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청혼
부릉!
수한은 루나를 만나러 가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 청와대 대변인의 말에 의하면, 이번 국회의원들의 비리 수사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국민이 수긍할 수 있도록 투명하고 공정성 있는, 성역 없는 수사를 지시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야당은 이것이 청와대가 대선을 앞두고 야당을 탄압하기 위한 행위라며 강도 높게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검찰에 소환 명령을 받은 국회의원은 야당 의원만이 아니라 여당의 의원도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전해지면서 야당의 주장은 힘을 싣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와대는…….
차에 시동이 걸리자 라디오에 국회의원들에 대한 비리 수사 내용이 흘러나왔다.
일부 의원들이 담합을 통해 자신의 회사를 어떻게 해보려다 불거진 일이기에 동정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여보세요.”
수한은 차를 출발시키며 루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지금 출발하는데, 한 시간쯤 걸릴 것 같아.”
오늘 수한은 루나와 데이트가 잡혀 있었다.
어제저녁 가족 모임 중 나온 이야기 때문에 수한이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은 것이다.
마침 그녀의 드라마 촬영도 오후 6시쯤이면 끝날 예정이라 자신이 조금 일찍 퇴근을 하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연구가 거의 끝나감에 따라 이제 자신이 굳이 나서서 지휘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이제는 데이트를 위한 시간도 낼 수 있었다.
“음…….”
수한은 한창 드라마 촬영이 진행되고 있을 일산으로 향하며 문득 어제 누나와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 ◈ ◈
한남동, 천하 그룹 회장 사택.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긴 식탁에 천하 그룹 정 회장의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정대한 회장이 문득 장성한 손자, 손녀들을 돌아보았다.
그들 중에는 결혼을 하여 자식을 본 이도 있어 4대가 함께하는 자리였다.
사업도 승승장구하고 있고, 자식들도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따듯한 눈빛으로 손자들을 둘러보던 정대한 회장의 눈에 식탁 끝 말석에 앉아 있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자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애결혼을 하고, 한때 의절까지 했던 아들의 자식들이다.
물론 현재는 가장 사랑하는 손자와 손녀이기도 했다.
보고만 있어도 든든한.
그중 정수정은 손주들 중 유일한 손녀이기에 가장 기꺼운데다 능력 또한 뛰어나 더욱 애정이 갔다.
하지만 그 옆에 앉아 있는 막내 손자에 대해서는 뭐라 표현하기조차 어려웠다.
정말이지, 정대한이 생각하기에 정수한은 두말할 것도 없는 천재였다.
자신의 손자이긴 하지만, 경외감이 절로 들 정도로 뛰어난 인물인 것이다.
그런던 정대한이 수한과 수정 남매를 지그시 바라보며 문득 물었다.
“수정아.”
“예, 할아버지.”
수정은 이미 식사를 마쳐 수저를 내려놓고 어른들이 식사를 끝내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할아버지의 말에 얼른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연이어진 질문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수정이도 이제 결혼해야지?”
수정은 정대한 회장의 물음에 표정이 굳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얼마 전 사귀던 남자와 헤어졌기 때문이다.
남들 모르게 비밀 연애를 해왔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5년 전, 서로 호감을 느껴 연애를 시작한 그 사람도 같은 직종의 연예인이었다.
그런 탓에 잦은 해외 공연과 스케줄로 인해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런 중에도 서로를 위로하며 힘이 되어주며 연애를 하였다.
하지만 팬들의 시선을 피해 연애를 하다 보니 그만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
마치 비밀 작전을 하는 것처럼 만나다 보니 그만 지쳐 버린 것이다.
자신들이 범죄자도 아니고, 이게 대체 연애를 하는 것인지 사람들을 피해 도피를 하는 것인지 경계가 모호해져 버렸다.
때문에 최근 자주 다툼을 벌였다.
상대편 남자도 지쳤는지 예전과 다르게 화를 내는 자신을 위로하기보다는 같이 짜증을 내는 빈도가 높아졌다.
수정은 이렇게 가다가는 좋은 관계마저 해칠 것 같아 이쯤에서 끝내기로 결정을 하였다.
