긋하게 힐링하고 싶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지금은 단순히 약을 치기 위해 온 거라 오래 있긴 힘들다.

공항에서 약 150km 떨어진 외딴 시골 도시 브뤼네. 이곳을 연고지로 하는 브뤼네FK의 유소년선수가 나의 목표다.

멋들어진 경관에 취해, 체감으론 금방 도착한 브뤼네FK.

이제 막 훈련이 끝나 어린 소년들이 귀가한다.

모두가 떠난 훈련장.

거기엔 한 소년이 남아 홀로 공을 다룬다.

난 그 소년에게 천천히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음? 아저씨 누구세요?”

“나쁜 사람은 아니란다.”

“그래 보이네요.”

소년은 겁도 없는지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하긴 무서울 게 없겠지. 이미 신장이 170이 넘었으니까. 182인 나랑 별 차이도 없다.

“그나저나, 참 잘 생겼구나.”

“네? 진짜요?”

내 칭찬에 소년은 얼굴에 화색을 띄웠다. 정말 좋아한다.

짜식. 얼굴값 하는구만.

“그럼. 진짜지 가짜겠어?”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전 태어나서 한반도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요. 엄마도 형들과는 달리 남자답네, 라고만 해줬어요.”

소년은 언제 화색을 띄웠냐는 듯,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시무룩한 표정이 꽤 귀엽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거야, 사람들이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지. 눈동자 대신 사탕이 박혀서 그런 거란다.”

“푸흡. 아저씨 재밌네요. 그래도 선뜻 믿기 힘드네요.”

“아냐. 멋들어진 금발 머리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떠오르게 한단다.”

“디,디카프리오요? 그 타이타닉!”

“그래. 그 디카프리오.”

“헤헤. 아저씨가 보는 눈이 있네요. 저도 종종 거울을 보면, 디카프리오가 보이긴 했어요.”

“···훌륭한 안목을 가지고 있구나? 너랑 나랑은 주파수가 잘 맞는 거 같아.”

난 간신히 맞장구를 쳐줬다. 그러자 소년은 내가 무척 마음에 드는 듯한 눈빛을 빛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저씬 꽤 마음에 드네요. 이름이 뭐예요?”

“성소하란다.”

“신기한 이름이네요. 그래도 입에 착 감기는 게 정감이 있어요. 근데,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남은 개인 훈련이 있어서요···. 아쉽네요.”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소년.

나와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훈련을 최우선으로 두는 모습부터가 남다르다. 과연, 미래의 슈퍼스타답달까.

“오. 아저씨가 훈련 좀 도와줄까?”

“네? 아저씨, 축구 할 줄 알아요?”

“그럼. 이래 보여도 감독이란다.”

“정말요?”

“그럼. 잉글랜드의 리그2 포츠머스라고 들어봤니?”

“아니요. 전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만 봐서요. 아, 리즈경기도 빼놓지 않고 챙겨보죠.”

하기야, 멀리 외국에 사는 소년이 리그2를 볼 방법은 없을거다.

“하긴. 모를 만도 하지.”

“그래도 아저씨가 거짓말하는 거 같지는 않아요. 그럼 잠깐 도와주실래요?”

아직 얼굴에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금발 머리의 소년, 에링 홀란드는 밝게 웃으며 권유했다.

물론, 난 이 제안을 거절할 마음이 없었다.

< 006화. 홀란드와 제라드. (1)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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