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88화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고 게임은 보나마나 뻔했다.
유세를 펼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지지율이 한쪽으로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촛불 시위를 승리로 이끈 주역, 기재욱 대표.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로 썩어 버린 이 나라를 구할 유일한 인물.
모든 적폐 세력을 몰아내고 깨끗한 대한민국을 만들 정치인.
이것이 바로 기재욱 대표에게 씌워진 프레임이었다.
하지만 그가 유미화 대통령 못지않은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 배신감이 얼마나 클까.
“오늘 보니 유세장에 사람들이 참 많이도 모였네요. 대통령 자리는 떼 놓은 당상이겠습니다.”
원래 기업인이 유세장에 가는 건 좋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기재욱 대표 못지않게 나도 촛불 시위의 영웅으로 뽑혀 우리 둘의 만남을 가지고 문제 삼을 사람은 없었다.
“이게 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자. 여기 앉으십시오.”
“괜히 바쁘신데 찾아온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회장님이라면 버선발로도 뛰어나가야죠. 하하.”
기재욱 대표, 이 양반 은혜를 잊고 사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저 깍듯함이 과연 얼마나 오래 갈까.
청와대에 입성하고서도 나를 향해 저런 자세를 보일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고삐를 잘 잡아 줘야 다른 생각을 품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조건 채찍을 휘두르는 게 아니다.
서로 상생하며 그 어떤 일이든 잘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이제 그는 이 나라 최고 권력자라는 대통령이 될 사람이니까.
“국정에 관한 일은 어차피 저와 관련이 없으니 유능한 참모진과 함께 잘 풀어 나가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조언이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 찾아 주십시오. 성심성의를 다 해 도와드리죠.”
“세계 최고의 투자가라는 평가를 받고 계시는 분이 바로 회장님 아닙니까. 그런 분의 조언이라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받아야 할 겁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주제넘은 조언 하나 드려도 될까요?”
“경청하겠습니다.”
“저는 이 나라가 깨끗해지기를 원합니다. 항상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는 곳이 아닙니까. 그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뭐라고 보십니까?”
“으음-. 글쎄요.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지속적인 감사?”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죠. 그러나 근본적으로 돈이 법보다 위에 있다는 걸 고쳐야 합니다.”
기재욱 대표와 더불어 참모진 간부들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돈이 법보다 위에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건 바로 천하 그룹입니다. 천하 그룹의 장학생들이 주요 국가 기관들을 장악하면서 아무런 제재 없이 합병을 진행해 지분 이동을 통한 희석을 하지 않았습니까?”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심각한 문제죠.”
“예. 청와대가 뒤를 봐준 것도 있고, 금융기관과 검찰, 법원 등이 천하 그룹을 건들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이유 때문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가장 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검찰과 법원을 뜯어고쳐야 합니다.”
검찰과 법원을 뜯어고친다는 말에 기재욱 대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군대와 법을 건들지 않는다는 건 지금까지 이어져 온 불문의 법칙이었습니다. 실제로 몇몇 대통령들이 군대와 법을 건들다 골로 가지 않았습니까?”
방산 비리가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대통령은 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들이 거센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면 사실상 청와대도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조인들을 건든다는 것 역시 대통령 임기가 끝난 뒤를 생각해 보면 썩 좋은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국회의원 중에 법조인 출신들이 많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가 민감했다.
“알고 있습니다.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걸. 하지만 한번은 솎아내야 할 일입니다. 언제까지 그들에게 끌려다닐 생각이십니까? 국민들이 대표님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제가 가진 모든 힘을 쓸 겁니다. 무서워할 필요 없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군요. 회장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미리 준비해 온 서류를 기 대표 앞에 내놓았다.
호기심이 동했는지, 그는 얼른 서류를 가져가 읽어 보았다.
“공수처 설치?”
“예. 공수처 설치로 검찰의 월등한 힘을 억제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여·야당을 가리지 않고 표적 수사가 난무했습니다. 모두 법을 돈에 팔아 버린 대가죠. 그러나 공수처를 설치하게 되면 수사권을 검사 마음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되고, 중대한 일에는 반드시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건 청와대의 힘을 강하게 키워 주는 꼴이 아닙니까? 대통령이 임기가 끝난 뒤에도 수사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은 여러모로 반발이 많을 겁니다. 거기다 이대로 공수처를 설치하게 되면 대통령이 검찰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겠군요.”
“그게 이 법안의 핵심입니다. 더는 청와대가 그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막강한 힘으로 일을 추진하는 것이죠.”
양날의 검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제안한 대로 공수처를 설치하게 되면 대통령은 적어도 이 나라에서 슈퍼 파워를 가지게 된다. 더는 무서울 게 없어지고,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은 공수처를 활용해 검찰 수사로 지워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검사들의 반발이 엄청날 겁니다. 자신들이 지금껏 왕 노릇을 해 왔는데, 그 왕관을 빼앗겨야 할 테니까요.”
“임기 첫날부터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표님은 남들과 다른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공수처 설치로 적폐 세력을 몰아낸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국민들은 공수처 설치가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물론, 공수처 설치는 사실 대통령과 여당의 권력을 더욱 강하게 해 주는 꼴이다. 만약 이게 설치만 된다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검을 잡고 휘두르는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반드시 내가 되어야만 한다.
