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79화
“정식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민중당 대표, 기재욱입니다.”
기재욱 대표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내가 열어 준 길을 따라 그는 자신이 주인으로 섬기던 대표를 몰아내고 새로운 야당의 대표로 우뚝 섰다.
난 그의 손을 잡으며 제대로 대접을 해 주었다.
“이제 대표님이시군요. 축하드립니다.”
“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 마음, 변치 않기를 바란다.
“자. 그렇다면 저도 이제 진지하게 대화에 임해 보겠습니다. 먼저 이거부터 보실까요?”
난 저번에 주지 못했던 서류를 기재욱에게 넘겨주었다.
천천히 서류를 하나씩 넘겨 가며 읽어 보던 기재욱 대표는 주먹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어느새 그는 목소리까지 떨었다.
“이, 이게 정말 다 사실입니까?”
“예. 믿기 어려우시죠?”
“사실, 이번 정권이 구린 게 많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빠르게 다음 서류로 이어 가던 기재욱 대표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대통령이 어떻게 이런 짓을···! 거기다 일반인이 국가 기밀을 들여다보고 사안을 결정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이건 명백한 국정 농단입니다!”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좀 웃기긴 했다.
대통령을 등에 업고 나랏일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던 건 왕왕 있었던 일 아니던가.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정상에 오르면 항상 옆에 있는 간신들에게 휘둘리는 경우가 참 많다. 역대 대통령들을 봐도 비선 실세들에 의해 정권이 흔들려 창피를 본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대표님.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정권을 하나 뒤엎을 정도의 힘이 나겠죠?”
“물론입니다! 이거면 충분하죠.”
“하지만 이걸 그냥 터트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 확 터트리면 우리가 원하는 그림이 안 나와요. 당장 우리가 서류를 봐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국민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거짓 선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군요.”
“네. 무작정 퍼뜨리기보다는, 일단 준비 운동부터 해야죠. 안 그럼 우리가 다칩니다.”
기재욱 대표는 내 말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 서류를 그대로 가져다 영화로 만들어도 욕을 먹을 판에, 뉴스에 퍼뜨리면 사람들은 오히려 선동질을 한다고 생각할 게 뻔합니다. 혹시 괜찮다면 제가 설계를 한번 해 봐도 되겠습니까?”
“대표님이 직접이요?”
“네. 회장님께서 왜 이걸 저희한테 넘겨주시려는 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당과 천하 그룹이 회장님과 J&H를 압박하고 있지 않습니까? 절 이 자리에 세워 주셨으니, 그 보답으로 그들이 절대 그 금융법을 통과시키지 못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역시, 운이 좋아서 대표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 아니다.
왠지 믿음이 갔다.
“좋습니다. 정확히 어떤 설계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혹시 김문혁 청와대 비서실장이라고 아십니까?”
청와대 비서실장 김문혁이라면 안면은 없지만 대충은 알고 있다.
“예. 알고는 있습니다.”
“이번에 정권 내부로부터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습니다. 그때 김문혁 비서실장도 일을 그만두고요. 겉으로는 스스로 사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알아보니 외압을 받아 사표를 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요?”
“김문혁 비서실장이 청와대를 빠져나올 때 기자들이 모이게 해 주십시오. 그럼, 그가 몇 가지 의문을 던져 줄 겁니다.”
나는 기재욱 대표의 의도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김문혁 비서실장은 저와 동문입니다. 그래서 가끔 술자리도 같이하죠. 그런데 저번에 술주정을 하더군요, 나라 꼴이 개판이라고 말입니다. 대통령은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그 밑에 있는 놈들이 나라를 쥐어흔들고 있다고.”
“그랬습니까?”
“예. 그래서 자세히 물어보니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회장님이 주신 자료들을 보니, 김문혁 비서실장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현재 청와대 상황이 어떤지 말입니다.”
대통령 곁에서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청와대가 어떤 시스템으로 굴러가는지 잘 알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의 일부분을 김문혁 비서실장은 분명히 알고 있을 터.
“음-. 김문혁 비서실장에게 따로 언질은 주셨고요?”
“아직입니다. 오늘 만나서 쇼부를 볼 생각입니다.”
“차라리 이런 건 어떻습니까? 김문혁 비서실장을 지금 여기로 부르세요.”
“네?”
“어차피 퇴근했을 거 아닙니까.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핑계로 부르라는 겁니다.”
“음-. 알겠습니다.”
며칠 뒤에 그만둘 사람이니, 청와대에 오래 일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재욱 대표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바로 온답니다.”
“제 얘기는 하셨습니까?”
“아니요.”
“잘했습니다.”
난 그가 오기를 기다리며 먼저 조금씩 식사를 했다.
생각보다 김문혁 비서실장은 빠르게 약속 장소로 왔다.
“어이~ 기 대표. 드디어 한턱 내려고 이 비싼 곳에 오라고 한 건가?”
걸걸한 목소리로 들어오던 김문혁 비서실장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응? 잠깐. 저, 저분은······.”
나는 먼저 일어나 악수를 건넸다.
“처음 뵙는군요. 아니. 예전에 청와대에서 주최하는 만찬에서 뵈었던가요? J&H의 이진석 회장입니다.”
얼떨결에 내 손을 잡은 김문혁 비서실장은 옆에 있던 기재욱 대표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심경을 헤아리며 사과했다.