물론 그 결정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끝까지 함께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마음을 다해 진지하게 사귀었다.
만약 그가 원했다면 연예 활동을 중단하고 내조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이젠 그 모든 일들이 과거가 되어버렸다.
잠시 안 좋았던 추억이 떠오르자 수정은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수정의 모습에 정대한은 뭔가 알고 있는 듯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이번엔 수한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하였다.
“수한이, 너도 이제 나이가 27살이나 되었는데, 아직 소식 없느냐?”
수정과 다르게 수한이 지금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은 가족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수한이 사귀고 있는 여자가 수정과 같은 그룹에 있는 멤버란 것도.
그러니 물어보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수한은 가볍게 대답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정대한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무술을 오래전부터 수련을 하고, 또 건강에 신경을 써서 잘 관리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대한의 나이도 벌써 아흔에 가까웠다.
과학이 발달하고 또 평균 수명이 늘긴 했어도 아흔이란 나이는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라는 인사를 진짜로 받아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막내 손자의 자식도 보고 싶은 욕심에 물은 것인데, 수한이 엉뚱한 대답을 하자 약이 올라 끈질기게 추궁을 하였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보겠냐! 너도 어서 빨리 결혼을 해야지.”
“음…….”
수한은 느닷없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할아버지가 이상했다.
자신과 누나의 결혼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는 태도가 여간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아직 제가 할 일이 있어서 결혼은 좀 더 나중에 할 생각입니다.”
수한은 괜히 여기서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계속해서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대답을 돌렸다.
수한이 결론을 내리듯 대답하자 정대한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건 네 알아서 하거라. 자, 이제 다들 밥을 다 먹었으니 그만 일어나자꾸나.”
“예,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와중에 수정은 수한의 귀에 조그맣게 이야기를 하였다.
“잠시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일이지?’
수한은 자신을 부르는 수정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하였다.
저택 바깥으로 나가는 수정의 모습에 수한을 말없이 따라 나섰다.
그러고는 정원 모퉁이에 있는 연못가에 서 있는 수정의 모습을 보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정원은 메마른 잔디와 앙상한 나무들로 인해 무척이나 삭막한 분위기가 느껴졌는데, 수정이 서 있는 모습 또한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누나, 무슨 일이야?”
수한은 수정이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말없이 연못을 보고 있던 수정은 그제야 시선을 돌리며 차분히 말을 하였다.
“수한아.”
“응?”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무슨 말인데 그러는 거야? 불안하게.”
수한은 심각한 수정의 태도에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수정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조금 전 할아버지가 네 결혼에 관해 물었지?”
“응. 근데 그건 나뿐만 아니라 누나 결혼에 관해서도…….”
“응, 그래. 일단 내 말 먼저 들어봐.”
“알았어, 말해.”
수한은 수정이 바로 말을 도중에 끊으며 이야기를 하자 가볍게 여기던 생각을 접고 진지하게 듣기로 마음먹었다.
“남자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결혼에 대해 불안감을 느껴.”
“……?”
“나… 사귀던 사람과 헤어졌어.”
“뭐?”
수한은 수정의 말에 깜짝 놀랐다.
다른 가족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수한은 수정이 5년 전부터 동료 연예인과 비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붙여둔 라이프 메디텍 특별 경호대를 통해 가족과 그 주변 소식을 모두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어졌다는 소식은 수한으로서도 처음 듣는 얘기라 조금은 충격이었다.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이유로 헤어졌는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뭐, 막 싸우고 나쁘게 헤어진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할 것은 없어. 그저 그 사람이나 나나 모두 힘든 연애에 지쳤을 뿐이야.”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수정은 다시금 수긍했다.
그렇게 신경질을 내고, 또 서로에 대하여 짜증을 냈던 이유가 지금 말을 하다 보니 그런 이유에서였다.
“참,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애인과 헤어진 이유를 곰곰이 떠올리던 수정은 문득 자신이 동생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응, 누나가 남자 친구와 헤어진 것까지 이야기했어.”
“아, 그래. 일단 내 이야기는 거기까지 하고……. 네가 일이 많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또 루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야.”
