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코리아-93화 (93/118)

1. 암류(暗流)

강남의 한 음식점에 장년의 남자들이 모여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맛난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굳어 있었다.

무언가 불만이 있는 듯 모두들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앞에 따라진 술잔만 들이켤 뿐이었다.

이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국회의원들로, 여야의 중진 의원들이 모여 정국을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이다.

이들은 지금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은 채 서로의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민감한 내용이 오가게 될 이런 자리에서 먼저 말을 꺼낸다는 것은 자신의 패를 먼저 상대에게 내보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말인즉, 상대적으로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내보이게 되는 셈이고, 다시 말해 협상에서 손해를 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서로 눈치만 보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서로 눈치만 보며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서로 눈치만 보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봅시다.”

결국 보다 못한 여당의 원내총무인 황준표가 먼저 입을 열고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그러자 야당 쪽에서도 그에 대한 답변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뭐, 우리 쪽 의견을 여당에서 수렴을 해준다면…….”

야당 원내총무인 손익규 의원이 황준표 원내총무의 말을 받은 것이다.

처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힘들었지, 황준표 의원이 물꼬를 트자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들은 한창 정책에 대한 방향을 협의하며 서로의 이익을 챙겨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협의가 마무리 되자 황준표 의원이 한마디를 꺼냈다.

“이제 정책 협상도 마무리되었는데, 내 한 가지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인지 황준표 의원이 입을 열자 여야 의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시선의 모이자 황준표 의원은 눈을 반짝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여러 의원님들, 천하 그룹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의미를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의원들을 보며 황준표 의원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천하 그룹이 이번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너무 독주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입니다.”

현 정권에 대하여 비판하는 듯한 언급에 이 자리에 모인 의원들은 모두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여당이나 야당을 가릴 것 없이 모두들 극히 조심스런 얼굴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혹시나 하는 얼굴로 주변에 있던 동료 의원들의 눈치마저 살폈다.

그에 황준표 의원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자신의 의견을 이어 나갔다.

“여당 의원으로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 그럽니다.”

“천하 그룹이 주요 국책 사업이나 국가 주도의 프로젝트를 맡는 비율이 너무 높다 보니 심히 우려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황준표는 마치 정경 유착을 고발하는 것마냥 부정적인 분위기를 몰아가기 시작하였다.

그가 여당의 원내총무이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것에는 사실 다른 속셈이 있었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내의 여론이 심상치 않기 때문인 것이다.

현재 여당 내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몇몇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중 있게 떠오르고 있는 이가 바로 천하 그룹 정대한 회장의 3남이자 전 캄보디아 대사였던 정명수 차관이었다.

정명수 차관은 실적도 뛰어나지만 그 못지않게 그를 둘러싼 배경이 대단했다.

그가 재계 서열 3위에 올라 있는 천하 그룹의 로얄 패밀리라는 것은 결코 무시 못할 사실이었다.

더욱이 그의 부인이나 자식들도 말만 하면 다 알 수 있을 만큼의 사회적 명망을 쌓았다.

그의 부인은 유명한 디자이너인 동시에 많은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 모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장녀인 정수정 또한 유명 아이돌 그룹의 멤버이면서도 어려서부터 자원봉사는 물론, 대한민국을 외국에 알리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하는 등 타의 모범이 되었다.

장남인 정수한은 어려서 납치를 당했다가 장성해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세간의 화제를 일으킨 것은 물론이고, 이후의 활약상을 통해 세기의 천재라 알려졌다.

그중에서도 정수한은 천하 그룹이란 집안의 도움 없이 자수성가한 입지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라이프 메디텍이란 재계 100위권 내에 드는 기업을 일궈낸 것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국방을 책임지는 획기적인 무기들을 개발한 개발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돈만 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

많이 버는 만큼 엄청난 기부행위를 하여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한 것이다. 급기야는 아예 재단을 만들어 재산 중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며 모범적인 사례로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런 요인 때문에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명수 차관을 자신이 속한 정당으로 영입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여야 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사실을 모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렇기에 마치 천하 그룹이 정권과 유착된 것처럼 포장했지만 황준표 원내총무의 속뜻은 그게 아님을 잘 알 수 있었다.

정명수 차관을 견제하고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여당 의원들은 황준표 의원의 계파에 속한 의원들이기에 어느 정도 언질을 받은 상황.

굳이 핵심을 짚어주지 않아도 눈치를 챌 수가 있었다.

