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정화 운동
파주 소재, 라이프 메디텍 연구소.
현재 라이프 메디텍 파주 연구소는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이곳은 연구원들의 창의력 향상을 위해 출퇴근 시간을 따로 정해두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일주일 48시간, 한 달 192시간을 근무하면 되는 것이다.
아니, 특별한 사정에 의해 정해진 근무시간을 채우지 못하더라도 성과만 내며 되기에 연구원들은 연구에 쫓기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편안한 상태에서 연구를 하다 보니 다른 연구소들보다 성과가 좋았다.
그렇게 해서 이뤄낸 연구 결과가 대한민국군의 명품 무기로 탄생하게 되었다.
지금도 연구소에서는 갖가지 무기에 관련하여 연구가 한창인데, 현재 대한민국 공군에서 의뢰한 차세대 제공 전투기(X―4)의 연구 개발이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자, 모두 X―4의 비행시험 준비를 하도록.”
수한은 하얀 가운을 걸친 연구원들에게 개발 중인 X―4의 비행시험을 주문하였다.
X―4의 비행시험은 벌써 20시간이나 하였지만, 아직 안정화가 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시험비행을 마칠 때마다 문제점을 조금씩 개선하고는 있지만, 그럴 때마다 또 다른 문제점이 튀어나오는 통에 골치를 앓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이전 시험비행에서 문제가 된 슈퍼 크루징 비행을 중점으로 살필 계획이었다.
슈퍼 크루징이란 비행기가 다른 보조 수단, 즉 애프터버너를 쓰지 않고 자체 엔진을 이용해 초음속 비행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슈퍼 크루징이 가능한 전투기는 세계에서 몇 종 되지 않았다.
미국의 주력 제공 전투기인 F―22나 유럽 공동체 소속의 유로파이터 타이푼, 러시아의 T―50과 중국의 J―31, 일본의 F―3 정도가 애프터버너 없이 초음속 비행이 가능했다.
그중 유럽 공동체의 유로파이터를 제외한 4국의 전투기들이 모두 스텔스 전투기이며, 그 모두가 대한민국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공군은 차세대 주력 제공 전투기 X―4의 요구 성능을 그들의 주력 전투기와 비슷하거나 좀 더 우위를 가질 수 있기를 원했다.
기본적으로 스텔스 기능이 있을 것, 최대 이륙 중량이 38톤 이상, 최고 속도 마하 2.2 이상, 항속 거리 3,500㎞ 이상, 실용 상승 고도 2만m 이상의 스펙을 요구한 것이다.
이는 주변 4개국의 스텔스 전투기 중 가장 성능이 떨어질 것이라 예상되는 중국의 J―31의 성능을 웃돌고, 세계 최강의 스텔스 전투기라 평가 받는 미국의 F―22 랩터와 비슷하거나 약간 우세한 정도였다.
하지만 수한이나 연구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공군의 요구 성능보다 더욱 월등한 전투기를 개발하기를 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 최강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는 F―22 랩터가 개발되어 실전 배치를 한 지도 20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제 막 개발하려는 주력 전투기가 20년도 더 넘은 전투기와 비슷한 성능을 낸다면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그래서 라이프 메디텍 연구소에 있는 연구원들의 목표는 세계 최강 F―22 랩터를 능가하는 전투기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한 목표 아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연구하고, 최고의 성능을 내기 위해 끊임없이 시험하며 부족한 부분을 업그레이드해 나가는 중이었다.
사실 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X―4의 성능은 공군의 요구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만약 오늘 시험하는 아음속에서 초음속으로 음속을 돌파하는 과정이 계획대로 통과된다면 X―4는 단숨에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올라서게 될 것이다.
최대 이륙 중량에 있어 38톤 이상을 주문한 공군의 요구보다 7톤 많은 45톤이나 되고, 최고 속도 또한 요구치보다 높은 마하 3.0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항속 거리는 F―15K와 비슷한 5,500㎞나 되었다.
항속 거리가 5,500㎞라는 것은 스텔스 전투기로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거리나 마찬가지였다.
스텔스 전투기의 특성상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선 레이더가 발산하는 전파의 반사를 최대한 줄여야 하는데, 전투기 외부에 부착된 물체가 많을수록 전파의 반사가 많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스텔스 전투기는 내부 무장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연료를 보관하는 탱크가 일반 전투기에 비해 작아질 수밖에 없다.