수정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수한과 루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너도 알겠지만, 여자 나이 서른이면 결코 적은 게 아니야. 물론 요즘 세대들은 늦게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2세를 생각하면 결코 바람직하진 않다고 생각해. 물론 나도 늦기는 했지만…….”
수정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니 면목이 서지 않아 결국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런 수정의 모습에 수한은 누나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야기를 꺼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지금 사귀고 있는 루나는 수정이 속해 있는 그룹의 멤버.
당연히 두 사람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치 가족 같은 관계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수정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루나, 모두 걱정이 되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리라.
“미안. 그동안 내가 너무 내 자신만 생각하고 있던 것 같네. 사실 나도 루나가 싫어서 결혼을 미루는 것은 아니야.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기에 결혼을 하지 않은 것뿐이지. 누나도 알겠지만, 나… 결혼을 하면 최대한 자식 많이 나을 거야. 그래야 부모님은 물론이고, 양어머니에게도 품에 손자를 안겨 드리지.”
수한은 수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아 안심시켜 주었다.
동시에 자신이 그간 너무 자신만 생각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 네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니 안심이 된다.”
“응. 나도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나면 청혼을 할 테니까 누나도 어서 빨리 좋은 사람 찾아봐.”
“그래, 알았다. 그럼 난 그렇게 알고 먼저 들어간다.”
“응, 먼저 들어가. 난 생각 좀 할 게 있어서 좀 있다 들어갈게.”
“응, 춥다. 너무 늦게 않게 들어와.”
“알았어. 어서 들어가.”
대화를 끝낸 수정은 그제야 찬 기운을 느낀 듯 빠른 걸음으로 집 안에 들어갔다.
수정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수한은 조금 전에 나눈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자신이 루나에게 너무 무관심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었다.
결론은 그렇다였다.
되돌아 떠올려 보면, 언제나 연락은 루나가 먼저 하였다.
사귀자고 말을 꺼낸 것도 루나였고, 첫 데이트 약속을 잡은 것도 루나였다.
남자인 자신보다 루나가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와 주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루나는 연구 때문에 자신이 시간을 못 내더라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수한은 루나에게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오늘은 자신이 먼저 연락을 하여 데이트 약속을 잡기로 하였다.
◈ ◈ ◈
웅성웅성!
“수고하십니다.”
수한은 드라마 촬영장으로 들어서며 루나의 매니저인 미숙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루나와 수한이 연인 관계인 것을 잘 알고 있는 미숙은 수한이 드라마 촬영장에 찾아왔어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조금 전, 수한이 미리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
수한은 드라마 녹화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나에게 오후 5시면 촬영이 모두 끝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시각은 저녁 8시.
그런데도 현장에서는 아직도 촬영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네. 그런데 아직 촬영이 끝나지 않았나 보네요?”
“예. 오늘 주연 배우 한 명이 좀 늦게 오시는 바람에 촬영이 아직…….”
그 말을 들은 수한은 아무리 주연이라고 하지만 참으로 프로 의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 자기 왔어?”
그때, 잠시 촬영이 중단되고 뜨거운 조명 탓에 지워진 화장을 고치려 세트장에서 나오던 루나가 수한을 발견했다.
“언제 온 거야?”
루나는 수한이 찾아온 것이 기쁜지 미소를 지으며 귀엽게 물었다.
해가 바뀌어 서른이 되었는데도 그녀는 수한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매달렸다.
수한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밖은 추운데, 여긴 열기가 아주 뜨겁네?”
“응. 모두 열정을 가지고 하다 보니 추운 줄 전혀 모르겠어.”
루나는 잠시 촬영이 중단된 세트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다음 촬영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를 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텝들의 모습이 보였다.
“루나야, 누구야?”
수한과 루나가 다정하게 촬영장 한쪽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루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박현빈이었다.
그는 요즘 한창 뜨는 남자 탤런트 중 한 명으로,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스타였다.
그런 그가 요즘 루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주변을 서성이는 중이었다.
한데 평소 남자를 만나는 것 같지 않던 루나의 곁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자 서둘러 접근한 것이다.