한편, 야당 의원들은 황준표의 의도를 알지 못해 그저 아무 소리 없이 궁리를 할 뿐이었다.

‘괜히 재계 서열 3위인 천하 그룹과 척을 질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경계 섞인 마음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어지럽혔다.

그리고 과연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이득인지 계산을 하느라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 ◈ ◈

“아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지킴이 PMC의 문익병 사장은 느닷없는 정부의 제재(制裁)에 어처구니가 없어 소리쳤다.

“사장님, 저도 어처구니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방위사업청에서 그런 공문이 내려왔는데 어쩝니까?”

하문수 실장은 자신에게 따지고 드는 문익병 사장에게 변명하듯 말을 꺼냈다.

사실 하문수 실장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직원 모집을 추가한 상태라 그에 필요한 장구류를 구매하기 위해 계약을 체결하려고 하였는데, 느닷없이 방위사업청에서 제동을 건 것이다.

지킴이 PMC에서 구매하려는 물품 중에 국가 전략물자가 포함되어 있어 제재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웃긴 점은 지킴이 PMC에서 구매하려는 물품이 바로 수한이 주인으로 있는 라이프 메디텍에서 생산하는 파워 슈트라는 것이다.

지킴이 PMC에게 파워 슈트는 기본 장구류였다.

그런데 그런 파워 슈트를 전략물자라는 이유로 구매를 하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은 정말 말도 되지 않는 변명일 뿐이었다.

그런 논리에서라면 방위사업청에서 파워 슈트의 개발사인 라이프 메디텍에 그만한 이윤을 책임져 줘야만 했다.

라이프 메디텍이 물건을 판매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손해를 그들이 책임져야 하는데, 그건 또 그렇지가 않았다.

즉, 방위사업청은 아무런 보상도 없이 라이프 메디텍의 정당한 거래 행위를 전략물자라는 말로 막은 것이다.

때문에 그로 인한 피해는 라이프 메디텍뿐만 아니라 지킴이 PMC도 함께 입고 있는 중이었다.

기본 장구류에 속하는 파워 슈트를 라이프 메디텍으로부터 구매하지 못하면 직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건 당연지사.

결국 현장으로 파견을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파워 슈트 없이 현장에 파견을 보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직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며, 만약 사고라도 터진다면 그 손해는 어디서 만회를 한단 말인가.

지킴이 PMC는 고위험에 노출되는 의뢰를 수행하기에 타사보다 많은 의뢰 비용을 책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직원은 기계와 같은 부속이 아니다.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에 이른다면 그것은 고스란히 회사의 손실로 적용된다.

그러니 지킴이 PMC는 고가의 장비인 파워 슈트를 구매해 직원의 안전을 확실하게 확보하면서 위험한 의뢰를 완벽하게 처리함으로써 이윤을 추구한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어렵게 되었다.

더군다나 해외로 빠져나간 파워 슈트에 대한 벌금을 물리겠다는,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 문익병 사장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이건 분명 누군가 장난을 치는 것이 분명해.”

문익병 사장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문이 날아온 것은 누군가의 음모가 분명하다고 판단을 하였다.

아무리 파워 슈트가 전략물자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청와대와 사전 협약이 끝난 일이었다.

지킴이 PMC가 설립되고 정부가 처리하지 못한 구북한 특수부대원들을 수용하면서 청와대에서는 지킴이 PMC의 편의를 봐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런 약속이 3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틀어진 것이다.

“나가봐!”

사실 문익병 사장도 너무 답답해 하문수 실장에게 큰소리를 쳤을 뿐이었다.

그의 잘못이 아님은 문익병 사장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안이었으니.

잠시 노화를 가라앉힌 문익병 사장은 하문수 실장을 내보낸 뒤,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원장님, 오늘 시간 좀 되십니까?”

문익병 사장이 연락을 취한 것은 김세진 국정원장이었다.

수한이 쿠웨이트로 가면서 혹시 문제가 생기면 김세진 국정원장과 의논을 하라는 지시를 떠올린 것이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 8시, 서초동에서 뵙겠습니다.”

김세진 국정원장과 미팅 약속을 잡은 문익병 사장은 다시 수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쿠에이트에서 돌아온 수한은 파주 연구소에 틀어박혀 한창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위사업청에서 내려온 공문의 내용이 워낙 심각하기에 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김세진 국정원장을 만나 이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단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계약이 체결되어 있는 미국과도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에 수한에게 미리 보고를 해두어야 했다.

