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2화. 임기 첫날. (1) >
1.
오전을 통째로 교차검증에 투자한 결과 이건 꿈이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이른 감독직에 대한 압박감에 못 이겨 정신이 나갔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허참. 이게 그 웹소설에나 보던 회귀란 말인가? 왜 일어난 일인지는 모른다.
대략 짐작은 가지만 그 이유를 찾아내기도 힘들 테고, 찾아낼 용기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취임은 확정이야. 때려치울 맘은 없다. 다시 한번 기회를 얻은 거니까.’
꿈을 이어나갈 마지막 기회.
쫄보처럼 도망칠 생각은 없다.
쉽게 생각하자.
난 10년의 미래를 보는 감독이다.
이건··· 정말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
‘십 년간 전술적인 측면은 엄청나게 발달했어. 하프 스페이스의 활용과 공간의 이해도는 절정이었지.’
전술적인 측면만 보자면 10년 후와 지금은 비교도 어렵다. 가까이서 보면 변화가 미묘해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대단한 성장을 이루었으니까.
지금은 한참 게겐프레싱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기. 전방위 압박으로 볼을 탈취해 빠른 역습을 가져가는 전술이 대세다.
고강도 전방위 압박 전술.
크루이프즘과 사키이즘의 발전형.
나도 이 전술에 대해선 빠삭하다.
그리고 훗날, 대 유행하게 되는 콩테의 3백과 변형 3백도 머릿속에 또렷하다.
‘하지만, 그런 난도가 높은 전술은 4부딱에 어울리지 않아.’
당장 사용하기는 어렵다. 높은 수준의 전술은 높은 수준의 선수를 필요로 했으니까.
‘그렇다면, 높은 수준의 선수를 미리 점찍어두면 된다는 것 아닌가.’
축구에 인생을 갈아 넣었다. 향후 10년간의 유망주는 모두 내 머릿속에 저장돼있다.
그들 중 몇몇을 데려온다면.
내 한발 앞선 훈련 세션과 전술, 그리고 뛰어난 선수들이 하나가 된다면.
유럽을 제패하는 것도 꿈이 아니다.
‘그전에 내 자리부터 확고히 잡아야 해.’
암만 팀을 잘 꾸려나간다 해도 난 결국 피고용인일 뿐.
즉, 고용주 마음에 따라 백수가 된다는 거다.
예를 들어 ‘한지 플릭’ 감독이 있다.
그는 6관왕을 달성했지만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독일 국가대표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씹어 죽일 브라이언 새끼의 얼굴이 문뜩 떠오른다.
일방적인 경질 통보는 절대 경험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피고용인의 신분에서 벗어나야 다는 이야기인데.
축구 구단에서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바로, 내가, 구단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
암만 4부딱 구단이라도 구단 가치는 수십억 원에서 백억원 정도는 한다.
평범한 사람이 인수하기엔 꿈에서도 불가능한 액수.
하지만 난 평범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몸 아니던가.
‘비트코인.’
정확한 년도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축구 말고는 관심이 별로 없었던지라.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보니 2017년도에서 2018년도에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던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주급을 모조리 털어서 비트코인으로 사둔다면 구단인수는 문제도 아니다.’
어디 보자.
지금 비트코인 시세가, 130달러군.
대충 15만 원이다.
이게 최대 8천만 원을 찍는다는 이야기지? 하하.
당연하게도 미래가 변할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본디, 내가 산 주식과 비트코인은 떡락하지 않던가.
그래도.
미래를 어느 정도 안다는 것만으로 10년 전의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아 오른다. 이것은 뭘까. 그래. 고양감이다. 무언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회귀에 대한 의문은 없다.
내 행동으로 바뀔 미래에도 관심 없다.
이젠 앞만 볼 시간이다.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포츠머스의 감독으로서 유럽을 제패하고야 말 것이다.
2.
다음 날, 첫 미팅의 시간이 다가왔다.