“아, 선배님. 제 남자 친구예요. 수한 씨, 이쪽은 이번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으신 박현빈 선배님이야.”
루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수한을 소개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정수한이라고 합니다.”
수한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며 자신을 소개했다.
수한의 반응에 박현빈은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날 모르는 것인가?’
수한은 당황하는 박현빈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날 못 알아보는 것을 보니 내가 좀 더 노력을 해야겠는걸.”
박현빈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른 너스레를 떨었다.
“선배님, 우리 수한 씨는 연예인에 대해 잘 몰라요. 하는 일이 연예계와는 전혀 달라서…….”
루나는 조심스럽게 수한의 상황을 박현빈에게 설명해 주었다.
혹시나 그가 수한을 오해하여 안 좋게 여길까 봐서였다.
하지만 그런 루나의 모습이 수한에게는 결코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의 여자라 생각되는 루나였기에 다른 사람 앞에서 저자세를 보이는 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럼에도 수한은 루나가 하는 것을 말리지는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이들만의 질서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랬기에 조용히 루나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수한의 모습이 뭐가 그리 기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박현빈의 반응은 날이 서 있었다.
“하는 일이 달라? 뭐, 그럴 수 있겠지. 그런데 일반인이 촬영장에 막 들어와도 되는 건가?”
갑작스런 큰 소리에 주변에 있던 드라마 출연자와 촬영 스텝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
“네가 유명한 스타란 것은 알겠는데, 그건 가요계 쪽이고… 이쪽으로는 신인이라면 신인인데 촬영장에 남자를 끌어들이다니. 너, 참 가지가지 한다.”
박현빈은 뭐가 그리 꼬였는지 급기야 루나를 상대로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당황한 루나는 입을 벌린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소란이 커지자 급기야 한쪽에서 지금까지 촬영된 것을 점검하고 있던 감독까지 다가오며 소리쳤다.
“아니, 김 PD. 겨우 신인이 촬영장에 남자를 데려온다는 것이 말이나 돼?”
드라마 감독이 다가오자 박현빈은 일부러 일을 키우려는 것인지 큰 소리로 소리쳤다.
그런 박현빈의 말에 다가오던 감독은 표정을 굳혔다.
‘젠장… 저 새끼, 또 병이 도졌군.’
드라마 감독인 김형석 PD는 박현빈의 부리는 수작에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몇몇 드라마 감독이나 관계자들에게 박현빈의 병 아닌 병은 유명했다.
일반인이나 신인들은 모르는 박현빈의 병.
그건 바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마치 초등학생이 되기라도 한 양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면박을 줘 기를 죽이고 나중에 조금씩 친절을 베풀면서 여장의 호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렇게 관계가 개선되면 자신의 잠자리로 끌어들이는 것이 최종 종착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관계가 오래가는 것도 아니었다.
몇 번 관계를 가지고 난 후에는 금방 싫증을 내고 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방송 관계자들에게는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박현빈은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당신, 방금 한 말 루나에게 사과하시오.”
수한은 도를 넘어선 박현빈의 행동에 단호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하지만 수한이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평범한 남자라 생각한 박현빈은 그 모습이 가소롭다는 태도였다.
비록 루나가 유명 아이돌 그룹의 멤버이고 천하 엔터라는 대형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 또한 그에 못지않은 인기 스타이고 천하 엔터에 뒤지지 않는 대형 기획사에 속해 있었다.
더욱이 자신은 루나보다 연예계 선배였다.
만약 루나와 자신 간에 문제가 불거지면 더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루나였다.
“가지가지 하네.”
박현빈은 기도 차지 않다는 듯 수한에게 향했던 시선을 루나에게 돌리며 비웃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자신을 바라보는 루나의 표정이 이상했다.
“너, 선배를 보는 시선이 그게 뭐야? 이거, 개념이 없구만! 김 PD, 나 오늘 이런 기분으로는 더 이상 촬영 못하겠으니 알아서 해!”
예상 못한 루나의 시선에 기분이 상한 박현빈은 강짜를 부리며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김형석 PD는 물론이고, 남아 있던 스텝과 탤런트들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사실 주인공인 박현빈이 늦게 나타난 탓에 촬영 시간이 이렇게나 늦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적반하장으로 루나를 핑계로 촬영을 중단하고 이탈하는 것이었다.
