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3화 (3/306)

< 003화. 임기 첫날. (2) >

1.

생각해보면, 이 빌어 처먹을 망할 구단에서 ‘내 편’은 한 명도 없었다.

날 감독에 앉힌 브라이언은 그냥 개새끼였고, 구단주는 방임주의자이며 짠돌이였다. 그저 쓰고 버리기 좋은 부품 정도로 생각했겠지.

스태프진으로 보자면, 수석코치, 일반코치, 스카우트할 거 없이 모두 다 한마음 한뜻으로 나를 냉대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선수단은 더 심했지. 검은 머리의 동양계 풋내기를 감독으로 맞이한 빌어먹을 새끼들은 10살 먹은 애새끼처럼 말을 쳐 듣지 않았다.

심지어 홍보팀, 재무팀, 시설관리팀 할 거 없이 모두 다 나를 무시했음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이야. 이런 미친 자리에서 10년을 버티다니. 대단함을 넘어 머저리가 따로 없다. 성격도 참 좋았지. 지금 같았으면 쌍욕 박고 때려치웠을 거다.

‘그딴 대우는 한 번이면 족하다.’

이젠 진절머리가 난다. 이참에 모든 스태프진을 전부 다 갈아 치워버릴 거다. 그러기 위한 선제 조건은 선수단의 인정을 받고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

“반갑다. 난 오늘부터 감독이 된 성소하라고 한다.”

내 당당한 자기소개에 라커룸 안의 선수들은 이건 뭐지? 라는 눈빛을 보낸다. 확실히 호의적이지는 않다.

이해는 한다. 경력도 별 볼 일 없는 28세의 젊은 애송이가 감독으로 왔으니. 더군다나 비선출의 검은 머리를 가진 동양인 혼혈. 따르는 놈이 신기한 축에 속하겠지.

그래도 10년 전의 수줍은 자기소개에서는 관심도 주지 않았으니, 장족의 발전이다.

“눈빛들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네. 뭐, 이해는 해. 강등도 당했는데 감독이란 중요한 자리에 웬 풋내기가 굴러들어왔으니까. 솔직히 엿 같겠지.”

내가 시큰둥하게 팩트를 집어주자 선수들은 은근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선 보통 묵묵히 침묵하지 않냐? 고개 끄덕이지 마!

새끼들. 오랜만에 봤는데 반갑기는커녕 꼴 받기만 한다.

난 천천히 선수들을 훑어봤다.

10년 전엔 정말 선수단 장악에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말을 들어 처먹지 않는 새끼들이 한 박스라.

이들 중 몇몇은 정말 팀을 옮기기 전까지 내 속을 긁던 놈들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딴 일로 속 썩이기 싫다. 죽어도. 결단코! 네버!

“요컨대 이거지. 능력도 없는 놈이 머리 위에 앉는 꼴을 보기 싫다, 이거란 말이야.”

“···.”

“좋아. 그럼 내 능력을 보여주지. 너희들의 머리 위에 오를만한 사람이란 걸 보여줘야 윈윈이겠지. 어차피 오늘이 프리시즌의 시작이니 가볍게 연습경기나 한판 뛰자고.”

이미 대책은 세워뒀다. 아니, 대책이라 부르기엔 미묘하다. 애당초 회귀 전에 이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망상이었으니까.

이젠 그 망상을 현실로 만들 차례다.

2.

신임 감독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바로, 선수단 전력분석이다.

감독이란 가진 선수단으로 성적을 내야 하는 직업.

당연한 순서다.

그런 의미에서 주전과 후보의 연습 시합은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다.

“제가 후보를 맡죠. 수석코치님은 주전을 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수석코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긍정했다.

잭 밀러. 전 시즌의 수석코치.

튀어나온 뱃살과 비례해 구단 내에서 영향력이 큰 아저씨다. 코치진 대부분과 꽤 많은 선수가 이 사람을 따를 정도.

