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4화. 임기 첫날. (3) >
1.
연습경기의 휘슬이 울리기 5분 전.
수석코치 밀러의 1군 팀은 의욕이 충만했다. 정규리그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투지가 흘러넘친다.
주전팀은 오만방자한 검은 머리 혼혈 애송이의 콧대를 부러뜨려주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나보다 어린 새끼가 말하는 본새하고는. 가뜩이나 강등당해서 기분 더러운데 화풀이나 해야겠군.”
“뭐? 한 달 동안 선발에서 뺀다고? 첫 경기도 못 하게 해주지. 비선출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깝죽거리네.”
“하, 퍽킹 차이니즈가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퍽킹 화이트의 퍽킹 파워를 보여주지.”
그중에서도 3명이 가장 열을 올렸다.
소하의 회상으로 말하자면, 그 무시무시한 개노답 삼형제였다.
꼰대, 부심러, 레이시스트.
환장의 조합이었다.
이들은 소하가 모조리 방출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오죽했으면 경질 뒤에도 종종 악몽에 이들이 나왔을 정도.
소하는 개인 면담으로 관계를 풀어보려 했지만, 답도 없었다.
“흐음. 감독은 무슨 생각이지?”
“꽤 재밌는 감독이잖아.”
“적어도 배짱은 괜찮아.”
대천사 삼형제도 존재했다.
부임 초기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신병에 걸렸을 거다.
다만 이들은 나이가 많거나, 라커룸 영향력이 적어 큰 도움을 되지 못했을 뿐. 아쉬운 일이었다.
양 팀의 진형은 4-4-2 와 4-3-3.
밀러가 맡은 1군 팀의 4-4-2 대형은 잉글랜드 축구의 기본이자 포츠머스의 기본 진형.
타이트한 수비진과 미드필더 라인의 간격. 그리고 최전방 투톱인 빅&스몰조합을 이용한 킥&러쉬 전술.
석기시대 전술이지만 효율성은 이미 증명이 됐다.
“흥. 풋내기가 어디서 본 거는 있나 본데, 그냥 웃음만 나오는군.”
밀러는 소하가 가져온 4-3-3 대형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많은 팀이 사용하는 진형이지만 포츠머스는 작년까지 4-4-2 대형을 사용하던 팀.
선수들이 새로운 진형에 익숙할 리 없잖은가. 축구를 보기만 한 비선출 풋내기의 전형적인 발상으로 보였다.
“심지어 저 의욕 없고 뛰기 싫어하는 푸시에게 원 볼란치를 맡기다니. 게임을 너무 많이 했어.”
기가 찼다. 마이클 반즈를 원 볼란치, 그러니까 홀로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두다니. 코웃음이 나온다.
심지어 반즈의 포지션은 2선과 1선.
매우 공격적인 선수다.
수비력은 리그2에서도 절망적이었고.
저런 선수에게 포백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겼다니. 지겠다는 이야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가관이군. 중앙 미드필더인 케빈 도슨을 중앙수비수로 기용하고 윙인 조쉬 킹을 원톱으로? 하. 멍청한 놈.”
아무리 봐도 중증 명장병이다.
자기가 무슨 펩 과르디올라라도 되는 줄 아나?
애송이가 분명하다.
“얘들아, 아주 박살을 내줘라!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아주 잘근잘근 밟아버리라는 말이야!”
밀러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패배할 거란 생각은 먼지 한 톨만큼도 들지 않았다.
2.
“씹새끼들이 뭘 꼬나봐.”
경기에 앞서 날 노려보는 개노답 삼형제의 모습에 기가 찬다. 저 씹어 먹어버려도 시원치 않은 개새끼들.
저 새끼들 때문에 내 감독 1년 차는 정말 지옥이었다. 그중 레이시스트는 내 4년 차까지 같이 한 놈이라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린다.
당시에는 그냥 쳐내기도 힘들었다.
놈들의 축구 실력은 포츠머스란 팀에서 확고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내 신생 포츠머스엔 저 쓰레기들의 자리는 없다.
나는 쓰레기들에게 관심을 끊고 슬쩍 밀러 아저씨를 흘겨보았다.
“흥. 아주 여유 만만하네.”
내 변칙적인 선수기용에 비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보인다. 뭐, 이해는 간다.
저 아저씨의 상식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방법이었으니까.
반즈의 원볼란치 기용.
조쉬 킹의 원톱.
도슨의 중앙수비수 기용.
파격을 넘어 어설퍼 보일 테지.
하지만 내가 누군가.
비선출로 험난한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10년을 버텼다.
저 친구들이 최고의 활약을 보여줄 포지션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반즈는 특유의 종잇장 같은 몸 떼기 때문에 1선과 2선에서 실패한 선수. 압박을 도저히 버텨내지 못했으니까.’
기술은 프리미어급이지만 피지컬이 휴지 쪼가리라 실패한 선수다. 툭, 치면 박살 나는데 제대로 뛸 리가.
