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5화 (5/306)

< 005화. 임기 첫날. (4) >

1.

“괜찮은 시합이었다. 주전팀은 너무 상심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들의 약점을 이미 파악했기에 이겼던 거다.”

주욱 늘어선 선수단에 위로의 말을 건넸다. 후보를 키울 예정이지만 주전 선수 전부를 버릴 순 없는 법.

잠재력은 낮을지 몰라도 현재 실력은 이들이 뛰어나다. 그중 몇은 잘만 다듬으면 꽤 훌륭한 선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했고.

“이것만으로 너희들의 인정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내 훈련과 지시에 당분간은 따를 생각이 들었다고 본다.”

선수들은 기계나 데이터 덩어리가 아니다. 나와 같은 사람일 뿐.

보통, 사람이 다른 이를 인정하기엔 꽤 오랜 시간이 흐른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아닌 이상.

“패배자들은 닥치고 따르라고! 우리 신임 감독님과 함께라면 우린 위로 올라간다!”

뭐, 보통이 아닌 사람이 종종 튀어나오기도 했으니까.

나는 의기양양하게 외친 조쉬 킹을 완전히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쟤 말은 신경을 쓰지 말아. 너희들에게도 기회는 있으니까.”

“어차피 한 달은 벤치를 달궈야 하지 않습니까? 전 경기를 뛰고 싶습니다. 비록 패배했지만요.”

주전 선수인 존 말로리가 의견을 표했다. 꽤 불만이 많은 표정이다.

“그래, 내뱉은 말은 지켜야지. 그런데 내가 오늘부터 한 달이라고 했지, 리그 시작부터 한 달이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안 그런가?”

“···.”

“···.”

선수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개노답 삼형제를 제외한 나머지 주전들은 표정이 밝아졌고 후보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저기, 감독님! 이건 저희를 속이신 거 아니에요?”

킹이 바로 불만을 표출했다.

역시 녀석은 반골의 상이야. 위연을 바라보던 제갈량의 마음이 이해된다.

“속이진 않았지. 프리시즌 중엔 친선 경기가 다수 잡혔다. 그 친선 경기에서의 선발보장은 상당히 좋은 조건이지 않나?”

“···그건 그렇죠.”

친선 경기에서 합을 더 자주 맞춘 선수들이 시즌 초반을 이끌 거다. 즉, 프리시즌의 한 달 선발 우선권도 무시하지 못할 좋은 기회라는 이야기다.

“주전에게도 그리 쉽지 않지 않은 기회일 거다. 그래도 1군은 원래 기본실력이 뛰어나니까, 금방 기회를 잡으리라 생각한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오늘의 패배를 만회하겠습니다.”

“좋은 자세야, 말로리. 유심히 지켜보도록 하지. 거는 기대가 커. 또 다른 의견은 없나?”

“저도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대천사 삼형제 중 하나인 말콤 우드가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이 35세. 구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의지를 많이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지는걸.

“그래. 뭐든 물어봐라.”

“감독님이 꽤 능력을 갖춘 분이라는 사실은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뭐가?”

“비선출 출신에 축구계 경험이 10년도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감독이 보여주기 어려운 태도와 선수기용은 위화감이 듭니다. 뭐랄까요. 분석을 넘어 예지하는 느낌입니다. 우습게 들리시겠지만요.”

“···.”

연륜이라는 건가.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이질감을 은연중에 느낀 듯싶다.

‘하긴. 이상할 만도 하겠지.’

수년은 앞서나간 포지션 변경이었으니까.

신임감독이 시도하기엔 꽤 파격적이겠지만 미래를 안다면 당연한 선택이다.

마이클 반즈. 이 선수는 1년 뒤, 세리에 2부리그로 이적해 팀의 승격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그리고 5년 동안 세리에A에서 수준급 미드필더로 이름을 날리고. 이때 포지션이 3선의 딥라잉 플레이메이커였다.

케빈 도슨과 조쉬 킹도 비슷하다. 단지 이 둘은 내 작품이었지만.

“그만큼 취임 전에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해주면 편할 거야.”

“공부라···. 정말 노력하셨군요. 알겠습니다. 그 노력에 보답하기 위해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드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

오전은 귀신같은 속도로 흘러 지나갔다. 선수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나는 아쉽게도 퇴근하지 못했다.

아직 할 일이 태산이라. 원래 감독이란 취임 첫날이 가장 바쁘지 않던가. 풋볼매니저만 해봐도 충분히 공감할 거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감독, 성소하입니다.”

구단 내 선수식당에서 프런트와의 미팅이 시작되었다. 미팅이라기보단 그냥 간단한 자기소개 정도였지만.