“이봐, 박현빈! 박현빈이!”
김형석 PD는 급하게 박현빈을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죄송합니다.”
루나는 자신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 같다고 느껴 얼른 고개를 숙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사과하였다.
“아나, 젠장!”
하지만 그럼에도 촬영장의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주연 배우가 촬영 거부를 하고 촬영장을 빠져나갔으니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분명 루나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아니야. 루나 씨가 잘못한 것이 뭐가 있겠어. 다 성격 지랄 같은 박현빈 때문이지.”
김형석 PD는 분을 삭이며 침착하게 말을 하였다.
수한은 그나마 그가 상황을 정확히 보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금 전 박현빈의 행동이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저거, 박현빈이 고질병이야. 관심 있는 여자에게 못되게 구는, 전형적인 초등학교 남학생 성격. 그러니 루나 씨는 너무 신경 쓰지 마.”
김형석 PD는 오히려 루나에게 위로를 해주었다.
“그런데 옆에 있는 분은 누구야?”
“네, 제 애인이에요.”
김형석 PD는 가라앉은 촬영장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루나의 옆에 서 있는 수한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 김형석의 질문에 루나는 얼른 수한을 소개하였다.
“애인?”
루나는 물론이고, 루나가 속한 파이브 돌스에게 애인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보지 못한 김형석 PD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애인이라고 말을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불어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것은 비단 김형석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소동으로 인해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그들도 사실 루나의 옆에 있는 수한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런데 루나의 애인이라고 하지 모두 놀란 것이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아, 나 저 사람 누군지 알아!”
모두가 충격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수한을 알고 있다는 듯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데?”
“누구야?”
“저 사람 파이브 돌스의 리더, 크리스탈의 동생이야!”
“크리스탈 동생?”
“응, 몇 년 전인가 신문에 크게 났던 파이브 돌스 스캔들 있잖아. 거기 스캔들남이라 불렸다가 그가 사실은 어릴 때 유괴되었다가 20여 년 만에 돌아온 크리스탈의 동생이라고 나왔잖아!”
“아!”
누가 말을 꺼낸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정보는 정확했다.
사실 수한의 입장에서는 7년도 더 된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더 놀라웠지만.
한편, 수한의 정체를 뜻하지 않은 곳에서 알게 된 김형석 PD는 눈을 반짝였다.
파이브 돌스의 리더인 크리스탈의 집안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3위에 위치한 천하 그룹의 총회장이 바로 크리스탈의 친할아버지였다.
그 말인즉, 루나의 애인이란 사람도 천하 그룹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사실 그는 드라마 주인공인 박현빈이 저렇게 깽판을 쳐놓고 나가 버리자 무척이나 난감했다.
분명 루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일부러 촬영장 분위기를 망쳐 놓은 게 분명한 것이다.
아무리 루나가 핫한 스타라고 하지만, 드라마국 소속인 김형석 PD로서는 박현빈을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는 이번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고, 루나는 조연이었다.
당연히 비중이 박현빈에게 쏠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전 난리를 치고 간 박현빈이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루나의 애인인 수한의 정체였다.
이번 드라마의 최대 스폰서는 다름 아닌 천하 그룹이었다.
한데 박현빈은 천하 그룹의 직계인 수한을 무시하고, 또 애인인 루나를 모욕했다.
김형석이 오랜 기간 쌓아온 경험으로 봤을 때, 박현빈은 머지않아 루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박현빈의 진심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었다.
또 그로 인해 박현빈은 드라마 촬영이 끝날 때까지 예전 버릇을 감추고 촬영에 임할 것이 분명했다.
김형석은 그런 생각이 들자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인기가 좀 올랐다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며 촬영 시간까지 제멋대로 정하려는 박현빈의 모습이 고깝게 느껴지던 김형석이었다.
아마도 이번 일로 박현빈과 그가 소속된 케이스트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천하 그룹을 건드렸으니 이후의 일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주인공이 저렇게 가버렸으니 더 이상 촬영을 할 순 없겠군. 모두 이만 퇴근들 하지.”