즉, 적은 연료 탓에 장시간 비행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X―4는 최대 이륙 중량이 F―15K보다 높다는 것이다.
스텔스 전투기이면서 레이더파 반사에 신경 쓰지 않고 외부에 덕지덕지 무장을 하는 전투기보다 더 많은 무장을 할 수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적의 전투기만 제압하는 제공 전투기, 즉 공중전만 할 수 있는 다른 스텔스 전투기와 다르게 X―4는 무장에 따라선 지상 타격도 가능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데다 전투기를 몰 수 있는 조종사의 숫자도 주변국에 비해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공군은 오래전부터 제공 전투기보다는 전천후 전투기, 즉 공중전은 물론 때에 따라선 지상 공격도 가능한 전폭기를 선호하였다.
그래서 X―4도 그런 요구에 맞게 개발된 것이다.
적의 레이더를 피해 암살자처럼 공중전을 치르고, 또 지상군과 협조를 하여 화력지원도 할 수 있는 전투기로서.
◈ ◈ ◈
“컷! 촬영 종료!”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수고했고, 다음 촬영에는 늦는 사람 없길 바라.”
“예, 알겠습니다. 선배님.”
감독의 촬영 종료 선언이 떨어지자 연기자들은 저마다 주변에 있는 동료 선후배 배우들에게 인사를 건네기 바빴다.
루나는 선배들이 촬영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다 멍하니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덧 그녀도 연예계에 데뷔를 한 지 10년이 넘었다.
아이돌 가수로 데뷔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2년 전부터는 영역을 넓혀 연기자로도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첫 출연 작품은 기대에 못 미치는 흥행 성적을 거뒀지만, 그 후로는 보다 철저히 준비하였기에 다른 아이돌 가수 출신 연기자가 겪는 발연기 논란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이제 루나는 연기자로도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은 촬영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난감하였다.
사실 원래 촬영 일정은 오늘 오후 10시까지였는데, 주연 배우 한명이 다른 스케줄로 인해 촬영을 펑크 내는 바람에 일찍 촬영이 끝나게 되었다.
물론 오늘 못한 분량을 다음에 추가로 촬영해야 하기 때문에 난관이 예상되지만, 어찌 되었든 연일 계속되는 촬영 때문에 지친 연기자들에게는 가뭄 속의 단비와도 같은 휴식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던 루나는 뭔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돌려 매니저에게 말을 하였다.
“미숙아, 파주로 가자.”
촬영지인 일산에서 파주까지는 얼마 떨어져 있지 않기에 루나는 오랜만에 수한을 만나 데이트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녀가 속해 있는 파이브 돌스는 2년 전부터 가수 활동은 물론이고, 각자 원하는 부분에서 개인 활동도 병행해 왔다.
사실 파이브 돌스의 평균 나이가 29세에 이르다 보니 언제까지 아이돌 가수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멤버들은 각자 개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리더인 크리스탈은 전부터 해오던 작곡에 집중해 새로운 아이돌을 양성하는 중이며, 크리스탈과 동갑인 레이나는 댄스 스쿨을, 미나는 오래전부터 관심이 많았던 패션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예빈은 동생 수빈처럼 모델 활동을 하며 틈틈이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녀도 미나처럼 패션에 관심이 있었지만,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했기에 공부도 하는 것이다.
아무튼 각자 활동을 하다가도 1년에 한 번씩 그룹 정규 앨범을 발표할 때는 3개월 정도 함께 활동을 해 나갔다.
어찌 보면 여유가 있을 듯도 하지만, 개인 활동을 하면서도 워낙 인기가 높기에 루나는 애인인 수한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수한도 많은 연구를 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사실 두 사람의 스케줄을 맞추기가 어려워 연인다운 데이트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오늘, 생각지도 않게 시간이 남게 되자 무작정 지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쩌면 한 시간 거리도 되지 않는 일산에 있었기에 그런 것일지도.
◈ ◈ ◈
끼익!
파주, 라이프 메디텍 연구소 주차장.
목적지에 도착한 루나는 차에서 내리며 미숙에게 말했다.
“미숙아, 넌 이만 돌아가. 난 우리 자기와 데이트하고 들어갈 거야.”