그러나 나에 대한 호감도는 최저다. 전임 감독이 잘렸을 때 자기가 감독직에 앉을 것이라 기대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덕분에 부임 첫해는 정말 힘들었다. 사사건건 딴지를 걸며 뒤에서 수작질을 부리는 터라.

덤으로 내 험담을 얼마나 하던지.

내가 직접 들을 정도니, 뒤에선 얼마나 했을지 짐작이 어렵다.

“그냥 하면 심심할 테니, 내기 하나 할까요? 밀러 수석코치님?”

“···내기요?”

뭔 개소리냐는 표정이다.

“네. 내기요. 우리 솔직해지죠. 밀러 씨는 제가 아니꼽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에이. 내가 밀러 씨라면 아니꼬울 텐데요. 유력한 감독 후보였는데, 굴러들어온 애송이가 자리를 강탈했으니까요. 그것도 비선출의 동양계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말과 다르게 은근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속마음을 정확히 짚자 인지부조화가 왔나 보다.

“내기는 간단해요. 수석코치님이 이기시면 당장 구단주님께 달려가 사표 쓰고 옷을 벗을게요.”

“뭐, 뭐라고요?”

“에이 잘 들었으면서. 덤으로 다음 감독직에 밀러 씨를 추천하죠. 어때요?”

“···.”

“제가 이기면 ‘옷 벗고 나가주세요.’라는 부탁은 무리니까, 음. 뭐가 좋을까. 좋아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노리스크 하이리턴. 어때요? 구미가 당기시죠?”

“큼큼. 너무 말 같지 않은 제안이라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슬쩍 간을 보는 밀러.

짱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럼 결정에 못을 박아 줘야겠지.

“구두계약이라 신빙성이 없을지도 모르죠. 제가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그래도, 제가 약속을 어겼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똑같은 결과일 텐데요.”

말 같지 않은 내기를 제안하고 결과에 순응도 하지 않은 몰염치한 감독!

신임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 바로 경질 열차 일등석에 앉겠지.

“흐음. 뭐, 좋습니다. 신임 감독님께서 이렇게 권유하시는데 거절하기는 예의가 아니잖습니까.”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밀러는 은근슬쩍 예의 운운하며 제안을 받았다.

예의는 지랄. 전형적인 영국놈 입에서 예의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기가 찬다.

신사라는 가면을 쓰고 전 세계적으로 패악질을 부리던 녀석들 아닌가. 적어도 내 기억으론 밀러는 전형적인 홍차였다.

‘당연히 받았군.’

밀러가 내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주전과 후보의 격차는 하위리그일수록 컸으니까.

풋내기가 주전도 아닌 후보를 맡는다고? 승리할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 이런 꿀 같은 제안은 두 번 다신 없을 테지.

“아! 주전 선수들에게도 전해주세요. 지면 최소한 한 달은 선발로 나서기 힘들 거라고요.”

“···선수들을 자극할 텐데요? 반발이 거셀 겁니다.”

“오히려 밀러 씨의 처지에서는 호재 아니에요? 부담은 모두 제가 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뜻이 정 그러시다면야.”

밀러는 히죽 웃으며 주전선수들에게 걸어간다. 걷는 자세가 이미 차기 감독과 다를 바 없이 위풍당당하다.

씰룩이는 엉덩이를 걷어 차주고 싶지만, 나중으로 미루자. 지금은 앞으로 나와 함께 첫 번째 시즌을 함께할 귀여운 2군 선수들과 만날 차례니까.

“자, 다 들었지? 너희들이 이기면 앞으로 한 달은 무조건 선발이다. 난 감독직까지 걸었어. 그러니까 그만큼 너희들을 믿는다는 거지.”

“···.”

나와 밀러의 이야기를 훔쳐 듣던 2군 선수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저기요?”

한 선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다.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케빈 도슨.

나와 함께 십 년간 동고동락한 좋은 선수다. 내 경질과 함께 크게 실망해 팀을 옮긴 친구기도 하다.

뭐, 대규모 영입으로 주전 경쟁이 어려워져서 이적했을지도 모르지만.