“기 대표님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실장님을 초대한 겁니다. 괜히 제 얘기를 꺼내면 오지 않으실 것 같아 비밀로 해 달라고 했고요.”
“그,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저를······. 이미 끈 다 떨어진 놈인데요?”
처음에는 경계의 눈빛을 띠다 지금은 기대가 만발해 있는 김문혁 비서실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얘기는 들었습니다. 청와대를 떠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실장님같이 능력 있는 분이 청와대를 떠나다니.”
“허허. 절 위로해 주시는 겁니까?”
“위로도 해 드리고 동시에 제안도 드리는 겁니다.”
“제안이요?”
“J&H에서 새로운 미래를 시작해 보심은 어떨까요? 고문 자리를 원하시면 드리겠습니다. 만약 정치를 하고 싶다면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드리죠.”
김문식 비서실장은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당황하며 말했다.
“회장님. 저한테 그런 제안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천하 그룹 때문입니까? 아쉽지만, 그 일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천하 그룹은 이미 청와대와······.”
“천하 그룹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전 다른 이유로 실장님을 모신 겁니다.”
나는 기재욱 대표에게 주었던 서류를 김문식 실장에게도 건넸다.
“잠깐만 읽어 보시겠어요?”
그는 반신반의하며 서류를 받아 읽었다.
이윽고 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 이건!”
“익숙한 내용들이죠?”
“이, 이걸 어떻게 얻으신 겁니까?”
그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실장님이 그 일에 연루되어 검찰에 끌려가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그럼······.”
“다음 주에 사표를 쓰고 청와대에서 나오실 때 기자들이 실장님에게 몰려들 겁니다.”
“기자들이요?”
“예. 제가 미리 깔아 놓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실 때 저희 회사에서 제공하는 대본대로 기자들에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대본······?”
그는 눈을 껌뻑이며 내 말뜻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잠시만요, 회장님. 혹시 이 서류에 있는 비리들을 저더러 폭로하라는······.”
“아니요. 이 서류는 잊으세요. 단, 이것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대통령은 사실상 허수아비다. 국정 결정권은 대통령에게 있지 않다. 그녀는 5순위에 불과하다. 이 나라의 최종 결정권자는 따로 있다.”
“회, 회장님!”
“당신들은 허수아비를 뽑아 놓은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내가 사표를 쓴 것이다- 라고 대사를 쳐 주시면 됩니다.”
“그, 그렇게 했다가는 파장이 엄청날 겁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실장님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제 경호를 받고 있는 이상, 누구도 실장님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자 기재욱 대표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무려 J&H 회장님의 말씀이다. 이분은 절대 신용을 저버릴 분이 아니야. 나도 도와줄게.”
“아무리 그래도 괜히 말 잘못 꺼냈다가는 나도 휘말릴 수 있잖아.”
겁을 잔뜩 먹은 건가.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한 양반이 뚝심이 없어서야.
“제가 지켜드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으세요. 그리고 이건 단순히 시작에 불과합니다. 비서실장님을 신호탄으로 모든 비리가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겁니다. 그럼, 실장님의 발언은 영웅적으로 포장이 될 것이며,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기보다는 큰 환호를 받게 될 겁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 무섭게 목소리를 냈다.
“회장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장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틀 안에는 답을 들어야겠습니다.”
“······네. 그런데 혹시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이미 제 계획을 들으셨으니 이거 참 난감합니다. 하하.”
“······.”
반쯤 협박이었다.
“하지만 일을 잘만 해 주신다면 그 보상은 매우 달콤할 겁니다. 제가 이런 쪽에는 인심이 후하거든요. 평생 펑펑 써도 마르지 않는 돈을 약속드리죠. 제가 줄 게 어차피 돈밖에 없어서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갔다.
난 기재욱 대표에게 슬쩍 물었다.
“과연 할까요?”
“돈을 좋아하는 양반입니다. 할 겁니다. 회장님이 주는 보상금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다는 걸 저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습니다. 김 실장도 잘 알겠죠.”
꽤 확신에 차 있는 목소리다.
역시, 돈 싫어하는 놈은 없다, 이건가?
* * *
“침통한 일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과연 이런 전례가 있었는지도 의문이군요.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우리나라 최종 결정권자는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이 아닙니다. 그분은 5순위에 밀려나 있죠.”
기 대표의 말이 맞았다.
김문혁 비서실장은 내가 약속한 돈을 믿고 일을 저질렀다.
어차피 청와대에 남아 있는 정도 없을 테니, 그로서는 괜찮은 도박이었을 것이다.
“이 나라의 대통령은 허수아비입니다. 비선 실세들이 정권을 쥐고 흔드는 중이며, 저는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더는 국민을 기만하는 짓을 할 수가 없어 이렇게 사표를 쓰고 나왔습니다.”
김문혁 실장은 우리 회사에서 내어 준 대본을 따라 아주 잘 읊어 내고 있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정말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지으며 인터뷰를 하는 게 정말 가증스러우면서도 남우주연상이라도 안겨 주고 싶었다.
“저는 오늘 목숨을 걸고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나머지 판단은 국민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그의 발언이 곧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유미화 대통령 게이트.
난 그 선두에 서서 이 정권을 뒤집어 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