“네.”
“정말 죄송해요, 감독님.”
“아니야. 어쩌겠어, 흥행 보증수표랍시고 위에서 저런 것을 주인공으로 뽑아놨으니 내가 감내해야지.”
김형석은 거듭 사과하는 루나에게 손사래를 치며 달랬다.
그러자 수한이 조용히 김형석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촬영이 끝난 것입니까?”
“예. 촬영을 하고 싶어도 주인공이 없으니 접어야지요. 쩝.”
김형석은 입맛을 다지며 아쉽다는 듯 대답하였다.
아직 일정에 쫓기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박현빈이 계속해서 촬영 스케줄에 따르지 않고 개인 사정으로 펑크를 내거나 지각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예전처럼 날밤을 새며 촬영을 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 저희 때문에 촬영이 중단되었으니 사과하는 뜻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저녁을 사고 싶은데, 어떠세요?”
수한은 괜히 자신 때문에 루나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촬영장 사람들에게 제안을 하였다.
배우는 물론이고, 촬영 스텝들의 숫자를 합치면 이 자리에 있는 인원은 무려 80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그 많은 인원에게 저녁을 사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네? 지금 촬영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녁을 사시겠다고요?”
김형석은 도저히 믿기지 않아 물었다.
“예. 루나 씨를 보기 위해 촬영장을 찾았다가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치게 되었으니, 사과하는 의미로 제가 모든 분들게 저녁을 사겠습니다.”
수한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허허, 저녁을 사시겠다는데, 거절을 하면 안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자 김형석은 촬영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 루나 씨 애인분께서 우리에게 저녁을 쏘겠답니다. 시간 되는 사람은 모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야호!”
김형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아닌 게 아니라, 다들 늦게까지 촬영을 하다 보니 너무도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수한은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잠시 촬영장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촬영장 식구 전원을 수용할 수 있는 음식점을 수배하기 위해 그의 양어머니인 최성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자신은 연구를 하느라 그런 것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때문에 라이프 메디텍의 자선 재단을 운영하는 최성희라면 그런 곳을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최성희는 좋은 곳을 소개해 주었다.
◈ ◈ ◈
달그락.
“오늘 어땠어?”
수한은 커피를 마시며 루나에게 물었다.
“으응? 방금 뭐라고 했어?”
멍하니 수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루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루나는 지금 하늘을 날아갈 듯 기분이 붕 떠 있었다.
수한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데이트 신청을 했던 어제저녁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때문에 오늘 예정보다 촬영이 늦어졌어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촬영이 늦어져 데이트를 할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게 조금은 불만이지만, 어찌 되었든 수한이 먼저 데이트를 신청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그리고 오늘 촬영장에서 조금은 불쾌한 일이 있었는데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오히려 촬영장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회식을 시켜준 것이 고마웠다.
행복한 기분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수한이 다정스레 말을 건네니, 바로 대답을 못하는 게 당연했다.
“아니, 오늘 촬영장에서 어떻게 지냈냐고?”
수한 역시 어제 누나와 대화를 하고 깨달은 것이 있어 다시 한 번 루나에게 물었다.
앞으로는 자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연애에 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관심을 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평소에 그러지 않던 사람이 이렇게 관심을 보이니 괜히 불안해진 것이다.
“수한 씨… 자기, 혹시 무슨 일 있는 거야?”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혹시나 헤어지자고 말하기 미안해 괜히 잘해주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든 것이다.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야. 하하, 이거참…….”
수한은 오히려 불안해하는 루나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불찰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연구에 매진하느라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 더욱 미안하게 생각되었다.
“그냥 내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런 거야.”
수한은 불안해하는 루나의 모습에 살며시 그녀의 손을 붙잡고 해명을 하였다.
그제야 루나는 조금은 안심이 되는 듯 표정이 풀어졌다.
“휴, 다행이다. 난 자기가 오늘 너무 친절해서 나하고 헤어지자고 하려는 줄 알았어.”
루나는 말을 하면서도 조금 전 불안감에 가슴을 졸이며 눈물을 글썽였던 것이 떠올라 눈물을 훔쳤다.