◈ ◈ ◈

드르륵.

김세진 국정원장은 방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하였다.

“이거, 제가 좀 늦었습니다.”

김세진 국정원장은 문익병 지킴이 PMC 사장이 갑작스런 연락에 연유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급히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라면 별 개의치 않고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국정원장 정도 되는 직위에 있다면 그것은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기에.

하지만 지킴이 PMC는 그렇게 쉽게 넘겨 버릴 상대가 아니었다.

이번 정권의 탄생부터 함께 보조를 맞춰오던 회사이다 보니 김세진 원장도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킴이 PMC가 가진 역량은 아무리 국정원장이라 해도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막말로 국정원 내의 특수팀도 지킴이 PMC에 위탁 교육을 보낼 정도로 의존하는 바가 높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김세진 국정원장은 확실한 명분만 있으면 지킴이 PMC에게 양보를 하는 편이었다.

“아닙니다. 국가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 늦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마음 쓰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문익병 사장은 가볍게 말을 받으며 김세진 원장을 맞이했다.

“일단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하시지요.”

부드럽게 권하는 문익병 사장의 행동에 김세진 국정원장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는 오늘 무슨 문제로 문익병 사장이 자신을 보자고 한 것인지 알아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킴이 PMC나 라이프 메디텍에 관한 사안은 따로 담당을 두어 처리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데 자신이 국정원에서 나올 때까지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보가 올라오지 않아 시간이 늦어졌다.

국정원에서 이들 회사를 따로 관리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국가 전략 부문에 있어 그 역할이 두루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회사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수한도 그 영향력이 지대했다.

정보가 알려질수록 너무 대단한 업적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황당해지는 경황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국가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의 집안인 천하 그룹 전체와 비견해 봐도 결코 처지지 않을 정도로 정수한 박사가 대한민국에 미치는 결과는 엄청났다.

그렇기에 수한에 대해서는 따로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

한데 김세진 원장은 자리에 앉으며 문익병 사장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보자고 한 것인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로서는 참으로 기가 막혀 한동안 멍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쪼르륵!

조용히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물 따르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김세진 원장은 정신을 차렸다.

“이런, 제가 결례를 하였군요.”

김세진 원장이 생각에 골몰해 있는 동안 문익병 사장이 그의 잔에 술을 따라 준 것이었다.

고급 음식점인지라 사기 주전자에서 흘러나온 술이 술잔에 담기자 맑은 약주의 향이 방 안 가득 풍겼다.

그와 동시에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확 들었다.

“향이 참 좋습니다.”

분위기를 풀어볼 요량으로 김세진 원장은 웃으며 덕담을 건넸다.

그런 김세진 원장을 보며 문익병 사장도 마주 웃으며 대답을 하였다.

“예. 옥류관에 백두산 산삼주가 들어왔다고 해서 한 병 가져왔습니다. 이게 피로 회복과 정력에 그렇게 좋다고 합니다. 한잔 쭉 들이켜시지요.”

“그럴까요?”

“건배.”

쨍!

“웃!”

“캬! 확실히 온몸이 짜릿한 것이… 좋군요.”

백두산 산삼주라고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목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나 먹고 난 뒤 입 안에 맴도는 산삼의 향이 정신을 더욱 맑게 해주는 것 같았다.

“문 사장님 덕분에 좋은 것을 먹어보는군요.”

“아닙니다. 제가 원장님을 만난다고 하니 박사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문익병 사장은 수한이 일부러 챙긴 것이라며 슬쩍 이야기를 흘렸다.

그 말에 김세진 원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가 그저 우의를 다지기 위한 자리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상기하였다.

“아, 그렇습니까? 정 박사님께 좋은 것을 보내주셔 감사하다 전해 주십시오.”

“그런 것이라면 한 입 건너뛰는 것보단 직접 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 예.”

사실 김세진 원장은 비록 나이는 어려도 감히 범접하기 힘들 만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수한을 대하기가 무척이나 껄끄러웠다.

더욱이 좋은 일로 만나는 것도 아니고, 약속을 어긴 일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자리인지라 직접 말을 주고받기가 난감하였다.

솔직히 수한이 나이는 어릴지 몰라도 전생에 대한 기억과 9클래스를 정복한 현자가 아닌가.