6개월 만에 만나는 브라이언 호프만.
이 씹새끼의 면상에 하이킥을 먹여주고 싶군.
알겠지만, 이 뺀질이가 상석은 아니다.
우리 구단주 할배가 상석이지.
저 브라이언, 빡빡이는 사장일 뿐.
우리 위대한 돈줄, 아니, 구단주님이 고용한 사장. 그러니까 CEO.
축구 구단의 생태계를 보자면,
구단을 소유한 구단주.
구단을 운영하는 CEO, 사장.
회사 내 축구를 담당하는 단장.
이렇게 3대장으로 나뉘어있다.
사실, 3대장이라 부를 위치도 아니다.
그냥 돈줄인 구단주가 최고 존엄이고 나머지는 월급쟁이다.
즉, 저 구단주 할배도 내 경질에 찬성했다는 이야기다. 구단주가 반대한다면 암만 회장이라도 날 자르지는 못할 테니까. 최소한 묵인은 해줬겠지.
후후. 후회할 거야, 영감.
“반갑군. 성소하라고 했나? 앞으로 성 감독이라고 부르겠네.”
인자한 웃음과 함께 구단주 할배가 인사를 건넸다. 저 웃음을 보니 10년 전이 떠오른다.
잔뜩 긴장해서 눈도 못 마주치던 풋내기 같은 시절.
하지만 이 몸은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경험하고 경질까지 당했던 몸.
쫄 이유가 없다.
난 당당하게 다리 꼬고 대답했다.
“그냥 편하게 부르고 싶은 데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반갑습니다. 구단주님.”
“허허. 그나저나 눈빛이 좋군.”
“네?”
“눈빛이 살아있다는 말일세. 자신감이 넘실거리는군. 심지어 그 안에 연륜마저 보여. 28세라는 나이를 뛰어넘는 연륜이.”
“···.”
아따. 노친네, 신기라도 들렸나.
눈빛만 보고 사람 속을 들여다보네.
괜히 농장 출신의 촌뜨기가 거대한 사업을 일으킨 게 아니었다.
“브라이언. 자네가 말한 이미지하고는 매우 다르군. 최소한 ‘아직은 어리숙하지만, 잠재성은 확실한 친구’는 아닌 듯싶네.”
“···며칠 만에 분위기가 달라졌군요.”
브라이언은 힐끔 나를 바라봤다.
나도 이때다 싶어 매우 불손한 눈빛으로 답해줬다.
마음 같아선 저 번들번들한 얼굴에 플라잉 니킥이라도 꼽아주고 싶지만, 꾹 참아본다.
“큼큼.”
원인 모를 적대적인 눈빛에 브라이언이 당황한다.
“흐음. 브라이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구만.”
“아닙니다. 어제 잠을 설쳤더니.”
“허허. 긴장하는 성격이라고 보이지는 않네만.”
“제 나이에 감독직이란 누구라도 부담스럽죠. 심지어 비선출 아닙니까. 그것도 동양계 혼혈.”
“그건 그렇지.”
암만 4부까지 떨어진 망한 구단이라도 역사가 깊다.
28세 풋내기가 감독직에 앉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
구단주 할배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론으로 들어가, 우리가 자네를 감독직에 선임한 이유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네. 잘 압니다.”
“허허. 그럼 자네의 생각하는 이유를 말해주겠나?”
“표면적인 이유를 말할까요? 내면적인 이유를 말할까요?”
“매우 흥미롭군. 둘 다 말해보게.”
불손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구단주 할배의 미소는 점점 짙어진다.
반대로 옆에서 관망 중인 브라이언은 표정이 시커멓게 죽어갔지만 말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뻔하죠. 임시감독으로 밀월의 강등을 막아냈으니까요. 몇 가지 더 붙인다면, 포츠머스의 유소년 선수 출신이자 유소년코치를 역임했기 때문이죠.”