이미 충동적으로 데이트를 결심한 루나는 아예 배수의 진을 치듯 매니저인 미숙을 돌려보내려는 것이었다.
“내일도 촬영 있으니까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마시고 일찍 들어가세요.”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나 아침에 늦지 않게 데리러 와.”
“알았어요. 그럼 전 이만 갈게요.”
“그래.”
부웅!
그렇게 차가 연구소를 빠져나가고 홀로 남은 루나는 로비로 들어가 자신의 방문 목적을 적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수한이 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탓에 가끔 방문한 적이 있어 데스크 직원은 루나를 알아보고 밝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루나가 유명한 스타인 점도 있지만, 연구소 소장인 수한의 연인이란 사실이 알려졌기에 부담 없이 맞이하는 것이었다.
“소장님 계신가요?”
루나는 마주 미소 지으며 수한이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데스크 직원에게서 들려온 말은 루나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는 것이었다.
“어쩌죠? 소장님께서는 항공 파트 연구원들과 함께 외부에 나가셨는데요.”
“아니, 그럴 수가…….”
루나는 직원의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 출연 때문에 자주 보지 못하다가 모처럼 마음먹고 찾아왔는데, 이렇게 또 엇갈리게 되니 눈물이 핑 돌았다.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는 루나의 모습에 데스크 직원은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연구소의 프로젝트는 모두가 극비에 속하는 일.
아무리 루나가 소장의 애인이라 해도, 아니, 더 나아가 가족이라 해도 그 행선지를 알려줄 수는 없었다.
“혹시 언제쯤이나 되어야 돌아올지 아시나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지만, 들려온 직원의 말에 루나는 완전히 낙담하고 말았다.
“그, 그게… 저 같은 말단이 알기에는…….”
결국 루나는 한숨을 쉬고는 발길을 돌려 힘없이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루나로서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모처럼 오후 스케줄이 비어 오랜만에 수한을 보러 온 것인데, 수한이 자리에 없으니 루나의 오후 시간은 그야말로 허공에 붕 뜨고 말았다.
더군다나 타고 왔던 차도 이미 보내 버린 상황이 아닌가.
그야말로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에휴, 이게 다 연락도 하지 않고 온 내 잘못이지.’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수한의 스케줄도 알아보지 않고 온 자신을 탓하며 루나는 거리를 걸었다.
하지만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괜스레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나이도 어느덧 스물아홉.
내일모레면 서른이다.
그런데도 수한은 결혼하자는 말을 아직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수한이 바쁘다는 것을 잘 알고, 또 그가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용한 일인지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
자신이 누구인가.
대한민국 톱스타 중 한 명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자신 같은 여자를 그냥 놔둘 수 있느냔 말이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민 루나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음료수 캔이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힘껏 차버렸다.
깡!
땡, 땡그랑!
루나의 발에 걷어차인 음료수 캔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저 앞으로 굴러갔다.
끼익!
그런데 멀리 날아갈 것처럼 힘차게 굴러가던 음료수 캔이 어딘가에 부딪치며 멈춰 섰다.
“누나, 여긴 어쩐 일이에요?”
“엉?”
수한을 원망하며 정처 없이 거리를 걷던 루나는 자신을 부르는 수한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눈앞에 차를 타고 있는 수한이 있는 게 아닌가.
“어? 무슨 실험 때문에 외부에 나갔다고 하던데, 다 끝난 거야?”
루나는 조심스럽게 수한에게 물었다.
“아니, 일이 좀 남긴 했…….”
수한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뒤이어질 내용을 짐작했다는 듯 표정이 굳어지는 루나의 모습에 말을 중단한 것이다.
“응, 남기는 했는데… 그리 급한 것은 아니야.”
수한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에 급격히 표정이 밝아지는 루나였다.
또한 그 모습을 확인한 수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그런데 누나는 어쩐 일로 여기 온 거야? 혹시 나 만나러?”
“으응. 오늘 주연 배우 한 명이 일 때문에 촬영이 펑크가 났거든. 그래서 시간이 남아…….”
신이 난 루나는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너무 시시콜콜 말하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에 말끝을 흐렸다.
부끄러워하는 루나의 모습에 수한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보며 다른 연구원에게 말을 하였다.