이미 깨달음의 경지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과거 위대한 성인들 반열에 들어선 존재가 바로 수한이었다.

그러다 보니 수한은 가만히 있어도 범접하기 힘든 오라를 발산하고는 했다.

물론 수한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해지는 감정도 천차만별이었다.

가족이나 파이브 돌스처럼 수한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온화함이나 인자함, 그리고 충족감과 안도감 등 긍정적인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면, 수한을 적대하는 이들은 위압, 두려움 내지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그런데 김세진 원장은 또 달랐다.

가족들처럼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대하거나 대응하려는 것이 아닌 거래 관계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끼지는 않더라도 위엄이나 위압 같은, 절대 함부로 하지 못할 존재라 느껴졌다.

나이 어린 이에게 그런 느낌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국정원장인 김세진에게는 무척이나 생소한 느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말을 하기가 꺼려지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김세진 원장의 감정을 알기에 문익병 사장도 일부러 수한을 언급했다.

“그런데 오늘 보자고 한 것은 아무래도 방사청에서 내려간 공문 때문이겠지요?”

김세진 원장은 분위기 쇄신을 위해 오늘 문익병 사장이 전화를 한 이유로 바로 논점을 바꿔 버렸다.

“예. 비록 저와 맺은 계약은 아니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정부에 허락을 받은 것이라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급 기관에서 이상한 이유로 방해를 한다는 것에 적잖이 당황스럽습니다.”

문익병 사장은 청와대에서 허락한 일을 어째서 지금에 이르러 방위사업청에서 방해를 하는 것인지 이유를 물었다.

사실 지킴이 PMC 직원들에게 회사에서 파워 슈트를 지급하는 문제는 이미 대통령의 허가를 받은 사항이었다.

그리고 지킴이 PMC가 해외 활동을 하는 것 또한 정부의 요구 때문에 그리된 것이다.

미국은 현재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IS와 전쟁에 한국군 파병을 계속해서 요구해 왔는데, 대한민국 정부는 국내의 혼란스런 문제를 언급하면서 지킴이 PMC를 파견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셈이기에 청와대는 지킴이 PMC의 해외 진출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어찌 보면 계륵과 같은 존재인 구 북한 특수부대원들을 대거 수용해 문제를 해결하고, 또 그들의 생계도 책임져 주면서 해외에서 달러도 벌어들일 수 있어 그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 아니, 일거다득(一擧多得)이었다.

다만, 파워 슈트를 외부로 반출할 때는 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라이프 메디텍에서 새로운 파워 슈트가 생산되면 대통령 직속부대인 AS에 우선 지급을 하는 것으로 계약을 맺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수한이 정부의 요구에 맞춰 새로운 파워 슈트인 스파르탄과 리퍼를 개발한 것이다.

아무튼 문익병 사장은 지금 김세진 원장을 통해 청와대가 의도적으로 약속을 어긴 것인지 확인하려 했다.

만약 정말로 청와대가 약속을 저버리고 그런 공문을 내려보낸 것이라면, 앞서 계약했던 모든 과정을 언론과 국회에 알릴 생각까지 한 채로.

“아무래도 방사청장이 사안의 중요성을 잘못 알고 독단으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은 제가 잘 처리할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문익병 사장이 무슨 의도로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 잘 알고 있는 김세진 원장은 얼른 그를 달랬다.

그러면서 자신의 선에서 처리할 테니 그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갖지 말라는 의미의 말을 하였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저희는 원장님의 말씀을 믿고 계획대로 일을 추진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습니까?”

“예, 아무 문제 없을 테니 그 공문은 상관하지 마시고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김세진 원장은 최대한 좋게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생각을 거듭했다.

먼저 이런 엉뚱한 일을 만든 방사청장을 만나 무슨 경위로 이런 조치를 취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뭔가 있어. 그 새가슴인 방사청장은 독단으로 그런 일을 할 위인이 아니야. 내 좀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문익병 사장에게는 안심하고 일을 추진하라 하면서도 김세진 원장은 이번 일을 결코 그냥 넘겨 버릴 생각이 없었다.

보신주의(保身主義)에 입각해 자신의 몸을 철저히 사리는 방위사업청장이 이런 엉뚱한 일을 독단으로 처리했을 리가 없다.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내린 김세진 원장은 내막을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뭔가 생각에 잠긴 김세진 원장의 얼굴을 보며 문익병 사장은 오늘 만남의 목적을 충분히 이루었음을 확신했다.