좋게 생각하자고.

“그래, 도슨. 오랜만이군.”

“오랜만이요?”

“아. 실수. 신경 쓰지 말고 말해봐.”

아차차. 반가운 얼굴에 실수해버렸다. 입조심 해야지. 회귀자라는 사실을 들킬 리는 없지만, 미친놈 소리는 사양이니까.

“의도는 이해가 됩니다. 그래도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역시 똑 부러지는 친구다. 머리도 좋고. 축구 지능이 매우 뛰어난 선수다운 모습이다.

“제가 보기엔 이겨도 이득이 손해보다 적을 듯 보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네? 네. 이긴다 해도 주전 선수들과 척을 질 테고, 진다면 모든 것을 잃으실 테니까요.”

“그렇다면, 검은 머리 혼혈 풋내기답게 대가리 숙이고 들어갔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만.”

“너희들도 같은 생각이겠지만, 난 애송이야. 이 정도로 하지 않는다면 인정받기까지 너무 오래 걸려.”

그동안 스트레스도 존나게 받을 거고.

“그리고, 이긴다면 적어도 너희들에게는 인정받지 않겠어?”

“···그렇죠.”

모두를 포용할 순 없다. 10년 후의 나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로서는.

그렇다면 반이라도 들고 가야지.

“저도 질문해도 됩니까?”

“그래. 해봐.”

난 쉽게 승낙했지만, 이내 입을 연 선수의 얼굴을 보고선 표정이 굳었다.

오랜만이군. 저 후레자식.

은혜도 모르는 개자식의 얼굴을 보니 표정 관리가 힘들다.

녀석의 이름은 조쉬 킹. 나이는 18살.

탄탄한 하드웨어와 빠른 스피드를 가진 유망주.

10년 전 녀석의 재능을 알아본 나는 정말 성심성의껏 키웠다. 덕분에 킹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구단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섰다.

하지만 돌아온 건 재계약 거부.

그리고 자유계약으로 챔피언십 리그 팀으로 튀었다.

돈 한 푼 쥐여주지도 않고 도망갔다는 이야기다.

그래, 맞다. 자계런.

그때 느꼈던 상실감이란.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큰 충격이었다.

진짜 친동생처럼 여겼었는데.

더 열 받는 사실은 그 후 놈의 축구 인생은 계속 잘 풀렸다는 것.

챔피언십 리그까지 씹어 먹은 녀석은 프리미어 리그의 팀에 들어갔고, 국가대표까지 승선해 월드컵까지 나갔다.

하여튼 시발. 내 뒤통수를 치는 놈들은 항상 잘나가.

“의중이고 뭐고 전 잘 모르겠고, 까고 말해 이길 수는 있습니까? 전 이겨서 선발 출장하고 싶은데.”

“똥 쌀 놈이 똥구멍 열지 못하는 거 봤냐? 내 지시나 잘 따라.”

“···네 알겠습니다.”

내 냉담한 답변에 킹은 고개를 떨궜다. 아차차. 18살짜리 애한테 너무 심하게 굴었나? 아니지. 어차피 배신할 놈이다. 그런 놈에게 잘해줄 필요는 없다.

“또 질문 없나?”

“저도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느긋한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감이 온다.

마이클 반즈. 27세.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어본 경험이 있는 선수다.

실력은 출중하지만, 의욕이 없고 멘탈이 약해 벤치만 뜨뜻하게 달궜다.

게다가 프리미어 리그 출신 선수라 리그2 수준을 아득히 초월한 급여를 받아 애물단지가 따로 없었다.

“저는 이유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하게 보는 타입이라. 어떻게 이기실 작정인지 듣고 싶어요. 이쪽과 주전의 실력 차이는 상당할 텐데요.”

“과연 그럴까?”

“···그 말은 실력 차가 없다는 말인가요? 도통 이해하기 어렵네요. 실력 차가 없다면 2군이 아니었겠죠.”