“김 박사님, 전 지금 바로 퇴근할 테니, 자료 정리한 것은 메일로 보내주십시오.”
수한은 항공 파트 수석 연구원인 김민구 박사에게 부탁을 하고는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연구소 차량은 먼저 보낸 수한은 루나를 데리고 연구소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 ◈ ◈
웅성웅성.
달그락달그락.
수한과 루나는 오랜만에 둘이서 임진강 변을 걸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후 저녁을 먹기 위해 음식점에 들어섰는데, 마침 음식점에 있던 손님들이 루나를 알아보았다.
때문에 잠시 소란이 일기는 했지만, 직원의 정리로 금방 수습되었다.
“미안.”
“뭐가 미안하다고 그래? 톱스타인 누나를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런 걸 가지고 미안하다고 할 필요 없어.”
사실 이런 일은 톱스타인 루나를 애인으로 둔 이상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일이라 수한은 생각했다.
더욱이 워커홀릭(Workaholic)에 가까운 자신의 스케줄 때문에 그간 연인다운 데이트도 못한 그녀의 심정을 잘 알기에 이런 일로 화를 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그녀를 달래는 수한이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아니야. 우리 그런 이야기 하지 말고, 다른 이야기 하자. 서로 바빠서 자주 데이트도 못하는데, 그런 우울한 이야기나 하고 있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
“그래.”
수한은 이대로 있다가는 데이트가 끝날 때까지 루나가 계속 미안해할까 봐 얼른 정리를 하였다.
수한의 배려에 루나는 고마워하며 그러자고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시험을 하기에 연구소가 아닌 외부로 나간 거야?”
루나는 수한이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극비를 요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한이 적당히 선을 긋고 알아서 이야기해 줄 것 또한 알기에 망설이지 않고 물은 것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쿠웨이트에서 돌아온 수한이 연구소에서 살다시피 하며 매달리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응, 별거 아냐. 공군에서 의뢰한 비행기 개발이 막바지에 들어 그걸 조절하느라 외부로 나간 거야.”
수한은 루나가 어디 가서 자신이 해준 말을 퍼뜨리지는 않을 것이라 알기에 적당히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말? 나도 뉴스를 본 것이 있기는 한데, 그걸 네가 연구하고 있던 거야?”
“응. 조만간 국방부에서 발표가 있을 거야.”
“와! 그럼 그 일만 끝나면 앞으로 시간 좀 나겠네?”
“하하하…….”
수한은 루나의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말았다.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그저 마무리된다는 말에 모두 끝날 것이라 생각한단 말인가.
일반적인 사업과 달리 국가적인 프로젝트는 한 가지 일을 마친다 하여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사후 처리가 더 중요한 것이 국가 차원의 업무인 것이다.
물론 루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일을 끝마치면 시간이 날 테니, 그때는 자신을 보러 먼저 찾아오라는 소리였다.
왠지 그 모습이 기막힐 정도로 순수하면서도 귀엽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왜? 설마 또 다른 프로젝트가 있는 거야?”
자신의 웃는 모습에 무언가 실수한 게 아닌가 걱정하는 루나는 갑자기 심각해진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 표정은 정말로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귀여웠다.
자신보다 세 살이나 많고, 또 이제 곧 새해가 밝으면 30살이 되는 여성인 루나의 표정이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 ◈ ◈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뭔가?”
한국당 원내총무 황준표는 당사를 나오던 중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는 남자들을 모며 소리쳤다.
수행하던 보좌관과 경호원들이 얼른 황준표 의원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강력한 방어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너희들 누구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황준표 의원은 자신의 팔을 잡아챈 사내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이 없자 자신의 신분을 들먹이며 큰소리를 쳤다.
평소라면 자신의 신분을 듣는 즉시 물러나거나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들은 달랐다.
황준표는 사내들의 표정에서 뭔가 자신이 생각하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놈들, 정체가 뭐지?’
그와 함께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몰려들었다.
“당신들 뭐야! 뭐해, 어서 막아!”
당사 앞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자 뒤늦게 소식을 접한 한국당 의원들과 당원들이 몰려나왔다.
“황 의원님을 구하자!”
누군가 구호를 외치자 한국당 사무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호응을 하며 달려들었다.
“의원님을 구해라!”