그는 술잔을 기울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 ◈ ◈

울산 현재 중공업.

이곳에는 지금 많은 내외국인들이 현재 중공업이 진수하는 한국형 순양함 3번함의 진수식을 보기 위해 모여 있었다.

한국형 순양함이란 페르시아만에서 IS를 맞아 쿠웨이트 해방 작전을 진두지휘했던 함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당시 뛰어난 활약을 펼친 해모수함을 1번함으로, 2번함인 주몽함, 그리고 오늘 진수되는 3번함인 왕건함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4번함이자 이성계함이라 명명될 함정이 거제 삼정 조선소에서 건조되고 있는 중이다.

대한민국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국가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바다가 무척이나 중요한 자원이고, 또 세력을 뻗기 위해선 바다를 개척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동안 대한민국은 바다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상반된 이데올로기 탓에 늘 북한 정권과 갈등을 빚고, 또 첨예한 대립을 하다 보니 육군 위주의 전력 증강에만 힘을 쏟아야만 했다.

하지만 남북한이 통일된 이후, 통일 대한민국은 육해공군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며 그에 대해 부단한 노력을 쏟았다.

그런 가운데 가장 먼저 대두된 것이 해군이었다.

3면이 바다인 탓에 자국의 영해를 지키기 위해서는 현대 해군에 걸맞은 첨단 군함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노후화된 군함들을 퇴역시키고, 오랜 연구 끝에 한국형 순양함인 해모수 급 순양함을 건조하게 되었다.

1번함 해모수를 필두로 한민족 역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국가 시조의 이름을 딴 순양함이 속속 만들어져 갔다.

3면의 바다를 지키고, 또 세 개 함대에 한 개의 기동 전단을 운영하는 한국 해군의 특성에 맞게 네 척의 한국형 순양함 건조 계획이 마침내 결실을 거두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세 번째 함인 왕건함이 진수식을 거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귀빈석에 앉아 왕건함의 진수식이 거행되길 기다리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윤재인 대통령.

왕건함의 제원이 적혀 있는 카탈로그를 읽고 있던 그는 자신의 뒤로 다가와 귓속말을 전달하는 길성준 비서실장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인가?’

“그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중요한 일 같습니다.”

길성준 비서실장은 자신 또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며 말을 전했다.

할 수 없이 윤재인 대통령은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재인 대통령 옆에는 각기 미국과 중국 대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통적 우방인 미국과 그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대표.

둘 모두 대한민국의 순양함인 왕건함의 진수식을 지켜보기 위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만큼 한국형 순양함의 존재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순간에 윤재인 대통령이 자리를 비워야 할 일이 발생한 것이다.

어찌 보면 손님을 초대해 놓고 주인이 자리를 비우는 것과 같은 상황.

하지만 미국이나 중국 대사에게 오늘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참석 유무가 아닌, 한국형 순항함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라 그리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무튼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벗어난 윤재인 대통령은 따로 자리를 마련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김세진 국정원장을 만나러 갔다.

“그래, 무슨 일이기에 행사가 시작도 되기 전에 날 찾은 것인가?”

김세진 국정원장의 모습을 확인한 윤재인 대통령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다짜고짜 용건을 물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진수식이 벌어지는 행사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현재 자신이 신경을 써야 할 사항은 그리 없고, 또 국정원장이 직접 보고를 할 사항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데 국정원장인 그가 직접 이곳 울산까지 찾아와 자신과 면담을 하려 하니 조금 의아스러웠다.

미국과 중국의 대사가 기다리고 있는 행사장으로 가는 것이 현재 윤재인 대통령이 알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

아무리 통일을 이룩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아직 대한민국은 주변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사정이었다.

그랬기에 미국과 중국의 대사를 기다리게 한다는 것은 국익에 방해 요소가 될 우려가 있기에 조금은 불편한 심기를 김세진 원장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 윤재인 대통령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세진 국정원장은 차분하게 서류 봉투 하나를 대통령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말없이 서류 봉투를 내미는 김세진 국정원장을 보며 윤재인 대통령이 물었다.

“어제저녁에 지킴이 PMC의 문 사장을 만나고 받은 물건입니다.”

김세진 국정원장의 무미건조한 말투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은 윤재인 대통령은 인상을 구기며 서류 봉투를 열었다.

