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82화
“회장님. 청와대에서 이번 합병 건은 다음으로 미루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뭐야?”
장연욱 회장은 요즘 매우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평소에 항상 고요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요즘은 조금만 거슬려도 버럭 소리를 지르곤 한다. 그렇기에 보고를 하는 비서실장은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청와대 게이트가 터지면서 천하 그룹 이름도 자연스레 거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쪽에서 우리가 청와대와 같이 손을 맞춰서 합병을 진행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고요.”
“하-. 돈은 돈대로 다 받아가 놓고 이렇게 나오시겠다? 웃기지 말고 진행하라고 해!”
“청와대에서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말라고 아예 라인을 끊어 버렸습니다.”
“뭐야? 건방진 새끼들이 감히 누구 라인을 끊어?!”
상을 강하게 내려쳐도 소용없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마음 같아서는 싹 다 전화를 돌려서 욕이란 욕은 다 퍼붓고 싶었으나, 장연욱 회장은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정에 휘둘려 자칫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
심호흡을 이어 가며 장연욱 회장은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이런 싸움은 처음이었다.
천하 그룹을 이렇게 궁지로 내몰다니.
“청와대에서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려는 거지?”
“그쪽도 이렇다 할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습니다.”
“젠장. 누가 공격을 하는지도 모르니 앉아서 당할 수밖에.”
이번 공격의 핵심은 당연히 J&H다. 그런데 청와대는 그것도 모르고 우왕좌왕하기만 하다 된통 당한 꼴이었다.
“이진석 그놈 참······.”
대단한 놈이다.
보면 볼수록 놈의 잠재력이 어디까지인지 가늠조차 되지가 않았다.
이번 촛불 시위만 봐도 그렇다.
장연욱 회장은 그 배후에 이진석이 있다고 확신했다.
놈은 비폭력 시위라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와 촛불 시위를 열었고, 각종 커뮤니티를 이용해 여론을 조장하여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을 길거리로 끌어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인기 많은 톱스타들 아가리에 돈을 쑤셔 넣어 기어코 광화문까지 끌고 왔다. 당연히 시민들의 반응은 엄청나게 뜨거웠고, 날이 가면 갈수록 J&H에게 유리한 전황이 만들어졌다.
“이거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는 건가?”
회장실에 모여 있던 임원들 모두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천하 그룹이 이 정도로 수세에 몰릴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J&H의 금융 독주를 막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천하 그룹의 만행을 세상에 드러내는 꼴이었다니.
“다들 왜 이렇게 말이 없어? 꿀이라도 퍼먹으셨나?”
“······회장님.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응? 무슨 방법?”
“80년도 군부 독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군부 정권이 백기를 들었죠. 하지만 만약 그때 군부 세력이 백기를 들지 않고 강압적으로 진압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미군이 쫙 갈아엎었겠지.”
“예. 하지만 오히려 미군과 타협을 봐서 군부 독재가 끝나지 않고 이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국민들이 또 한 번 자기 힘으로 정권을 바꾸려는 것이죠.”
더는 개돼지라고 무시할 국민이 아니었다.
지금 이들에게는 나라를 뒤집을 힘이 있다. 그것이 처음으로 장연욱 회장을 두렵게 만들었다. 나라를 바꿀 정도의 힘이라면 기업 하나를 뒤집는 것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청와대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합니다.”
“어떤 조치?”
“정말 국민들 말대로 하야를 하든가, 아니면 정면 돌파를 해야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계엄령까지 내린다면 제아무리 비폭력 시위라고 해도 강제 진압을 할 수가 있습니다.”
강제 진압.
그것이 임원들이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유미화 대통령의 지지율이 지금 7%도 안 됩니다. 거기다 야당은 하야를 요구하며 탄핵 소추안을 발의했고요. 여당에서도 굉장히 흔들리고 있답니다. 정말··· 정말 잘하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임원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이대로 가면 정권이 끝장난다는 걸 예견한 것이었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
과연 가능할까.
지금이 무슨 군부 독재 시대도 아니고, 힘으로 저 불같은 국민들의 열기를 눌러 버릴 수 있을까?
“근데 청와대가 라인을 전부 끊어 버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 끊는다고 해서 그놈들이 내 연락을 계속 무시할 순 없을 거야. 그러니 자네들 의견대로 한번 해 봐.”
“네?”
“청와대가 힘으로 저 미쳐 날뛰는 국민들을 억누를 수 있을지 한번 지켜보자고.”
* * *
“여러분. 대통령은 이 나라를 위해서가 아닌, 개인의 이익을 위해 나랏돈을 허비했습니다. 청와대가 낭비한 돈만 수십조 원에 이르며 대통령 개인 사치를 위해 쓰인 것도 어마어마합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지켜만 봐야 한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 민중당은 유미화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건의하는 바입니다.”
새로운 민중당의 얼굴, 기재욱 대표가 의원들 앞에서 뜨겁게 연설을 하고 있었다.
여당 의원들이 당장 내려가라며 욕을 퍼부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하다.
“여당 쪽에서도 유미화 대통령 반대편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중심으로 여당 세력이 분열되고 있답니다. 아마 실망이 컸던 것이겠죠. 당장 여당 핵심 의원들도 청와대가 저 정도로 막장일 줄은 몰랐다고 하니, 말 다 한 거겠죠.”