“이런.”
수한은 결국 그녀의 머리를 감싸며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어머,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란 루나는 작게 탄성을 흘리며 앙탈을 부렸다.
“뭐, 보면 어때. 이참에 우리 연애하는 것 공개할까? 어차피 아까 촬영장에서 다 알려졌는데, 굳이 비밀로 할 게 뭐 있겠어.”
수한의 말에 루나도 잠시 고민을 했다.
‘그래, 어차피 회사에서도 연애에 관해서 터치를 하지 않으니……. 또 팬들도 우리 그룹 멤버들의 나이가 있어서 오히려 연애를 하라고 떠밀고 있으니 이참에 공개를 해버려?’
확실히 이젠 파이브 돌스도 평균 나이 30살이 넘었다.
그동안 파이브 돌스는 연예 활동을 하면서 별다른 스캔들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물론 몇 번의 스캔들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 스캔들의 주인공은 지금 앞에 있는 수한이었다.
파이브 돌스의 리더 크리스탈의 친동생으로, 아기일 때 납치되었다가 18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비운의 천재 아기였다.
그 뒤로 자신과 연애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파이브 돌스는 모든 멤버가 지금껏 스캔들 한 번 없었다.
그러다 보니 파이브 돌스의 안티들은 오히려 이런 깨끗한 사생활을 가지고 다시 디스를 하기 시작하였다.
파이브 돌스 멤버들이 이성이 아닌 동성을 좋아한다거나, 아니면 연애 감각이 없는 석녀(石女)라는 루머를 퍼뜨렸다.
물론 그런 루머를 퍼트린 사람들은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그 뒤로도 잠잠할 만하면 그런 루머가 퍼지다 보니 팬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의 우상인 파이브 돌스 멤버들이 차라리 연애를 했으면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지금 루나는 수한의 말이 결코 가볍지 않게 들려왔다.
솔직히 자신이야 연애 사실이 공개가 되든, 아니면 지금처럼 비공개로 연애를 하든 상관이 없었다.
루나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 때문에 수한이 하는 일에 방해를 받을까 봐 그것이 걱정인 것이다.
자신이야 연예계 활동을 접으면 그만이지만, 수한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가 맡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또 그것이 국가와 민족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도 잘 알고 있는 루나로서는 자신 때문에 수한이 연구에 방해를 받는 것이 싫었다.
“그런데 연애 사실을 공개하면 자기가 하는 일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야? 그렇다면 난 지금도 상관없어. 그러니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마.”
수한은 루나의 말을 듣고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생각하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하였다.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빠르게 뛰는 것 같은 심장의 펌프질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다 뭔가 결심을 했는지 수한이 조심스럽게 루나의 손을 잡았다.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추더니 루나의 눈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너무 갑작스럽다는 것은 알지만… 나랑 결혼해 줄래?”
“뭐? 방금 뭐라고 했어?”
루나는 갑자기 진지한 태도로 무릎을 꿇고 결혼해 달라는 수한의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또 귓가가 멍멍한 것이, 도저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방금 전 들은 말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 말인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못 들었다면 다시 말할게. 루나야, 나랑 결혼해 줘.”
수한은 다시 한 번 결혼해 달라 말하며 이번에는 잡고 있는 손등에 키스를 하였다.
그런 수한의 행동에 루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변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들려왔다.
짝! 짝! 짝!
“오우, 용감한데?”
“용감한 청년의 고백을 받아주시오!”
“받아줘! 받아줘!”
언제 사람들이 몰려들었는지 조용하던 카페테리아에 모인 사람들이 청혼하는 모습을 보며 환호성과 박수, 그리고 용기를 낸 수한의 고백을 받아주라며 루나를 독촉하였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더욱 얼굴이 붉어진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청혼을 받아들였다.
사실 루나는 한 가지 작은 걱정이 있었다.
연애를 하자고 먼저 말한 것도 자신이었는데, 설마 청혼까지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한이 연애하는 동안 한 번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그동안 루나만 속으로 끙끙 앓아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렇게 청혼을 받게 되자 정말 꿈만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