“그렇지. 그러나 하나 빠졌군.”
“네. 저희 아버지 때문이겠죠. 포츠머스가 굉장히 아끼던 선수였으니까요. 아쉽게도 부상으로 일찍 은퇴하셨지만요. 별명이 미스터 포츠머스였죠?”
“그렇다네. 좋군, 그럼 내면적인 이유는 뭔가?”
“경영난이죠. 프리미어 리그에서 리그2까지 떨어졌으니 돈이 달리지 않겠습니까? 비싼 감독을 고용하긴 힘들 테니까요. 구단 유소년 출신이며 저렴한 몸값의 젊고 유망한 감독은 체면치레하기도 좋죠. 팀을 젊고 건강하게 일신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겠습니까. 또한 서포터도 어느 정도 인내심을 가져주겠죠. 마지막으로는···.”
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의도한 당돌함이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말해도 되나?
“계속해보게.”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쓰고 버리기 좋은 방패막이니까요.”
이 사실은 이전 생에서는 몰랐다. 마냥 떨리고 좋아서 그냥 감사합니다, 연발이었으니까.
내 폭로에 구단주 할배와 브라이언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먼저, 브라이언은,
“오우. 갓···.”
거침없는 발언에 머리를 쥐어 감는다.
하지만 나는 놈의 반응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할배의 반응이다.
“허허허허! 맞네! 맞아. 선임에 대한 인과관계를 정확히 파악했군!”
물개박수까지 치며 호탕한 웃음을 날린다. 내가 저 할배와 10년을 알고 지냈지만 저런 모습은 처음이다.
고혈압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진지한 걱정마저 들 정도다.
이미 환갑을 넘으신 분인데 말이야.
“이거 대단한 친구를 데려왔군! 브라이언. 내 자네를 과소평가했나 싶다네. 사람 보는 눈은 조금 부족하다 싶었는데 아니었군!”
“하···하하. 과찬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저런 친구를 발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조만간 저녁 식사나 같이하지.”
“감사합니다.”
사색이던 브라이언의 낯짝에 화색이 돌았다. 슬며시 웃는 표정이 무척 불쾌했지만 참아야겠지.
아쉽게도 브라이언은 이번 면담으로 신임을 얻을 거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를 위해서도 최선의 한 수다. 적어도 브라이언보다는 내가 점수를 더 크게 땄을 테니까.
할배의 사람 취향은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파악해두었다. 그래서 이런 태도로 나선 거였고. 한마디로, 전부 다 계획된 행동이었단 말이다.
물론, 내 성격이 조금 바뀐 영향도 없진 않다. 경질을 당한 뒤론 좀 뭐랄까. 거칠어졌다고 할까.
아마도 예전과 같은 모범생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겠지.
“허허. 참 마음에 드는군. 젊어서 그런가, 거침없는 패기가 눈부셔.”
“과찬입니다.”
너무 나대는 것도 역효과.
이쯤에선 제법 겸손한 모습도 보여줘야 효과가 두 배다.
“허허. 겸손하기까지 하군. 믿고 일을 맡길 만하겠어. 알다시피 난 당분간 이 구단에 큰 투자를 하지 않을 거라네. 밑바닥에 구멍이 난 사업에 돈을 쓰는 짓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없지. 적어도, 챔피언십 리그는 가야 주머니를 열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싶네.”
“알고 있습니다.”
너무 잘 안다.
직접 ‘몸’으로 체험해봤으니까.
“비난과 비판이 폭등할 거야. 성적이 좋지 않다면 말이지. 그 오욕은 대부분 자네가 짊어질 테고. 한계점을 넘으면 방패를 바꾸면 된다네. 쉬운 일이지.”
“알고 자리에 앉은 겁니다.”
“후하하! 알고 앉았다? 그 자신감이 정말 마음에 드는군. 좋아. 믿고 일을 맡길 만하겠어. 동양계답지 않게 간덩이가 아주 크군.”