여당 의원들도 지금 멘붕이었다.
청와대가 좀 이상하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 설마 일반인이 국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즉, 여당에서도 유미화 대통령을 지켜 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도 유미화 대통령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진짜 탄핵이 될까요?”
“이번에는 정말 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밝혀진 의혹들도 엄청 많고, 이게 정식 수사로 들어가면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 쏟아져 나올 겁니다.”
대통령 탄핵이라.
설마하니 내 손으로 대통령을 끌어 내리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탄핵을 시키더라도 확실하게 플레이어 메이킹을 해야 합니다. 기재욱 대표가 무조건 앞에 서게 만드세요. 차기 대통령은 기재욱이라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확실히 심어 주어야 합니다.”
“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있는 촛불 시위 집회 때 기재욱 대표를 정면에 세울 겁니다. 이 시위의 주최자가 마치 기재욱 의원인 것처럼 최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게 할 예정입니다.”
기재욱을 청와대 주인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거기다가 요즘은 연예인들이 촛불 시위에서 한번 공연 서 보는 게 소원일 정도로 인기가 많아졌습니다. 더는 돈을 주고 불러올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이것도 예상했던 일이다.
초반에만 돈이 들어가지, 나중 가면 알아서 자기를 써 달라고 손을 벌리게 되어 있다.
무려 수백만 명이 모이는 가장 핫한 집회이지 않은가.
그런 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얼굴을 보이는 게 연예인으로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재욱 대표가 그곳에 나와 대장 역할을 한다면 국민들의 지지도는 금방 치솟게 되어 있다.
“문제는 진강호 의원입니다. 아직 탈당을 하진 않았지만, 저렇게 계속 버티려는 거 같은데······.”
진강호 의원은 아직 당을 나가지 않았다.
최대한 자기편을 끌어들여 탈당을 한 다음 새롭게 창당을 하려는 거 같은데, 그렇게 되면 야당의 표가 확 갈라져 기재욱 대표가 당선이 안 될 수도 있다.
“음-. 일단 그건······.”
“회장님.”
그때 비서실장이 안으로 들어와 내게 예상치 못한 소식 하나를 알려 주었다.
“진강호 의원이 회장님을 뵙고자 합니다.”
“진 의원이 여길 왔다고?”
“예.”
미리 약속도 잡지 않고 회사에 쳐들어오다니.
“회장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날 찾아온 사람을 무작정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안으로 모셔.”
“예. 회장님.”
이윽고 진강호 의원이 회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게 먼저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진강호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급할수록 이성을 잃기 마련이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순간 진강호 의원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렇군요. 회장님 말씀대로 제가 지금 많이 급하긴 합니다.”
회장실에는 나와 진강호 의원 둘만 남고 전부 밖으로 나갔다.
마실 걸 내오기도 전에 진강호 의원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회장님. 제가 여기에 온 이유를 아실 거라 믿습니다.”
“차기 대선 때문입니까?”
“예. 지금 추세라면 대통령은 곧 탄핵될 겁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차기 정권은 우리 진보 정당이 가져가게 되겠죠.”
“그런데요?”
“이번에 회장님께서 민중당 대표를 갈아 치운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재욱 대표를 정면에 내세우셨죠. 하지만 그 친구는 대통령이 될 그릇이 아닙니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기재욱 대표가 대선에 나오지 못하게 막아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예. 기 대표가 이대로 대선에 나와 버리면 야당 표는 갈라지게 됩니다.”
“그럼 진 의원님이 안 나가시면 되겠네요. 후배에게 다음 자리를 양보하시죠.”
진강호 의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 나라를 누군가 복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 의원님은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 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재욱이 아닌, 제게 투자를 해 보십시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게 되실 겁니다. 그 친구보다 제 그릇이 더 크다는 걸 금방 알게 되실 겁니다.”
예전에는 얼굴 한번 내게 비추지 않던 인사가 지금은 여기까지 찾아와 제발 자기를 살려 달라고 빌고 있다.
“진 의원님께서 기재욱 대표보다 그릇이 크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사실 이 남자보다 기재욱 대표의 그릇이 더 클 수도 있다.
아니. 기재욱의 능력이 진 의원보다 더 좋을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저는 그릇이 크고 인품이 좋은 사람을 찾는 게 아닙니다.”
“네?”
“청와대에 들어가서 나랏일 잘하라고 기재욱 대표를 밀어주는 줄 아십니까?”
“그게 무슨······.”
“전 제가 손쉽게 허수아비처럼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사람을 청와대에 보내려는 것이지, 당신처럼 고집 세고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을 봉황 의자에 앉히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진강호 의원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져 갔다.
“번지수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이 대선을 포기하게 만들 겁니다. 그래야 기재욱 대표가 수월하게 차기 대통령이 되고 청와대를 우군으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만약 내가 여기서 기재욱이란 패를 버리고 당신을 선택한다면, 과연 진 의원님은 내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 할까요?”
“······.”
“아마 처음에만 제 말을 듣는 척하다 나중에는 못 본 척하겠죠. 아니. 제 뒤통수에 칼이나 안 꽂으면 다행입니다. 그러니 허튼수작 부리지 마세요.”
나는 진 의원을 포기시키기 위해 세게 나갔다.
과연 충격이 컸는지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비서가 가져온 커피를 맛있게 음미했다.
오늘따라 커피 맛의 풍미가 깊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