“잘 검토해 보십시오. 대통령이 되시고 나서 천하 그룹이 끊임없이 청와대를 괴롭히려 들 겁니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공수처 설치는 필연적입니다. 대통령님도 절대적 권력이 있어야 차후 일을 하시는 데에 있어 편하실 게 아닙니까?”
“으음. 잘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에게 제안을 하고 나서 나는 캠프를 나섰다.
어차피 오래 있을 필요도 없고, 이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최종 결정은 기재욱 대표에게 남았다.
* * *
“대표님. 언제까지 이진석과 손을 잡고 계실 생각이십니까?”
이진석 회장이 나가고 나서 참모진은 본심을 드러냈다.
“저희가 많은 도움을 받긴 했지만, 가까이하기에는 위험한 사람입니다. 유세장에 뻔히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생색을 내기 위함 아닙니까? 우리가 두고두고 끌려다녀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들의 말이 맞다.
기재욱 대표도 이진석이 자기 목에 목줄을 채우려 한다는 걸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그렇기에 여당이 통과시키려 했던 금융법을 다시 한번 검토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중에 이진석을 짓밟아 버릴 때 필요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가 던져 주고 간 서류를 보자 생각이 확 달라졌다.
“난 다 싸울 수 있어도 이진석 저 사람하고는 싸우기 싫습니다.”
“네?”
“이 법안부터 보세요. 공수처 설치. 이것만 있으면 청와대는 정말 막강한 힘을 자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구린 것은 다 숨기고 우리의 적에게 불리한 것은 전부 까발릴 수 있는 그런 힘이에요. 불법 사찰 같은 것도 합법적으로 만들 수가 있게 되고요. 거기다 명분도 넘쳐납니다. 국민들도 법이 썩었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심리를 이용해 공수처를 좋게 포장해 뿌리는 거죠.”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묘안이었다.
공수처 설치로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고, 청와대에 대항하는 놈들의 싹을 모조리 잘라낸다. 그리고 임기가 끝난 뒤에도 대통령은 과거의 잘못으로 법적 책임을 물 필요가 없어진다.
그동안 여당과 야당 사이에서 돈 액수에 따라 갈팡질팡하던 검찰이 더는 칼잡이 노릇을 못 하고 오직 청와대의 개 노릇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걸 기획해 온 사람과 싸우고 싶습니까? 사실 이진석 회장이 아니었더라면 대선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공수처는 이진석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결국 우리를 쥐고 흔들어 자기 입맛대로 칼을 휘두르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아니. 분명 그럴 겁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다 알고 그 사람의 손을 잡은 게 아니었습니까? 만약 우리가 선로를 틀어 버리면 이진석이 어떻게 복수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날려 버린 사람이에요. 두 번이라고 어렵겠습니까?”
“······.”
“물론, 나도 이용만 당할 생각은 없습니다. 만약 이진석이 선을 넘으려 한다면 철저히 응징할 생각이에요. 그러니 그전까지는 지켜보도록 합시다. 괜히 딴마음 품고 있다가 티를 내기라도 하면 다 된 밥이 엎어질 수도 있으니.”
기재욱 대표는 오늘 또 한 번 이진석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람과 척을 져서는 안 된다.
아무리 대통령이 되어 이 나라의 권력을 자기 손에 다 넣는다고 해도 말이다.
* * *
“생각보다 빨리 연락을 주셨군요.”
“안 그랬다가는 칼이 내 목을 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마음이 섰는지 장연욱 회장은 나를 직접 만나러 왔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별수 있나?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내세운 사람과 싸울 생각은 없네. 그러니까 말해 보게.”
“무엇을요?”
“자네가 내게 원하는 거. 뭔가 원하는 게 있으니까 저번에 살벌한 협박을 한 거 아니겠나?”
“살벌한 협박이라니요. 예전에 회장님에 저한테 하셨던 것보다는 훨씬 약했습니다.”
“하하. 그걸 아직까지 꿍쳐 놓고 있었다니. 보기보다 속이 좁구먼.”
잡담은 여기까지.
나는 원하는 걸 말했다.
“제가 원하는 건 뻔하지 않습니까? 현광 자동차 지분을 주십시오.”
이미 내 요구조건을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체 왜 현광 자동차에 집착하는 거지?”
“현광 자동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것에 집착하는 겁니다.”
그 뒤에 있는 것.
그건 바로 현광 그룹이었다.
“어렵게 얻어낸 자동차야. 그걸 자네한테 다시 넘기라고? 아무리 그래도 상도덕이 있지. 이건 너무하지 않나?”
“저도 무작정 떼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좋은 가격에 가져갈 겁니다. 그리고 현광 자동차 전체를 달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장 회장은 착잡한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어렵다고 하면?”
“오늘의 대화는 없었던 걸로 해야죠. 그리고 차기 정권이 들어선 뒤 꽤 재밌는 일이 많이 벌어질 겁니다.”
천하의 장연욱 회장이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 상황 자체를 즐겼다.
과연 그의 대답이 어떨지 기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