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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계 천재가 되었다-172화 (172/200)

금융계 천재가 되었다 172화

이틀 뒤 정영준 회장은 결국 타계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민국이 잠시 들썩였다.

마지막 싸움에서 패배한 왕의 죽음이었지만, 결코 불명예스럽지는 않았다.

전경련에서는 최고 예우를 갖춰 경제인장으로 진행하려 했으나, 현광 그룹에서 그러기를 원치 않아 가족장으로 돌리게 되었다.

물론, 장례식장에 조문을 오는 것은 허용이 되었기 때문에 재벌 총수들이 장례식장으로 모여들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나는 정영준 회장의 영정 사진 앞에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내게 모든 것을 걸었으니, 난 충실히 응답할 것이다.

난 당신의 자식들이 가진 모든 걸 빼앗을 것이고, 그토록 원하던 대로 천하 그룹의 아성을 반드시 깨부술 것이다.

조문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정대용 부회장이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회장님. 이따 저랑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음-. 그러시죠. 식사하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예상하고 있는 바였다.

나는 아무 자리에 앉아 직원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기다렸다.

주변을 슬쩍 바라보니, 사람들은 날 힐끔 쳐다보며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나와 조금이라도 친분을 만들려는 것이 저들의 목적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5분도 안 돼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몰려왔다.

나는 그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아 주느라 제대로 식사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엇. 저분은······!”

“안 올 줄 알았는데, 기어코 왔구먼.”

나도 저 양반이 여길 올 줄은 몰랐다.

천하 그룹 회장 장연욱이 차에서 내려 조문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묵묵한 얼굴로 정영준 회장의 영정 사진 앞에 섰다.

정영준 회장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이 바로 장연욱 회장이지 않은가?

그러나 당신이 뭔데 여길 오냐며 소리치는 사람은 없었다.

정대용 부회장은 정중하게 장연욱 회장을 맞이했다.

“어려운 발걸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그래도 투닥거리면서 정이 많이 든 친구였는데, 이렇게 떠나다니. 점점 나만 빼고 다들 떠나는 것 같아 외롭구먼.”

뻔뻔하기 그지없었으나, 장연욱 회장에게 누가 감히 삿대질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짧게 조문을 마쳤다.

주변에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으니, 길게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이다.

“음? 자네도 와 있었군.”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친 장연욱 회장은 내게 악수를 권했다.

“예. 회장님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 뭔가 말에 뼈가 있군. 마침 시간도 좀 남으니, 같이 가볍게 식사라도 할까?”

장 회장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방으로 획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한잔하겠나?”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술부터 시켜서 잔에 따라 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그룹의 회장 장례식이라 그런지 술도 일반 소주가 아니라 비싼 전통주였다.

술을 따르던 그가 내 신경을 한번 건드렸다.

“쯧쯧. 정 회장 그 양반, 마지막에 욕심만 안 냈어도 이렇게 가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 않나?”

술을 입에 넣으려 했던 내 손이 멈칫거렸다.

나는 술을 넣지 않고 잔을 내려두었다.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후후. 본인도 아니면서 왜 발끈하고 그러나? 설마, 날 탓하려는 건 아니겠지?”

“······.”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장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먼. 고작 이런 일로 토라지다니. 어차피 여긴 무한 경쟁의 세계야. 먼저 먹지 못하면 다른 놈이 가져다 먹는 곳이라는 거지. 자네가 그렇게 화를 낼 일은 아니라는 거야. 자네도 남의 것을 쏙쏙 빼먹어 오지 않았나?”

맞는 말이다.

나는 그룹을 이끄는 경영인이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렇군요.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나는 웃으며 장 회장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기만 하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회장님께서도 다음에 무언갈 빼앗기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되실지··· 조금 궁금하군요.”

“자신 있나? 난 이제까지 뭔가를 빼앗겨 본 적이 없어. 누구에게 추월당한 적도 없고.”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나한테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내는 건 좋은 일이 아닐 텐데?”

“이미 회장님은 절 노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굽신거린다고 해서 마음을 돌리실 것도 아니니 저도 눈치 볼 필요가 없죠.”

그러자 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쓸데없이 눈치 볼 필요가 없지. 오히려 나도 기분이 한결 편해졌어. 이제 더 망설임 없이 자네를 짓밟을 수 있을 것 같군.”

쫄지 말자.

예전의 이진석이 아니다.

이제는 당당히 천하 그룹과 맞설 수 있을 만큼의 힘이 내게도 있다.

“그래도 너무 실망은 하지 말게. 내가 자네의 능력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하니까. 나중에 회사 다 정리하고 나서 갈 곳이 없으면 천하 그룹으로 와. 그 몸에 날개를 달아 주지.”

그래 봐야 결국 천하 그룹의 노예가 되라는 뜻이 아닌가.

“회장님은 몸조리 잘 하십시오. 이 싸움의 끝이 어디인지 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날 확 죽이기라도 하시게? 후후. 내가 우리나라 대통령보다 더 삼엄한 경호를 받고 있네. 자신 있으면 시험해 봐도 좋아.”

장연욱 회장도, 그리고 나도 서로 웃는 얼굴이었지만 속으로는 상대를 물어뜯기 바빴다.

“역시 장례식장 밥은 맛이 별로야. 나도 나이가 다 돼서 그런가 이런 곳에 오면 자꾸 찜찜해. 먼저 일어나겠네.”

그렇게 장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호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장례식장을 떠났다.

그에게 눈도장 한번 찍으려고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날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과연 우리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몹시 궁금할 것이다.