“그거야, 감독이 너희들의 최대치를 끌어내지 못해서 그렇지.”

적어도 잠재성만큼은 2군 쪽이 훨씬 뛰어나다. 그리고 난 선수 자신보다 선수를 잘 아는 사람.

무려 10년을 포츠머스의 감독으로 있었으며 미래를 아는 감독이니까.

미래의 지식을 토대로 최적화된 역할을 다시 찾아준다면, 이들의 기량은 하루 만에 스텝 업이 가능하다.

물론 무슨 헛소리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지션 변경만으로 대박을 터트린 선수는 셀 수 없이 많다.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중앙수비수로.

빅터 모지스, 윙어에서 윙백으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윙어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라모스, 풀백에서 중앙수비수로.

그 외, 가레스 베일, 티에리 앙리, 필립 람, 파비안 델프, 애쉴리 영, 안토니오 발렌시아 등등.

다 나열하기도 힘들다.

심지어, 나는 주전 선수들의 모든 장단점을 달달 외운 남자.

약점을 집요하게 공략한다면, 아직 몸이 풀리지 않은 프리시즌 첫날엔 충분히 이변을 만들 수 있다.

“호오. 그럼 저희의 최대치를 채워줄 수 있다는 말인가요?”

“당연하지.”

“굉장히 흥미롭네요. 그렇다면 전 어디서 뛰게 될까요?”

마이클 반즈는 재밌다는 듯 질문을 연거푸 던졌다. 아무런 의욕이 없던 녀석이 이런 태도라면 대성공이다.

마이클 반즈야말로 내 신생 포츠머스 1기의 핵심 선수로 점찍었으니까.

“그거야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래, 단단히 기대하라고. 그럼 다른 질문은 없나? 슬슬 경기준비를 해야지.”

“···.”

더 이상 질문은 없는 듯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이제 의욕을 좀 더 올려줘 볼까.

“솔직히 말해, 너희들. 평생 4부 리그 선수로 살고 싶진 않을 거 아니야? 4부, 3부 리그에서 10년 썩고 은퇴하면 뭐 먹고 살려고?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망할 4부에서 벗어나 위로 올라가야 한단 말이지.”

EFL 리그2, 4부리그.

프로리그의 맨 밑바닥이다.

여기서 더 내려가면 내셔널리그다. 프로와 준프로의 경계인 내셔널리그!

요컨대, 지금처럼 밥만 먹고 평범하게 축구를 한다면 노후 걱정을 해야 할 수준이다.

짧으면 10년. 길면 15년.

이 안에 평생 쓸 돈을 벌어야 하는 직업이 바로 축구선수다.

리그2의 평균 주급은 천 파운드 정도. 한화로 150만 원 선이다. ‘그럼 한 달에 4주니까 월급은 600만 원 아닌가? 개 많네.’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건 세전이다. 게다가 영국은 축구선수들의 세금을 옴팡지게 걷는 나라.

반 정도 뗀다고 치면 300만 원이다.

300만 원. 달마다 300만 원씩 고작 10년을 벌면 노후가 보장되겠는가?

절대 아니다. 불가능하다.

한국에서도 300만 원씩 10년을 벌면 폐지 주워야 할 판인데, 물가가 비싼 영국은 오죽하겠냐는 말이다.

“첫날부터 말로만 너희들이 따르길 바라진 않아. 하지만 말이야, 일단 한 번만 믿어봐라. 적어도 난 위를 노리고 있으니까. 손해 볼 건 없잖아?”

“···.”

“나와 함께 위로 가자. 그리고 위로 가기 위한 첫 발판은 저 1군 녀석들이다.”

“···.”

우렁찬 답변은 없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분명하게 달라졌다. 이 정도면 성공이다.

자, 그럼. 이제 1군 녀석들과 밀러 아저씨를 요리해줘 볼까. 맛대가리 없는 피쉬&칩스 말고 혓바닥에 착착 감기는 돼지고기 불백으로 말이야

< 003화. 임기 첫날.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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