“죽여!”
우당탕탕!
탕!
사람들이 뒤엉킨 아수라장 속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터져 나오자 사람들의 행동이 일제히 멈췄다.
“모두 꼼짝 마! 더 이상 우리의 일을 방해하면 발포하겠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들며 연행을 방해하자 급기야 한 명이 권총을 꺼내 발사한 것이다.
눈앞에서 권총을 확인한 한국당 의원들과 당원들은 놀란 마음에 선뜻 달려들지 못했다.
다만, 황준표 의원이 연행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만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도대체 당신들 정체가 뭔데 우리 의원님을 데려가려는 거야!”
그러던 중 그나마 담대한 한국당 당원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황준표 원내총무를 연행하려는 것인지, 또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 총기 소지가 금지되어 있는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권총을 소지한데다 발포까지 한 이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우린 국가정보원 직원들이다. 황준표 의원이 반국가 행위를 저질렀기에 연행하는 것이다.”
그에 황준표를 연행하던 사내 중 한 명이 한국당 의원과 당원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와 연행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럴 리가 없다. 우리 의원님은 결백하다.”
하지만 한국당 의원과 당원들로서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건 우리가 판단한다. 황준표 의원 말고도 반국가 행위를 저지른 의원들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대통령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괜히 방해를 하다가 억울한 일을 당하기 싫으며 그만 물러나라!”
대통령의 명령이라는 국정원 직원의 말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준표가 반국가 행위를 했을 리가 없다며 반발하던 한국당 의원들과 당원들은 움찔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연행해!”
이들의 기세가 사그라들자 앞에 나서서 말을 하던 국정원 직원은 다시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차분하게 명령을 내리는 국정원 직원과 달리 한국당 당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 자리에서 자칫 잘못 행동했다가는 반국가 행위에 함께 걸려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당연히 황준표 의원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유일하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당원들이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자 위기감이 든 것이다.
결국 그는 국정원 직원들에게 끌려가면서 뒤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무엇들 하는 거야! 어서 날 구해!”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그는 필사적으로 도움을 구했다.
이대로 국정원에 끌려간다면 쉽게 풀려나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준표 의원이 아무리 힘껏 고함을 질러도 한국당 의원이나 당원들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로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황준표를 연행하는 이들이 국정원 직원이라는 것과 대통령의 명령이란 말이 주는 무게감도 컸지만, 무엇보다 총을 발사했다는 점이 제일 컸다.
아무리 황준표가 한국당에서 원내총무를 맡고 있다지만, 살아 있을 때에야 떠받들어 주며 이득을 볼 수 있는 법.
총에 맞아 죽은 뒤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사실 대통령의 명령이나 연행하는 이들의 정체가 국정원 직원이란 것은 그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합법적으로 권총을 쏘는 이들에게 어떻게 맨몸으로 덤비겠는가.
아무리 국정원 직원이라 하더라도 한국에서 총기를 발포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데 상대는 총을 쏘는 것에 있어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그만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안이 심각하다는 반증.
어차피 할 만큼은 했고 황준표에게 보일 수 있는 의리를 지켰으니,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여겨 죄책감도 없었다.
그러니 명분이 있을 때 뒤로 물러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러는 와중 한국당 의원들 중에는 황준표 의원이 차지하고 있던 원내총무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무혐의로 풀려난다 해도 이만큼 노력했으니 의리를 지킨 셈이고,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기에 물러나는 한국당 의원들의 모습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비단 한국당 당사 앞에서만 벌어지는 아니었다.
같은 시각, 제1야당인 민족당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대한민국 국회는 때 아닌 구속 소식에 난장판이 되었다.
일반 의원이 검찰에 소환만 되도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것인데, 당의 원내총무를 맡고 있는 최고 의원들이 붙들려 간 것이다.
때문에 여야 할 것 없이 들고일어났다.
모두들 이번 사태에 대하여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한목소리를 내며 이번 일을 지시한 대통령을 탄핵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50석이나 되는 전체 국회의원들이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당과 민족당 의원들 중 황준표와 손익규의 계파 의원, 그리고 그들과 친한 의원들만이 나서서 성토할 뿐, 소장파 의원이나 초, 재선 의원들 중 일부는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저 검찰도 아니고, 국정원이 움직였다면 무언가 숨겨진 내막이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욱이 대통령이 직접 잡아들이라 지시를 내렸다는 말에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다.