그 덕에 반즈의 자신감은 맨틀까지 떨어졌고 4부 리그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압박이 없는 자리로 옮겨주는 것이 감독이 된 도리.
압박이 없는 3선의 자리라면 녀석은 자신의 장점을 모조리 뽐내겠지.
그럼 수비는 어쩌냐고?
수비는 깔끔하게 포기다.
난 말이야, 공격축구를 할 거라고. 3골 먹히면 4골 넣는 본프레레식 축구를!
-삐익.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공은 내 팀부터.
공을 주고받는 모습이 아직 어색하다.
예상한 결과다. 새로운 포지션과 새로운 감독의 지시는 머리를 혼란케 하겠지.
“에라. 모르겠다. 받아 반즈!”
수비에 둘러싸인 원톱의 조쉬 킹이 냅다 백패스를 갈겼다. 참, 패스의 질이 왜 4부 리그 선수인지 여실히 증명한다. 내가 패스해도 저거보단 구질이 좋을 거다.
그래도. 1군 선수가 셋이나 붙었는데, 버텨내는 저 피지컬!
바로 저 엄청난 피지컬이 10년 후 녀석을 국가대표까지 이끄는 원동력이다.
“후우. 3선이라. 어색한데.”
쓰레기 같은 백패스를 우아하게 받은 반즈는 여유가 넘쳐 보인다. 좋아, 보여주라고. 너의 능력을. 너의 패스를.
반즈는 압박이 없는 편안함이 생소한 듯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아한 자세로 멋들어진 전방 킬러패스를 내지른다.
강한 탑스핀이 걸린 공은 전방으로 쇄도하던 조쉬 킹을 향해 날카로운 곡선을 그리며 뻗어간다.
얼핏 보면 꽤 무리한 패스다. 이미 조쉬 킹은 두 명의 ‘중앙 수비수’가 달라붙어 있었으니까.
씨익.
절로 웃음이 나온다. 계획대로다.
내가 아는 후레자식, 조쉬 킹은 말이야, 저걸 이겨낼 테니까. 저 피지컬을 사이드에서 써먹었으니 성적을 국밥 말아먹듯 후루룩 말아먹지.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힘을 폭발시키는 조쉬 킹. 내 바람대로 두 명의 덩치를 떨쳐낸다. 그와 동시에 조쉬 킹의 주발인 오른발에 안착하는 반즈의 패스!
조금 균형을 잃은 킹이었지만 패스가 워낙 좋아 그대로 공을 끌고 골대로 쇄도한다.
골키퍼와 1대1 상황!
끝내라. 머저리 새끼가 아니라면.
네가 통수왕일지는 몰라도 머저리는 아니잖냐?
-텅! 철썩!
킹은 골대 오른쪽 구석으로 강력한 슛을 시도했고, 골포스트를 한번 맞추며 시원하게 골망을 갈랐다.
“예에쓰!”
포효하는 조쉬 킹. 엣된··· 얼굴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척 행복해 보인다.
“좋았어!”
주먹이 절로 불끈 쥐어졌다. 기뻐서? 아니다. 어차피 이긴다는 미래는 상수다. 다만,
“씨발. 거기서 꼭 강슛을 해야 하나? 빡대가리 새끼인가.”
못 넣는 줄 알았다. 골포스트를 맞을 땐 심장이 철렁했다. 힘 좋다고 자랑하는 건가? 나중에 제대로 갈궈야겠다.
“하하! 감독님. 정말 되네요?”
1분 만에 선제골을 넣은 조쉬 킹이 나에게 달려와 환한 미소를 날렸다.
음. 좀 부담스럽군. 근데 진짜 18세 맞냐? 선수 연명부 좀 다시 봐야지.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적응이 쉽지 않다.
“당연히 되지. 내가 말했지? 넌 존나 세다고. 다 부숴버려!”
“네! 생각보다 선배들이 약하네요.”
“···. 그래.”
아냐. 네가 그냥 강한 거야.
“지금처럼만 해. 어깨 먼저 집어넣고 배에 힘 딱주면 누구도 널 막지 못한다. 그리고 저 둘은 무게중심이 높아. 팔로 밀쳐버리면 균형을 잃을 거다.”
“네! 감독님.”
선천적으로 힘을 쓰는 방법을 아는 녀석이다. 기초 정도만 가르쳐줘도 몸을 제대로 사용할 거다. 거기다가 1군의 약점을 알려줬으니, 알아서 잘할 테지.
“호오. 아직 어색하지만, 널널해서 좋은 자리네요. 3선이라는 건.”
멋진 패스로 1어시스트를 적립한 반즈도 나에게 한마디 걸었다.
“마음에 드냐?”
“글쎄요.”
“구라치네. 네 성격과도 맞잖아? 그 좋아하는 과정을 계속 만들라고.”
“후후. 알겠습니다. 감독님.”
새끼들. 이제야 주둥이에서 감독님이란 소리가 나오네. 이 정도면 꽤 성공일지도 모르지만, 겨우 시작일뿐.
“아주 개작살 내버려!”