“···최선을 다해 결과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구단주님의 기대에 어긋나진 않을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성과없는 자신감은 자만이지 않겠는가? 자만은 독이라네. 그리고 사람은 독을 품으면 죽는다네.”
“···그렇죠.”
역시. 예리한 노친네다.
이 말인즉슨 성과가 없다면 오만방자를 떤 애송이라고 평가하겠다는 거겠지. 대가는 경질일 테고.
“좋아. 그럼 이 늙은이와 대화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나보다는 자네 밑에서 뛸 젊은이들과 만나고 싶지 않겠나?”
“선수들과의 만남도 기대가 매우 큽니다. 그래도, 구단주님과의 대화는 매우 즐거웠습니다.”
거짓이 아니다. 구단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매우 큰 이득이다. 당분간 내 자리는 확고하다는 이야기니까.
자리를 견고히 한다는 것.
이 어찌 즐겁지 않으리.
경질의 추억은 자리 간수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폈다.
“빈말이라도 듣기 좋군. 조만간 저녁 식사에 초대할 테니 거절하진 말아 주게나. 늙으면 속이 좁아져, 삐친다네.”
“언제든 연락만 주십시오. 당분간 저녁은 굶고 있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껄껄. 꼭 연락하지. 그럼, 선수들과 좋은 이야기 나누길 바라네.”
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렸다. 한국식 예의에 꽤 흡족한 미소를 짓는 할배는 잠시 나를 멈춰 세운다.
“잠깐.”
“네?”
“자네, 감독 말고 다른 일을 할 생각은 없나? 그저 공놀이 관계자로 썩기엔 재능이 조금 아까워 보인다네. 회사경영에 관심이 있나? 정치 감각이 뛰어나 보여서 하는 말이네.”
흐음. 효과가 너무 좋았나 보군. 고민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다.
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아쉽지만 구단주님이 잘 못 보셨네요. 전 타고난 감독 체질입니다.”
3.
구단주와 회장과의 미팅이 잘 끝나 마음이 편하다.
단장은 왜 없냐고?
이런 4부 리그 구단에 단장까지 있을 리가.
사실, 원래는 있었지만, 구단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옷을 벗었다. 덕분에 단장의 업무는 감독과 사장이 분담했고.
즉, 실질적인 권력을 손아귀에 쥐기 위해선 한 놈만 담그면 된다는 거다.
그 대상이 브라이언이니, 참으로 호재다. 어떻게든 허수아비로 만들어야지.
10년 전엔, 대부분의 권한을 브라이언에게 넘겼었다. 아직 구단 내부일까지 신경을 쓰기엔 경력도, 능력도 모자랐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겉모습은 28세 애송이지만, 속은 하부리그에서 10년을 구르고 구른 중견 감독.
이래 봬도 꽤 능력을 인정받아 프리미어 리그의 코치 자리까지 제안받았었다.
난 예전과는 달리 앞으로는 구단의 모든 일에 관여할 생각이다.
10년의 감독 생활 동안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
바로, 좋은 성적을 내려면 선수와 감독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수와 감독은 당연하고, 프런트의 모든 직원이 우수한 능력을 뽐내야 진짜 강팀이 된다는 거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훗날의 이야기다. 지금은 첫 단추도 끼우지 못했다. 적당히 옷깃이나 여민 정도랄까.
첫 단추는 당연하게도 선수단 관리다. 어찌 됐든 선수들을 이끌고 좋은 성적을 내야 구단 내에서 나의 힘이 강해질 테니까.
‘선수단 관리라.’
흔히 감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선수에 전술을 맞추는 감독.
전술에 선수를 맞추는 감독.
10년 전, 나는 전자의 유형이었다.
전술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하지만 그 짓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그러니까, 이번 감독 인생은 후자로 갈 거다.
전술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 002화. 임기 첫날. (1)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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