웅성웅성!
“김 의원, 자넨 뭔가 아는 것 있나?”
“허허. 최 의원, 나라고 뭐 특별한 것이 있겠나. 나도 모르네.”
한국당과 민족당의 일부 의원들이 이번 사태를 야기한 대통령의 폭거에 응징을 해야 한다며 탄핵소추안을 제의하는 와중에 무소속 의원인 김민평과 최한길은 느긋한 자세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의원들은 비단 이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무언가 정보가 있는지 친한 의원들끼리 논의하는 모습이 국회 본회의장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그건 한국당이나 민족당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런 이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의원들도 몇 있었다.
그들은 바로 민족수호당 소속의 의원들이었다.
3년 전에 창당된 민족수호당은 초, 재선 의원 20명으로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무소속 의원들을 영입해 45명의 국회의원을 거느린 제2야당이 되었다.
한때 돌풍을 일으키던 선진민주당을 제치고 민족당에 이어 제2야당이 된 것이다.
현재 민족수호당은 다른 정당들과 다르게 젊은 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정치에 별 관심이 없던 2~30대에게 정치를 돌아보게 만드는 데 성공한 민족수호당은 당 이름처럼 한민족을 수호한다는 이념 아래 청소년의 교육과 건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정책을 입안했다.
그런 모습들이 차츰 젊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의원 수를 늘려갔고, 또 지지율이 높아졌다.
기존 정당의 당원들이 탈당을 하고 민족수호당의 당원으로 등록할 정도인 것이다.
그런 민족수호당 의원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소란을 지그시 지켜보았다.
사실 민족수호당 의원들은 민족 수호 단체인 지킴이의 회원 출신들로, 회주인 수한의 건의로 정치에 뛰어든 사람들이었다.
지킴이가 아무리 음지에서 민족 수호를 위해 갖은 노력을 해도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정치인들이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않으면 나라와 민족이 올바르게 흘러가지 못 한다 판단하여 그런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민족수호당에 등록한 의원들도 수한의 그런 생각에 동조하고 그 뜻을 받들어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뜻을 펼쳐 나가는 데 힘을 조금씩 모아가는 중이었다.
언젠가는 그 힘을 표출해 민족정기를 해치는 위정자들을 척결하고 국회에 민족정기를 바르게 세울 것이다.
그리고 그 첫걸음이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사욕을 채우기 위해 외국의 정보 조직과 손잡은 국회의원들을 가장 먼저 국회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 탄압입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국회의원을 연행하다니요. 이는 헌법에 나와 있는 국회의원의 권리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동료 의원 여러분, 대통령 탄핵안을 소추합니다!”
한국당 중진 의원인 김유성 의원이 대통령 탄핵안을 소추하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민족당 의원 한 명이 찬성을 하였다.
“대통령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고 국회의원의 강제 연행을 지시한다는 것은 의원 활동을 막겠다는 것이니, 당연 탄핵을 해야 합니다. 전 찬성입니다.”
한 사람이 나서자 이내 봇물이 터지듯 한국당과 민족당 의원들이 앞 다투어 찬성표를 던졌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에 대하여 찬반 투표가 벌어지고 있을 때, 국민들은 조용히 국회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입법 활동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고자 하는 국민들을 위해 국회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전달해 주는 국회방송.
그것을 통해 정치에 관심이 있는 국민들은 언제든 국회의 회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여야 원내총무들이 대통령령으로 긴급 체포가 되었다는 속보가 나가자 많은 국민들의 관심이 국회에 몰렸다.
과연 국회의원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지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는 국회의원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국민들의 두 눈 가득 박혀들었다.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한 채 혹여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 것이 두려운 의원들은 그런 국민들의 시선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야를 떠나 국회의원으로서의 지위와 권리를 잃어버리지 않게 담합하는 한국당과 민족당 의원들은 여전히 상황을 판단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사태의 진실을 파악한 뒤에 행동하라고 만류하는 의원들에게 고함을 치며 난리를 쳤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여과 없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 ◈ ◈
조그만 방.
밝은 조명 아래 드러난 방은 너무도 황량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방 안에 있는 집기라고는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두 개의 의자 위에는 상반된 표정의 인물들이 각기 자리해 있었다.