그러고는 안에 들어 있던 서류를 꺼내 읽기 시작하더니, 곧 조금 전보다 더 심하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일이 있는데 왜 나한테 보고가 올라오지 않는 것인가!”

윤재인 대통령은 읽고 있던 서류를 집어 던지며 버럭 호통을 쳤다.

방금 전 윤재인 대통령이 읽은 것은 방위사업청에서 지킴이 PMC에 보낸 공문이었다.

파워 슈트의 외국 반출 행위를 금지한다는 내용과 그동안 정부의 허가 없이 불법으로 반출한 것에 대한 벌금을 물리겠다는,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공문을 다 읽은 윤재인 대통령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급기야 자신의 인가도 없이 무턱대고 공문을 발부한 방위사업청장의 저희가 의심되었다.

분명 그 자신이 직접 지킴이 PMC와 거래를 맺어 허가를 내려주었는데, 방위사업청에서 자신도 모르게 공문을 보내다니.

그 내막 속에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사가 끝나면 바로 청와대로 들어갈 테니, 방사청장 들어오라고 하세요.”

윤재인 대통령은 뒤에 서 있는 길성준 비서실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원래 왕건함의 진수식이 끝난 뒤에는 여러 나라의 대사들과 만찬이 마련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성공적인 순양함 건조에 따른 각국의 속내를 읽어볼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한데 그런 일정을 취소하고 청와대로 복귀를 한다는 말에 길성준 비서실장은 잠시 망설였다.

만찬 자리의 중요성을 짚어줘야 하겠지만, 윤재인 대통령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번 진수식에는 굳이 대통령이 직접 참석할 필요가 없긴 했다.

총리나 국방부 장관이 대신 참석해도 될 일이었는데, 굳이 윤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날이 지날수록 선박 건조 업체들의 적자가 심화되고 있기에 오늘 왕건함의 진수식을 맞아 한국 해군의 군함 건조 기술을 선보이며 세일즈 외교를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이나 중국은 모르겠지만, 그밖의 다른 나라는 충분히 관심을 보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하여 부푼 기대를 안고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생각지도 않은 변수로 인해 일정이 틀어지고 만 것이다.

윤재인 대통령이 화를 내는 이면에는 바로 그런 점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대통령이 국정을 수행하는 데 있어 결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일정을 잡지는 않는다.

단순한 스케줄이라도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복합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번 진수식 참석만 해도 단순히 환영 행사만이 아니라 이 기회를 통해 세계 각국에 대한민국 해군의 저력을 보여주어 감히 도발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기술의 뛰어남을 강조하여 수주 계약을 맺자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기대하던 자리였는데, 엉뚱한 일로 일정이 변경되고 말았다.

지시를 받은 길성준 비서실장은 바로 대통령의 일정을 조절하기 위해 움직였다.

한편, 단호한 일처리를 지켜보던 김세진 국정원장은 윤재인 대통령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심각하게 이번 사안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 ◈ ◈

“청장,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윤재인 대통령은 왕건함의 진수식이 끝나자마자 모든 일정을 뒤로한 채 청와대로 복귀하였다.

그러고는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박세기 방위사업청장을 집무실로 불러들여 물었다.

“저, 그, 그것이…….”

“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있지 않습니까?”

윤재인 대통령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박세기 청장의 모습에 더욱 크게 호통을 쳤다.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입니까? 예? 어디 한 번 말해보세요!”

계속되는 질책에 박세기 청장은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제길, 내 이럴 줄 알았다.’

사실 박세기 청장은 지킴이 PMC에 공문을 보내기 전에 무척이나 고민을 했다.

하지만 여야 의원들이 하도 전화를 해 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서류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고위 공무원들은 정치권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였는데,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를 자신들의 권력을 표출하는 장으로 만들면서 그런 현상이 벌어졌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들은 질책을 받지 않기 위해 그들의 청탁을 하나둘 들어주게 되었다.

어느새 공무원이 국회의원의 눈치를 보는 자리가 되고 만 것이다.

방위사업청의 수장인 박세기 청장도 그런 위인 중 한 명이었다.

사실 그는 예전 일신 그룹의 청탁을 받아 경고를 먹은 적이 있었다.

그나마 그 뒤로는 별 탈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옷을 벗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청탁을 넣은 여야 의원들이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지금 보여주는 대통령의 서슬 퍼런 기세에 그런 약속이 지켜질 리는 만무했다.