인사를 마친 나는 천천히 미우나 고우나 당분간은 한솥밥을 먹어야 하는 얼굴을 훑어봤다.

‘웅장하다 웅장해.’

무능한 홍보팀장, 수포자 재무팀장, 문과 출신 시설관리팀장.

하나같이 레전드를 갱신한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영양사와 팀닥터, 그리고 기록분석관은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

이들마저 폐급이었으면 정말. 하.

상상만 해도 몸에 소름이 돋는다.

코치진 또한 별걱정은 없다. 실력도 나쁘지 않았고 우두머리인 밀러 아저씨를 일단 제압해두었으니까.

하나둘씩 천천히 교체할 예정이기는 하지만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다.

바로, 기자회견.

기자회견은 꽤 중요하다.

미디어 핸들링. 이 능력은 감독을 평가하는데 큰 요소 중 하나다.

백날 무능력한 홍보부가 일을 해봤자 감독의 기자회견 한방으로 더 큰 효과를 누리는 경우가 많았다. 4부 리그라면 효과는 더욱더 배가 되었고.

아쉽지만 전에는 기자회견을 완전히 망쳤었다. 무거운 분위기와 기자들의 거침없는 팩트폭격, 서포터 대표의 신랄한 비판은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나는 브라이언과 함께 단상에 앉아 기자들과 서포터 대표를 맞이했다.

“적어준 대로만 하면 쉽습니다. 긴장하지 말고, 튀어 나가지 않으면 무난히 흘러갈 겁니다.”

내 옆의 브라이언이 슬쩍 주의를 주었다. 아마도 오늘 보인 내 행태에 불안함이 스며든 거겠지.

“알아서 잘할 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에게 불만이 있습니까?”

“아니요.”

불만은 무슨. 불만 같은 수줍은 감정이 아니다. 그냥 증오지. 이 감정을 숨길 생각은 없다.

놈도 나와 똑같은 월급쟁이. 결국, 살아남는 건 더 능력이 있는 쪽이다.

팀을 4부까지 강등시킨 무능한 CEO.

팀을 구렁에서 구원하는 유능한 감독.

누가 살아남을지 뻔하지 않은가.

어차피 사라질 인간에게 굽신거릴 마음의 여유 따윈 지난 6개월 동안 사라졌다.

“성격이 며칠 만에 달라지셨군요. 개인적인 사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개인적인 사정이라. 있을지도 모르지만 신경을 쓰실 이유는 없을 텐데요.”

“···.”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전 당신의 상상 이상으로 잘 해냈습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브라이언은 마지못해 긍정했다. 확실히 오늘 내 행보는 20대 후반의 풋내기가 보여줄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전 알아서 잘하니까 불필요한 걱정은 하지 말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웃어요. 웃어. 곧 시작이니까. 카메라 다가오는데 표정 관리해야죠.”

“···.”

씨익.

카메라가 다가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나와 브라이언은 미소를 지었다.

짜식. 녀석도 축구계에서 구른 세월이 세월인지라 어설프진 않다.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 첫 번째 질문이 쇄도한다.

“감독님. 감독님은 노아 캐슬이십니까 성소하 이십니까.”

첫 번째 질문의 주인공은 지역 주간지의 기자였다. 축구와 상관없는 질문이라 분위기가 조금 경직된다.

브라이언은 넘어가라고 눈치를 줬지만 모처럼 첫 질문인데 받아 줘야 인지상정.

“둘 다입니다. 복수국적자이니까요.”

“제가 알기론 한국은 복수국적이 허용되지 않는 나라라고 알고 있습니다.”

“법이 바뀌었습니다.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하면 가능해졌습니다.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하지만요.”

“그렇다는 이야기는 군대를 다녀오셨다는 겁니까?”

“네.”

한국의 의료수준은 뛰어났다. 내 망가진 다리도 완벽하게 치료해낼 만큼.

덕분에 큰 수술을 경험하고도 재신검을 받아야 했고, 현역 판정이 떴다.

당시에는 큰 고민은 없었다.

건강보험 덕분에 싸고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았으니, 인간으로서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나.

기브&테이크. 내 신조다.

한국 국적을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깔끔하게 갔다 왔다. 물론, 훈련소 첫날에 붉은 취침등을 등에 업고 모포를 치며 후회했지만.

“후후. 대단하시네요. 군대를 다녀온 감독은 감독님이 유일하실 겁니다.”

“그런가요? 그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내주세요. 아, 물론 ‘사우스’코리아입니다. ‘노스’라고 하시면 저 잡혀갑니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남한과 북한의 관계 정도는 아니까요!”

조금 경직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소한 질문들은 어렵지 않았다.

“리그2 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감독입니다. 부담감이 상당할 텐데요. 대처에 자신감이 있으신지요?”