한 사람은 지난밤 긴급 체포가 된 한국당 원내총무인 황준표였고, 그 맞은편에는 국정원 2차장인 김기춘이었다.
“이게 대체 무엇하는 짓인가!”
황준표는 자신을 신문(訊問)하는 김기춘 국정원 제2차장에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김기춘 차장은 그저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며 나직하게 말을 하였다.
“이봐, 황준표. 당신, 지금 여기가 어떤 곳인지 잊었나 본데, 여긴 당신의 그 알량한 권력이 닿지 않는 곳이야.”
결코 높지 않은, 하지만 그로 인해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목소리.
“당신이 여기 끌려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대체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끌고 온 것인가. 어디 들어나 보자.”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황준표는 믿고 있는 바가 있다는 듯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사실 여기서 물러나면 끝장이라는 절박함이 그에게 마지막 발악을 하게끔 만든 것이다.
그런 황준표의 뻔뻔스러운 모습에 김기춘은 말없이 서류 봉투에서 사진을 꺼냈다.
그와 함께 테이블 위에 놓인 녹음기도 재생을 시켰다.
얼마 안 있어 녹음기에서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한참을 듣던 황준표의 낯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 황 의원님께서 CIA의 동아시아 지부장을 만나셨다고요?
― 음, 그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 우리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우리 일본의 정보력은 미국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그 내용을 한국 정부에 넘긴다면 어떻게 될지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소?
― 우리 일본이 원하는 것은 플라즈마 실드 발생 장치와 이번에 쿠웨이트에서 활약을 한 신형 전함의 설계도입니다.
― 아니…….
탁!
거기까지 녹음 내용을 들은 김기춘 차장은 녹음기를 정지시켰다.
“12월 28일, 저녁 10시 28분, 종로 호텔 709호, 이토 곤스케, 사이고 다카모리…….”
김기춘 차장은 말을 하면서 들고 있던 사진을 한 장, 한 장 황준표 앞에 내보였다.
그 사진 속에는 그날 황준표가 만난 일본인 두 명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사진 상단에는 몇 장이 종이가 클립에 끼워져 함께 있었다.
김기춘은 끼워져 있던 서류를 분리해 사진 옆에 내려놓았다.
그 행동에 따라 황준표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 순간, 서류 상단에 굵게 표시된 글씨가 강렬하게 들어왔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본국가안보국(NNSA) 국장이라니…….”
황준표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진 옆에 놓인 서류를 보고 너무 놀라 중얼거렸다.
황준표도 NNSA가 어떤 조직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총리 직속 내각조사실의 기능을 확대 개편한 정보 조직이며, 대한민국의 국정원보다 더 폭넓은 정보활동을 하는 곳이란 것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필요에 따라서는 적대국의 요인 암살도 하는 조직의 수장을 자신이 만났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당시 일본 총리가 총애하는 인물이라고 이토 곤스케에게 소개를 받기는 했지만, 설마 그가 NNSA의 수장일 줄은 미처 몰랐다.
더욱이 그를 소개한 이토 곤스케의 정체도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달랐다.
단순히 일본 대사관 직원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대사관 직원이 아닌 NNSA의 한국 지부장이었던 것이다.
한국 내에서 일본에 유리한 정책이 이루어질 수 있게끔 공작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에게 포섭된 국내 정치인들이 상당하다는 것도 서류에 일목요연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아……!”
자료를 읽어가던 황준표는 머릿속이 멍해짐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기습적으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마냥 띵했다.
빠져나갈 틈이 전혀 없는 올가미에 묶였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이미 국정원에서는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자신을 붙잡은 것이다.
평소라면 국회의원을 감시했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방금 김기춘 차장이 말했다시피 자신은 외국 정보기관의 수장과 비밀리에 회동을 했다.
그리고 자신은 전략물자를 생산하는 국내 업체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음모를 꾸미려 하지 않았나.
그런 정보가 모두 알려진 상태에서 자신이 아무리 여당의 원내총무라 해도 버틸 여지는 없었다.
“당신의 잘못을 인정하나?”
“…….”