그러니 어느 정도까지 추락하게 될지 장담을 하지 못하는 박세기 청장이었다.

예전 정권이었다면 박세기 청장이 이토록 고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대통령이라 해도 국회의원들을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국정 운영을 해 나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대통령 자리에 있는 이는 윤재인이었다.

한반도를 통일시킨, 그야말로 권력의 정점에 올라 있는 존재인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윤재인 대통령의 집권 초반 북한의 전쟁 도발로 인해 지지율이 극도로 나빠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 되어 오히려 한반도가 통일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대통령 직속 특수부대가 북한에 침투를 하여 정권을 붕괴시키고 휴전선 일대에 주둔하던 북한군 지휘관들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거기에 최대의 위협이라 할 수 있는 핵무기와 핵 시설마저 확보하였다.

윤재인 대통령의 업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후 처리도 무척이나 깔끔하게 이루어졌는데, 동맹인 미국이나 국경을 맞댄 중국으로부터 핵무기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외교의 크나큰 성과였다.

지금까지 미국은 새로운 핵무기 보유국이 탄생하는 것을 극구 저지해 왔다.

아니, 미국뿐 아니라 기존에 핵을 가지고 있던 강대국 어디라도 같은 행동을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단숨에 핵무기 보유국 승인을 얻어낸 것이다.

그것 하나만 봐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윤재인 대통령의 업적은 엄청났다.

감히 트집을 잡을 수도 없을 만큼 확연히 드러나는 업적이었고, 덩달아 지지율도 급상승하였다.

일부에선 윤재인 대통령에게 종신 대통령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할 정도로 인기와 지지율이 상승하였다.

물론 그런 요청은 윤재인 대통령이 헌법에 위배되는 일이라며 고사(苦辭)하며 그저 해프닝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현재 윤재인 대통령이 하는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박세기 방사청장이 청탁을 받아들여 일을 꾸민 데에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화려한 업적을 쌓은 윤재인 대통령이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임기는 1년 남짓.

1년만 잘 버티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을 하고, 이후 권력을 얻게 될 여야 의원들의 약속을 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박세기 청장의 기대와 달리 대통령의 반응은 그야말로 극단적이었다.

결국 여야 국회의원들의 약속과 별개로 자리를 보존하는 것은 이미 글렀다는 판단이 들었다.

“왜 말이 없습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입니까?”

“그, 그것이…….”

계속되는 추궁에 박세기 청장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받은 압력과 청탁에 대한 내용을 윤재인 대통령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잘못 판단을 내렸다가는 그동안 힘들게 쌓아온 기반마저 모조리 날아갈 판국이었으니.

비록 이번 일로 자신은 옷을 벗게 되겠지만, 그래도 연금만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제 나름대로 수십 년간 국가를 위해 노력해 왔다고 착각하는 박세기 청장이었다.

과연 끝까지 추한 면모를 버리지 못한 박세기 청장은 자신에게 청탁을 넣은 의원들의 명단을 전부 공개했다.

즉, 자신의 연금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과 딜을 한 것이다.

박세기 청장으로부터 명단을 넘겨받은 윤재인 대통령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이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서류에 사인을 했겠습니까? 야당에서만 그랬다면 저도 거부했을 테지만, 여당의 원내총무인 황준표 의원으로부터 연락이 왔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자는 전에도 한 번 그런 일로 문제를 일으키더니만, 이번에 또…….”

윤재인 대통령은 황준표 여당 원내총무의 이름이 언급되자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4년 전에 진행되었던 차세대 주력 전차 선정 과정.

그때도 황준표 의원은 일신 그룹의 로비를 받아 방위사업청에 압력을 행사했다.

당에 큰 손해를 끼친 그 일로 말미암아 한동안 입지가 흔들리기도 했지만, 어느새 재기에 성공하여 다시 한 번 원내총무의 자리에 올랐다.

그것만 보면 아예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닌 듯했다.

문제가 그 능력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윤재인 대통령은 그 점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것이고, 이번 기회에 그를 더 이상 활개 치고 다니게 놔두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가보시오.”

윤재인 대통령은 차가운 태도로 박세기 청장을 집무실에서 쫓아냈다.

그러고는 밖에 있던 길성준 비서실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길 실장, 김세진 국정원장을 불러주게.”

윤재인 대통령은 중대한 결단을 내리려는 듯 깍지 낀 두 손 위로 턱을 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