“쯧-. 눈치 없는 영감 같으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온 겐지.”

장 회장이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정대용 부회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무슨 사람 대기시켜 놓는 점쟁이라도 된 줄 알았다.

“저 양반이 와서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음-. 절 짓밟아 놓겠다더군요.”

“······예?”

“모르셨습니까? 천하 그룹이 저번부터 절 노리고 있습니다. 요즘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잖아요. 금융 독재다 뭐다.”

“아하-. 그게 천하 그룹에서 나온 거였습니까? 전 경쟁 금융사들이 필사적으로 언론 플레이를 한 줄 알았습니다.”

“그쪽도 한통속이긴 하죠.”

정대용 부회장은 슬쩍 내 눈치를 보다 물었다.

“저기 회장님. 저번에 제가 말씀드린 대출건은······.”

“그렇지 않아도 회사 자체적으로 검토를 해 봤습니다.”

“그러셨군요. 얼마 정도 가능할는지요?”

“저번에 7천억이라고 하셨죠? 1조 원까지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오. 그렇군요.”

“그런데 역시 문제는 담보겠죠. 현광 그룹 지분 20%를 담보로 거신다면 돈을 융통해 드리겠습니다.”

정대용 부회장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흠. 20%나요?”

“20%에 최대 1조 원입니다. 손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미 저도 알 만한 내용은 다 알고 있습니다. 정 회장님이 두 아드님에게 회사 지분을 정확히 절반으로 쪼갰다는 걸 말입니다.”

정대용 부회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의미였다.

“뻔하지 않습니까. 이미 정대환 이사 쪽에서도 심상찮은 움직임이 보고되고 있어요. 임원들을 만나고 현광 그룹의 지분을 들고 있는 기관의 인사들도 하나씩 만나 보고 있죠.”

“크흠. 그렇게 저희 집안을 감시하고 계실 줄은 몰랐는데요?”

“부회장님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서로 다 뭐 하는지 엿보는 사이끼리 새삼스레······.”

정대용 부회장은 무안한지 헛기침을 뱉었다.

“회장님은 꼭 제 편에 서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저는 그저 돈만 빌려드릴 뿐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꼭 부회장님이 현광 건설을 차지하셨으면 좋겠군요.”

“하하. 정말입니까?”

“예. 장남이 모든 걸 물려받아야 집안에 시끄러움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현광 건설이 얼른 안정을 되찾길 바랄 뿐입니다.”

“회장님이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정대용 부회장이 웃기에 나도 따라 웃어 주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난 누가 회장이 되어도 상관없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이 둘이 치열하게 싸워 주길 바란다. 그렇기에 반드시 누구의 편에 서기보다는 각자에게 내가 가진 힘을 빌려주어 회사를 더 흔들어 놓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회장으로 취임하십니까? 부회장이시니, 위계상 회장으로 취임을 하시는 게 맞지 않나요?”

“그렇지 않아도 주주총회를 열어 회장 선임 안건을 통과시킬 예정입니다. 문제는 제 동생 녀석이 반대표를 들어 버리면 일이 꼬인다는 거죠.”

현광 건설 그룹 회장 자리가 공석이라.

일이 재밌게 흘러간다.

“잘 알겠습니다. 대출에 관한 내용은 실무진을 보내 주십시오. 그때 잘 처리해 놓겠습니다.”

“저기, 그런데 꼭 20%를 담보로 잡아야만 합니까?”

“20%든 50%든 갚기만 하신다면 단 1%도 제가 가질 수 없습니다.”

“하하. 그건 그렇죠.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다른 손님들을 만나러 가야 해서요.”

“예. 저도 일어나겠습니다.”

드디어 나는 장례식장을 나올 수 있었다.

정대용 부회장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나와 자리를 갖길 원했으나, 나는 쉬고 싶은 마음에 그들의 제안을 전부 거절했다.

장연욱 회장과 아주 잠깐 만난 것뿐인데, 기가 다 빨린 기분이다.

그러나 거절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제안도 있었다.

“회장님. 아까 정대환 이사에게서 회장님과 따로 만날 수 없느냐는 문의가 있었습니다.”

“권 대표님한테 제안을 넣었어요?”

“예. 회장님이 워낙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니, 그쪽에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나 봅니다. 그리고 보아하니 조용히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고요.”

“흠······.”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정대용 부회장 다음으로 꼭 만나 봐야 할 사람이 정대환 이사이긴 했다. 그는 과연 무슨 미끼를 내게 던지려 할까.

“연락 한번 넣어 보세요. 약속 장소를 잡으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다고.”

“예.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권 대표가 상대와 연락을 하는 동안 나는 차 안 시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어떻게 하면 현광 그룹을 내 손으로 넣을 수 있을까.

그리고 동시에 천하 그룹을 무릎 꿇릴 수 있을까.

그들이 가져간 자동차는 또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회장님. 출발하겠습니다.”

약속 장소를 잡았는지 권 대표는 기사를 시켜 운전을 하게 했다.

공개적인 만남이 아니기 때문에 은밀하게 움직이고자 경호원들을 둘로 나눠 따로 이동하게 했다.

정대환 이사.

정대용 부회장이 다 물려받았어야 했는데, 마지막 정영준 회장의 변덕 때문에 뜻밖의 기회를 잡게 된 행운의 남자. 하지만 그것이 행운일지, 아니면 파멸의 시작일지는 직접 만나 봐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정대환이 이기든, 정대용이 이기든 현광 그룹은 반드시 내 손에 넣어 정영준 회장의 유지를 지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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