난 사심을 가득 담아서 외쳤다.
3.
전후반 20분씩, 40분의 연습경기는 빛살 같은 속도로 끝났다.
결과는 6-3. 압도적인 대 승리였다. 심지어 우리의 통수왕 킹은 멀티-해트트릭을 달성했다. 녀석에게 당한 1군 수비수는 혼이 나갔다.
힘도 달리는데, 약점까지 공략당하니 버틸 리가 있겠나. 그냥 발려야지.
“오! 저는 공격수가 체질이었나 봐요. 6골이나 넣다니. 그렇죠? 감독님.”
“···. 마음대로 생각해라.”
난 뚱하게 대답했다. 미래의 배신 때문이 아니다. 그냥 찬스를 너무 날렸다.
강슛선플이라도 달렸나? 왜 골키퍼를 제치고도 골포스트를 맞추는데.
“드디어 제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거 같아요. 조금 아쉬운 점이 있지만요.”
“아쉬운 점?”
“슛이 좀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호오. 이 자식. 자신의 단점을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까지 갖췄었나? 훌륭한 자아 성찰이다. 성장했어··· 조쉬 군···!
“수비수를 제압하느라 힘을 다 썼는지 슛에 힘이 실리지 않더라고요.”
“···.”
뭐? 힘이 실리지 않은 슛이었다고?
18세의 조쉬 킹은 내가 알던 녀석보다 힘이 넘치는 인간이었나보다.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라는 역할은 상상 이상으로 재밌군요. 감독님.”
“그렇지? 반즈 너에게는 딱 맞는 옷일 거라고 믿는다.”
“대단하시네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저의 활용법을 찾아내다니요.”
“그동안 널 맡았던 감독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눈을 가졌던 거겠지.”
“후후. 칭찬 감사합니다.”
반즈는 특유의 기술과 패스 능력으로 경기를 완벽하게 조율했다. 사령탑으로서 선수를 진두지휘하는 모습은 내가 알던 그가 맞나 싶었다.
이 정도 일 줄이야. 상정 외의 결과다.
준수한 능력을 보여줄 거라고 계산했지만 경기를 완전히 지배할 줄 몰랐다.
프리미어 리그 출신이 어떤 존재인지 여실히 보여줬다.
“놀랍습니다. 감독님. 전혀 익숙하지 않은 진형과 역할인데, 적응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도슨도 한마디 거들었다. 경기가 뜻대로 흘러갔다는 기분 좋은 미소 속에 어리둥절함이 숨어있었다. 하기야, 난생처음 맡은 중앙수비수라는 역할이 너무 편해서 놀랐겠지.
“넌 원래 수비수가 최적이었으니까.”
“그런 듯싶습니다. 어떻게 저 자신도 모르던 특기를 찾아낸 겁니까?”
“별거 있겠어? 감독이니까 당연한 거지. 앞으로 너는 하부리그의 버질 판테이크가 될 거야.”
우수한 신체 조건과 빠른 발.
그리고 프리미어 리그 급 축구 지능.
여기에 훌륭한 패스 기술은 볼플레잉 디펜더가 되기엔 최적의 조건이다.
회귀 전에는 이 사실을 몰랐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론, 미드필더가 아닌 수비수로서 갈고닦을 부분은 많이 남았지만.
“네? 버질? 그게 누구입니까.”
“큼큼. 그런 선수가 있어.”
아차차. 지금 시대엔 버질 판데이크가 월드클래스 급 선수가 되기 전이었지.
아직 하루 차라 오락가락한다. 더욱더 입조심을 해야겠다.
“대단하십니다. 취임 전에 이미 모든 선수의 신상은 물론 능력과 잠재력까지 분석을 끝내시다니. 정말, 진심으로 놀랍습니다. 감탄만 나옵니다.”
“벼, 별거 아니야.”
뭐야. 얘. 날 왜 이렇게 빨아. 부담스럽게. 분명 이런 캐릭터 아니었는데.
“별거 아닌 게 아닙니다. 먼저, 감독님께 의구심을 가진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큼큼. 그래. 자, 잘 따라오라고. 내 템포 맞추기 힘들 테니까.”
“넷! 감독님!”
당황스럽다. 회귀 전에도 사이가 좋았던 녀석이지만 이 정도의 존경심은 보이지 않았거늘.
같은 인물에게 전혀 다른 대접을 받자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하다.
그래도, 나쁘진 않네.
“큼큼. 제가 졌습니다. 감독님.”
어정쩡하게 슬그머니 다가온 밀러 아재가 결과에 승복했다. 혼이 반쯤 나간 듯한 표정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었다.
“좋은 승부였어요.”
“···대단한 실력이십니다.”
“뭘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비 맞은 고양이 같은 태도로 내 손을 맞잡는 밀러 수석코치를 보니 묘한 희열이 올라온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랄까. 오늘은 오랜만에 술 없이 달게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많이 남은 길고 긴 취임 첫날이 끝난다면 말이다.
< 004화. 임기 첫날. (3)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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