황준표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럴 정신이 없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어렵게 정계 복귀를 하였는데, 그보다 더한 나락으로 빠져 버렸으니 정신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연좌제(緣坐制)라는 것이 현대에 들어와 사라지기 했지만, 간첩 행위에 대한 사항은 암묵적으로 유지가 되고 있었다.
그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가족 중 한 명이 간첩 행위를 하다가 잡히게 되면 정서상 나머지 가족들도 간첩으로 몰려 불이익을 당했다.
취직이나 사회활동 전반에 걸쳐 주홍 글씨가 새겨져 두고두고 피해를 입는 것이다.
그러니 황준표가 지금 이 순간에 느끼는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야 이젠 나이가 있으니 어찌 버틴다 해도 자식이나 손자들은 어떻게 될지 앞날이 암담했다.
다행이라면 손자들은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자식들은 아니었다.
황준표의 절망하는 표정을 잠시 지켜보던 김기춘 차장은 이젠 당근을 줄 차례라 생각해 제안을 하였다.
“CIA 극동 지부장을 만나 나눈 이야기를 진술하고, 또 그동안 당신이 저질러 온 불법 사안들을 시인한다면 간첩 행위는 무마해 주지.”
김기춘은 솔직히 황준표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황준표는 여당인 한국당의 원내총무였다.
그를 따르는 국회의원도 많을 뿐 아니라 여당 내에서 그의 입김은 무척이나 컸다.
그런데 만약 간첩 행위로 처벌을 하게 된다면, 자칫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를 통일하면서 겉으로는 평화가 도래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많은 불안 요소가 있었다.
아직 소탕하지 못한 구북한 지휘관들이 남아 있고, 또 이념적으로 갈라져 대립해 온 남과 북이 화합을 하기에 3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정부는 정책 수행을 하는 데 있어 아직도 살얼음판을 걷듯 그 행보가 조심스러웠다.
그런 가운데 동맹인 미국이나 일본 또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호시탐탐 대한민국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니 윤재인 대통령은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대수술을 감행하면서도 외부에 허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소음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미국이나 일본 모두 겉으로는 동맹이라고 하지만 어차피 모두 자국의 이득을 위해 손을 잡은 것일 뿐, 결코 인도주의적 입장에 입각해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동맹이라도 자국의 이익 앞에서는 적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것이 국제관계인 것이다.
그러니 황준표나 손익규처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외국의 정보기관과 손잡은 이들을 처리하면서도 큰 소란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더욱이 황준표의 뒤에는 미국의 CIA가 있지 않은가.
아직 대한민국이 홀로 미국의 부당함을 맞서기엔 한참이나 부족한 상황이었다.
차후 대한민국이 동북아시아에서 홀로서기를 할 수만 있다면, 그때는 사정이 다르겠지만.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를 하는 것이니, 지금은 묵묵히 참으며 내부를 다스려야 할 때였다.
“물론 불법을 저지른 것에 대한 죄값은 치러야 하겠지만 말이야.”
김기춘은 의자에 기대 팔짱을 끼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황준표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황준표는 결국 그의 말대로 따르는 것이 최선이란 것을 깨달았다.
“알겠소. 내 모든 것을 인정하고 진술할 테니, 나만 처벌하고 끝내 주시오.”
드르륵.
황준표가 항복 선언을 하자 김기춘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이 있는 쪽으로 손짓을 하였다.
그것은 특수 제작된 거울로, 이곳에서는 볼 수 없지만 거울 뒤쪽에서는 이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기춘의 손짓에 국정원 요원 한 명이 방으로 들어와 그가 하는 진술을 녹음하였다.
황준표가 들려준 이야기는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정계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준 CIA나 그것을 약점 삼아 협박을 해온 일본의 NNSA의 목표가 너무도 황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라이프 메디텍이 파워 슈트를 개발했을 뿐 아니라 실용화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형 순양함인 해모수함의 비밀을 CIA가 알아내 설계도를 빼돌리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두 무기 모두 라이프 메디텍의 파주 연구소에서 개발되었고, 그 모든 것을 정수한 박사가 개발했다고 추정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CIA는 정수한 박사를 어떻게든 미국으로 데려가려고 황준표에게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수한 박사를 추방시키도록.
물론 일본은 그러한 사실까지는 모른 채 그저 정수한 박사가 개발한 무기들의 설계도를 얻기 위해 황준표를 협박한 것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