“동서고금을 통틀어 똑같이 나오는 말이 있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예외가 많지만 전 이번에 이 말을 증명할 예정입니다.”

“챔피언십 리그의 밀월의 수석코치 감독직을 내려놓고 리그2로 오신 이유가 뭡니까? 객관적으로 보자면 손해만 있을 뿐인데요.”

“하하. 맞습니다. 연봉이 절반 넘게 날아갔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사랑하는 포츠머스의 제안을 거절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미스터 포츠머스’의 피가 흐르지 않습니까.”

미스터 포츠머스. 아버지의 별명이다. 취향이 독특하신 분이었지만 이래 봬도 세계적인 유망주셨다.

심장질환으로 21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하셨지만 발자취는 대단하셨다. 2부 리그 출신의 국가대표 승선도 대단한데 유로 예선에서 골 폭풍을 몰아치셨고 스타덤에 올랐다.

수많은 프미리어 리그 구단의 러브콜을 모조리 무시하고 포츠머스만 사랑하셨던, 이상하지만 로망이 있던 분이셨다.

“결국 부자가 모두 ‘낭만’을 택하신 거였군요. 꽤 괜찮은 기삿거리네요.”

“그럴지도 모르겠죠. 모두 아시다시피 요즘 축구계에 로망은 사라졌으니까요. 그렇다고 너무 오글거리게 ‘최후의 로맨티시스트’라는 타이틀은 사양하겠습니다.”

“후후. 제가 잘 조절하겠습니다.”

분위기는 어느새 굉장히 화사해졌다. 과거와 같은 질 나쁜 질문은 보이지 않았다.

기자들도 알았을 거다. 이 감독은 약점을 꼬집는 방법보다 이런 방식으로 해야 기삿거리가 잘 나온다는 사실을.

“좋군.”

어느덧 자연스럽게 내 페이스로 넘어온 기자회견 분위기에 브라이언이 감탄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없긴 하다. 단지 저 인간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곧 진짜 공격이 시작될 테니까. 본경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아하니, 감독의 언론대처 능력은 준수하다고 평가됩니다.”

“···.”

올 것이 왔다. 좌측의 서포터석에서 묵직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엘 펠트만. 네덜란드에서 이민을 온 서포터 대표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능력에는 의문이 생기지 않기가 어렵군요.”

“계속 말씀해 보세요.”

내가 손짓하자 펠트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쥐었다.

그 모습이 마치, 불곰이 가지를 든 모습이라 웃음이 나올뻔했다.

“감독은 겨우 28세입니다. 축구계는 경험이 중요하죠. 비선출인 28세의 감독에게 경험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이미 20년 전부터 이미 감독직을 맡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런고로 ‘약간’의 경험만 채운다면 누구 못지않은 감독이 되리라 자신합니다.”

“약간의 경험이라. 그 약간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내포한 표현입니까?”

“3년입니다.”

난 주저함이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펠트만의 얼굴이 붉어진다.

“3년이요? 리그2에서 3년을 허비하겠다는 말입니까?!”

펠트만은 콧김을 내뿜으며 분기탱천했다. 자리가 사석이었다면 내 죽탱이를 날릴 기세다.

충분히 화날 만하다.

포츠머스. 1898년에 설립한 유서 깊은 구단.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초창기를 제외하고 리그2에서 3년 이상을 보낸 적이 없다.

지금은 빌빌거리지만 나름 1부와 2부를 왔다 갔다 하던 근본 있는 구단이기도 하고.

“진정하세요!”

“펠트만 씨 지금은 첫 기자회견 자리입니다. 흥분을 가라앉히시죠.”

“일단 감독의 말부터 듣자고.”

펠트만이 흥분하자 사람들이 그를 뜯어말리려 한다.

“잠깐.”

난 말리려는 사람들을 제지하고선 천천히 펠트만과 눈을 마주쳤다.

이글이글.

두 눈동자에 화산이 폭발했다.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면 뚝배기를 깨버리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펠트만 씨.”

“네.”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그 의미를 이해한다’라고 말이죠.”

“···그래서?”

“제 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 3년이라고 했지 리그2에서 3년이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펠트만은 이 애송이가 무슨 약을 파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난 씨익 웃으며 펠트만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3년 내로 프리미어 리그로 복귀할 겁니다. 그 시간이면 제가 프리미어 리그의 감독이 되기엔 충분한 시간이니까요.”

축구계에는 ‘3년 계획’이 유명하다.

솔샤르의 3년 계획.

아르테타의 3년 계획.

무리뉴의 3년 계획.

구디브닌, 아니 에메리의 3년 계획.

그러니까 나도 한번 써보자고.

그 3년 계획.

< 005화. 임기 첫날.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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